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전원의 여러 가지 흥취를 가지고 범양 이가의 시체를 모방하여 이십사 수를 짓다
[夏日田園雜興效范楊二家體二十四首] 신묘년
봄의 일은 아득하여 따라잡을 수 없어라 春事微茫不可追
푸른 매화 열매 맺고 버들가지 늘어졌는데 靑梅結子柳垂垂
푸른 그늘 창문 깊숙이 등불 그림자 생기니 綠陰窓戶深生暈
정히 선생께서 시문을 고치는 때이로세 正是先生點易時
십순 동안 병상에서 꽃다운 계절 보내고 十旬淹病度芳菲
이제야 남의 부축받아 애써 사립을 나오니 初倩人扶强出屝
괴이하게도 은밀한 향기가 코를 찔러라 怪有密香來觸鼻
들장미꽃이 눈처럼 하얗게 피었네그려 百花如雪野薔薇
단오절 가까운 때에 석류꽃 붉게 피니 石榴紅綻近端陽
일마다 한적하고도 일마다 바쁘구려 事事幽閑事事忙
하늘은 잠시 맑아 주어 누에고치를 말리겠고 天賜暫晴容曬繭
땅에는 봄물이 고여 모내기를 할 만하네 地留春水賴移秧
몹시도 어여쁘던 작약꽃 옛모습은 絶憐紅藥舊時容
붉은 뺨 산산이 부서져 개미둑에 떨어졌네 破碎殘顋落螘封
어찌 밤나무 꽃에 향기를 딸 게 있으랴만 豈有栗花香可採
나무 끝에 주린 벌들이 수없이 엉겼네그려 梢頭無數著飢蜂
누에 친 뒤 뽕나무 가지 모두 텅 비었는데 蠶後桑枝竝蕩然
따낸 자리에 새 잎이 부드럽게 돋아나누나摘餘新葉始柔姸
이제야말로 나에게 있는 힘을 다하여如今竭力輸身分
다시 집안일 돌보아 일 년을 지내리라 再作家私度一年
농부의 집 보리밭 언덕을 따라 내려가나니 / 延緣野屋麥平垣
초가집 마을 하나가 희미하게 보이어라 / 隱約茅茨見一痕
가만히 앉아 석양에 연기 나는 곳 헤어 보니 / 坐數夕陽煙起處
원래 몇 집의 마을인가를 비로소 알겠네 / 始知原是幾家村
마늘에선 수염 나와 하얀 꽃잎을 이루었고 蒜菢生鬚玉瓣成
오이넝쿨 겹친 잎새엔 노란 꽃이 숨어 있네 瓜藤疊葉隱黃英
새끼닭에다 뽕버섯까지 섞어서 끓인다면 筍鷄剩有桑鵝糝
시 모임에 골동갱을 걱정할 것 없구려 詩會無憂骨董羹
삼나무 꼭대기 새로 싹튼 가장 윗부분은 杉頂新抽最上臺
어린 끝이 유약하여 약간 쓸리려 하는데 嫩梢柔弱欲微頹
곧은 표치가 필경은 쇠화살같이 자라서 貞標畢竟如金矢
저 강가의 백 척의 돛대가 되어 가리라 去作江邊百尺桅
누런 송아지 막 나오니 어미 사랑 유달라라 黃犢新生母愛殊
이리저리 뛰고 걸으며 산주로 들어가누나 橫跳豎躍入山廚
모를레라 저렇게도 우아한 본바탕이 不知似許便娟質
어찌하여 후일엔 그 우둔한 것이 되는고 何故他年作笨夫
햇병아리 울음 배워라 어리석은 그 소리 雛鷄學唱大憨生
하늘이 다 밝아서야 비로소 한 번 우는데 恰到天明始一鳴
리듬 있게 잘 울지 못한다고 말들 하지만 縱道喉嚨無曲折
가을에는 절로 넉넉히 가성을 이을 거로세 秋來自足繼家聲
새 새끼 나비를 쫓아 가벼이 살짝 날아라 新雀捎飛趁蝶輕
노란 주둥이 막 검어지고 깃털은 보송보송 蠟咮初黑羽毛成
벌벌 떨어 가련한 태도를 교묘히 지으면서 顫顫巧作哀憐態
어미를 따라 먹여 주기 바라는 정을 펴누나 隨母猶陳望哺情
주(咮) 자는 고시(古詩)에서 평성(平聲)으로 많이 쓰였다.
