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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선생시집서圃隱先生詩集序
노수신盧守愼
공경히 생각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서 고려 재상 정 문충공(鄭文忠公)이 송(宋)나라와 명(明)나라의 두 충신과 대등하다고 여겨 신에게 그들의 문집 서문을 모두 짓도록 명하셨습니다.
신이 삼가 공의 문집을 읽고는 태종대왕이 속히 시호를 내려서 표창하신 것과 네 성상이 차례로 등극하여 《삼강행실》 〈충신전〉에 싣고 숭의전(崇義殿)에 배향하고 공자묘(孔子廟)에 제향하고 서원에 편액과 서적과 위전(位田)을 내리신 것과 우리 성상에 이르러 또 편액을 내리고 치제(致祭)하신 것을 삼가 보게 되었고, 지금 다시 이러한 명까지 있으니, 저 큰 규모와 원대한 계책이 전고(前古)에 비하여 더없이 탁월하심을 더욱 감탄하게 됩니다.
신이 일찍이 생각건대, 공훈이 높아 사직(社稷)의 신하가 되고 법도가 있어 왕자(王者)의 스승이 되면 반드시 생민과 만대의 본보기가 되게 함이 있으니, 어찌 사람의 힘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공은 정신이 산악(山嶽)처럼 빼어나고 기상이 성두(星斗)처럼 빛났으며, 효제(孝悌)가 집안에 행해졌고 충의(忠義)가 국가에 믿음을 얻었습니다. 예컨대 시묘(侍墓)하고 사당과 신주를 처음 만든 일, 호복(胡服)과 용관(宂官)을 혁파한 일, 부학(部學), 향교(鄕校), 의창(義倉), 수참(水站)을 설치한 일, 감사와 수령, 전부(田賦)와 경비(經費)를 바로잡은 일들처럼 교화가 이루어지거나 편리해지도록 한 것이 많았으니, 그 제작(制作)함이 성대하다고 하겠습니다.
조정에 건의하여 맨 먼저 명나라에 귀부(歸附)하였고, 중간에 여러 번 틈이 생겨서 해명하는 말을 아뢰려고 모두 일곱 번이나 남경(南京)으로 가게 되었으나 곧바로 응낙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드디어 세공(歲貢)을 감면받아 온 나라가 영원히 도움을 입게 되었으니, 그 계책이 특별하다고 하겠습니다.
일찍이 화주(和州)와 운봉(雲峯)과 동북면(東北面)에 종사관으로 출정하여 모두 승리를 거두었고, 뒤에 다시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화복(禍福)의 이치로 타이르자, 왜인이 명을 모두 따라서 포로를 돌려주고 침략을 금하게 하였으니, 그 위엄과 신의가 대단하다고 하겠습니다. 〈행장〉에서 “안팎으로 일이 많아 긴요한 업무가 수없이 쌓였으나 목소리와 낯빛을 바꾸지 않고서도 큰일을 처리하고 큰 의혹을 결단하며 좌우로 응답하는 것이 모두 꼭 들어맞았다.”라고 일컬었으니, 왕을 보좌할 명세(命世)의 인재가 아니면 누가 여기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국운이 극도로 쇠퇴하고 꽉 막힌 때를 만나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라를 떠맡고 있거늘, 어찌 감히 두마음을 품겠는가. 내 이미 처신할 바를 생각하고 있다.”라고 하고, 한 몸으로 오백 년의 마지막 운명을 감당하여 시퍼런 칼날을 밟고도 피하지 않아 매서운 서리, 뜨거운 해와 늠름히 빛을 다투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육 척의 어린 임금을 부탁할 만하며 백 리 되는 나라의 운명을 맡길 만하며, 죽고 사는 사이에 이르러서도 절개를 빼앗을 수 없는 군자”라고 할 것입니다. 진실로 평소에 익숙히 수양해 온 사람이 아니면 어찌 이처럼 확고히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대개 젊었을 때부터 큰 뜻을 품고서 날마다 《중용》과 《대학》을 외워 학문이 정밀하고 순수하며 강설이 깊고 은미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생각을 크게 뛰어넘어 집주(集註)와 은연중에 합치하였기 때문에 호서(胡書)를 보았을 때 선비들이 놀라며 감복하였던 것입니다. 그 문풍과 학술은 흡연(翕然)히 공경하고 본받는 바가 있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유림(儒林) 중의 종주(宗主)라고 할 만합니다.
