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會上
법화경일일법문 여래수량품 제16: 『말로 설법한 모든 것들이 모두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느니라
『말로 설법한 모든 것들이 모두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느니라.-1 왜냐하면, 여래는 여실(如實-부처님만이 진실을 본 것을 말함)히 삼계의 모양을 알고 보았기 때문이니,-2 생사(生死)가 물러가거나 나아오는 것이 있지 않고,-3 또 재세(在世-세간이 존재한다는 견해)와 멸도(滅度-존재하기 때문에 사라진다는 견해)가 없으며,-4 비실(非實-범부가 미혹에 집착이 되어 모양을 취하는 것이 같이 않음)하고 비허(非虛-소승이 색<色>을 멸<滅>하고 공<空>을 취함이 같이 않음)하며,-5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아,-6 삼계의 눈으로 삼계를 보는 것과는 같지 않나니,-7 이러한 일들을 여래는 분명히 보았기 때문에 착류(錯謬-혼돈)하는 일이 있지 않느니라.』16-14,8
제소언설 개실불허 소이자하 여래 여실지견삼계지상 무유생사 약
諸所言說 皆實不虛 所以者何 如來 如實知見三界之相 無有生死 若
퇴약출 역무재세 급멸도자 비실비허 비여비이 불여삼계견어삼계
退若出 亦無在世 及滅度者 非實非虛 非如非異 不如三界見於三界
여사지사 여래명견 무유착류
如斯之事 如來明見 無有錯謬
諸所言說이 皆實不虛하나니라 所以者何오 如來는 如實知見三界之相이니 無有生死가 若退若出하고 亦無在世와 及滅度者하며 非實非虛하며 非如非異하야 不如三界見於三界하나니 如斯之事를 如來明見하야 無有錯謬일새니라
1-천태보살이 이 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였다.
「모든 말 다 진실하여 거짓 없으니,」
諸所言說 皆實不虛]
처음에 「거짓 없다」함은 점돈(漸頓)의 이기(二機)가 이 두 가지 형성(形聲)의 교화를 받으니, 다 이익을 끼침이 거짓 아니라는 취지다.
위의 과거장(過去章)에서 다 환희함을 밝힌 것은 세계실단(世界悉檀)의 이익 같거니와, 지금 「다 거짓 없다」고 밝힌 것은 승렬(勝劣)의 형성(形聲)이 이기(二機)에 어울려서 사실단(四悉檀)을 얻음이 다 거짓 아니라는 것이다.
대론(大論)에서는 사실단이 아울러 진실이라 밝혀 세계실단인 까닭에 진실이며, 대치실단(對治悉檀) 위인실단(爲人悉檀)인 까닭에 진실이라 했다.
그러나 깊이 있게 이를 논한다면, 셋은 세간(世間)의 진실일 뿐이므로 이 진실은 거짓이 된다. 기연(機緣) 중에서도 세간의 셋은 진실이나, 제일의(第一義)에서는 거짓임이 있다 해야 한다.
만약 이 허실(虛實)을 가지고 적본이문(迹本二門)에 대해 해석한다면 점돈(漸頓)의 이익을 받는 자에게 허실이 있으니, 예전의 방편행(方便行)은 아직 실도(實道)의 이익을 얻지 못했으므로 그 인(因)의 거짓이라 할 것이며, 근적(近迹)에 집착하여 아직 본지(本地)의 진실한 이익을 얻지 못했으므로 곧 과(果)의 거짓이 되거니와, 이제 적문(迹門)의 설을 듣고 한가지로 실상(實相)에 든 것은 곧 인(因) 중의 진실한 이익을 얻은 것이 되며, 본문(本門)의 설을 듣고 곧 집근(執近)의 분별을 제거한 것은 장원(長遠)한 과지(果地)의 진실한 이익을 얻음이 된다. 따라서 지금은 이실(二實)을 얻어 예전의 이허(二虛)를 대한다 할 수 있다.
또 원돈(圓頓)의 중생에 대해 말하건대, 적본이문에 있어서 하나는 진실이며 하나는 거짓임이 있다. 중도(中道)의 행(行)을 얻음은 인(因) 중에서 진실한 이익을 얻는 것이 되나, 그러면서도 근과(近果)에 집착함은 과(果)에 있어서 거짓임이 되며, 이제 인(因)을 설하심을 듣고 다시 별개의 진실의 이익을 얻음은 아니나, 원과(遠果)를 설하심을 듣고는 진실의 과(果)의 이익을 얻었다. 이같이 예전에는 하나의 거짓이 있고, 지금은 하나의 진실을 얻었으므로 「다 진실해 거짓 없다」고 하는 것이다.
初不虛者.漸頓二機 稟此二種形聲 皆益不虛.上過去章明皆歡喜.似如世界之益.今明皆不虛.勝劣形聲逗於二機.獲四悉檀皆不虛也.大論明四悉檀 實.世界故實.對治爲人故實.篤而爲論 三是世間實 此實則虛.緣中亦有世間三實 第一義則虛.若以此虛實 約迹本二門.漸頓益者虛實.昔方便行 未得實道之益.是其因虛.執於近迹 未得本地眞實之益.卽是果虛.今聞迹門之說 同入實相.卽得因中實益.聞本門之說.卽除執近之情.得於長遠果地之實益.今得二實 對昔二虛 約圓頓衆生.於迹本二門 一實一虛 得中道之行.是得因中之實益 而執近果.是於果虛.今聞說因 更不別得眞實之益.聞說遠果 卽得實果之益.昔有一虛 今得一實.故云皆實不虛也.
