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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 주 선생 묘지명 병서 〔愼齋周先生墓誌銘 幷序〕
신재(愼齋) 주 선생(周先生)은 휘는 세붕(世鵬), 자는 경유(景遊),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고조의 휘는 유(瑜)이니 고려 말에 진사가 되었고 합천(陜川)에 은거하였다. 증조의 휘는 상빈(尙彬)이니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조부의 휘는 장손(長孫)이니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지내고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부친의 휘는 문보(文俌)이니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만년에 외씨(外氏)를 따라 칠원(漆原)으로 이주하였다. 모친 정부인(貞夫人) 창원 황씨(昌原黃氏)는 부호군(副護軍) 근중(謹中)의 따님이다. 홍치(弘治) 을묘년(1495, 연산군1) 10월 25일에 선생은 합천의 천곡리(泉谷里)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에 《소학(小學)》을 깨우쳤다. 그 이듬해에 황씨가 병에 걸려 오래도록 낫지 않으니 선생이 손수 목욕시켜 드리고 기름을 바르며 머리를 빗겨 머릿니를 제거하니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열 살에 사서(四書)를 두루 읽었고 말을 하면 번번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자라서는 우뚝이 성현(聖賢)의 사업으로써 스스로 기약하였다. 무릇 성리설(性理說)을 입으로 외고 손으로 베끼며 흠뻑 무젖어 넉넉히 노닐었으니, 〈중용음(中庸吟)〉과 〈존양부(存養賦)〉에서 그 조숙한 조예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경진년(1520, 중종15)에 부친께서 군직(軍職)으로 국경의 수비를 어기게 되자 선생이 순병사(巡兵使)에게 극력 호소하여 마침내 무사하였다.
임오년(1522)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니 곧 우리 중종대왕 17년의 일이었다. 이해 겨울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
갑신년(1524)에 부정자(副正字)로서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선임되었다.
병술년(1526)에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로 옮겼고 〈수성잠(守成箴)〉을 지어 올렸다. 얼마 후에 저작랑(著作郞)에 전임되었다.
정해년(1527)에 박사로서 수찬(修撰)에 승진하였다. 겨울에 천둥이 치자 옛 일을 상고하여 올리라는 하명이 계시므로 〈시월편(十月篇)〉을 써서 올렸다. 당시에 김안로(金安老)가 정권을 잡았고 경빈 박씨(敬嬪朴氏)가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하여 체차되어 군직에 회부되었다.
무자년(1528)에 수찬으로 복직하였는데 병으로 면직, 공조 좌랑이 되었다. 〈이상잠(履霜箴)〉을 지어 올렸다.
기축년(1529)에 병조 좌랑으로 옮겼다가 외직으로 나가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가 되었다.
경인년(1530)에 소환되어 전직에 복귀하였는데 숙배(肅拜)도 드리기 전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이 되었다. 이때 사간원에서 막 김안로의 죄를 품계(稟啓)하였는데 임금의 윤허를 얻지 못하자 대사간인 심언광(沈彦光)이 정계(停啓)하려고 하였다. 선생이 불가함을 말하면서 반대하니 심언광이 다른 일로 탄핵하여 선생을 파면하였다. 그러고는 도리어 편지를 보내와서 말하기를,
“세 번 파면되어도 성내는 기색이 없다고 하더라.”
하였다. 선생이 이에 답장을 보내어,
“공부한 지 30년에 도리어 권신에게 아부하는 대열에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성나는 일이다.”
하니, 심언광이 몹시 서운하게 여겼다.
임진년(1532, 중종27)에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충청도 도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겨울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몸이 상하여 수척해지고 머리털이 희어졌다. 상을 벗고는 다시 전적이 되었으며 중학 교수(中學敎授)를 겸임하였다.
병신년(1536)에 가벼운 잘못으로 파면을 당하였다. 그 이듬해에 김안로의 세력이 더욱 거세지자 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으로 있다가 걸양(乞養)을 이유로 곤양 군수(昆陽郡守)가 되었다. 고향〔桑梓〕과 가까운 고을을 다스리면서도 사사로운 청탁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정치가 물처럼 맑았다. 그 이듬해 여름에 이웃 고을에서 남형(濫刑)한 사실을 추검하였는데 보고서에 차이가 있어 파직되었다. 얼마 후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나이가 시쇠(始衰)에 가까웠는데도 거친 밥〔疎食〕을 먹으며 여막(廬幕)에서 살기를 앞서의 부친상 때와 같이 하였다.
