*사회인으로의 첫 출발*
나의 첫 직장은 천광전자였지만 입대전 이었고 CEO의 갑질로 끝이 났었죠.
두 번째는 제일공업사란 전기자제 생산 공장에 서기로 취직했습니다. 전기제품을 생산하는 10인 이내의 작은 공장입니다.
첫 월급이 3만 원 이었습니다.
1년여를 다니던 중 공장장인 박씨 아저씨가 거래처인 송전사 사장(예비 장인) 딸내미 중신을 서겠다고 했습니다. '신랑감(저)은 자기 밑에 있는 조왕연이고, 사람이 착하고 성실하다고'
그 당시 조카(큰어머님 맏딸의 막내)도 대구 대명 7동에서 전기업(금오전기전자)을 하고 있었는데…. 외삼촌인 나하고 동업을 하자고 졸랐습니다. 그 조카는 인문계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전기, 전자 기술도 없으면서 가게를 어떻게 차렸는지…. 조카(심영화)는 나보다 3살 위였고 미혼이었습니다.
조카도 송전사(전기 도매업)에서 전기재료를 사오고 있었습니다. 예비 장인도 청송 심씨여서 조카와 사이가 각별했습니다. 해서 조카까지 제 중신에 나셨죠!
1975년 봄에 산 다방에서 우리 쪽은 저와 누님과 어머니셨고 아내 쪽은 아내와 부모님이 오셨습니다.
그 후 누님과 자형이 어린 나이에 결혼을 왜 하냐고 해서 진척이 없었는데…
그해 가을 초에 조카 가게에 투자하게 됐습니다.
투자를 몇 번 하다가 보니 자연스레 동업이 되어서 제일공업사는 퇴사하고
대명 7동에 있는 금오전기전자 상회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가게에 딸린 방에서 의식주를 해결했습니다.
남자 둘이 자취생활을 하니 고달프더라고요.
그래서 조카에게 결혼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장인께서 승낙하셔서 그다음 해 1월 29일에 대구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살림집은 가게 뒤에 있는 대덕시장 상가주택(방 2)에 차렸습니다. 자형이 전세로 얻어 주셨습니다.
알뜰한 아내는 방 한 칸을 학생들에게 월세로 놓았습니다.
신혼 재미는 너무 좋았습니다.
하나 동업하는 가게는 수입이 신통치 않았습니다.
하루는 처5촌 아저씨가 찾아 오셔서 본인의 쌀통(전국 최초 생산)을 대구, 경북 대리점 총판을 하라고 하십니다.
'물건은 무한정 밀어준다'고 하시면서 영업 잘하는 '전무도 붙여준다'고 하십니다.
배달할 사람도 구하고 짐 자전거도 구입했습니다.
대구의 전자판매장, 대리점, 교동의 도매점 등에 납품하고 후 수금 하는 구조였습니다.
그때는 쌀통이 인기가 있는 귀중품이었습니다. 제법 팔리기는 했는데 수금이 문제였습니다.
공장이 서울 (구, 한양 영화 스튜디오)였는데 철제품이다 보니 대구까지 운송 중에도 흠집이 생기고, 각 납품처에는 진열하다가 흠집을 많이 냅니다. 거의 30% 넘게 반품 처리를 해야 합니다. 진열을 시켜주고 다음 납품 때 수금하는 구조였습니다.
처음엔 수금되는 한도에서 입금을 해드렸는데 물건값을 즉시 보내라고 합니다.
동업하는 금오전기전자 거게도운영이 잘 안되고
쌀통 대리점도 어려위서 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조카에게 투자금을 회수하기로 했습니다. 80만 원 손해 보고 동업을 철회하고 갈라섰죠.
같은 건물의 3층을 독채로 빌려서 사무실과 창고로 정하고 쌀통대리점만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참 어려운 시기였죠.
업친데 덮친다고 공장에 불이 났습니다.
서울공장에 가보니 돔형 본체와 콘솔형 2채가 새카맣게 불탔었습니다.
