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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
어찌하여 이런 일이
전투가 벌어지기 전, 그들은 베냐민에게 딸을 시집보내지 않기로 결의까지 했단다. 베냐민이 꼴통 짓했다면, 나머지 지파는 미친 짓의 연속이다. 정신 못 차리고 악수를 계속 둔다. 한 지파가 사라진다는 것을 그제야 인지하고, 미친 짓에 동참하지 않은 길르앗 남자를 죽이고 결혼하지 않은 여자만 데려간다. 어떻게 구분했을꼬? 그래도 모자라니 실로의 축제에 참여한 여성들을 납치하는 묘수까지 짜낸다. 그러면서도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며 운다.
이제야 제정신이 든 모양이다. 넘겨주는 게 싫으면, 자체적으로 적법한 절차를 따라 재판하고 벌을 주면 그만인데, 전쟁을 선택한 베냐민 지파는 멸절 위기에 봉착했다. 다른 지파들은 사건을 철저히 조사한 연후에 결정하면 될 일을, 피해 당사자의 일방적 증언만 듣고 전쟁이라는 최악수를 두었다. 싸움에서 이기면 게서 멈출 일이지, 잔당 소탕하고, 성을 불사르고, 애먼 시민을 학살했다. 끝을 보고서야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안다. 그때서야 묻는다.
한자어 ‘호반 무(武)’를 파자하면 ‘그칠 지(止)’와 ‘창 과(戈)’가 된다. 창으로 창을 그치게 하는 것, 상대가 창을 사용하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최종적으로 내가 아예 창을 들지 않는 힘이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졌냐고? 폭력으로 폭력을 해결하려 한 점, 폭력에 취해서 멈출 줄 모른 것, 그리하여 폭력의 희생자에서 폭력의 가해자가 된 점이다. 아서라. 처음부터 하지 마라.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라. 그러면 죽이지 않는다. 그러면 너희가 살리라. (삿 21:3)
12/12
닥치는 대로
두 번의 연속 패전에 깊은 시름에 빠진 열한 지파 연합군은 온갖 제사를 지낸다. 아무 생각 없이 숫자만 믿고 힘으로 밀어붙이려던 기존의 방법에서 전략과 전술을 짜고 군대를 운영한다. 소수의 군대로 싸우면서 일부러 패하는 척 뒤로 물러나면서 적을 유인한다. 적이 본진에서 멀어지고 우리 쪽 깊숙이 들어오면 매복조와 함께 그들을 포위해서 섬멸한다. 나머지는 텅 빈 성을 공략한다. 잔당을 끝까지 추적해서 떨어진 이삭 줍듯이 적을 쓸어버린다.
성에 있던 것은 사람이든, 가축이든 가리지 않고 모조리 학살한다. 그 일대의 성들은 화염 공격으로 불태웠다. 그만큼 그들의 분노가 들끓었다는 뜻이렷다. 2만 6천 명 중에서 살아남은 것은 고작 6백 명이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종 청소하듯 무자비하게 도륙한다. 사람도 짐승으로 보였나 보다. 그들이 짐승이었던지. 하여간, 하나님의 자녀요 한 핏줄인 베냐민 지파 사람들, 제의와 농사에 필수인 가축도, 생활 터전인 성읍을 초토화했다.
폭력의 명분은 악한 폭력에 저항해서 선한 폭력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나는 항상 선하고, 적은 언제나 악하다. 그러나 폭력은 악인의 악으로 악인을 심판하는 것이다. 결국 원수끼리 서로 닮고, 폭력으로 일치단결한다. 그런데 라이언 일병 구한다고 적국의 라이언을 몇 명 죽였을까? 죽은 무수한 라이언의 복수한다고 끝까지 죽이려 들겠지. 폭력은 악순환을 이루고, 가속화된다. 다 죽어야 끝난다. 고마해라. 닥쳐라. (삿 20:48)
12/11
싸워도 되겠습니까?
이건 분명 승산이 충분하다. 뿔뿔이 흩어져 제각각이던 열 한 지파가 이 일로 물 샐 틈 없는 하나가 되었다. 적의 10배가 족히 넘는 40만 대군이다. 사기도 드높다. 대의명분도 확실하다. 하나님께서도 분명 말씀하셨다. “가라, 싸워라.” 어느 모로 보나 질 수 없는 전쟁이다. 한 가지 불리한 점은 지형지물이 낯선 곳에서의 공격전이라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런가, 연전연패다. 전투 때마다 하나님께 여쭈어도 대답은 한결 같다. “가라, 싸워라.”
그들의 질문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빠졌다. ‘왜’가 없다. 형제와의 전쟁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다. 가인과 아벨의 사건에서 보듯 골육상잔은 원초적으로 금지된 행위이다. 악을 악으로, 폭력을 폭력으로, 살상을 살상으로 갚는 것, 하나의 폭력에 전부를 궤멸시키는 전면적 폭력을 그들은 당연시한다. 의문시하지 않는다. 내 안의 악은 눈감고 상대의 악에는 두 눈 부릅뜬 형국인데, 내 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상대방의 티눈을 절대화한다. 그저 싸우려고만 든다.
하나님은 묻는 족족히 승인한다. 마지막에는 승리까지 보증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 방식이다. 악인은 그가 자행한 악에 먹힌다. 똑같은 놈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다 망한다. 그래서 악에 관한 신학의 고전적 답변은 적극적 허용이 아니라 소극적 묵인이다. 여기서는 외려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하도록 장려하는 분위기다. 싸워도 돼요? 그럼, 실컷 싸우렴. 죽여도 돼요? 그럼, 얼마든지 죽이고, 죽으렴. 묻지 말고 더 싸우고 더 죽이렴. 왜 더하지 않고? (삿 20:22)
12/10
이스라엘답게
레위 사람은 사울이 소를 열두 토막 내서 전 지파에 보내어 전투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듯 아내를 그리한다. 베냐민 빼고 모든 지파가 득달같이 모여든다. 레위인은 불리한 것은 쏙 빼고, 유리한 것은 과장하며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희생 제사의 전문가로서 우마를 잡듯 시신은 토막 내더니, 교육 전문가로 마지막 말은 압권이다. “하나님 백성답게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 백성답게 실천하고, 저를 위해 대안을 제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이 없다. 첫째, 모인 숫자가 그렇다. 자그마치 40만이다. 옷니엘부터 입다에 이르는 전투에 비해 훨씬 많은 용사가 참전했다. 그때는 내분이 있었다면, 지금은 똘똘 뭉쳤다. 둘째, 분노의 이유다. 외세를 몰아내는 일이 아니라 한 가정, 한 지역의 일을 그 단위에서 처리하지 못하고, 전 국가적 사건으로 비화하고 있다. 마지막은 말하는 장본인이다. 일을 키우고, 회피하고 방치한 건 바로 그다. 그런 자가 공동체 전체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모두 자기가 정의롭고 정당하다는 확신에 차 있다. 레위인은 피해자 코스프레하고, 이스라엘은 악당을 때려 부수는 정의의 사도다. 사건에 대한 심층적이고 다층적 분석이 없다. 하나님이 끼어들 자리도 없다. 죽은 여인을 기리는 애도도 없다. 책임 전가만 있다. ‘답지’ 않은 자들이 ‘다움’을 요구하니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다. ‘답게’(like) 좋아하네. 너무 식상한 말, 그래서 언제나 진리인 말. “너나 잘하세요.” 한 마디 더. “너부터 잘하세요.”(삿 20:7)
12/9
동이 틀 때
저녁 늦게서야 겨우 잠자리를 마련하고 배불리 먹고, 두 사람은 고향 떠나 사는 자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감사도 하며 눈시울을 붉힌다. 세속에 비분강개하고, 하나님의 영접을 받고 하나님을 영접했다면서도 나그네를 영접하지 않는 하나님 백성의 위선을 안주 삼아 정겨운 대화가 무르익고, 불빛도 잠이 들 찰나다. 동네 양아치인지, 베냐민 지파가 싸고도는 것을 보니 ‘있는 집 자식’인지 모르겠다만, 외지인을 윤간하겠다고 발정 난 수캐 여럿이 모여들었다.
노인은 딸과 첩을 먹잇감으로 내주겠다고 제안해도, 이것들은 막무가내다. 레위 사람은 문을 열고 제 처를 문밖으로 떠밀고 급히 닫는다. 갑자기 장면이 느려진다. 화면은 흑백이고, 배경음악도 소리도 없다. 떠미는 남편의 옷자락이라도 잡으려다,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여자. 달빛도 없고, 별도 길을 잃은 밤에 거친 숨소리와 처연한 소리. 짐 챙기고 달게 자는 레위인. 천, 천, 히 동이 튼다.
영화 보듯 그려지는데 불경스럽게도 이 단락을 성경에서 찢어내고 싶다. 내가 본 성경 이야기 중 최악이다. 왜 우리에게 이 일을 깊이 생각하고 의견을 말하게 할까? 내남 없는 우리 이야기니까. 아내가 아이 사건으로 너덜너덜해진 영혼으로 밤잠을 못 자고 앓아누웠을 때도, 교우가 죽을 것같이 힘들다고 호소할 때도,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의 죽음 소식 앞에 잠깐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쿨쿨 잤다. 이 시대의 가정과 교회에 ‘아침이 정말 올까, 거기 누구 없소?’ (삿 19:22-30)
12/8
먹고 마셨다
잘들 한다. 잘들 먹고 마신다. 아무리 먹기 위해 산다고 해도, 먹지 않으면 못 산다고 해도, 이리 먹고 마시나. 아내 찾으러 가서 장인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토탈 5일이다. 닷새 동안 진탕 먹고 마시는 일뿐이다. 변명은 가능하다. 장인이 저리 극진히 대접하는데, 어찌 단호히 물리치리오. 주는 대로 먹는 거지. 다음 스토리는 또 어떤가. 기브아 광장에서 만난 노인의 환대로 겨우 잠자리를 마련한 레위인의 행동을 이렇게 묘사한다. 먹고 마셨다.
사사기는 먹고 마신 일에 왜 집착할까? 한 게 그것뿐일 리 없다. 기록에서 뺀들 어쩌랴만, 자꾸 길게 말한다. 왜? 아내와 대조하기 위해서다. 며칠 동안 아내는 이름도, 말도, 행동도 일절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는 입도, 손도, 몸도 없다. 분명 말했고, 먹었고, 몸짓이 있었을 텐데. 왜 사사기는 의도적으로 이 여인을 침묵하게 만들지? 바로 먹고 마시기 바쁜 남편 놈 때문이다. 없는 존재 취급한 것이다, 아내를. 그러다가 없어졌고.