신축년(1541, 중종36)에 전적과 공조 좌랑에 복관되었고 승문원 교리에 제수되었다. 가족들을 서울로 데려왔는데, 처소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위(神位)를 사당처럼 차려 놓고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살피며, 나고 들 때에 반드시 고하고, 새로운 물건이 생기면 반드시 천신(薦新)하였다. 이해 여름에 예빈시 정(禮賓寺正)을 거쳐 풍기 군수(豐基郡守)에 제수되었다. 고을과 마을에 고시(告示)하여 오교(五敎 오륜(五倫))의 도리를 보이고, 《소학(小學)》과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배포하여 교육하였다.
이듬해 봄에 문묘(文廟)를 새로 지었다. 또 죽계(竹溪) 곁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워서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ㆍ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ㆍ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를 제향하고, 책을 소장하고 학전(學田)을 갖추어 영재들을 교육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서원의 시작인데 《죽계지(竹溪誌)》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해에 마침 큰 기근이 들었다. 미음을 끓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였는데 반백(班白) 이상의 노인들은 양식을 달리하여 구휼하였다. 그러자 군에서 기맥(岐麥)이 나왔다. 정민공(貞愍公) 온계(溫溪) 이해(李瀣) 공이 재상 어사(災傷御史)로 내려왔다가 그 사실을 아뢰니 특별히 한 자급(資級)을 올려 주셨다.
갑진년(1544, 중종39) 가을 소백산(小白山) 국망봉(國望峯)에 올라가서 서쪽을 향하여 네 번 절을 올리고 시 한 수를 읊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얼마 후 중종대왕께서 승하하셨으니, 기미를 미리 안 것이다.
을사년(1545, 인종1)에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니 제술관(製述官)에 선임되었는데 먼저 정릉(靖陵)에 나아가 곡하고 참배하였다. 겨울에 사성(司成)이 되었다.
병오년(1546, 명종1)에 군자감 정에 제수되었다. 중종과 인종 양조(兩朝)의 실록을 수찬(修撰)하는 데에 참여하고 얼마 후에 응교에 임명되었다가 전한(典翰)으로 옮겼다. 얼마 되지 않아서 직제학으로 옮겼고 부제학에 승진하였다. 매양 진강(進講)할 때에는 성학(聖學)을 열어서 이끌어 주었는데, 천리와 인욕, 군자와 소인, 진퇴(進退)와 소장(消長)의 기미(幾微)를 더욱 간절하게 말씀드렸다. 하루는 시강을 마치고 조용히 기묘년(1519, 중종14)에 화를 당한 여러 현인들의 억울함을 말씀드렸더니 임금께서 자세를 바로잡으셨다. 이때 이기(李芑)가 무고(誣告)하여 큰 옥사를 일으키고 국정을 전단(專斷)하니 선생은 《심도(心圖)》를 올려서 성인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好生之德〕을 극력 말씀드렸다.
정미년(1547, 명종2)에 이기 등이 인종은 임금 자리에 1년도 있지 못했다고 하여 문소전(文昭殿)에 부묘(祔廟)하지 않으려고 하니, 선생이 동료들과 차자(箚子)를 올려 간쟁(諫爭)하였다. 사복시 정(司僕寺正) 김천우(金天宇)가 어전에 들어가 윤대(輪對)할 때에 중국의 말을 수입하자고 청하니 선생이 또 소(疏)를 올려 배척하였다. 후원(喉院)에 들어가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고 1년 동안에 우승지와 좌승지에 누천(累遷)하였다.
기유년(1549)에 도승지를 거쳐 가선대부에 올랐다.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간원(諫院)에서 주세붕은 학문이 정밀하고 굉박(宏博)하여 사표(師表)의 직임을 맡을 만하므로 마땅히 경연에 두어야지 지방에 보내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아뢰니, 임금께서 말씀하기를 “서도(西道 황해도)의 백성들이 곤궁하므로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라고 하셨다. 부서를 점검하고 관리들을 단속하며 형벌을 줄이고 세금을 가볍게 하고 농사를 권장하고 효제(孝悌)를 강조하여 풍속의 교화를 돈독히 하였다.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의 사당을 새로 짓고 또 그 앞에 서원을 세워서 학문을 장려하는 방법을 백운동과 같이 하였다.
