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암 처사(松巖處士)의 묘지 정해년(1587, 선조 20)
황명(皇明) 만력(萬曆) 정해년 가을 7월 어느 날에 청성산인(靑城山人) 영가(永嘉) 권공(權公)이 졸하였다. 그의 문인(門人)인 권기(權紀)가 공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지명을 지어 달라고 청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스승님의 친구이고 우리 스승님을 알아주는 분으로는 당신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스승님의 묘지명을 지을 사람이 당신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의리상 감히 문장에 뛰어나지 못하다는 핑계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이에 행장을 살펴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은 덕을 숨긴 채 산 사람이다. 이름이 조정에 알려지지 않고 행실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아서, 이 세상에서는 참으로 이름이 칭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윽한 난초가 향기를 풍기고 골짝 아래의 솔이 푸르름을 머금는 것은 절(節)이고, 진주가 연못 속에 있어 못이 아름답고 옥이 산속에 있어 광채가 쌓이는 것은 덕(德)이다. 이것으로 공에게서 구한다면 이는 공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공은 성품이 영특하면서도 효성스러웠다. 8세 때 어버이를 생각하면서 글을 지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저 언덕에 올라가서 부모를 생각함이여.[陟彼屺兮 瞻望父兮]” 하였으며, 또 시를 짓기를, “창이 밝음에 해가 뜬 것을 알겠다.[窓明知日上]” 하니, 식자들이 비상한 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뒤에 선부군(先府君)의 병이 심한 때를 만나서는 똥을 맛보아서 병세를 살폈고, 선부인(先夫人)을 봉양하면서는 얼굴빛을 공손하게 하여 봉양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모두 여묘살이를 하면서 죽만 먹고 지냈다. 공의 지극한 행실은 대개 이와 같았다.
어려서부터 퇴계 선생(退溪先生)을 따라서 학문을 하였는데, 오직 스승의 가르침대로 실천하였으며, 평생토록 힘을 얻은 곳은 모두 바름을 기른 공이었다. 실천을 하고 남은 힘으로 학문을 하였으며, 문장을 짓는 재주도 뛰어났다. 신유년(1561, 명종 16)의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으나, 끝내 대과(大科)에는 합격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운명인 것이다. 공 역시 이것으로 인해 근심하지 않고 시골로 돌아와 담박하게 지내었다.
집에 있으면서는 가산(家産)을 불리기를 일삼지 않았고, 날마다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즐겼다. 비록 어지럽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술과 시에는 흥취를 붙이었다. 그리하여 손님이 찾아오면 문득 술상을 차렸으며, 불콰하게 술이 오르면 반드시 붓을 가지고 오라고 하였는데, 기쁜 마음으로 밤을 지새었다. 이런 뜻이 일찍이 게을러진 적이 없었으며, 사람들이 혹 술을 끊을 것을 권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천부적인 자질이 화평하고 원대하여 상대방과 더불어 다툼이 없었으며, 기쁘고 노함을 드러내지 않았고, 옳고 그름을 판별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방을 보고서 알아보는 눈은 참으로 저절로 있는 것 같았다. 바른 성품은 고상하고 깨끗하여 몸가짐이 하자가 없었고, 범속(凡俗)을 내려다보며 마치 자신을 더럽히기나 할 것처럼 여겼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예의(禮意)가 더욱더 겸손하였다. - 편(編)을 끝마치지 않았다.
松巖處士墓誌 丁亥
皇明萬曆丁亥秋七月某甲。靑城山人永嘉權公卒。其門人權紀具公狀。索銘于余曰。友吾師知吾師。宜莫若子。誌師墓者。非子而誰。余義不敢辭不文。乃按狀而言曰。公。隱德人也。名不登朝。行不著世。世固無得而稱焉。然幽蘭揚芬。澗松含翠。節也澤珠媚淵。山玉蘊輝。德也。以是求公。則斯知公矣。公性悟且孝。八歲思親作書曰。陟彼屺兮。瞻望父兮。又作詩曰。牕明知日上云云。識者知非常兒。後遇先府君疾革。嘗糞以驗差劇。奉先夫人。盡其色養。丁內外艱。皆廬墓啜粥。其至行類如此。自少從退溪先生學。惟師訓是服。平生得力處。皆養正功也。餘力學文。文藝亦贍。中辛酉進士。終屈大科。命也。公亦不以是戚戚。歸臥衡門。泊如也。家居不事産業。日以圖書自娛。雖不喜紛華。而詩酒於寄興。遇客輒呼觴。微醺必索筆。欣然終夕。意未嘗倦。人或勸其止酒。亦不從也。天資夷曠。與物無競。喜怒不形。是非靡別。而照物衡鑑。固自若也。雅性高潔。操履無玷。下視凡俗。若將浼焉。而待人禮意愈撝謙也。未卒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