문 밖의 꾀꼬리는 나를 향해 말을 하는데 戶外黃黧說向吾
온갖 소리 유창하고 각각 다르기도 하여라 百聲流利百聲殊
분명히 소리마다 각각 품은 뜻이 있으련만 分明各有中含意
개갈로를 거듭 만나지 못한 게 애석하구려 惜不重逢介葛盧
집터 자주 옮기는 저 제비 애석하기도 해라 鷰子開基惜屢移
공연히 진흙 가져다 들보와 문미만 더럽히네 謾將泥點汚梁楣
근래엔 풍수설이 온통 풍속을 이루는지라 邇來風水渾成俗
의심컨대 새들도 지사가 있는 모양이로군 疑亦禽中有地師
온 몸뚱이가 새파란 아주 작은 개구리는 綠色通身絶小蛙
갈래진 매화가지에 일생을 단정히 앉았나니 一生端正坐梅叉
제가 감히 높은 데 있길 바라서가 아니라 非渠敢有居高願
닭 창자 속에 산 채로 매장됨을 저해서라네 剛怕鷄腸活見埋
강가에 빈 천둥 소리 은은히 울리더니 江上空雷隱有聲
구름 위에서 두어 점 빗방울이 떨어진지라 雲頭數點落來輕
개구리들은 참소식인 줄 잘못 알고서 蝦蟆錯認眞消息
우묵한 숲 속에 지레 개골개골 울어대네 徑作林坳閣閣鳴
보리 가을 저문 날에 산기운 설렁한데 麥秋山氣晩凄然
하릴없이 담배만 피며 밤새 잠 못 이루노니 閑爇金絲耿不眠
이슥한 밤 빈 처마엔 참새가 편히 깃들였고 夜久虛檐棲雀穩
물같이 푸른 하늘엔 거미 하나가 매달렸다 碧天如水一蛛懸
구절창포 비녀에 진홍빛 모시 치마를 입고 九節菖簪絳苧裳
집집마다 여아들 새로 단장 말끔히 하고서 各家兒女靘新粧
자리 앞에서 일제히 단오의 절을 올리니 席前齊作端陽拜
앵두 한 바구니를 상으로 내려 주누나 賞賜櫻桃瀉一筐
비 내리니 작은 계집종 바쁘기도 하여라 雨中忙殺小鬟丫
파 모종과 가지 모종 옮기라고 분부했는데 吩咐披蔥又別茄
아직 어려 동약의 뜻을 듣지 못했는지라 生少不聞僮約指
축대에 올라 먼저 봉선화부터 심고 있네 上臺先揷鳳仙花
집에 가득한 누에똥 옛 흔적을 다 씻어라 滿屋蠶沙滌舊痕
부녀자들 일 년간의 능사를 마쳤네그려 一年能事了閨門
이상해라 고치실 켜는 물레 소리 요란하여 怪來嘈囋繅車響
또 열흘 동안은 산집이 떠들썩하겠네 又作山家十日喧
내기 활 쏘고 취하여 비틀거리며 걸어오니 醉步之玄賭射歸
석양에 사람 그림자 멀리 들쭉날쭉하여라 夕陽人影遠參差
향촌에선 따져 보아 획수 많은 걸 치기에 鄕村釋算稱多畫
종이에 그려 승전기를 높다랗게 쳐드누나 畫紙高擎勝戰旗
싱싱한 갈치며 준치는 한성에만 갈 뿐이고 鮮鮆鮮鰣隔漢城
촌가에는 가끔 새우젓 파는 소리만 들리는데 村莊時有賣鰕聲
돈으로 받길 원치 않고 보리로 받길 바라니 不要錢賣還要麥
어부들의 살림살이 어려울 게 걱정이로세 怊悵漁家事不成
예로부터 어촌에 보리 익을 무렵이 되면 /漁村自古麥黃天
큰 냇물 가로질러 촉고를 연하여 쳤는데 密罟連環截大川
모두 이르길 금년에는 산골 물이 많아서 總道今年饒峽水
좋은 고기가 수없이 깊은 못에 숨었다 하네 好魚無數隱深淵
산늙은이 어렵스레 산에 올라 칡넝쿨 뜯어 山翁釆葛苦攀登
새 힘줄을 취하여 가느다란 노끈 만들고 擰取新筋作細繩
하릴없이 기나긴 여름 보내기 무료하여/ 不耐消閒度長夏
또 이웃 늙은이와 함께 고기 그물 짜는구나 且同隣叟結漁罾
갑자기 더우니 응당 소나기 올 걸 알겠어라 驟熱懸知急雨屯
새벽에는 천둥과 함께 동이로 쏟아붓겠지 曉來雷火照飜盆
해마다 한 번 내리는 모내기 철의 큰비를 年年一沛移秧水
특별한 은총임에도 늘 예사로 생각한다오 還把殊恩作例恩
[주1] 범양 이가 : 범양 이가(范楊二家)는 송(宋) 나라 때에 특히 시문(詩文)으로 명성이 높았던 범성대(范成大)와 양만리(楊萬里)를 합칭한 말이다.
[주2] 골동갱(骨董羹) : 어육(魚肉) 등을 섞어서 곤죽처럼 범벅이 되게 끓인 국을 이름.
[주-D003] 산주(山廚) : 원래 산 속의 푸줏간을 이르는 말인데, 여기서는 산중에 있는 인가(人家)의 뜻으로 범범하게 쓰인 듯하다.
[주4] 개갈로(介葛盧) : 춘추 시대 개국(介國)의 임금을 이름. 그가 노 희공(魯僖公) 29년에 노(魯) 나라에 입조(入朝)했었는데, 그는 우어(牛語)에 통했었다고 한다. 《左傳 僖公 29年》
[주5] 지사(地師) : 지술(地術)을 알아서 집터나 묏자리 등을 잡는 사람을 말한다.[
[주6] 동약(僮約) : 한(漢) 나라 때 왕포(王褒)가 지은 문장(文章)의 이름으로, 노예(奴隷)의 계약(契約)을 서술한 것이다. 그 내용을 대략 간추려 보면, 노예가 한번 팔려 가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주인이 시키는 대로 조금도 거역 없이 해내야 한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는 곧 계집종 아이가 동약의 원칙을 아직 몰라서 상전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고 제멋대로 다른 일을 하고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