경술년(1550) 가을에 내직으로 들어와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얼마 후에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신해년(1551, 명종6)에 〈벽불소(闢佛疏)〉를 올렸다. 이때 요승 보우(普雨)가 연산군 때 이미 폐지된 양종(兩宗 선종과 교종)을 복원하자고 청하였기 때문이다. 체차되어 첨지중추부사 겸 동지성균관사로 옮겼다가 다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임자년(1552)에 하명하여 청렴하고 근실하며 덕행이 있는 자 19명을 선발하여 경회루에서 잔치를 베푸셨는데, 선생과 동고(東皐) 이 충정공(李忠正公 이준경(李浚慶)), 퇴계(退溪) 이 문순공(李文純公)이 함께 거기에 들어갔다. 동지의금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힘써 사양하며 퇴직하기를 청하니 임금께서 윤허하지 않으면서 말씀하기를,
“매일 출근은 못 한다고 하더라도 가끔씩 의금부에 나가 본다면 무슨 광폐(曠廢)가 있겠는가.”
하셨다. 끝내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계축년(1553)에 동지경연사에 임명되어 병을 무릅쓰고 입시하여 진강하였다. 한마디 말로써 임금의 마음을 깨우치고자 하였고, 체차를 허락받지 못하여 또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겨울에 다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갑인년(1554)에 병이 더욱 심해져서 사직을 청하니 3월에 비로소 어명으로 동지경연사와 동지성균관사에서 체차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이미 병이 너무 위중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7월 2일에 서울의 집에서 돌아가셨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시며 부조를 후하게 내리고 상여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는 여비를 지급하도록 하셨다. 이해 12월에 유언에 따라 선영에 안장하니, 곧 칠원의 저연(猪淵) 묘향(卯向)의 언덕이다.
아아, 선생은 풍채가 호걸스럽고 국량이 컸으며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릴 때 집을 떠나 스승에게서 학업을 배울 때의 일이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홀로 계신 것을 생각하고 밤을 틈타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큰 호랑이가 길을 막고 있으므로 선생이 꾸짖으니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가 버렸다. 집에 돌아와서는 이 일을 숨기고 어머니가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부친의 시묘살이를 할 때에는 집에서 30리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도 사흘에 한 번씩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기르던 개가 따라다녔는데 고기를 던져 주어도 먹지 않았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대변이 단가 쓴가를 맛보았고 밤이면 자신이 대신하게 해 달라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소에 쓸 석재를 배로 실어 오는데 돌이 무거워서 배가 강바닥에 붙어 버렸다. 밤새도록 소리 내어 울었더니 그 이튿날 물이 불어나서 배가 저절로 떠올랐다. 하늘을 감동시키는 효성이 이와 같았다.
어려서부터 의지를 굳게 하여 학문에 힘썼는데,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단정히 앉아서 종일토록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옛것을 좋아하여 독실하게 믿었고 과감하게 힘써 실행하였으니, 일상 용품에는 명문(銘文)을 짓고 벽에는 경계하는 말을 붙였다. 옛사람들이 남긴 교훈으로 가사(歌詞)를 지어서 날마다 읊조리고 외웠는데 늙을 때까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자신을 다스린 엄격함이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도의 큰 근원과 학문의 요체를 환히 깨달아서 문장에 표현되어 나온 것이 기이하고 위대하면서도 웅장하고 물 흐르듯 하였으니 참되고 순수하여 인의도덕(仁義道德)의 정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으로써 임금을 섬김에 세 임금에게 시강하여 그 임금을 반드시 요순으로 만들고자 했으며, 이것을 끌어다가 도를 펼치매 환두(驩兜)와 공공(共工) 같은 간신배가 비록 해치고 이간질하는 일이 있었으나 임금과 신하가 협력하여 화목하게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저절로 이루어 내었다. 이것으로써 백성들을 다스리매 반드시 그 지방의 선사(先師)에게 석전(釋奠)을 드리고 삼대(三代) 때의 교육 제도를 마을과 동리에서 시작하여 밝혀서 신라와 고려의 비루한 습속을 씻어 내었으니, 백록동에서 옛 흔적을 찾아내어 서원을 다시 세운 것과 견주어 본다면 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또 회헌(晦軒 안향(安珦))의 경(敬)을 위주로 하는 학문이 회암(晦庵)의 학문에서 얻은 것이라 여겨서 마침내 ‘경(敬)’ 한 글자를 뽑아내어 회암이 〈선천도(先天圖)〉를 만든 예에 따라 절벽에 새겨서 천고에 ‘경’이 우리 유학의 종지(宗旨)임을 보였다. 이것으로 회헌은 회암의 독실한 계승자이고 선생은 또 회헌의 독실한 계승자임을 알 수 있다. 선생이 또 일찍이 《심경(心經)》의 의심나는 곳을 회재(晦齋) 이 문원공(李文元公 이언적(李彦迪)) 선생에게 질문하였다. 당시에는 기묘년(1519, 중종14)에 선비들이 모두 화를 당한 뒤라서 세상에서 모두 이 학문을 꺼렸으므로 문원공께서 비록 우리 유도를 책임지는 중책을 자임하였으나 다만 자옥산(紫玉山)에서 조용히 수양하고 묵묵히 연구하면서 겉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았는데, 선생이 홀로 회재 선생이 우리 유학의 종주가 된다는 것을 알고 질문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처신하는 데〔立身〕에는 반드시 의탁하는 곳이 있고, 재주를 본받아 기르는 데〔方才〕에는 반드시 도달하는 곳이 있다.”라는 말이 있게 하였다. 지위로 본다면 차이가 있어도 나이로 본다면 어깨를 나란히 하여 친구가 될 만한데도 자신을 비우고 도를 구하는 정성이 그 어떠하였던가.