어디서 봤다, 이 사람. 김첨지 같달까. 딱 나다. 운 좋게 수입 생기면 쾌 지나 칭칭 났네. 치삼이 만나 술 걸치는 대신 밥 먹고 커피 마시며 고상하고 천상을 헤매는 토론에 들떴다. 고담준론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레위인은 종과 대화하고, 나의 의사결정에 아내의 자리는 없다. 한밤중에야 까만 봉다리 들고 가면 착한 날이다. 산 책 들고 가기 일쑤. 왜 당신은 밥도 안 먹고 있냐며 되레 타박. 그래, 잘들 하고 있다.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 (삿 19:21)
12/7
왕이 없던 때에
성경을 묵상하는 한 방법은 분량이 작은 성경은 통으로 먼저 읽고 얼추 맥을 잡은 다음 단락별로 날마다 뜯어보는 것이다. 사사기는 가능하다면 1장부터 21장 25절까지 읽으면 좋다. 그게 안 되면 예컨대, 삼손 스토리(13-16장) 혹은 미가의 신당과 제사장 이야기(17-19장)을 한 번 읽고, 매일 묵상하면 좋다. 숲의 생태계를 머리에 넣은 다음 나무와 풀을 보는 것이고, 전체 그림을 흘깃 보고 퍼즐을 맞추는 것과 같다 하겠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눈이 번쩍 뜨였다. 미리 볼 요량으로 19장에서 21장까지 천천히 읊었다. 레위인이 웬 첩질이며, 기브온 불량배는 나그네를 환대하기는커녕 욕보이고 짓밟냐. 니가 유영철이냐, 왜 아내를 열두 토막 내냐. 법도 없고 대화 시도도 없이 군사부터 일으키냐고. 오징어 게임은 규칙이라도 있지. 여기는 규칙은 단 하나, 규칙이 없다는 규칙뿐. 자기만 최고인 사람들의 아비규환이다. 그런데도 감정 뺀 흑백 영화처럼 담담하고 싱겁다.
정약용은 선택의 기로에 설 때 유용한 판단 기준을 일러준다. 정의와 이익의 조합이다. 옳음+이로움, 옳음+해로움, 그름+이로움, 그름+해로움이다. 유자(儒子)의 마지노선은 두 번째인데, 신자의 최선이 네 번째라니. 만인이 만인에게 왕 되려 날뛰고, 못되었다고 난리다. 지옥을 사는 자, 내 이야기 얼개를 보았으니, 노래 불러봄세. 제목은 “잠시 지옥에 내가 살면서.” “열린 지옥문 들어가 세상 짐 남에게 떠넘기고 삐까번쩍 왕관 쓰고 내 맘대로 다스리리.” (삿 19:1)
12/6
모세의 손자
지금껏 근무지에서 무단 이탈하여 이리저리 떠도는 바람처럼, 물결처럼 흘러 다니다가 우연히 얻어걸린 미가의 집에서 호의호식하던 이. 하나님의 제사장이 아니라 한 개인의 가신 노릇 하고, 영적 아버지가 아니라 친아들처럼 귀염받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고용주의 입안 구슬 노릇하며 호강하던 이, 봉급에 눈이 멀어 얼른 고무신 거꾸로 신은 이의 실체가 폭로된다. 그가 돈 따라 왔다리갔다리한 건, 가난해서일까, 돈이 좋아서일까. 아무튼, 그는 모세의 손자다.
이 청년이 모세 손자라면 모세에게 재롱잔치도 했을 거고, 여호수아를 알 테고, 야웨의 전쟁에 참전했거나 당사자들의 경험담을 자주 들었을 터. 사사 시대 초창기 사건이다. 하도 곤혹스러워서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70인역은 모세를 므낫세로 살짝 비틀었다. 오히려 그냥 두는 게 본문이 가하는 충격파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독법이리라. 하이에나처럼 먹을 것 찾아 어슬렁거리는 제사장이나, 돈과 숫자로 꼬시는 사람들이나. 아무튼, 누가 더 문제임?
벗이 묻는다. 이때는 제사장이 역할 못 해 그런 거니? 기독교 신문사 편집장과 언론학자와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교회 타락은 목사 때문이라는 편집장에게 나는 둘 다 문제이고, 힘센 교인에게 쫓겨난 목사, 장로 따까리 노릇해야 밥 먹는 목사 많다는 것도 기억해 달라 했다. 그는 완강하게 반박했고, 교수는 미 한인교회 얘기하며 내 주장 거들었다. 오십 보는 교인, 백 보는 목사. 모세 손자놈 더 잘못했다. 목사는 목사 탓하면 됨. 서로 내 탓 하면 됨. 누가 더 문제인지는 1도 안 중요함. (삿 18:30)
12/5
평화롭게 사는
삼손과 함께 적을 물리치기는커녕 단 지파는 엉뚱한 곳에서 전쟁을 벌인다. 그들은 분배받은 땅을 차지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살만한 곳 찾아 이리저리 떠돈다. 용케 라이스를 찾아냈다. 땅도 넓고 기름지다. 사람들이 순박하다. 국방은 허술하다. 외진 곳이어서 동맹 관계를 맺지 않았다. 천혜의 땅이다. 하나님이 주시마한 곳이 아니지만, 이리 좋은 곳을, 하나님 백성이 차지하면, 하나님의 지경이 넓어지니 얼마나 좋으랴. 평화, 평화, 평화로다.
그들이 한가로이, 평화롭게 사는 이들을 쳐죽이고 땅을 빼앗은 것이나, 미가의 집에서 은으로 만든 우상과 제사장을 가로챈 것이 묘하게 겹친다. 하나님은 가나안의 패역을 심판하는 도구로 이스라엘을 사용했을 뿐, 평화롭고 유유자적하는 사람들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만들고 조종하려는 것이 우상이라면, 자기의 탐욕을 위해 이웃의 폭력적 통제는 분리되지 않는다. 우상 숭배와 전쟁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에서 배운 대로 인간은 선하고, 교육과 계몽으로 세상은 발전한다고 설교할 수 없었다. 인간은 탐욕적이었고, 자본 앞에서 설교는 무능했다. 그때 위대한 신학자들이 1차 대전을 정당화하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사람을 죽이는 신학, 전쟁을 지지하는 신학은 사라져야 한다. 내적 우상과 외적 폭력은 샴쌍둥이다.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노는 신앙이 아니라 어린 양 잡아먹는 사자의 종교. 광화문과 장위동의 종교. 아주 평화롭게 소멸하는구나. (삿 18:27)
나를 고용하여
미가의 집과 고용된 제사장을 두고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땅을 정탐하러 온 5명에게 던진 말이 뭔가 슬쩍 흘리는 투다. 다른 지역 방언이라서 말투가 달라서인지 알아보고 어디서 왔냐고 물었는데, 나는 여기 고용되어 있다고 한다. 이건 뭔가 꼬리치는 느낌이다. 좀 더 많은 연봉을 주면 얼마든지 갈 수 있다는 이력서 제출과 흡사하다. 그걸 알아챈 다섯 명의 스파이는 600명을 이끌고 오면서 한 집안보다 한 지파의 제사장직을 제안한다.
사실 희한한 일이 아니다. 애초부터 제안이 있었긴 하지만, 자리 잡지 못해 떠돌던 처지이고, 자발성도 있었으니 더 많은 연봉 주면 냉큼 달려가는 것은 소돔 땅 태우는 불 보듯 훤하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평화롭게 사는 사람을 무참히 죽인 단 지파나, 하나님의 일꾼으로 조건만 맞으면 어디든 달려가는 이 제사장이나 도긴개긴이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이 아니라 돈과 크기, 숫자의 부름만 있으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다.
목사들이 이 제사장처럼 솔직하지 않다. 돈 때문에, 자녀 교육 때문에, 큰 도시 큰 교회에서 큰 목회하고 싶다고 말하라. 미안하다고, 가고 싶다 하면 아쉽고 서운해도 “그대 가는 길에 주의 축복 있으리”를 부를 용의가 있다. 그 말하기 간지럽거들랑, 아무 말 말고, 그냥 가라. 그러면 축복하고 축하드린다. 기묘한 신의 뜻을 알 리 없는 우리가 가타부타 논할 계제가 아니니까. 부디 신무기 개발하듯 신논리 갖다 대지 말고, 새 회사로 그대 잘 가라. 사요나라~ (삿 18:4)
12/4
친아들처럼
삼손 사후의 사사기는 당시의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샘플을 꺼내든다. 아들놈, 미가는 제 엄마 돈을 훔쳤다가, 저주하는 소릴 듣고 깜짝 놀라 이실직고한다. 어미는 그것도 기특하다면서 하나님께 쬐매 떼서 드린다. 아, 근데 제사장이 입는 에봇은 뭐며, 신상은 뭐야. 아들놈 세워 제사장 삼았다가 떠돌이 레위인을 만나 정식으로 집안 제사장 삼는다. 우리 집안의 아버지요, 제사장으로 섬긴다더니, 아들처럼 귀여워한다.
미가 하는 짓이 참 골 때린다. 한 개인이, 한 집안이 개인 신당을 갖고 있다. 공적이고 공공의 성전이 아니다. 사적 소유물이다. 이는 하나님을 사유했다는 뜻이다. 주머니 동전처럼 하시라도 넣고 뺄 수 있는, 내가 달라는 대로 주어야 하고, 내 시키는 대로 뭐든지 다 하는 하나님과 제사장을 원한다. 말로는, 겉으로는 영적 아버지요, 목사님이지만, 몸으로는, 속으로는 아들? 아니 종놈 부려 먹듯 한다.
“내 헌금으로 밥 먹고 사는데 내 말 들어야지.” 회의 중 발언인데 환청을 들은 듯싶다. 개소리를 몇 번 들으면 골병든다. 교회는 공교회가 아니라 개인 신당이었던 거다. 나는 고용되었던 거고. 미가 보다 못하다. 애들 자장면 사줄 봉급이나 주던지. 못된 노무시키들. 곤조는 있어서 사람 종이 아니라 하나님 종이라고 외쳤으니, 친아들처럼, 강아지처럼 나를 이뻐하고 싶었던 그들 귀에는 내 말이 이리 들렸을 것이다. 왈, 왈, 왈. (삿 17:11)
12/3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천하의 삼손이 비루하기 그지없다. 동물의 왕 중의 왕인 사자를 맨손으로 찢어 죽인 것이 그다. 머리카락 밀리자 힘을 쓰지 못하고 오랏줄에 동동 매여 끌려가는 처지가 되었다. 혼자서 블레셋 군대와 싸워 싱싱한 나귀 턱뼈로 자그마치 일천 명을 때려죽인 게 그다. ‘없어 보이게시리’ 쭈그려 앉아서 아낙네처럼 맷돌 갈고 있다. 웃통 벗고 울퉁불퉁 근육 자랑하며 온 동네의 밀과 쌀을 가는 대형 맷돌이 아니다. 이건 숫제 돈도 없고 가오도 없고. 쪽 팔린다, 야.
집 대문도 아니고 성문을 통째로 뽑아 들고 물지게 지듯 밤새도록 걷던 그다. 이제는 눈알이 뽑히고 제 몸 간수도 못한다. 결혼 피로연에서 수수께끼 내고 블레셋을 골탕 먹인 건 그다. 그가 블레셋의 신전에서 그들의 유흥을 위해 광대 짓거리 중이다. 그는 술 마시며 사랑 찾는, 사람 틈에서 웃고 있는 삐에로가 아니다, 삼손은. 그는 광대가 아니라 사사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지 블레셋의 종이 아니다. 그런데 말이다, 그가 종놈이 되었다.