아아, 다섯 가지가 모두 갖추어졌으니, 무슨 흠잡을 것이 있겠습니까. 또한 학문에 근본하였을 뿐이라고 하겠습니다만, 마침내 세교(世敎)가 이로써 부식(扶植)되고 왕업(王業)이 이로써 공고해져서 우리나라 사람이 무궁토록 그 내려 준 은택을 받을 것이니, 충량(忠良)이라 불리며 한 세대에 드러난 사람과는 같은 등급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 유행하고 있는 302편의 시는 신이 지금 음미해 보니, 호방하고 표일하며 전아하고 강건하며 웅혼하고 심오하며 온화하고 돈후합니다. 대부분 성정(性情)에 근본하고 물리(物理)를 다하였으며, 종종 마음으로 터득한 데서 절로 발현되어 밖에서 구할 필요가 없는 듯한 시도 있으니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말이 있다.”라는 말이 미덥다고 할 만합니다.
돌아보건대 당세에 경서를 연구하여 글 뜻에 정심(精深)한 사람이 있으면 서로 이학(理學)이라고 명명했으니, 목은(牧隱)이 지칭한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횡으로 말하든 종으로 말하든 모두 이치에 맞다.”라는 것은 또한 모름지기 성학(聖學)의 경계에 들어간 사람이라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마리를 찾아볼 만한 논저(論著)가 조금도 없는 것이 유독 한스러울 뿐입니다.
아아, 방 정학(方正學)이 참상을 겪은 뒤에도 오히려 없어진 나머지에서 얻어 낸 유문(遺文)이 있었거늘, 하물며 공이 수립한 것은 성조(聖朝)의 장려를 받고 있는데도 자손과 문도들이 남긴 글과 흩어진 말을 수습하여 후세에 전혀 전하지 못했으니, 우리나라의 문헌이 부족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가 실행한 바와 수립한 바를 살펴보며 시 몇 편을 영탄하고 음미해 보면 또한 족히 그 학문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많은 것만을 귀하게 여기겠습니까.
황명(皇明) 만력 을유년(1585, 선조18) 7월 3일에 좌의정 신(臣) 노수신(盧守愼)이 하교를 받들어 삼가 서문을 쓰다.
[주1] 송(宋)나라와 …… 충신 : 송나라의 문천상(文天祥)과 명나라의 방효유(方孝孺)를 가리킨다. 문천상은 남송 말 원나라에 항전하다가 패하여 3년 동안 연옥(燕獄)에 갇혔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아 처형당하였다. 저서로 《문산집(文山集)》이 있다. 방효유는 영락제(永樂帝)가 건문제(建文帝)를 몰아내고 그에게 등극의 조서를 짓도록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다가 끝내 처형당하였다. 저서로 《손지재집(遜志齋集)》이 있다.
[주2] 신에게 …… 명하셨습니다 : 선조(宣祖)가 노수신(盧守愼)에게 〈문산집서(文山集序)〉, 〈손지재집서(遜志齋集序)〉, 〈포은집서〉를 짓게 한 것을 말한다. 이 세 편의 서문이 《소재집(穌齋集)》 권7에 나란히 실려 있다.
[주3] 공의 …… 되었고 : 〈연보고이〉에 의하면, 1401년(태종1) 태종이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1432년(세종14) 세종이 《삼강행실》을 지으면서 포은을 〈충신전〉에 넣게 하였고, 1452년(문종2) 문종이 숭의전(崇義殿)에 배향하게 하였고, 1517년(중종12) 중종이 문묘에 종사하게 하였고, 1555년(명종10) 명종이 임고서원(臨皐書院)에 사액하고 사서삼경, 《통감(通鑑)》, 《송감(宋鑑)》을 하사하며 위전(位田)을 두게 하였고, 1570년(선조3) 선조가 숭양서원(崧陽書院)에 사액하고 치제하게 하였다.