백씨인 세곤(世鵾)이 효성과 우애가 하늘에 사무치고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으나 불행히도 일찍 돌아가시니 선생이 언제나 지극히 애통해 하였다. 그 조카들을 가르칠 때에는 오직 지혜를 열어서 깨우쳐 주는 것이 부족할까 두려워하였고 반드시 유언을 들어서 간곡하게 타일렀으니, 그 글에 드러난 것이 글자마다 눈물짓게 한다.
선한 일을 즐기고 의로운 일을 좋아하여 한계를 두지 않았고, 노인을 보면 반드시 말에서 내리고 상주를 보면 반드시 경의를 표하였다. 후학들을 지도할 때는 반드시 기질(氣質)을 변화시키는 것을 요체로 하여 반복하여 지도해서 오직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무릇 우리 강토 내의 이름난 산과 큰 강물도 선생의 작품으로 평가를 거치면 정채(精采)를 바꾸고 실상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풍악(楓岳 금강산), 천마산(天磨山), 비로봉(毗盧峯), 소백산(小白山), 청량산(淸凉山), 희양산(曦陽山)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성품이 맑고도 깨끗하여 조정에 벼슬한 지 30년에 지위는 경상(卿相)의 반열에 올랐으나, 의복은 빈한한 선비와 같았고 밥상에는 두 가지 고기가 없었으며 좌석에는 담요나 평상이 없었고 마구간에는 좋은 말이 없었다. 봉급이 남으면 모두 일가나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돌아가실 때에는 적은 재물도 비축된 것이 없었으니, 장례 도구는 모두 공사 간의 부조로 충당하였다. 그러므로 조정의 사대부들이 모두 말하기를 “현명하도다!”라고 하였고, 해서(海西) 사람들까지 와서 제사를 드리고 유상(遺像)을 그려서 양근서원(陽根書院)에 봉향하였다. 흥주(興州 순흥(順興))의 문성사(文成祠)에 배향되었으며, 합천에는 도연사(道淵祠)가 세워졌고, 칠원에는 남고사(南皐祠)가 세워졌는데 남고(南皐)는 곧 선생이 학문을 닦던 곳이다. 숙종 병진년(1676, 숙종2)에 덕연(德淵)이라 사액하였고, 그 이듬해에 상신(相臣)들이 의견을 올려 예조 판서에 추증하였으며, 순조 무자년(1828, 순조28)에 문민(文敏)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니, 조정에서 높이고 칭찬한 것과 후학들이 존경하고 보위(保衛)한 것이 유감없다 할 것이다. 저술 가운데 《심도(心圖)》와 《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은 산일(散逸)되었고, 《죽계지(竹溪誌)》와 《무릉고(武陵稿)》는 간행되어 세상에 전한다. 선생의 부인은 진주 하씨(晉州河氏)이니 홍문관 교리 옥(沃)의 따님이다. 묘소가 진주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실전되었다. 계비인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훈도(訓導) 여거(汝居)의 따님으로 선생의 옆에 부묘(祔廟)되어 있다.
두 부인이 모두 자손이 없어서 형의 아들인 박(博)으로 뒤를 이었는데, 박은 홍문관 교리를 지냈으며 호는 구봉(龜峯)이다.