잘렸던 머리카락이 다시 자란다. 그걸 블레셋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까? 머리털 밀린 삼손이 힘이 빠졌으니 다시 자라면 힘이 회복될 가능성에 주의하고 준비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한번 실패하면 끝장이라는 결정론, 숙명론이 그들의 세계관이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버림받은 자인데, 그 신이 다시 품으랴. 허나, 기묘한 하나님에게는 우리의 죄악이 은혜가 되고, 실패가 재기의 기회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오늘도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지 않더냐. (삿 16:22)
이번 한 번만
딱 한 번뿐인 인생인데, 사사 삼손이 최후를 맞았다. 이번 딱 한 번만, 마지막으로 드리는 기도를 응답해 달라는 그의 기도를 가만 보면, 거기에는 하나님도 잘 안 보이고, 압제 받는 백성도 안 보인다. 그저 제 눈에 쳐죽일 놈들에 대한 복수심만 이글거린다. 하나님의 철천지원수요, 백성의 간악한 원수에게 보복한다는 말 정도는 해야 사사답고 간지나는데, 이리 죽고, 이리 기도하면 영 아니올시다. 하긴, 삼손이 삼손답게 죽어야 삼손이지 뭐. 허탈하다.
마지막까지도 정신 못 차리고 복수심에 불타는 삼손의 기도는 확실히 응답해 준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기도 응답하고, 삼손은 삼손답게 기도하고. 참으로 삼손과 삼손의 하나님은 기묘한 짝꿍끼리의 쿵짝이다. 이 조합 앞에서 기도란 모름지기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멋들어진 정의는 무색하다. 민낯 그대로의 욕망을 분출하고, 재깍 응답받는다. 기도가 뭘까? 아니 하나님은 뭐 하는 분이지?
“우리 집 강아지가 죽어가요, 와서 기도해 주세요”라는 울먹이는 전화를 받으면 갈 건가를 물었더니 다들 도리질이다. 난, 간다. 꼭 끌어안고 울며 기도할 용의가 있다. 어떤 이는 대학 입학과 취업은 내 뜻 구하는 기도라 하지 말란다. 사는 게 그리 아름다우면 좋으랴만, 교인 사랑하니까, 눈 딱 감고 한다. 하나님도 한 번 더 응답한다. 나도 내 원하는 거, 막 기도할 거다. 하나님이 내 깐부인데, 이번 한 번만 더 기도하는 거지 뭐. (삿 16:28)
12/2
어깨에 메고
삼손 스토리는 코미디일까, 판타지일까, 아님 로맨스일까, 스릴러일까? 사이코 드라마일까? 밤새 여성과 잠자리를 하고 성문짝을 뽑아 어깨에 걸쳐 메고 물 건너 산 넘어 무려 64km 떨어진 마을에 갖다 버린다. 호시탐탐 그를 죽이려던 자들의 얼빠진 모습, 양쪽 어깨에 메고 걸어가는 삼손. 변강쇠는 해학이 넘쳐서 박장대소하며 개웃긴다는 관람 후기라도 남길 수 있지만, 이건 뭐, 웃긴데 하나도 안 웃긴다. 그냥 웃프다. 뭐 하는 짓이야, 이게.
헤라클레스는 헤라 여신의 미움과 신의 장난으로 12번의 노역을 견뎌내며 성장했다지만, 신이 정한 운명을 거역해보지만 끝내 좌절하는 비극미와 비장미가 있다지만, 우리의 삼손은 신의 절대적 은총을 후루룩 말아먹고 성숙은커녕, 제 욕망 해소하려고, 제 힘 자랑하느라 밤늦도록 싸돌아다닌다. 밤새 페이스북, 넷플릭스, 유튜브하는 너나, 좋아요 숫자와 댓글, 유튜브 조회수, 내 책이 얼마나 팔리는지를 틈날 때마다 들락날락거리는 나나, 그짝이긴 하지만서도.
삼손은 왜 이럴까? 유다 지파에게 팔려 적에게 넘겨진 그가 깃발 든다고 나설 자가 없어서일까? 원체 떼를 지어 몰려다니기를 싫어하는 ‘독고다이’라서 단기필마일까? 그냥 바람둥이라서 발정 난 개처럼 저 지랄일까? 하여간, 저리 사는 삼손이 더 안쓰럽고 딱하고 웃길까? 그런 삼손을 사용하려고 욕보는 하나님이 더 안쓰럽고 딱하고 웃길까? 내 어깨에 멘 짐 중, 안 메도 되는 게 참 많다. 내 어깨 위 카메라로 만든 내 인생 드라마의 장르는 뭘까? (삿 16:3)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
괴롭다, 이 사람 삼손. 성 문짝을 잡초 뽑듯 뽑아 들고 가는 삼손에게 기가 질린 블레셋은 치졸하지만, 미인계를 쓴다. 들릴라를 돈으로 매수해서 힘의 비밀을 캐내려 한다. 삼손이 아놀드 슈왈제네거 같지 않았던 거다. 그렇다고 갸날픈 몸매는 아니고 꽤 근사한 몸매이었겠지만. 사랑하는 연인의 교태와 삐지고 토라지며 집요하게 비밀을 물어대니 슬슬 힘의 비밀에 가까운 대답을 하다가 결국 실토한다. 그러고는 더 괴로운 나락으로 떨어진다.
들릴라야 엄청난 돈을 준다니 너끈히 이해된다. 블레셋 군주들이 약속한 금액이 당시 연봉의 110배란다. 3천이면 33억, 5천이면, 55억이다. 다시 곱하기 5를 하면? 그것도 일시불로 준다는데, 미쳤냐, 안 하게. 해야지. 내게 그런 유혹이 없어서 그렇지, 나 같은 놈에게 그런 껀수가 떨어질 리 만무하지만, 번뇌하느라 죽을 지경은커녕 머리와 달리 마음과 몸은 가뿐히 결정해 버렸다. 영끌도 한다는데 뭘 못해. 없는 게 괴롭지, 없어서 괴롭지.
근데 괴력의 삼손은 그녀 앞에만 서면 왜 이리 작아지는가? 그녀를 사랑하고 하나님에 대한 일말의 신앙이 있으니까 괴롭다. 반면교사 삼손은 말한다. 사랑 땜에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죽을 만큼, 네 인생 전부를 걸어본 적 있냐? 하나님과 돈, 하나님과 여자, 하나님과 승진 사이에서 그토록 번민해 본 적 있어? 아, 이 사람 삼손, 이해 불가라서 힘들게 하더니, 이제는 말이 안 되지만, 말이 되는 질문으로 나를 번뇌케 하는구나. (삿 16:16)
12/1
나에게 한 대로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 지겨워서 그랬는지, 이국적 외모의 여성을 좋아했는지, 하여간에 그녀를 아내로 삼고자 했고, 그 일이 틀어져서 기발한 아이디어로 철저하게 응징했다. 자신을 잡으러 온 동족인 유다 지파에게 순순히 체포당한 뒤, 항우의 역발산기개세를 발휘해서 일당천의 싸움을 벌여 물리친다. 미쳤다, 미쳤어. 승리에 도취해 힘 자랑하더니 금세 타는 갈증에 물 달라 보채는 아이가 된다. 삼손이 20년 동안 사사라는 나레이터의 말로 이 단락은 끝난다.
삼손의 일련의 행동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가 받은 대로, 일 것이다. 나실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이나 신의 소명 의식, 압제 받는 동족에 대한 연민 따위는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렵다. 단독으로, 독단으로 행동하고, 본분이 아니라 욕망을 좇아 행동할 따름이다. 일신의 안위와 성공에만 눈독을 들인다. 그런 삼손을 하나님은 기괴한 방식으로 사용하지만, 삼손은 그런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않는다. 다급하면 찾는 시늉은 한다.
그런 삼손이 어이없긴 하지만 실은 안쓰럽고 짠하다. 그가 나고, 내가 그라서 그런갑다. 내가 내게 가만가만 묻는다. 넌 목사라는 정체성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이토록 전투적으로 사니? 아니면 책 읽고 책 쓰는 삶이 너무 좋아서 제 흥에 겨워 미친 듯이 사니? 내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삶이 주의 뜻을 이루는 아주아주 아주아주 쬐그만 일이라도 되기를 기도하는 걸 보니, 아, 나는 내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영락 없는 삼손이로구나. (삿 15:11)
11/30
알지 못하더라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삼손은 하나님이 내린 복을 받으며 무럭무럭 잘 자랐다. 그런 그가 블레셋 영내로 들어가 한 아가씨에게 홀딱 반했다. 눈을 떠도 보이고, 눈을 감으면 눈떴을 때보다 더 선명하고 잡힐 듯 같아 미칠 지경이다. 사랑의 열병으로 혼미한 그는 부모를 설득하고 졸라댄다. 주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고지한 대로 나실인으로 살아야 할 아들의 요청에 부모가 응할 리 만무하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결국 아들 뜻대로 결혼에 성공한다.
삼손의 끔찍한 사랑, 사자를 한주먹으로 때려눕힌 일, 수수께끼를 만들고 블레셋 사람들을 골탕 먹인 일, 연인의 등쌀을 견디다 못해 정답을 실토하고만 일은 그나마 낫다. 나레이터의 한 마디는 가히 핵폭탄급이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이러고도 하나님인가? 하나님이면 이렇게 해도 되나? 의문의 영이 세차게 내리 덮친 듯,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마구 쏟아진다. 알면 내가 얼마나 알겠냐마는 모르겠다,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다.
내 안에 삼손이 똬리 틀고 앉았음을 오래전부터 인정했어도, 삼손을, 삼손의 하나님을 몸으로는 밀쳐낸다. 되레 하나님이 안 기뻐한다고, 기독교 윤리에 어긋난다고 말한 욥의 친구들이 나다. 어쩌랴. 기도할밖에. “주님,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로 말했고 비방했고 방해했습니다. 사람 숫자만큼 다양하고 낯선 방식으로 일하는 주님을 내 작은 대가리로 재단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 이제 내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길을 알게 해 주소서." (삿 14:4)
11/29
내 이름은 기묘자라
믿을 수 없다. 긴가민가하다. 난데없이 나타나 아들을 낳을 거니, 술도 마시지 말고, 시체도 만지지 말고, 남과 구별된 깨끗한 삶을 일평생 살게 하라 한다. 혼란스런 사사 시대에 어찌 그리 산단 말인가. 둥글게 둥글게 살아야지. 말하는 폼이 도사급이라 자꾸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키워요? 이렇게 말하는 당신의 정체는 누구요? 잘라 말한다. 묻지 마, 내 이름 비밀,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 이해하려고 할수록 다치는 건 너야. 그러니 알려 하지 마.
삼손의 일생은 그야말로 미스테리하다. 미궁이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금기된 행동만 골라 한다. 또한 이방 여인과의 섹스 스캔들로 물든 것이 그의 전 생애다. 머리로 이해가 안 된다는 차원이 아니라, 온 몸이 저항한다. “이따위가 사사라고? 이런 망나니, 난봉꾼을 사용해서 블레셋을 물리친다고? 하이고. 이게 말이냐, 당나귀냐.” 뭐 그런 생각이 마구 든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하는 방식이고, 그도 하나님의 사람이라니, 참으로 괴이하다.