계량기와 철판 자재 살 돈이 필요하다고 선입금하라고 하셔서 갈수록 힘이 들었습니다.
처삼촌이 박아 놓은 전무는 영업 핑계로 거래처 주문과 수금을 핑계로 매일 술대접한다고 하면서 판공비 달라고 하지를 않나…. 해서 내가 직접 거래처 수금에 나서니 씨알도 안 먹히지 않더군요!
저는 고민하다가 몇 달을 입금 안 해주고 처당숙에게 대리점 그만두겠다고 통보했습니다!
재고와 거래처 현황과 반품 수량을 총계산해서 전무 월급 과하게 지불한 것을 합계해서 처당숙한테 송부했죠.
그리고 수금처 답사 중 원대동 공중 전자가 점포 인수자를 구하는 것을 보고 여사장 김00과 인수 협상을 했습니다.
그녀는 그 건물 주인이었습니다. 1층에 점포와 방 한 칸, 이층에는 방 두 개인 조그만 건물이었습니다.
물건인 수비 300만 원, 보증금 200만 원(후불), 월세 30만 원에 가게만 얻었습니다.
처음 몇 달은 남구 대명 7동에서 서구 원대동까지 자전거로 하는 출퇴근이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아내는 걷거나 버스로 오전 중에 출근했습니다. 점점 장사가 바빠지니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습니다. 조금후에는 아내를 짐 자전거 뒤에 태우고 일찍 출근하고 밤 1시쯤에 귀가했습니다.
출퇴근의 시간을 많이 소비하다 보니 아내와 상의 후 원대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집은 가게에서 250m 떨어진 골목 안의 단칸 월세로 문간방을 하나 얻었습니다. 대문 열면 첫 방이고 부엌은 없고 연탄아궁이만 있는 그런 집입니다.
대명동의 전세금 200만 원은 점포 보증금 선불로 주고, 첫달은 운영비가 모자라서 대구은행에 100만 원을 차입해서 1년 원금상환을 했습니다.
장사는 순조롭게 잘되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12월14일 새벽에 산통이 와서 혼자 걸어서 병원에 갔습니다. 저는 곤히 자느라 몰랐습니다. 연락이 와서 병원으로 달려갔지요. 이층 산실에서 아내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서 안절부절못하고 무사 분만을 빌며 1층 마당을 서성였습니다. 잠시 후 딸이 태어났습니다. 딸과의 첫 대면은 감동되었습니다.
아기를 안아보니 부성애가 저절로 우러나와서, 아내와 아기와 내가 오로지 한 가족이라는 인식이 되었습니다.
장모님이 오셔서 산후조리를 도와주셨습니다.
아내는 오래 쉬지는 못했습니다.
애기를 들쳐 업고 가게일을 보아야 했습니다.
살림 살고, 육아도 하면서 아내와 나는 개미처럼 부지런히 일만 했습니다.
마침 가게 2층의 큰방이 비어서 이사를 왔습니다.
한집에서 출퇴근하니 한결 장사하기가 쉬워졌습니다.
그런데.... 점포와 방이 삭월세(10개월)다보니 금방금방 만기가 닦아 오더라구요.
악착같이 안써고 돈 모아도 별로 모이지가 않습니다.
10달되면 삭월세는 계속 오르고 5년경과하니 30만원에서 50만원이 됐습니다. 그당시 주인이 우리한테 집을 사라고 했지만 그만한 돈이 없으니...
시장 안에서 분식집을 하는 이사장에게 팔렸습니다.
이사장도 대금이 부족 하다고 집세를 전세로 돌려서 우리는 그나마 저축을 조금씩 할 수가 있었습니다.
살림집도 점포와 연결된 1층방으로 내려오고 조금 편해졌습니다.
참 열심히 장사했습니다.
일년 365일에 363일을 문 열고 장사를 했습니다.
두 명절에 하루 쉬었습니다.
무려 18년동안 그 조그만 점포에서 장사를 했습니다.