6남 1녀를 두었다. 아들 극창(克昌)과 윤창(胤昌)은 모두 자손이 없다. 익창(益昌)과 필창(必昌)은 임진왜란 때에 모두 의병을 일으켜 진주에서 순절하였으며 그들의 처인 이씨와 김씨도 함께 강물에 투신하여 남편을 따라 죽었다.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는데 역시 모두 자손이 없다. 낙창(樂昌)과 배창(倍昌)은 모두 음보로 참봉에 제수되었다. 딸은 정홍조(鄭弘祚)에게 출가하였다.
낙창의 아들은 진원(震元)이고 그의 아들은 맹헌(孟獻)이고 그의 아들은 재만(再萬)이고 그의 아들은 성우(聖佑)이고 그의 아들은 필문(必文)이고 그의 아들은 기덕(基德)이고 그의 아들은 효철(孝喆)이고 그의 아들은 봉렬(鳳烈)이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지금은 선생의 시대에서 350여 년이 지났다. 시찬(時贊)과 시범(時範)이 집안 어른들의 명을 받들고 와서 나에게 묘지문을 부탁하였다. 아득한 후생이 궁벽한 산골에서 거의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 어찌 감히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으랴.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선생은 우리 선조 문순공(文純公 이황)과 도의로써 서로 사귄 분이니, 백운동에는 공안(公案)이 남아 있고 성균관에는 장고(掌故)가 남아 있으며, 기타 주고받은 글 속에 드러나는 것은 이루 손꼽아 셀 수도 없다. 그래서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에 우리 선조께서 깊이 탄식하며 애석해하셨고 유문(遺文)을 교정하여 간행하도록 하셨다. 애석하게도 그 당시에 묘지문을 요청하지 않고 선생의 명성과 영향이 거의 사라지고 난 지금에 와서 나같이 못나고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요청하니 그 정상이 또한 민망하지 않은가. 끝까지 사양할 명분이 없어서 삼가 가장(家狀)과 미수(眉叟) 허 문정공(許文正公 허목(許穆))이 찬술한 신도비문에 의거하여 짓고, 이어서 명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오호라, 선생이여 / 於乎先生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키고 / 孝而通神
충성이 임금을 바르게 한 것은 / 忠而格君
신라와 고려에도 그러한 사람이 있었고 / 羅麗氏未爲無人
오호라, 선생이여 / 於乎先生
덕이 높고 학문이 넓으며 / 德之崇學之博
문장이 웅장하고 뛰어난 것은 / 文章之雄偉
선생의 당대에도 그러한 사람이 있었네 / 當時亦有其人
최초로 서원을 창설하여 / 最是肇設書院之敎
교육으로써 백성을 교화하고 좋은 풍속을 이룬 것은 / 以化民而成俗
우리 동방 사천 년 역사에 / 吾東四千年
오직 선생 한 분뿐이로다 / 惟先生一人
그 문장과 학덕과 충효가 / 所以文章德學忠孝
이로 말미암아 더욱 빛나니 / 由此而益光
도의를 부르짖어 밝힌 공을 비유하자면 / 擧其倡明之功而比擬之
우리 동방에도 마땅히 광풍제월 같은 주무숙 선생이 있었다고 하겠네 / 吾東亦當曰有光風霽月周茂叔先生
[주1] 시월편(十月篇) : 《시경(詩經)》 〈시월지교(十月之交)〉이다. 주나라 유왕(幽王) 때 간신 황보(皇父) 등이 미인 포사(褒姒)를 끼고 국권을 전용하였는데, 시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자 대부들이 이 시를 지어 유왕을 풍자하였다. 주희의 전(傳)에 “일식과 월식은 비록 일정한 도수가 있으나, 임금이 덕을 닦아 정치를 잘하면……먹을 것도 먹지 아니한다.”라고 하였다.
[주2] 정계(停啓) : 사헌부(司憲府)나 사간원(司諫院)에서 죄인의 성명과 죄명(罪名) 등을 적어 임금에게 올리는 서류에서 죄인의 이름을 삭제하는 일을 말한다.
[주3] 세 번 …… 없다 : 공자의 제자인 자장(子張)이 영윤(令尹) 벼슬에 있는 자문(子文)에 대하여 묻기를 “세 번이나 영윤 벼슬에 올랐는데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고 세 번이나 그 자리에서 파면되었어도 성내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만하면 어떻습니까?” 하니, 공자께서 대답하기를 “진실하다〔忠〕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論語 公冶長》 심언광이 이 말을 빌려 와서 부당하게 파면당했다고 생각되더라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말라는 뜻을 보인 것이다.