비정상이 일상화된 시대다. 괴악스러운 방식으로밖에 달리 일할 수 없을 만큼 이스라엘이 타락했다. 장점 아닌 단점, 거룩 아닌 죄악으로도 일하는 기상천외한 하나님, 그때와 다를 바 없는 지금, 하나님은 같은 방식으로 일한다. 그런 게 어딨느냐고? 나다. 내가 그 증거다. 나 같은 죄인 살린 하나님, 기묘자! 나 같은 죄인 사랑한 하나님, 기묘자! 나 같은 죄인 사용하는 하나님은 기묘하고 기묘하고 기묘하나니, 그 이름 기묘자라. 언빌리버블!! (삿13:18)
11/28
시작하리라
역사는 반복된다더니, 그 반복은 비극이라더니 사사기 역사가 갈수록 가관이다. 예전에는 좀 나았다. 외세가 압제하면, 꿈틀거렸다. 살려달라고 부르짖었다. 이번에는 호소가 아예 없다. 구원을 간청하지 않았다. 체념이든, 순응이든 모두들 블레셋 체제에 동화되어서 그럭저럭 사는 거다. 무려 40년이다. 한 세대란 말이다. 아침에 해가 동쪽에서 뜨듯, 지금 이 세상은 원래 그런 거다. 날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블레셋이 학대했고, 의문에 부칠 의제가 아닌 거다.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 걸 뭐. 달라지면 이상하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여인도 마찬가지다. 성경 속에는 불임 여성들이 여럿 있는데, 그들은 다들 기도했다. 불임이란 그 시대 여성에게는 가장 가혹한 저주요 재앙이었으니까. 여성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그래서 살려달라고, 자식 달라고 울부짖었다. 사라는 하갈을 들들 볶았고, 라헬은 야곱을 못살게 굴었고, 한나는 술 취한 여자처럼 기도했다. 그래서 진정한 나실인, 사무엘을 낳았다. 삼손의 어머니는 몸만이 아니라 맘도 불임이다.
모든 사람은 시대의 자식이다. 시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은 그 한계 안의 한 사람 불러내서 일을 시작한다. 특출난 것 없고 남들과 똑같이 별 일없이 사는 인생, 아무 일 없는 오늘을 사는 건, 그녀도 나도 똑같다. 지금의 그녀가 어쩌면 나일지도. 덧없이 반복되는 오늘과 다른 하루가 오늘이고, 오늘이 그 시작일이면 좋겠다. 너랑 똑같은 그녀와 새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너도 별수 없다시작해야지 뭐. 또 새로운 시작이 반복되는구나. (삿 13:5)
11/27
입다는 죽어서
큰 용사 입다가 죽었다. 딸을 번제로 바치는 비극 이후에 에브라임이 시비를 걸어온다. 기드온 때 뒷북치고 전리품을 쏠쏠하게 챙긴 재미를 보려는 심산이다. 근데 말끝이 사람의 오장육부를 뒤집는다. 너와 네 집을 불태우겠다니. 딸 잃은 아비 마음에 불을 지른 셈. 너희들은 우리에게서 도망친 놈들이라는 지역 차별까지 겹쳐서 말이 고울 수 없다. ‘쌀’을 ‘살’로 발음하는 이가 있듯이 요단강 나루터에서 ‘쉬볼렛’ 테스트로 몰살해버렸다.
내전 이후 사사의 사후에 언급된 패턴이 보이지 않는다.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왔고, 그 기간이 대략 몇 년이라는 보도가 일절 없다. 옷니엘은 40년, 에훗은 80년, 드보라는 40년이었는데 말이다. 암몬과의 싸움은 딱 한 구절인데, 딸과 에브라임 이야기는 상당히 길다. 베냐민 지파가 2만 5천 명이 죽으면서 지파가 거의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과 견주어도 4만 2천 명이면 어마어마한 학살이다. 죽고 죽은 이야기만 그득하다.
입다는 술만 마시면 ‘왕년에’ 타령이요, 죽은 딸에 대한 회한과 자책이다. 지파 분쟁은 심화하고, 뉘라도 제 심기 건들면 반 죽여놨을 터. 길르앗 장로와 암몬과 협상하던 ‘말’의 정치는 사라지고 폭력의 정치만 난무한다. 승리하면 제 아닌 누군가를 번제로 바친다는 서원이 아니라, 승리하면 제 몸을 번제로 드리는 삶을 살겠다고 서원했다면 어땠을까? 큰 용사이었고 위대한 아웃사이더이었던 입다. 6년의 공포 정치 이후, 그리 살던 입다가 죽었다. (삿 11:7)
11/26
하필이면 왜 너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서원을 드리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변방을 떠돌던 입다가 이스라엘에서 입지를 구축했다. 무남독녀로 아비의 사랑 받고 자란 딸은 그 옛날 미리암처럼 여성들을 앞장서 이끌고 탬버린 치며 춤추고 승전가를 부르며 달려 나와 얼싸안는다. 입다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한다. 그는 서원을 철회하지 못하고, 딸은 아비를 위해 자기 몸을 던진다. 사람들은 입다가 아니라 딸을 기억하고 기념한다.
입다의 처신이 영 이상하다. 하나님의 영이 내렸음은 하나님이 그를 사사로 승인하였다는 뜻이자 확고부동한 승리의 담보이거늘 서원은 불필요하다. 이스라엘 신앙에서 인신 번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사악한 죄다. 잘못된 서원은 얼마든지 취소 가능하다. 그가 우는 것도 딸의 생명 보다 자기 위신 때문이다. 왜 거두어들이지 않았을까? 왜 딸은 알면서도 철회하라고, 사랑 한 번 못하고 죽기 싫다고, 울며 호소하지 않았을까?
입다는 저 스스로 입지의 불안을 느낀다. 권력이 공고하지 못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사사로 세웠지만, 천출이요 비적 출신인 그를 온전히 사사로 인정하기도, 인정받기도 어렵다. 공개적인 서원을 공개적으로 취소하는 순간, 권위가 떨어지고, 말발이 먹히지 않을 터. 그걸 아는 딸은 아비 위해, 비정한 아비는 권력 위해 딸을 희생한다. 왜 하필이면 너냐고? 하필이면 너 같은 아비 만난 딸이 할 말이다. 성공 위해 자식 희생하는 너는 하필이면 입다처럼 사니? (삿 11:35)
11/25
입다는 답변합니다
암몬왕과 입다의 말 배틀이다. 암몬왕: 애굽에서 400년 살다가 들어와 그간 살던 사람 쫓아내었으니, 원래 내 땅을 돌려달라~ 입다: 역사적으로 말하겠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제인 에돔 등의 땅을 주지 않았다. 영내 통과를 거절하여 빙 돌아갔다. 아모리 왕은 거절하면 그만인데 전쟁을 걸어왔기에 싸웠고 승리하여 그 땅을 얻었다. 300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이의제기 없었다. 이건 너희들도 인정했다는 말이다. 인제 와서 웬 시비?
한술 더 뜬다. 고대적 세계관은 전쟁의 승리는 신의 승리요, 영토 확보는 신의 선물. 지금 너희 땅도 너희 신이 주신 것이고, 우리 땅은 우리 하나님 주신 것. 전쟁 대신 발람의 저주 방식으로밖에 응대하지 못한 발락 보다 못한 한참 모자란다. 전쟁해서 질 것 같으면 화친을 청하고, 선린 관계의 유지가 현명할 터. 전쟁한다고 백성 죽이고, 경제 죽이고, 이거 뭐 하자는 거요. 지략도, 애민도 없는 똥멍충아.
입다는 전쟁이 아니라 대화와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현실주의자이자 역사와 신학적 소양을 두루 갖춘 인문주의자이다. 변방으로 내몰려 시대를 한탄하며 건들거리는 건달패가 아니라, 와신상담하며 권토중래를 꿈꾸는 야심가이자 문무를 겸한 실력자다. 기약 없는 자기 때를 무한정 기다리며 웅크릴 줄 아는 현명함과 외교력도 갖추었다. 한을 품고 사적 복수가 아니라 위기에 처한 어제의 배신자인 동족을 구원하는 꿈을 품었다. 입다 같은 큰 용사가 그립다. (삿 11:15)
11/24
굉장한 용사
성경은 입다를 딱 한 단어로 갈무리한다. 굉장한 용사. 기드온에게 전한 천사의 말과 같다. 큰 용사. 두 사람의 성격과 출신, 환경, 업적은 달라도 둘 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자세히 뜯어보면, 기드온 동급이라고 하기에는, 큰 용사라고 하기에는 미심쩍다. 찜찜하다. 기드온이 그나마 양화라면, 입다는 음화이다. 어둡고 침침하다. 그의 출생과 성장 환경은 최악의 여건이다. 자기도 남도 파괴하는 사람일 공산이 크다.
어머니는 창녀이었다. 그녀의 가슴 저미는 모진 삶과 부도덕한 행위, 집창촌에서 자라는 입다는 어땠을까. 아버지는 길르앗인데 희한하다. 본디 길르앗은 지명이지 인명이 아니다. 아버지를 모른다는 뜻도 되겠다. 어머니와 스친 길르앗 사람이 하도 많아 그리 부른 게다. 한 지역 전체가 똘똘 뭉쳐 축출했다. 낯선 땅에서 도적질하는 무가치한 자들, 건달패들과 어울리며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주먹질이며, 입담이며, 머리 굴리는 것까지 발군이었던 모양이다.
그에 적합한 이름은 뭘까? 깡패? 루저? 찐따? 흙수저? 그는 아웃사이더가 제격이다. 주류의 가치관으로 보면 아무짝에 쓸데없지만, 그들과 다른 이야기, 다른 세계관으로 다른 세상을 준비하며 실력을 키우는 사람이다. 중심에서 밀려나 변방에서 이를 갈며 실력을 키우고, 새 세상을 꿈꾸었기에 길르앗 사람은 모시러 왔고, 성경은 굉장한 용사라 칭한 거다. 지금도 어디선가 입다가 자라고 있다. 굉장한 용사가 말이다. (삿 11:1)
11/23
오늘만은
좀 낫다가 그대로다. 잠깐 좋다가 원래대로다. 아비멜렉으로 난장판이던 이스라엘에 두 명의 사사가 연달아 등장하면서 안정을 찾았다. 돌라와 야일. 그들의 사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이 신, 저 신 찾아 떠돈다. 그 결과는 18년간의 억압. 다시 발이 손이 되도록 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번 지나면 또 이전 상태로 돌아가거나 더 악화할 것은 안 봐도 비디오다. 짐짓 등을 돌린 척해도, 본심이 아니다. 그래도 어쩌겠나. 우리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데.
사람이 급하면 지푸라기도 잡는다. 위기에 처하면 가장 포악해지기도 하지만, 겸손해진다. 무신적 삶을 살았던 이도 독실한 자처럼 기도한다. 더없이 절박하기에 제 목숨을 십자가의 그리스도처럼 살 것처럼 공약(空約)을 남발한다. 한 번만 살려주시면 주를 위해 살겠나이다.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이번 곤경으로부터 구출해 달라 통사정하는 이스라엘 때문에 우리 하나님, 크게 근심한다. 우리 힘든 것 이상으로 힘든 내 하나님.