*중년의 삶*
나는 영세 자영업자의 고단함을 잘 안다. 10 平 여의 작은 구멍가게에서 구색 갖춰서 장사하기엔 역부족이 많다. 처음에 원대에 왔을 땐 직원 한 명과 둘이 장사를 했는데 인건비가 채 안 나왔다. 해서, 직원은 내보내고 아내와 같이 지출을 최소화해서 가게를 꾸려 나갔다.
고정 단골이 생기고 영업이 정상화되니 이웃에 새로 들어온 경쟁자가 문제였다. 더 큰 가게가 들어와서 우리 단골도 양분 하니 경쟁이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좀 더 넓은 가게가 필요했다. 시장 입구 첫 가게가 20여 平으로 조금 넓은 편이었다. 그 건물 주인을 찾아가서 기한 만기가 되면 나에게 주십사하고 간청을 드렸었다. 그러나 3차례까지 기회를 놓쳤다. 첫 번은 LG 대리점이 선점했고, 두 번째는 새마을금고가 더 키워서 들어왔고, 세 번째는. 대우전자 직영점이 들어 왔었다.
얼마 후 마침 직영점을 개인대리점으로 전환을 시켜 준다고 해서 대우전자(주)와 계약을 체결했다. 1억3천만원전세였었다. 같은 넓이의 2층은 2천만 원 전세로 철학관에 세 놓았다. 업장을 옮겨 가려면 자본, 장소 등도 중요했지만 찬스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건물 주인 백00은 내가 옆 건물에서 열심히 장사를 잘 해줌으로써 자기 건물도 더 번영하는데 내가 옮겨 오는 것이 자신은 싫었다고 합니다. 그는 원대동에서 직물공장을 했는데 나중에 성서공단으로 이전 했다.
우리 부부는 노는 날 없이 참으로 열심히 개미처럼 일했다. 고향에서 1년에 7~8가마 부쳐주시는 쌀로 밥하고 최소한의 반찬으로 삼시세끼를 해결하고 아끼고 덜 쓰고 예금을 했다.
직원 없이 부부가 1인 3역을 하면서. 하루 16시간 이상씩 일 했다. 나는 판매, 배달, 출장, 할부 접수, 각종 서류제출, 상품 입, 출고 등을 했고, 이래는 살림도 하면서 판매, 부품구매, 기장 등을 했다.
대우전자대리점을 하고 몇 년쯤까지는 장사가 그런대로 됐는데…. 하이마트, 삼성프라자, LG프라자 등 초대형 전자마트와 통신기기 전문점, 컴퓨터 전문점, 온라인 시장이 세분되면서 작은 점포들은 사양화되었다. 매출이 절반(50%)으로 떨어졌다. 업친데 덮친다고 97년 말 IMF가 닥쳐와서 매출이 또 절반(25%)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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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업*
경제는 IMF 후 2001년 후 조금 회복됐지만 우리 가게의 수익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한사람 인건비도 안 됐다. 폐업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경제가 안 좋으니 집값. 전셋값도 떨어졌다. 가게는 대우전자 3년 계약기간까지는 전세 설정이 되어 있었는데 그 후 내 개인이 계약갱신 할 때는 백00은 전세 설정을 해주마고 약속은 해놓고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가뜩이나 IMF로 전세도 내렸는데….
전화 연락도 피하고 성 공단에 있는 공장에 찾아가도 안 만나주고, 봉덕동 효성아파트에 가봐도 안 만나주더니….
하루는 가사를 시켜서 문자를 보냈었다. "그 돈은 나한테 껌값밖에 안된다 고하며 공장하는 사람이 그 까짓돈 떼어 먹겠느냐?"고 막말을 하네요!
몇 달을 죽을 맛으로 지냈다.
가게건물 등기부등본을 떼어보니 몇 달 전에 주인이 서00으로 나옵니다. 큰일이었다.
서00의 주소지(동구 지묘동) 팔공 2차 APT로 급히 찾아갔다. 서00은 출타 중이었고 부인이 있어서 사실관계를 설명했다. 부인은 서00이 대구은행장을 역임한 사람이라고 하며 안심해도 된다고 했다. 명함을 주고받고 연락을 부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대구은행장 하는 중학동이기에 서00의 사람 됨됨이를 물어보았다. 비로소 약간 안심할 수 있었다.