[주4] 시묘(侍墓)하고 …… 일 : 〈연보고이〉 을미년(1355, 공민왕4) 조에 “1월에 부친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의 상을 당하여 시묘하였다.”라고 하였고, 또 을사년(1365, 공민왕14) 조에 “1월에 모친 변한국부인(卞韓國夫人)의 상을 당하여 시묘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경오년(1390, 공양왕2) 조에 “사서인(士庶人)으로 하여금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본받아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만들어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도록 청하니, 예법과 풍속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주5] 호복(胡服)과 …… 일 : 호복은 원나라 복식을 가리키고, 용관(宂官)은 쓸모없는 벼슬아치를 가리킨다. 〈연보고이〉 경오년(1390, 공양왕2) 조에 “용관을 없애어 준량을 등용하며, 호복을 혁파하여 중국의 복제를 따랐다.[汰宂散, 登俊良; 革胡服, 襲華制.]”라고 하였다.
[주6] 부학(部學) …… 일 : 부학은 오부 학당(五部學堂)이고, 수참(水站)은 고려 시대 진도(津渡)에 설치하여 강상(江上)의 수송을 담당한 조창(漕倉)으로, 수역(水驛)이라고도 한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 “고려 말에 정몽주의 건의에 따라 설치하였다.”라고 하였다. 〈연보고이〉 경오년(1390, 공양왕2) 조에 “안으로는 오부 학당을 건립하고 밖으로는 향교를 설치하였다. 의창(義倉)을 세워서 궁핍한 백성을 구휼하며, 수참을 설치하여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주7] 감사와 …… 일 : 〈연보고이〉 경오년(1390, 공양왕2) 조에 “수령을 청망(淸望)이 있는 참상(參上)으로 가려서 시키고 이어서 감사를 보내어 출척(黜陟)을 엄하게 하였고,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경력(經歷)과 도사(都事)를 두어 전곡(錢穀)의 출납을 기록하였다.”라고 하였다.
[주8] 조정에 …… 귀부(歸附)하였고 : 《포은집》 〈행장〉에 “명나라가 처음 일어났을 때 공이 조정에 힘껏 청하여 맨 먼저 명나라에 귀부하여 고황제에게 크게 칭찬을 받았다.[皇明之肇興也, 公力請于朝, 首先歸明, 大爲高皇帝所嘉.]”라고 하였다.
[주9] 화주(和州)와 …… 거두었고 : 〈연보고이〉 계묘년(1363, 공민왕12) 조에 “8월에 종사관(從事官)으로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한방신(韓邦信)을 따라 화주에서 여진(女眞)을 정벌하였다.”라고 하였고, 또 경신년(1380, 우왕6) 조에 “가을에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우리 태조를 따라 전라도 운봉(雲峯)에 이르러 왜(倭)를 쳐서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라고 하였고, 또 계해년(1383, 우왕9) 조에 “8월에 동북면 조전원수로 다시 태조를 따라 정벌하러 갔다.”라고 하였다.
[주10]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 〈연보고이〉 정사년(1377, 우왕3) 조에 “9월에 전(前) 대사성(大司成)으로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라고 하였다.
[주11] 행장 : 함부림(咸傅霖)이 지은 포은의 〈행장〉을 말한다. 《포은집》 끝에 실려 있다.
[주12] 안팎으로 일이 많아 : 대본에는 ‘內外多故’로 되어 있는데, 《포은집》 〈행장〉에는 ‘國家多故’로 되어 있다.
[주13] 육 척의 …… 군자 : 《논어》 〈태백(泰伯)〉에 보인다.
[주14] 집주(集註) : 남송(南宋) 주희(朱熹)의 사서집주(四書集註)이다.