[주4] 고향 : 원문의 ‘상재(桑梓)’는 《시경》 〈소변(小弁)〉에 “부모가 심은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공경한다.〔維桑與梓 必恭敬止〕”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부모가 살던 고향을 뜻한다.
[주5] 이웃 …… 파직되었다 : 주세붕은 1538년(중종33)에 진주 목사 한석호(韓碩豪)가 남형(濫刑)하여 고을 사람 강완(姜浣)을 죽게 한 사건을 이웃 고을 수령으로서 추심(推尋)하였는데, 처음에 검시한 내용과 관찰사에게 보고한 보고서 및 피해자 가족에게 발부한 시장의 내용이 다 달라서 한석호를 비호하려 한 것이 아니냐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복검(覆檢)을 한 의령 현감(宜寧縣監) 오겸(吳謙)과 함께 파직당하였다. 《中宗實錄 33年 6月 19日》
[주6] 시쇠(始衰) : 맹자의 “5묘의 택지에 뽕나무를 심으면 나이 50인 자가 비단옷을 입을 수 있으며, 닭과 새끼돼지와 개와 큰 를 때를 잃지 않고 기르면 나이 70인 자가 고기를 먹을 수 있다.”라는 말에 주희가 “50에 쇠하기 시작하여〔始衰〕 비단이 아니면 따뜻하지 아니하니 50이 되지 않으면 비단옷을 입지 못한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孟子集註 梁惠王上》 이때 주세붕은 44세였다.
[주7] 기맥(岐麥) : 한줄기에 두 개의 이삭이 달린 보리를 말한다. 풍년이 들 상서로운 조짐으로 여겼으며, 관리의 탁월한 치적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後漢書 卷31 張堪列傳》
[주8] 정릉(靖陵) : 중종의 능이다.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주9] 문소전(文昭殿) : 조선조 경복궁 내에 별묘(別廟)로 모시던 원묘(原廟)의 하나이다. 원래는 태조와 신의왕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었으나 그 후 차차 ‘제후(諸侯) 오묘(五廟)’라는 일반 사당의 원리에 따라서 태조와 현왕(現王)의 사조(四祖)를 모시는 원묘가 되었다.
[주10] 환두(驩兜)와 공공(共工) : 요 임금 때의 간악한 신하들이다. 순 임금이 즉위하여 이들을 모두 죄주자 천하가 다 복종하였다고 한다. 《書經 舜典》 여기서는 중종 때의 간신들이었던 김안로나 이기 등을 빗댄 표현이다.
[주11] 삼대(三代) …… 제도 : 삼대는 하(夏), 은(殷), 주(周)로 성왕들의 덕치가 행해지던 시대를 말한다. 그 시대에는 25가구가 사는 가(家)에는 숙(塾)이 있고, 500가구가 사는 당(黨)에는 상(庠)이 있고, 1만 2500가구가 사는 술(術)에는 서(序)가 있고, 국도(國都)에는 태학(太學)이 있어 교육 제도가 정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주12] 현명하도다 : 공자가 자신의 제자인 안회를 칭찬하면서 “현명하도다, 안회여! 한 도시락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만 가지고 누추한 거리에서 가난하게 사는 것을 사람들은 모두 싫어하는데 안회는 학문하는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구나. 현명하도다, 안회여!”라고 하였다. 《論語 雍也》 여기서는 조신들이 모두 주세붕의 청렴한 삶을 칭찬한 말로 쓰였다.