어릴 적 부모님에게 혼날 때면, 구석진 곳에서 무릎 꿇고 두 팔 들고 벌을 섰다. 잘못해서가 아니라 힘들어 눈물 뚝뚝 흘린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한 번만 봐주세요.” 우리 애들도 그러더라. 우습기도 하고, 화도 나고. 결국 안아준다. 또 그럴 줄 안다. 내가 그랬는데, 또 그렇게 자라는 거지 뭐. 내 새끼 우는 걸 보는 게 가장 큰 고통인 별수 없는 하나님, 얼른 도와주신다, 오늘도 또 오늘도 그리고 또 오늘도. 오늘이 그날이다. 오늘도 그날이다. (삿 10:15)
11/22
죗값을 갚으시고
왕은 제 백성 배불리 먹고 편안하게 살게 하고, 외부의 위험에서 지키는 자다. 그런데 이 작자는 제 형제를 무자비하게 죽이더니, 저를 추대한 세겜인들의 뒷담화를 못 견디고 길길이 날뛴다. 살아보겠다고 망대 위에 올라간 백성들을 불태워 죽이려던 그는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죽고 만다. 쪽팔리게 죽기 싫지만 초라하고 비참함이 줄어들지 않는다. 피로 맺은 동맹이던 아비멜렉과 세겜은 상대의 피를 흘리며 그렇게 서로 죽이다가 서로 죽는다.
악인의 최후는 악의 승리가 그리 길지 않다는 진실을 알려준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다. 아비멜렉은 고작 3년이다. 권좌를 잃을까 봐 조바심 내던 3년, 그의 전 생애랑 맞바꿀만한 가치가 있었나. 친형제를 망나니 칼 아니면 군중의 돌멩이로 죽인 보람이 있었나. 한낮의 꿈이요 잠깐의 바람이라. 그러려고 태어난 것도, 산 것도 아닐 텐데, 사는 게 죄요 죽음도 죗값이라니, 나쁜 놈 참 잘 죽었다니, 악인도 하나님의 형상일진대, 참 안 됐다. 잘 가라.
악인의 죽음은 악은 악에 의해서, 악인은 악인에 의해 심판받는다는 진실을 일깨운다.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한 자, 폭력으로 유지하다가 끝내 폭력에 의해 망한다. 내 주님께서 칼로 일어선 지는 칼로 망한다고 한 말씀 그대로다.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나다. 나에 대한 최고의 심판은 내 판박이를 만나는 거다. 그것이 등가교환의 법칙이고 요담의 저주의 비밀이다. 아프게 했냐. 아플 것이다. 죽였느냐. 죽을 것이다. 다 죗값이다. (삿 9:57)
11/21
백성을 죽이고
이번에는 듣도 보도 못한 외지인이고, 집안 배경은 에벳, 곧 종의 아들이다. 가알이라는 이 사람, 나름 논리적이다. 아비멜렉과 세겜의 관계는 모계가 아니라 부계로 따지면 남남이다. 명쾌한 정리로 양자의 틈을 확 벌린다. 그리고 허세작렬을 시전한다. 아비멜렉 정도는 한 끼 식탁에 올린 꽁치, 가볍게 먹어 치우겠다더니 전투다운 전투도 못 하고 자기도 죽고, 따르던 사람들도 망한다. 정의롭던지, 실력이 있던지. 아니면 꺼지든지 찌그러져 있던지.
제 혈육을 죽이고 왕이 된 아비멜렉은 끝내 혈육을 죽인다. 3년만에 쿠데타를 함께 했던 세겜 내부에서 음모와 배신이 싹튼다. 그래도 권력의 최정점에 올라선 그이기에 권력의 속성을 모르지 않을 터. 다른 곳도 아닌 세겜의 모반을 초전박살 내지 않으면, 한순간에 물거품 되기에 십상이다. 제 가족 죽이고 왕된 자가 제 가족 아닌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인정사정없다. 재기 불가능하도록, 환원 불가능하도록 도시를 파괴하고, 소금을 뿌려 황무지로 만든다.
죽인 자들끼리 죽이고 죽는다. 하나님은 악을 저지른 자에게 악이 알아서 악을 악으로 갚도록 놔둔다. 악인은 악을 신으로 섬기고, 그 신의 뜻에 맞게 살다가 악의 화신이 되어 후루룩 타버린다. 헌데, 우리 착한 하나님은 악인에게 부당하게 고통받는 자에게 악을 선으로 갚으시고, 악이 선이 되게끔 하신다. 하나님 안에서는 어떤 것도 쓸모없는 것이 없나니 악인은 악인으로 선을 증거하고, 선인은 선으로 선을 증거하나니, 내 쓸모는 뭘까? (삿 9:45)
11/20
가시나무
나무들이 왕을 추대한다. 올리브, 무화과, 포도나무를 찾아가서 왕이 되어 달라 사정한다. 가나안 지역에서 나무 중의 나무요,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이 유익한 나무들은 한사코, 한결같이 거절한다. 이유는 같다. 대체 불가능한 자기만의 사명감과 왕좌에 대한 거부감이다. 왕은 우쭐대고 으스대다가 나무의 세계 자체를 뒤흔드는 위험에 빠뜨리는 위험천만한 자리라는 인식이다.
하는 수 없어 가시나무를 찾아간다. 왕이 되라는 성화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받아들인다. 가시나무에게 왕은 타인을 제 그늘 아래 보호하고, 그늘 밖은 모조리 불태우는 자리이다. 어불성설. 그늘 없는 가시가 뭘 제 품에 안으며, 자기보다 큰 나무를 어찌 품으랴. 되레 찔리고 찢길 뿐. 게다가 비교 불가능한 아름드리 백향목을 살라버릴 생각에 신이 난다. 품은 적도, 살린 적도 없는 자의 수준에 딱 맞는 생각이다.
누가 리더인가? 그의 삶의 이야기를 보라. 타인과 사회를 위한 자기희생적 스토리와 겸양의 미덕이 있는지 아니면 돕고 살린 이야기는커녕 가시처럼 날선 비판은 날리며 누군가를 아프고 상하게 했고, 머리이 되어 보복을 공언하는지를. 예수는 가시관 쓰고 죽음으로 죽어가는 자를 살렸고 당신도 살아나셨다. 아비멜렉은 가시나무가 되어 산 자를 죽음으로 내몰고 자기도 죽었다. 나의 왕은 가시관 쓰고 있나, 가시인가? (삿 9:15)
11/19
우리의 혈육
아비멜렉은 내 아버지는 왕이다, 라는 이름으로 살았고, 자랐다. 아버지 사후, 그는 어미의 고향으로 간다. 두 가지로 동향을 설득한다. 일흔 명이 우후죽순으로 난립하는 것보다 한 명이 낫지 않으며, 어차피 한 명을 고른다면, 혈육지간인 아비멜렉이 낫지 않겠느냐고. 신전의 아우라를 등에 입고 제 형제 70명을 도륙을 낸다. 한곳에 모아놓고 개떼처럼 달려들어 죽였는지, 망나니 칼춤으로 사형 제의를 했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아비멜렉은 왕이다.
그에게서 왕이 될만한 자질이나 경험을 텍스트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이전의 사사들은 한결같이 백성을 구원하는 자로 쓰임 받았다. 옷니엘과 에웃, 아버지 기드온처럼 큰 업적을 남기거나, 삼갈처럼 규모는 작아도 어찌 되었건 구원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는 말도 없다. 절대 신으로부터 소명 받은 것도, 인간적 차원에서의 실력을 검증한 것이 없다. 단 하나.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 그것도 외가라는 것 하나 외에 이유가 없다.
같은 지역이라서 지지하고, 다른 지역 사람에게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고, 지지한다. 고대판 지역주의이다. 현대에서는 이념이지만, 성경은 악령이라 말한다. 모든 것이 이 망령 앞에서는 허약하다. 딱 한 마디면 못 할 일이 없다. “우리가 남이가.” 하나님은 약자에게 “우리가 남이가, 너는 내다. 너 괴롭힌 놈은 나 괴롭힌 놈이다”라고 하지만, 우리는 힘센 놈에게 빌붙어 말한다. “우리가 남이가, 니가 내고, 내가 니다.” 주님이 네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남이다. 사요나라~” (삿 9:3)
11/18
다스려 주소서
기드온이 귀환하자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왕, 왕, 왕이 되라 한다. 이는 한편으로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신 자이고, 신중하게 전략을 짜고, 막강한 미디안 군대를 지략으로 제압하고, 에브라임과는 협상하고, 숙곳과 브누엘은 누구도 복수를 꿈꾸지 못할 잔인함으로 제거하였다. 신중함, 지혜로움, 군대 지휘력, 대화와 협상, 무자비한 성격까지, 그야말로 왕이다. 해서, 내남없이 먼저 나서서 ‘왕이 되소서’를 환호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도 있다. 은밀히 숨긴 기드온의 야망이 다 보인다. 이미 하나님이 전쟁을 기드온의 전쟁으로 만들어 승리의 영광을 가로챘다. 말로는 왕이 되지 않겠다지만 금귀고리를 바치라 한다. 무게가 대략 쌀 20kg 정도이다. 그걸로 대제사장의 의복인 에봇을 만들고, 자신의 집에 두었다. 군사권만이 아니라 경제 권력과 종교 권력까지 움켜쥐었다. 왕으로 모시지 않으면 후환이 두렵다. 알아서 긴다. ‘우리의 왕이 되소서.’
기드온은 시대적 제약과 그들의 속셈을 간파한다. 누구도 왕이었던 적이 없던 시대의 첫 왕은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복원력으로 자색 옷 벗는 건 시간문제다. 게다가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저들이 좋아서 추대했다. 제 기대랑 멀어지면, 수틀리면 하시라도 뒤엎는 게 바다 같은 민심이다. 다스려 달라는 말은 내가 너를, 너를 통해 다스리겠다는 뜻. 다스리는 자는 다스림을 받는 자다. 그게 싫어 기드온은 거절했다. 영리한 걸까, 영악한 걸까. 알고나 하려고 해라. (삿 8:22)
11/17
사람들을 죽이니라
오랜 미디안의 압제로부터의 해방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전공에 따른 논공행상이 주된 이슈가 된다. 에브라임의 말도 안 되는 항의는 자신을 한껏 낮추어 그들의 전과를 추켜세워주는 협상력으로 마무리 지은 반면에, 적의 잔당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협력하지 않은 숙곳과 브누엘에 잔인한 응징을 가한다. 마을 장로에게 들가시와 찔레로 고문하고 브누엘, 곧 브니엘의 성대를 허물고 주민을 학살하였다. 포로로 잡은 두 왕은 친형제를 죽였다고 쳐죽인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전쟁의 독특성은 하나님이 주도하셔서 자연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적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상대방도 하나님의 적이지 인간의 적이 아니다. 그렇게 하여 전쟁에서 인간을 최대한 배제하고, 인간이 폭력의 주체가 되지 못하게 막는다. 그것은 폭력의 악순환에 걸려서 끝없는 보복과 폭력으로 한 사회가 안에서부터 스스로 무너지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이다. 폭력의 본성은 폭력을 행하는 자, 그를 잡아먹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제 이름과 영예를 슬쩍 밀어 넣은 기드온이 폭력에 전염되었다. 힘센 에브라임은 다독이고, 작고 약한 사람은 죽이고, 적국의 왕을 척살한다. 하나님의 주도권을 빼앗고, 적도 아닌 동족을 죽이고, 개인의 원수를 하나님의 원수로 만들어 사적인 복수를 행하고, 아들마저 폭력에 끌어들인다. 마침내 폭력의 주체가 되었다. 하나님처럼 되려 했던 인류의 첫 죄악이 형제간 폭력과 살인이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죽이면 죽는다. (삿 8:17)
대답과 같았다
기드온은 속이 탄다. 남은 잔당을 처리해야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확실히 구원할 것인데, 예상치 못한 발목잡기에 뿔났다. 힘깨나 쓰는 에브라임 지파는 관망만 하다가 전세가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참전하고서는 인제 와서 딴소리다. 전리품을 더 얻을 공산이다.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은 전투 중인 군사들에게 물과 빵을 제공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승리가 확정되었다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다. 내심 화를 누른 기드온이 화를 폭발했다. 보복을 맹세한다.