[주15] 호서(胡書) : 원나라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이다.
[주16] 성정(性情)에 …… 다하였으며 : 주희가 말하기를 “시는 인정에 근본하고 사물의 이치를 다하여 풍속의 성쇠를 징험하고 정치의 잘잘못을 볼 수 있다.[詩本人情, 該物理, 可以驗風俗之盛衰, 見政治之得失.]”라고 하였다. 《論語集註 子路》
[주17] 방 정학(方正學) : 명(明)나라 학자 방효유(方孝孺)를 가리킨다. 방효유는 영락제(永樂帝)가 건문제(建文帝)를 몰아내고 그에게 등극의 조서를 짓도록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다가 끝내 처형당하였다. 저서로 《손지재집(遜志齋集)》이 있다. 촉 헌왕(蜀獻王)이 초빙하여 세자의 스승으로 삼고 독서하는 집을 정학(正學)이라고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정학선생(正學先生)이라 불렀다.
[주-D018] 노수신(盧守愼) : 1515~1590.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穌齋),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시호는 문의(文懿)인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1543년(중종38)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대제학과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소재집(穌齋集)》이 있다.
圃隱先生詩集序[盧守愼]
恭惟我 主上殿下以麗相鄭文忠公可班宋,明二忠臣。 命臣幷序其集。臣謹就而讀之。伏見 太宗大王亟贈謚以㫌之。四 聖迭御。以列三綱傳。配崇義殿。祀孔子廟。 賜院額書田。至于 聖上。又錫扁致祭。今復有是 命。益歎夫宏䂓遠猷卓越前古萬萬也。臣嘗謂勳爲社稷臣。法爲王者師。是必有使之爲生民萬世者以之。豈人力可及。惟公神秀文嶽。象表星斗。孝悌行於家。忠義孚於國。如創廬墓廟主。革胡服冗官。部學,鄕校,義倉,水站之設。監司,守令,田賦,經費之正。所以化成利便多類此。其制作盛矣。建議首歸義主。中罹荐釁。敷奏辨明。凡七赴京師。無不兪者。遂减歲貢。一方永賴。其籌畫奇矣。嘗從征和州,雲峯。東北面皆捷。後再使倭。諭以禍福。莫不聽命。還俘禁侵。其威信大矣。狀稱內外多故。機務浩繁。而不動聲色。處大事决大疑。左右酬答。咸適其宜。非命世王佐之才。夫孰能與於此。會衰否之極。莫可如何。乃諭人曰。受人國豈敢二心。吾已有所處。夫以一身當五百末運。蹈白刃而不之避。凜然與嚴霜烈日爭光。正所謂託六尺之孤。寄百里之命。臨大節而不可奪之君子人也。苟非所養之熟有素。焉得所守之確如是。盖自少有大志。日誦中庸,大學。學問精粹。講說淵微。超出人意。暗合集註。及得胡書。諸儒驚服。其文風學術。翕然有所矜式。眞可謂儒林中宗主。嗚呼。五者備矣。何間然。亦曰本於學而已。畢竟世敎以植。王業以鞏。而東人受其賜於無窮。其不可與號爲忠良顯於一世者同年語也審矣。庸非天意而何。至於有詩三百二篇行於世。臣今味之。豪逸雅健。雄深和厚。多本性情該物理。往往有若自發於心得。而無假於外求者。信乎有德者必有言也。顧其當世有能治經深於文義者。相命曰理學。不知牧老所指何居。然橫竪當理。亦須闖藩者能知。獨恨無少論著可以尋其緖耳。嗚呼。以方正學所遭。尙有得於爐燼之餘。况公所立爲 聖朝所奬。而子孫徒弟絶莫能收拾其遺文散語以傳諸後。吾邦文獻不足。乃至此乎。雖然。觀所爲所立。而於詩數章。咏嘆之淫泆之。亦足以知其學矣。何事於以多爲貴。皇明萬曆乙酉七月初三日。左議政臣盧守愼。奉敎謹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