[주-13] 광풍제월 …… 선생 : 무숙(茂叔)은 송나라의 대학자인 주돈이(周敦頤)의 자이다. 북송(北宋)의 시인이자 서예가(書藝家)인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를 존경하여 쓴 글에 “그 인품이 매우 고명하고 마음결이 시원하고 깨끗하니 마치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갠 날의 달과 같다.〔其人品甚高 胸懷灑落 如光風霽月〕”라고 하였다. 《宋史 卷427 周敦頤列傳》
愼齋周先生墓誌銘 幷序
愼齋周先生諱世鵬字景遊。系出尙州。高祖諱瑜。麗末中進士。隱于陜川。曾祖諱尙彬贈司僕寺正。祖諱長孫龍驤衛副護軍贈兵曹參議。考諱文俌龍驤衛副司果
贈吏曹參判。晩從外氏移漆原。妣貞夫人昌原黃氏。副護軍謹中女。弘治乙卯十月二十五日。先生生于陜之泉谷里第。六歲通小學。翌年黃氏嬰疾沉綿。先生自沐膏以承髮蝨去之。人皆稱歎。十歲遍讀四書。發語輒驚人。比長卓然以聖賢事業自期。凡性理說。口誦手抄。涵泳優游。中庸吟存養賦。可見其夙詣之一端也。庚辰先公以軍職違防秋。先生力籲于廵兵使。竟得無事。壬午中司馬。卽我中宗十七年也。是冬登別試文科入槐院。甲申以副正字賜暇湖堂。選爲藝文館檢閱。丙戌遷弘文館正字。製進守成箴。俄轉著作。丁亥以博士陞修撰。因冬䨓命考古事。
書進十月篇。時金安老用事。朴嬪有寵也。因遞付軍職。戊子還修撰。以病免爲工曹佐郞。製進履霜箴。己丑移兵曹佐郞。出爲江原道都事。庚寅召復前職。未肅拜。司諫院獻納。時院中方啓安老之罪未蒙允。諫長沈彦光欲停啓。先生曰不可。沈以他事劾罷之。反致書曰三已之無慍色。答曰讀書三十年。反在吮舐之列。是可慍也。沈恨之。壬辰由成均館典籍。爲忠淸道都事不赴。冬丁先公憂。侍墓三年。毁瘠髮白。旣除喪。復爲典籍兼中學敎授。丙申以微譴罷。翌年安老勢焰益張。以奉常寺判官。乞養爲昆陽郡守。治近桑梓。私謁不行。政淸如水。翌夏推檢隣郡濫
刑事有差罷。俄丁內艱。年至始衰。飯䟽居廬一如前喪。辛丑復典籍工曹佐郞。除承文院校理。挈家入京。於所館設考妣位如祠堂。朝夕必省。出入必告。見新物必薦。是夏由禮賓寺正除豐基郡守。牓諭閭里。以示五敎之方。布敎小學三綱行實。翌春新文廟。又就竹溪上。建白雲洞書院。享安文成公裕,文貞公軸,文敬公輔。藏書置田。以育英才。此吾東書院之所由始。事詳竹溪誌。歲適大侵。爲糜粥以濟飢民。班白以上異粮以養之。時郡有歧麥。溫溪李貞愍公瀣以災傷御史上其事。特增一秩。甲辰秋。登小白山國望峯。西向四拜。吟一詩涕遂下。俄中廟賓天。幾微
盖先見也。乙巳天使至。以製述官被召。先詣靖陵哭拜。冬入爲司成。丙午除軍資監正。參修中仁兩朝實錄。俄拜應敎。改典翰。尋遷直提學。陞副提學。每進講。開導聖學。尤懇懇於天理人欲。君子小人進退消長之幾。一日講畢。從容陳己卯諸賢之冤。上爲之動容焉。時李芑誣起大獄。專擅國政。先生進心圖。極言聖人好生之德。丁未芑等以仁宗爲未踰年之君。將不祔文昭殿。先生與同僚陳箚爭之。司僕正金天宇入輪對。請貨唐馬。先生又抗䟽斥之。入喉院爲同副承旨。因遷左右房凡一年。己酉由都承旨陞嘉善。拜戶曹參判。出爲黃海道觀察使。
諫院以爲周世鵬學問精博。可任師表。宜在經幄。不宜遠出。上曰西民困窮。非此人不可。旣按部。飭管下。省刑罰薄賦稅務農桑。申孝悌之義。以敦風敎。新崔文憲公冲祠。又立書院于其前。勸學之方。一如白雲洞。庚戌秋。入爲同中樞。俄拜大司成。辛亥上闢佛䟽。時妖僧普雨請復燕山已廢之兩宗故也。遞移僉中樞兼同成均。又爲同中樞。壬子命選廉謹有德行者十九人。賜宴於慶會樓。先生與東𦤎李忠正公,退溪李文純公與焉。拜同義禁。以疾力辭。請退休。上不許曰縱不能勤仕。時往禁府。有何曠廢。竟辭不就。癸丑拜同經筵。力疾入講。冀一言悟上意。