그들은 ‘혹여 기드온 장군님이 세바와 살문나를 잡지 못하면, 후일, 그들과 가까운 이곳은 필시 보복당할 겝니다. 우리로서는 조심할 수밖에 없다오,’ 라고 말한 것뿐이다. 거리를 멀찌감치 두고 보면, 현실에 기초한, 자기 안위를 우선하는 말이다. 기드온 입장에서는 비아냥일 테고. 가까이 다가가 본다면, 작은 읍성 사람으로 양쪽에 끼여서 오도 가도 못하는 불안이 읽힌다. 확실한 물증만 있다면 최대한 도울 테지만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하고, 증거를 요구한 건 누구던가? 기드온. 구체적 물증과 엄청나게 누적된 확증이 있은 다음에야 행동한 것은 기드온이었다. 성경에 이토록 많은 증거를 요구하고 받은 인물이 있던가? 기드온뿐. 그랬던 그가 증거 부족과 현실에 입각한 불안을 토로한 약자를 가혹하게 보복하였다. 숙곳과 브누엘의 대답은 기드온이 하나님에게 했던 대답과 같았다. 자기랑 똑같은 놈을 만나니, 자기 진상 보니 역겹다. 내 모습 보기 이렇게 힘들다. (삿 8:8)
11/16
여호와를 위하여 기드온을 위하여
여호와를 위하여 마침내 기드온이 일어섰다. 끝도 없이 의심하고 증거를 요구하더니 미디안 진가에서 적병의 해몽을 듣고 자신감을 갖는다. 미디안은 비몽사몽 중 큰 함성과 어지러운 불빛, 칠흑 같은 어둠에 아군과 적군의 피아식별이 불가하니 아무나 마구 찔러대며 달아나기 급급하다. 돌려보냈던 병사와 흩어진 지파를 규합하여 전략적 요충지에 배치하여 퇴각하는 적을 궤멸적 수준으로 몰아간다. 기드온의 소심함이 신중함과 용의주도함으로 빛을 발한다.
헌데, 말과 군호가 특이하다. 나를 본받으라, 나를 따르라? 기드온을 위하라? 기드온의 칼이다? 이건 그가 할 말 아니다. 대장군이 선두에 서고 그의 이름 환호하는 것이 대수이랴만 이 전쟁의 특수성은 기드온처럼 의심하게 만든다. 여호와의 전쟁이다. 인간의 전쟁이 아니다. 홍해에서처럼, 인간은 가만히 있어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보고 따르면 그만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이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전쟁을 자신의 전쟁으로 뒤바꾸었다.
원 플러스 원이다. 하나님 더하기 기드온이다. 하나님과 기드온이 동급이다. 점차 하나님은 소거되고 기드온이 전면에 등장한다. 입으로 왕이신 하나님, 몸으로는 내가 왕이다. 유사 왕 노릇 하다 아들 인생 망쳤다. 이스라엘을 타락으로 이끌었다. 급기야 하나님도 내 말 들어, 하나님도 나한테 까불면 죽어, 라는 미친 소리 지껄인다. 날마다 외칠 군호는 이것이다. 자, 우리 모두 힘껏 소리 질러 보자. 오직 여호와를 위하여! 한 번 더. 한 번 더. 너는 빼고. (삿 7:18)
11/15
아직도 많으니
하나님과 기드온, 천상에서 나눈 가상 대화. 主: 기독교인들이 너무 많다. 기드온: 남한 5천만 중 최대 1천만인데 많다니요. 主: 제힘으로 성장, 부흥했다고 으스대니 줄여야겠다. 기드온: 어떻게요? 主: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 지고 따르겠다고 고백하지 못하는 자는 다 떠나라 해라. 기드온: 그랬더니 7백만이 떠나고 3백만 남았습니다. 이 정도면 해 볼 만합니다. 主: 아니다. 아직도 많아. 기드온: 더 줄인다니요. 그 숫자로는 아무 일 못 합니다.
主: 나의 싸움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니란다. 너의 힘도 아니다. 기드온: 어떻게 줄일 참인지요? 主: 골방에서 기도하는지, 주야로 성경 묵상하는지, 번 돈으로 구제하는지, 가족과 이웃에게 예수를 살고 있는지 물어보렴. 기드온: 그러면 누가 남겠습니까. 모두 떠날 겁니다. 主: 내가 원하는 바다. 내 길은 좁은 길이 아니더냐. 기드온: 3만 2천 중 1%도 안 되는 3백 명 남더니 천만 중 1%인 10만 명이 남았나이다. 완전히 망했습니다. 主: 이제 살 것이다.
수는 힘이다. 또한 돈이다. 수가 많으면 승산도, 영향력도 크다. 적은 메뚜기 떼와 같고 모래알처럼 많은데, 하나님은 너무 많다고 죄다 돌려보내고 3백 명만 남겨둔다. 지금껏 한 일이란, 쪽수로 이익 관철하고, 상석 차지하고, 남 무시하면서 나 무시하지 말라고 광장에서 아우성치기. 그들을 싹 다 골라낸다. 하나님은 사람 통해 일하지만, 사람 수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기독교인 수가 줄어든다고 다들 걱정이 많다. 그러나 아직도 많다. (삿 7:4)
11/14
바알 제단 허물고
우리의 쫄보 기드온이 결국 해낸다. 물론 즉각 순종한 건 아니다. 다음 날, 남의 이목 무서워 환한 대낮이 아니라 어둔 밤을 틈타 바알 신상을 부순다. 고대에서 신전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걸 감추랴. 때마다 시마다 들러 정상을 바치는 곳인데 금세 들통난다. 모두들 몽둥이며 짱돌 들고 쳐들어와서 때려죽일 기세다. 내가 복 빌던, 내게 복 주던 바알 제단 헐고, 아세라 신상 찍어낸 놈은 죽어 마땅하다. 기드온은 우상을 없애고, 사람들은 기드온을 없애려 하고.
기드온의 이방 신상을 박살 낸 것에서 두 가지를 주목하게 된다. 하나는 아버지의 소유물이라는 점이다. 이스라엘에서 장로요 유지인 사람의 집안에 버젓이 신전과 신상이 있었다. 그것이 아버지의 권력이고 명예이고, 노다지로 벌어들인 돈의 원천이었으리라. 아비 목에 칼을 겨눈 것과 진배없다. 아까워도 어쩌랴. 아들 살려야지. 그제야 정신 차린 요아스의 언변과 권위로 사건은 무마된다. 아들도 살리고, 신앙도 살리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의 실상이다.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는 모습이 퍽 자연스럽다. 하나님과 풍요를 동시에 누린다면 죽어도 좋다. 돈 주고, 돈 불린다면 어떤 신도 웰컴 투 마이 하우스! 그거 건들면 아비에셀 사람처럼 들고일어난다. 그 힘으로 남의 종교와 재산 축내고 신앙인 척 호들갑 떤다. 권위 있는 유력자의 신앙을 부수라. 내 공동체의 우상을 허물라. 나는 내 안의 우상을 부수는 기드온이냐, 기드온 때려잡는 아비에셀 사람이냐. (삿 6:25)
11/13
힘센 장사야
겁 많은 기드온이 포도즙 짜는 구덩이에 밀을 넣고 까부르고 있다. 미디안의 위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는 사람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용기를 북돋는 말을 해도, 이리저리 내빼기 바쁘고, 핑계 대기 바쁘다. 다박다박 말대꾸는 잘한다. 이 나라가 이 지경 되도록 뭐하셨느냐고, 지나간 출애굽 이야기가 지금 무슨 소용 있냐며 드세게 코너로 몬다. 그가 누구든지 잡아먹을 기세다. 왜 하나님은 기드온더러 힘이 퍽 센 용사라고 했을까? 뭘 보고?
사사기에서 기드온은 소심하면서도 대범하다. 겸손한 듯 교만하다. 왕좌를 거절하면서도 권력은 탐한다. 엉큼한 이중적 인간의 전형이다. 끝없이 증거를 요구하는 의심 많고 합리적 증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영락없는 현대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동행 약속은 그의 인간적 자질과 무관하다는 해석도 있지만, 그렇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이 또 있으며, 세고 센 사람 중에 왜 기드온인가? 왜 기드온은 힘이 센가?
따지는 능력이다. 그는 현실이 불만족스럽다. 기드온은 동시대인의 보편적 물음을 대변했고, 질문하지 않는 시대 중 유독 그만이 캐물었다. 더 나아가 대드는 태도이다. 설사 하나님의 예언자라도 질문하는 거칠고 거센 결기가 보인다. 아무도 묻지 않는 시대에 묻는다는 것만으로도 용사다. 진정한 힘은 현실에 대한 불만을 품고 왜 이따위냐고, 이러면 안 되지 않느냐는 물음에서 시작한다. 묻고 따지기를 멈추지 않는 그대의 이름은 힘센 용사! (삿 6:12)
네가 해라
기드온은 하나님을 큰 소리로 꾸짖는다. 바락바락 대든다. 둘의 대화를 들어볼까. 하나님이 우릴 버렸어요. 너희가 버렸다. 내가 이스라엘을 구원한다고요? 구원했다. 집안 배경이 안 좋아요. 아버지는 지역 유지이고, 기드온의 말 한마디에 위험한 일도 수행하는 사내종만 10명이다. 집에서 힘없는 막내예요. 다윗도 막내였다. 다윗은 아버지 사랑을 받지 못한 막내라면, 기드온은 아버지가 지켜주는 아들이다. 또 있니? “….” “네가 해라.”
불평의 진실성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이 하나 있다. “네가 해라” 그 한마디만 던지면 된다. 십중팔구는 기드온이 된다. 남이 하지 않는다고 열렬히 비판하던 그는 돌변한다. 왜 자신이 하지 못하는가를 열변을 토한다. 그러고는 슬슬 피한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꽁무니를 뺀다. 저 여자를 돌로 치라며 아우성치던 그 정의롭던 남자들처럼. 불쌍한 여자를 죄인 만들어 자신의 정의로움을 그저 내세우려던 것뿐.
감히 대드는 너, 이러다가 복장 터져 내가 먼저 죽겠다고 하는 너, 그 모든 말은 올곧게 너를 가리킨다. 답은 무엇(what)이 아니라 사람(who)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불평하고 항의하는 그를 사용하신다. 그러니 더 많이 불평하고 항의하라. 아직도 부족하다. 기드온보다 더, 더, 더 억세게 묻고 따져라. 머지않아 진실하게 묻는 자가 들을 대답은 이것이다. 묻는 네가 하라. 네가 대답이다. 질문하는 자가 되고, 대답이 되는 자 되라. (삿 6:14)
11/12
울부짖을 때
울고불고 난리다. 여기저기 훌쩍거리고 끌어안고 서럽게 운다. 통곡이 아니다. 흐느낌이다. 소리 없는 눈물이다. 7년 동안 미디안에게 눌려 살았다. 펄펄 살아야 할 기가 죽었으니 울 힘도, 기력도 없다. 천사가 나타나 혼을 낸다. 하지 말라는 짓은 골라 하고, 결국 자기 죽을 무덤 파고 사니 그런 거라고. 이집트에서 억압받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건져주었더니 미디안 족속에게 구박과 천대받고 사니, 지금 울고 있는 것은 너희가 아니라 나 야웨다.