며칠 후 서00으로부터 내방이 있었다.
우리 전세금 1억 천만 원은 자신이 책임을 진다고 했다. 한 달 후 내린 전세금 3천만 원을 받았다.
8천만 원 설정을 부탁하니 보증금 5천에 월세 40만 원 하자고 하네요.
한번 놀란 가슴은 5천만 원도 겁이 나네요. 그때가 2009년입니다. 그 당시 장사는 거의 노는 수준으로 월 100만 원 정도로 인건비도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몇 해 전부터 건물주에게 가게 그만둔다고 얘기하니 세놓고 나가라고 합니다.
안 그래도 간혹 씩 부동산에서 들어올 사람 있다고 세 놓으라고 했었다.
2010년 4월에 천 양 백화점업자에게 보증금 오천, 월 50만원, 권리금 천만원에 계약했습니다.
진열된 상품은 최소한으로 줄여서 판매하고 나머지는 인수시켰습니다.
5월에 잔금 받고, 폐업 신고까지 마쳤습니다.
36년 생업에서 퇴직했습니다!
내 나이 60세니 조금 이른 감이 든다!
*노년의 삶*
36년 동안 쉼 없이 달려온 생업도 마감하고, 단독 3층 주택에 우리 부부만 살고 있다. 자식들 다 출가시켰고, 노후 준비도 대충 마첬다. 여행, 농악, 자전거 하이킹, 등산, 스포츠댄스, 가요 교실, 에어로빅스 등 동적인 취미와 컴퓨터 수업, 스마트폰 수업, 사진, 동영상 편집 등 정적인 취미에 시간표 짜서 바쁘게 산다. 등산은 매월 2회, 스포츠댄스는 일주일에 2시간 에어로빅스 6시간, 컴퓨터 고급 5시간, 스마트폰 고급 5시간 가요 교실 2시간 봉사활동은 월에 5시간 정도 한다. 2013년~2019년은 어머니 간병 했다. 10년 전부터 아내가 하는 부업도 적극 돕는다. 요리하는 시간도 즐겁다. 옥상 텃밭 가꾸기는 즐기는 취미활동이다.
이제 100세 시대라고 한다. 앞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 현재 생활 방식을 고수할 것이다. 앞으로 20년 이쪽저쪽이다.
부부가 다 건강하게 해로 했으면 금상첨화 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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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재*
어영부영 살다 보니 어느새 이 나이가 되었다.
내 나이 74세, 한 살 적은 아내와 단독주택에 살고 있다.
1997년 10월에 내 나이 47세 때 내 집을 짓고 들어와 산 지 지금까지 27년이 되었다.
대지 40평의 작은 한옥을 철거하고 건평 60평 3층 집을 설계해서 1층은 창고, 2층은 내외 주거 공간, 3층은 딸, 아들 거처로 하고 옥상 텃밭도 만들었다.
지금은 딸 아들 출가 시키고 2층은 아내가 쓰고 3층 딸 방은 침실로 아들 방은 서재로 내가 쓴다.
옥상에는 과일나무 6종이 있고 각종 야채를 길러서 이웃과 나눠 먹는 재미도 느낀다.
성가신 농약 안치고 안전한 먹거리라는 자부심도 있다.
*미래의 삶*
내 나이 74세! 앞으로 남은 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
고요한 아침 햇살을 느긋하게 맞이하며, 소중한 사람들과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고 싶다.
자연 속에서 산책하며 삶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지혜와 경험을 나누며 젊은 세대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
새로운 취미를 발견하고, 배움의 즐거움을 다시 느끼며, 마음의 평온함을 찾고 싶다.
건강을 돌보며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작은 행복을 소중히 여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다.
세월이 흘러도 늘 배울 것이 많고, 사랑할 것이 많으며, 살아갈 이유가 많음을 기억하며,
올바른 노후생활을 지혜롭게 가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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