而不得蒙遞。又爲僉中樞。冬又爲同中樞。甲寅疾益甚。乞骸骨。三月始命遞經筵成均二同知。時則欲歸而病重不可爲也。七月二日。卒于京第。訃聞上震悼。贈賻弔加厚。及歸櫬令道路給費。是年十二月。以治命從葬先兆。卽漆之猪淵卯向原也。於乎。先生風儀魁傑。宇量恢廓。性至孝。兒時受業于外傅。一日念母氏獨處。乘昏歸。有大虎當逕。先生叱之。緩步徐行。及歸秘不令母氏知之。其廬考墓。去家一舍。每三日一省母氏。所畜狗隨行。投與肉不食。母疾嘗糞甜苦。夜則禱天願代。考妣墓治石水運。石重船沉。徹夜號泣。厥明水至船自浮。其感通之誠如此。自少勵
志爲學。鷄鳴而起。盥櫛端坐。對案終日。篤信好古。勇於力行。器皿有銘。墻屋有戒。以古人之訓作歌詞。日令諷誦。至老不怠。其自治之嚴有如是者。故洞見乎道之大原學之體要。其發爲文章。奇偉壯浪而粹然是仁義道德之華也。以之事君則侍講三朝。必欲堯舜其君。引之以當道。驩兜共工雖或惎間。都兪之治固自如也。以之臨民則必釋奠于其地之先師。使三代庠序之敎。肇明於閭巷。以洗羅麗陋俗。其視白鹿之因舊蹟而興復之。不亦難乎哉。又以爲晦軒主敬之學。有得於晦菴。遂表出一敬字。依晦菴先天圖之例。刻之石壁。以示千古。吾學之宗旨。是知晦軒爲
晦菴之純臣。先生又爲晦軒之純臣也。先生又嘗以心經疑旨。質于晦齋李文元先生。時當己卯芟夷之餘。世皆以學爲諱。雖以文元任斯道之重。祇得潛修默究於紫玉山中。不欲表襮。先生獨知其爲斯學之宗而質問之。至有立身必有所託。方寸必有所到之語。以位則有分而以齒則肩隨也。其虛己求道之誠。爲何如也。伯氏世鵾孝友天至。英悟過人。不幸早世。先生恒爲至痛。其敎姪子。惟懼開悟之不足。必擧遺意丁寧告戒。見於筆札者。字字可涕。樂善好義。不設畦畛。見老者必下。有喪者必敬。引進後學。必以變化氣質爲要。反復提撕。惟恐其不成。凡域內名山大川。
一經先生題品。無不換精采而現實相。楓岳,天磨,毗盧,小白,淸凉,曦陽。最其大者也。性澹泊。立朝三十年。位躋列卿。被服若寒士。食不重肉。坐無氊簀。廐無良馬。俸祿之餘。盡周宗族賓友。及身歿家無甔石之儲。喪具取足於公私賻布。朝之士大夫咸曰賢哉。海西人來奠。畫遺像以享陽根院,興州配文成祠,陜有道淵祠,漆有南𦤎祠。南𦤎卽先生藏修之所。肅宗丙辰。賜額曰德淵。其翌年因相臣獻議贈禮曹判書。純祖戊子。贈諡文敏。朝家所以崇奬。後學所以尊衛。可謂無憾矣。所著心圖,東國名臣言行錄逸,竹溪誌,武陵稿行于世。先生內子晉州河氏。弘文校理沃
女。墓在晉州。壬辰亂失傳。廣州安氏訓導汝居女。墓祔。皆无育。以兄子博爲嗣。弘文校理號龜峯。生六男一女。男克昌,胤昌幷无子。益昌,必昌壬辰幷倡義立殣于晉州。其妻李氏金氏同投水以殉。㫌表。亦皆无子。樂昌,倍昌幷蔭除參奉。女適鄭弘祚。樂昌子震元。其子孟獻。其子再萬。其子聖佑。其子必文。其子基德。其子孝喆。其子鳳烈。餘不盡錄。今距先生之世三百五十餘年。時贊,時範以門父老命。來責墓誌於晩燾。藐末後生。方瀕死窮山。何敢承當。仍伏惟先生吾先君文純公道義契也。白雲有公案。成均有掌故。其他見於唱酬之間者。不可僂數。所以先生旣歿。吾先
君深加嗟惜。又爲之表圈遺文。使之鋟行。惜乎。遺誌之請。不在其時。乃於聲響沉寂之後。責之於不肖無狀如晩燾者。其情不亦可憫乎。有不敢終始引分。謹據家狀及眉叟許文正公所撰神道碑而序次之。系以銘。銘曰。
於乎先生。孝而通神。忠而格君。羅麗氏未爲無人。於乎先生。德之崇學之博。文章之䧺偉。當時亦有其人。最是肇設書院之敎。以化民而成俗。吾東四千年。惟先生一人。所以文章德學忠孝。由此而益光。擧其倡明之功而比擬之。吾東亦當曰有光風霽月周茂叔先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