울음만큼 미약하고 미력한 것은 없다. 내면의 문제라면 펑펑 울면 시원타. 산에 들어가 소리 지르고 욕 좀 해대면 개운타. 일기장 꺼내 두서없이 마음 가는 대로 끼적이면 생각이 정돈되고 후련타. 갑갑했던 마음이 뻥 뚫린다. 허나, 외부의 문제라면 일시적 해소는 될지언정 해결은 안 된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서라 했다. 미디안이 억압하면 울거나 소리 지르고 글을 쓰기보다는 싸워야 한다. 드라마 명대사로 조언하건대 ‘울기보다 물기부터 하렴.’
엄마 없는 아이는 울지 않는다. 울음을 삼킨다. 울어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업신여김을 받을까 봐 울지 않는다. 외려 센 척한다. 이스라엘이 울부짖었다는 것은 울 곳이 있다는 것, 기댈 곳이 있다는 뜻이다. 울 수 있는 곳, 하나님이 있어 좋다. 나랑 같이 울어주는 하나님이 있어 좋다. 내 잘못을 따박따박 지적을 해대서 싫을 때가 많아도, 사랑 없이 하지 못할 말이고, 진실이라 아플 뿐이다. 그러니 이쁜 내 새끼야, 아프면 먼저 울기부터 하렴. (삿 6:7)
11/11
시스라의 어머니
어머니가 운다. 승전보가 없고, 아들 온다는 기별은 더디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울음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큰 전쟁을 치른 다음에 처리할 일들이 어디 한두 가지랴. 내 아들은 대왕께서 워낙 귀히 여기는지라 집 가는 걸 붙잡고 거나하게 술 한잔하는 거겠지. 돌아와 바짝 나를 안고 입맞춤할 거야. 약탈해 온 비단이며 보석을 한 아름 안길 테고, 지 맘에 드는 예쁜 처녀를 몇 데리고 와 질펀하게 놀 거야. 암, 암만. 내 새끼인데. 내 새끼가 누군데.
말본새가 거식하다. 남의 집 귀한 처자를 호칭하는 단어가 요상하기 그지없다. 패전국의 여성이기로서니 막 부르면 쓰나. 자궁이 뭐냐, 자궁이. 그녀 말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자궁 하나, 자궁 둘.’ 그러니까 사람이 아닌 게다. 인격이 없는 거다, 그녀 눈에는. 그냥 제 자식 놈 성적 노리개 삼아 놀다가 버리면 그만, 시장에 내다 팔면 그만인, 그런 물건인 게다.
입 뗀 아기의 첫 단어는 ‘엄마’다. 80이 되도 엄마 생각하며 운다. 엄마가 ‘어미’가 되곤 한다. 제 자식 건드리면 죽여서라도, 죽어서라도 지키고, 설사 사람 죽여도, 잘 죽였다고 괜찮다고 지지하는 동물적 모성의 여인이 어미다. 헌데, 성서는 도리질이다. 너는 짐승이 아니야, 사람이라고, 신의 모상인데. 그걸 잃으면 짐승이야. 내 자식 땜에 자식 잃고 우는 맘 아는 게 엄마다. 아들 잃고 우는 시스라의 어미 보며, 그렇게 울게 될 어미들을 생각하며 나도 운다. (삿 5:28)
11/10
놈, 놈, 놈
드보라의 노래에는 세 놈이 등장한다. 싸운 놈이다. 한 지파가 위험하면, 함께 싸우자고 나팔 분다. 그러면 하던 일도 죄다 때려치우고 모여든다.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은 건 그때나 지금도 매일반이다. 당연하지 않은 당연한 일을 한 그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 지파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거라’ 흥부 박이 터질지어다.
두 번째는 끼인 놈이다. 두둔하자면 생각이 많다. 생각 없이 사는 시상에서 성찰한다는 것, 좋은 거다. 헌데,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 보고도 생각하는 사람처럼 무릎에 턱 괴고 앉았으면, 못써. 그건 성찰이 아니지. 몸 쓰고, 그건 이문 생각한 거지, 손해 계산한 거지. 돈 쓰는 일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 네 이름은 르우벤. 할까 말까 망설이며 번호 뽑다가 날 샜다. 우물쭈물하며 네 인생 종친다. 네 곁에 아무도 없을 거다, 이 애매모호한 놈들아.
마지막은 빠진 놈이다. 아예 생각조차 없다. 계산기도 필요 없다. 얻을 건 없고 잃을 것은 많다. 동포라 생각하니 짠해도, 저짝 산 중턱 위 사는 거렁뱅이 일에 끼일 이유가 하등 없다. 바닷가 사는 아셀에게는 불똥이 떨어지기에 겁나 멀고, 강 건너 사는 길르앗에게는 강 건너 불구경이다. 가나안 왕들도 거들고, 별들도 나선 싸움에 빠진 너는 접싯물에 코 박을 거고, 필시 물에 빠져…. 넌, 어떤 놈이냐. 네가 부를 노래는 무엇이냐? (삿 5:13-23)
11/9
시스라
이스라엘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무적의 철 병거 900대를 운용하던 대장군이 청동기 낫과 칼 들고 달려든, 당나라 군대로 깔보든 이스라엘에 대패하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제 혼자 살자고 병장기며 병사도 다 버리고 죽어라 뛰었다. 알고 지내던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자 숨차게 달려온 그는 숨겨 달라고, 물 좀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한다. 야엘의 섬세한 살핌에 안심했는지 말투가 명령조다. 장막 어귀에 서 있어, 나 찾거든 나 없다 하고.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더니 시스라가 그 짝이다. 다급하니 숨겨달라고, 목마르니 물 달라고 짐짓 없어 보이는 척하더니, 두 손 모으고 공손히 말하더니 지친 심신 달랠 아늑한 잠자리와 따뜻한 우유 한 잔으로 목 좀 축였겠다, 적의 추격은 따돌린 것 같고, 안전하다 싶으니 말투가 달라진다. 눈빛이 바뀐다. “야, 너. 텐트 입구 거기에 서 있어.” 구걸하는 처지에 장군이랍시고, 수컷이랍시고, 꼴에 가오는.
시스라와 바락을 싸잡아 빈정대는데, 어럽쇼, 둘은 내 거울이다. 목회는 아내 없이 못 하는 일인지라, 나는 바락이고 그녀는 드보라다. 집에서는 똑 부러지게 가족 챙기니 야엘이다. 힘들다고 죽네 사네 하던 그때도, 책 읽고 책 쓰기에 미쳐 사는 요즘도 아내는 언제나 그 자리다. 별일 아닌 일에도 잘 삐지는 나는 바락에 가까운데 시스라처럼 행동하곤 한다. 기현 씨, 간절히 청하노니, 깝치지 마라. 잘 좀 해라. 드보라를 야엘 만들지 말고. 너, 시스라 된다. (삿 4:22)
11/8
드보라
소개 양식이 특이하다. 예전에 우리가 김가네 OO입니다, 라고 했다면, 이스라엘은 누구의 아들 아무개라고 한다. 옷니엘도, 에훗도, 삼갈도 그리했다. 이번에는 다르다. 여자, 아내, 여성 선지자다. 한술 더 떠 여자 사사라 썼다. 이름도 꿀벌, 수컷의 여왕님이시겠다. 12명의 사사 중 홍일점이다. 드보라는 여성이야, 여성이라니까, 왜 귓구멍이 막혔냐, 여성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인 사사기는 지금도 메아리처럼 말씀하신다.
점입가경은 예언자인데도 통치했다는 점이다. 예언자는 다스리지 않는다. 예외가 모세와 사무엘, 그리고 드보라다. 여성이 선민이자 성민을 다스린다. 별 다섯 단 바락 장군에게 명령하고 지시한다. 용맹무쌍한 장군도 드보라 없이 아무 일 못 한다. 아예 하려 들지 않는다. 힘은 세나 쫄보인 바락의 소심함과 드보라의 리더십이 돋보이는 장치를 사사기 저자 하나님은 곳곳에 심어두었다.
여성은 최고 리더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주야로 성경을 공부하고 설파하는 이들은 이 대목을 어험, 한 번 헛기침하며 휙 휙 넘겼나? 드보라 없는 사사기를 읽었나?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그리 용감하누. 하늘의 음성 듣지 않고, 통념에 찌든 내 생각 고수하느라 신선한 공기 한 점 들어갈 틈 없는 머리를 가르는 해머다, 사사기는, 그리고 드보라는. 여자는 안된다고? 바락한테 혼날래? 야엘에게 맞을래? (삿 4:4)
11/7
소를 모는 막대기
딱 한 절이다. 딱 한 사건, 한 행동이다. 하나님 백성의 안위를 위협하는 원수 블레셋 사람 6백 명을 물리친 것이다. 다른 사사들의 업적에 비하면 초라하다. 바로 앞의 사사 에훗은 1만의 정예군을 격파했다. 드보라와 바락, 기드온, 입다의 공적은 또 어떤가. 출신은 한미하기 이를 데 없다. 목동이다. 그의 무기는 허탈한 웃음 짓게 한다. 소모는 막대기. 딱하다.
소모는 막대기는 철병거와 확연하게 대조된다. 궁색하고 궁상맞기 짝이 없다. 고작 그걸로 무얼 한다고, 해 봐야 별수 없지 뭘, 한들 그게 무슨 대수냐고. 그걸로 세상 바뀌지 않아. 철병거 하나 정도 있어야 명함도 내밀고, 업적을 쌓을 첫 주춧돌도 놓고, 시작할 용기라도 애써 내 볼 만한데, 그게 뭐냐. 토끼나 잡고, 엎드려 뻗친 엉덩이나 두들길 양이라면 모를까, 무슨 소용 있나, 소모는 막대기.
모세도 볼품없는 지팡이로 홍해를 갈랐고, 다윗은 지천으로 널린 돌멩이로 골리앗을 부쉈다. 예수는 나무 위에 매달려 죽어 온 세상 구원했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이유를 조리 있게 말하고, 내 가진 것 없다고 푸념하지 마라. 삼갈은 작대기 하나로 싸웠다. 홀로 6백 명을 상대했다. 네 말을 듣고 소가 웃고, 네 가진 것 보고 막대기가 열불 나서 네 엉덩짝을 딱 한 대 후려갈길 것이다. (삿 3:31)
그도
그에 관한 기술은 짧다. 꼴랑 한 절이다. 별로 한 게 없는 거다. 역사가의 시선으로 볼 때, 기록할 만한 대단찮은 업적이 없다. 그래서 겨우 한 구절이다. 어지간해야 써 주지. 게다가 집안도 봐줄 게 없다. 목동이니 필시 가난했고, 아비의 이름이 전쟁의 여신 아낫과 같은 것을 보면, 이교도요 이방인일 공산이 크다. 다문화 출신이고 이주민일 터. 아웃사이더, 마이너리티의 지존이다. 성경 기록자의 시선은 하나님의 관점이다. 그분이 말씀하신다.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
그도, 라는 말에서, 인칭대명사 ‘그’에 따라붙은 조사 ‘도’는 눈 아래 깔고 한 수 접고 보았던 네까짓 것 별 볼 일 있나, 별수 있나 여겼는데 어쭈, 쫌 했네, 의외네, 뭐 이런 시니컬한 평가일 수도 있겠다. 또는 옷니엘과 에훗처럼, 기드온과 입다 만큼 곤고한 사람을 구출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일을 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뜻도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할 건가. 택한 그게 나다. 그게 내 운명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를 기억하고 기록한다. 그도 하나님의 일을 했고, 하나님의 사람이다. 일의 크기가 아니다. 맘 상하고 몸 힘든 딱 한 명 돕는 일은 하나님을 도운 거다. 성전 미문 올라가던 베드로처럼 내 없는 것이 아니라 내 가진 것이면 족하다. 나도 하나님의 사람이고 하나님의 일을 장차 하겠느냐고 아직도 의심이 든다면, 네 마음속 삼갈에게 물어보렴. 그도? 그래 그도! 너도? 그래 너도! 나도? 그럼 나도! (삿 3:31)
11/6
시험하려고
가나안 족속을 모두 몰아내라고 그토록 요구하던 하나님도 변심했나 보다. 남겨두기로 작심한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2:24)이나 그리 말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악행과 함께 그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기록한다. 블레셋의 다섯 도시 국가, 가나안 사람 전부 다, 시돈, 히위 사람. 한구석에 처박아 둔 게 아니다. 도처에 편만하도록 두어서 그들의 무력과 문화 침공에 어찌 대처하나 지켜볼 요량이다.
비단 이때만 그런 게 아니다. 행복하게 오순도순 잘 사는 에덴의 두 남녀를 선악과로 시험하셨고, 금쪽같은 내 새끼와 하나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아브라함을 산꼭대기로 몰았고, 더 이상 경건할 수 없는 욥을 더 이상 흉측할 수 없는 구덩이에 처넣고 마구 흔들었고, 급기야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달아두셨다. 이런 화려한 전력을 가진 우리 하나님이다.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하나님, 조심하라.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는 테스트가 있다. 뒤집어엎는 거다. 그러면 밑바닥이 드러난다. 맑은지, 탁한지. 마실 수 있는지, 없는지. 맹자께서 하늘이 사람을 쓸 때는, 주리고 하는 일마다 안 되도록 흔들어 본 연후라 이르셨다. 아무 잘못 없다 하지 마라. 없지 않다. 큰 사람도, 큰일도 원치 않는다, 별일 없이 살겠다고 항변하지 마라. 그런다고 있던 고난 없어진다더냐. 시험은 숙명이다. 너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고난 속에 증명하라. (삿 3:1)
11/5
저버리고
유명한 사사기 사이클이다. 3단계로 말하면, 타락–심판–구원, 4단계는 타락-심판–호소–구원이다. 한 단계 더 보태면, 타락–심판–호소–사사–구원이다. 타락이란 종교적 배교와 도덕적 부패를 동시에 이르는 말이다. 이러기를 한두 번도 아니고 최대 12번, 또는 6번이다. 한두 해가 아니다. 갑자가 다섯 번 이상 돌았다. 그만할 때도 되었는데, 개소도 아는 것을 머리 검은 것들은 그칠 줄 모른다.
내가 하나님이었으면 끝을 내도 벌써 끝냈을 텐데, 착한 하나님은 언제나 ‘그래도! 그래도!’를,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를 주문처럼 왼다. 하나님을 저버리는 이스라엘의 악함과 뻔뻔함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약을 바짝 올리는 의리 없는 그들을 끝끝내 저버리지 못하고, 사랑에 모든 것을 걸고, 언약에 당신을 꽉 붙들어 맨 하나님의 착각도 유분수지. 하나님이 되어서 계속 속으실까. 어휴. 불쌍타.
동아시아 전통에서 가장 나쁜 인간은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화상이다. 좋은 것은 좋은 것으로, 나쁜 것은 나쁜 것으로 갚을 줄 알아야 사람이다. 해서, 주군을 배신한 자는 다시 쓰지 않는다. 한 번 배신한 자가 두 번은 못 하랴.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는 더 쉽다. 허구한 날 저버리면서도 저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못된 심보의 나는, 그분이 경이롭고, 안쓰럽고, 그저 고맙다. 난 버려도 날 안 버려서. 내가 또 저버리더라도. (삿 2:13)
11/4
눈으로 직접 본
호되게 호통을 친다. 불러 보낼 사람 없어 하나님은 천사를 직접 보내셨다. 만든 날부터 부동자세인 무용한 우상 섬기고, 우상 기준 삼아 사는 너희는 그것에 사로잡힌다는 전갈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여호수아가 살아 있을 때는, 그와 함께 한 자들이 죽기 전까지는 그러질 않았다. 본 자들이 사라지자 볼 게 없고, 본 것이 없으니 보여줄 게 없고, 서로 본 게 없으니 개판이 된 거다.
우리 시대는 일만 스승은커녕 한 스승 만나기도 어렵다. 돌고 도는 악순환이다. 스승이 없으니 제자가 없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기준과 원칙도, 이야기가 없다. 마침내 하나님도, 하나님이 하신 일도 망각하고, 대신 희망은 사라지고 욕망만 부푼다. 가나안처럼 잘 먹고 잘 살면 장땡이다. 그럴 바에는 풍요로운 땅, 애굽에서 왜 탈출했니? 아무튼, 보여주지 못한 걸까, 보고도 못 본 걸까?
방법이 아주 없지 않다. 나 역시 아비 없이 자란, 본 데 없는 자식이었으므로 잘 살기 위해서는 무언가 보아야 했다. 내가 택한 방법은 평전과 한 저자의 책을 죄다 읽는 것이었다. 직접 보지 못해 아쉬워도, 본 게 없지 않다. 본 대로 살지 못해 부끄럽다. 아예 안 본 것보다는 낫다. 그랬더라면 단언하건대 나는 망했다. 큰 바위 얼굴을 날마다 본 자가 그 얼굴을 닮았다. 나는 오늘도 큰 바위 얼굴인 책을 본다. (삿 2:7)
11/3
또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유력한 유다 지파가 미완의 성공에 그치더니 다들 그 전철을 밟는다. 요셉 가문의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그 외의 스불론, 아셀, 납달리, 단 지파에 이르기까지 죄다 실패한다. 상황은 갈수록 나쁘다. 처음에는 철병거 핑계 대더니, 강제 노역으로 부려 먹으려고 남겨둔다. 단 지파는 오히려 포위되는 형국이다. 후에는 멀리 북쪽으로 이주한다. 피해 달아난 거다. 쫓아내지 못하고 쫓겨났다.
이 현상을 설명하려고 태어난 단어가 도미노 아니면 깨진 유리창 이론일 것이다. 하나가 무너지니까 연쇄적으로 연결된 모든 것이 우르르 내려앉는다. 한 놈이 쓰레기를 버리니 이놈 저놈 덩달아 던져 쓰레기 천지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꼴이다. 12지파 내에서 세력도, 무력도 단연 최강인 유다 지파가 끝까지 도전하지 못하고 어설피 물러서자 나머지 지파도 속절없이 허물어진다.
인생은 역설이다. 너는 내가 아니고 나는 네가 아니다. 내가 잘하면 내가 잘한 것이지 너가 잘한 것은 아니다. 반대도 진실이다. 내가 너고, 너가 내다. 너 하나 잘되면 그걸 본받는 이들이 따르니 너 하나 잘한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러니, 잘 살아야 한다. 아니, 너라도 잘살아라. 네가 잘살아야 남도 잘 산다. 네가 못하면 남도 못 한다. 주변을 보라. 너 때문이냐. 너 덕분이냐. (삿 1:22-36)
11/2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호수아가 남긴 과제를 완수하고자 제일 먼저 출격한 것은 유다 지파이었다. 형제인 시므온 지파와 연대하여 승승장구한다. 아도니베섹을 제거하고, 헤브론과 네게브를 복속시킨다. 갈렙은 아낙 자손, 세새와 아히만, 달매를 무찌르고, 옷니엘은 드빌을 점령하고, 악사와 결혼한다. 파죽지세로 달리던 그들은 철병거를 가진 저지대 주민과의 싸움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해야 할 일, 하지 못하고 있다.
연승 행진을 가로막은 것은 표면적으로 철병거다. 청동기 문명의 이스라엘의 구리 무기와 저들의 철기 무기가 맞상대가 될 리 없다. 게다가 천하무적이다. 말이 끄는 강철로 만든 수레에 달려들어도 죽어 나가는 것은 우리 편이다. 화염병으로 탱크 잡기이고, 소총으로 전투기를 격추하기다.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 지리적 이점을 가진 이들과 전투는 예측 불가가 아니라 승리 불가이었을 터.
드보라는 철병거와 승리했다. 힘에 부쳐서, 힘이 없어서 행하지 못함도 아니다. 해 보지도 않고 지레 포기함이다. 처음부터 나는 못 할 거라고 단정하고 선을 그은 탓이다. 싸워 봐야 백전백패야라는 패배 의식을 자신에게 주입한다. 하나님은 안 믿고, 난 못한다는 믿음은 강하다. 스스로 한계짓고 그 안에 갇혔다. 너의 적은 너다. 네 안의 적을 쫓아내지 못하면, 네 밖의 적도 쫓아내지 못하리니, 해 보지도 않는 너, 하려고도 않는 너, 쭉 고생 쫌 하겠다. (삿 1:19)
11/1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
여호수아가 죽었다. 모세의 지도력을 승계하고, 그가 끝내 이루지 못한 가나안 정복을 실현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한 채, 그가 죽었다. 모세는 임종 전에 확실한 후계자를 세웠으나 여호수아는 그렇지 못했다. 그가 준비를 못 시킨 것인지, 리더 깜냥이 없어서인지, 자기들끼리 상호 견제하느라 옹립에 실패했든지 간에, 이스라엘은 집단지도체제가 되었다. 차세대 지도자 없이 위대한 여호수아가 죽었다.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체제는 지파 연맹체이다. 하나님만이 왕이기에 특정인이 왕이 될 수 없다는 신학적 이유와 실질적 리더의 부재라는 현실적 이유, 토론과 합의에 따른 공동체 운영이라는 이상적 이유가 맞물린 까닭이다. 이는 일시적 현상이기 쉽다. 알렉산더 사후, 시저 사후, 레닌 사후의 집단체제가 내전과 숙청의 과정을 거쳤던 것과 흡사하다. 여호수아 없는 이스라엘, 서로 살릴까, 죽일까?
“선생님은 3, 40대에 한 시대의 담론과 운동을 이끄셨는데, 저희는 그러질 못하고 얹혀사는 듯해서 부끄럽습니다.” “나를 그리 높게 평가해 주어서 고맙지만,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그때는 가능했어요. 허허벌판이었으니. 조심스레 비유하면, 그때가 자이언트가 요구되었다면, 지금은 난쟁이의 때입니다. 서로 협력하고 연대해야 할 거예요.” 나와 손봉호 선생님의 우문현답이다. 거인 어깨 위에 올라간 난쟁이가 될지, 난쟁이들의 난장판이 될지. 여호수아가 죽었다. (삿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