질문.「금석(今昔)의 대승이 나타내고 있는 실상(實相)은 앞서 깨닫고 뒤에 깨닫는 것에 따라 그 내용에 차이가 있다고 할 것인가.」
대답.「처음에 실상에 들기도 하고, 다음에 실상에 들기도 하고, 내지는 초암(草庵)을 깨고 중도(中道)에 들기도 하니, 실상(중도)에 드는 점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다만 들어감에 점돈(漸頓)이 있으므로 이교(二敎)를 구분하는 것뿐이다. 진제(眞諦)에 들어감에 적용컨대, 둔근(鈍根)인 자는 석법(析法)의 무상(無常) 따위 관법(觀法)에 의거하고, 이근(二根)인 자는 체법(體法)의 공관(空觀)을 쓰니, 그러므로 장통(藏通)을 나누는 것뿐이다.」
問.今昔大乘所顯實相.前後悟者應有異耶.答.初入次入.乃至壞草庵通入中道.但入有漸頓故分二敎.例入眞諦.鈍者依析法無常等觀.利者用體法空觀.故分藏通耳.
「어째서어뇨. 여래 여실(如實)히 알되」 이하에서는 둘째로 전반적으로 익물(益物)의 거짓 아님을 해석하니, 먼저 형익(形益)을 해석하고, 뒤에 언익(言益)의 거짓 아님을 해석했다. 이 중에 육구(六句)가 있어서 응신이 법신을 떠나지 않음을 나타냈다. 법신은 형상도 없으시고 기멸(起滅)도 없으시나, 중생에 기멸의 작용이 있어서 법신을 받아들이니, 여래의 원력(願力)은 이런 기멸에 응해 동조하시는 것뿐이다. 따라서 기멸의 견해는 중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그러므로 삼계(三界)에 입각해 여러 구(句)를 밝히신 것이다.
이것에 또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진리를 비춤에 거짓 아니심이요, 둘째로 「여러 중생」 아래서는 중생의 근기에 어울림에 거짓 없으심을 밝히셨다. 진리에 통달하며 근기에 어울려 가르침을 만드사 중생을 제도하시는 바에는, 반드시 거짓 없으실 것은 당연한 일이다.
從所以者何如來如實知見下.第二總釋益物不虛.先釋形益.後釋言益不虛.此中六句 顯於應身不離法身.法身無形 亦無起滅.衆生有起滅之機 感於法身.如來願力 應同起滅.起滅之見出自衆生.故約三界 以明諸句.又爲二.一照理不虛.二從以諸衆生下.明稱機不虛.達理稱機 設敎化物 必不虛也.
「어째서어뇨. 여래 여실히 알되, 삼계(三界)의 상(相)이 나고 죽어서 물러나거나 나오거나 함이 없으며, 또한 재세(在世)와 멸도(滅度) 없으며 진실 아니고 거짓 아니며,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 하여, 삼계(三界)의 삼계 보는 것과는 다른 까닭이니, 이같은 일 여래는 분명히 보아 그르침 없느니라.」
所以者何 如來如實知見三界之相 無有生死若退若出 亦無在世及滅度者 非實非虛 非如非異 不如三界 見於三界 如斯之事 如來明見無有錯謬
「여실히 안다」함은 곧 실지(實智)인 절대적 지혜니, 이것으로 삼계의 진실을 비추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진실하므로 삼계의 인상(因相)이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고 죽음이 없다」함은 이사(二死)의 고(苦)가 없음이니, 집(集)을 일으킴을 「물러난다」하고, 무상(無常)의 과(果)가 나타남을 「나온다」고 한다.
또한 생사의 세간(世間)에 살아 있는 것과 열반의 멸(滅)에 들어감이 없어서, 이 둘이 함께 멸하므로 「또한 재세(在世)와 멸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멸도가 진실인 것도 아니며 생사가 거짓인 것도 아니므로, 「진실 아니고 거짓 아니다」 말하는 것이다.
또 세간의 격이(隔異)도 아니며 출세간(出世間)의 진여(眞如)도 아니므로,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말하는 것이다. 이 사구(四句)는 중도(中道)를 밝히신 말씀이시다.
如實知見 卽是實智如理 而照三界之實.實則無三界之因相也.無有生死者.無有二死之苦也.起集名退.無常果現名出也.亦無在生死之世 及入涅槃之滅.此二俱滅 故云亦無在世及滅度者.非於滅度之實.非於生死之虛.故云非實非虛也.非於世間之隔異.非於出世之眞如.故云非如非異.此四明中道也.
만약 이변(二邊)을 아울러 부정하여 구(句)를 맺으면 필시 일변(一邊)이 되리니, 이를테면 「생(生)도 아니고 사(死)도 아니다」의 명제는 구를 맺으면 생(生)이 되며, 「생이기도 하고 사이기도 하다」의 명제는 구를 맺으면 사가 되고, 「물러남이기도 하고 나옴이기도 하다」는 명제는 구를 맺으면 물러남이 되며, 「물러남도 아니고 나옴도 아니다」는 명제는 구를 맺으면 나옴이 되고, 「거짓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다」는 명제는 구를 맺으면 진실이 되며, 「거짓이기도 하고 진실이기도 하다」는 명제는 구를 맺으면 거짓이 됨과 같다. 이같은 것들은 이제 다 이를 부정하고, 내지는 단복(單複)을 고루 갖춘 것도 부정하니, 바로 중도의 취지를 나타내신 것뿐이다.
若雙非二邊 結句定一邊.例如非生非死 結句爲生 是生是死 結句爲死 是退是出 結句爲退 非退非出 結句爲出 非虛非實 結句爲實 是虛是實 結句爲虛.如此之流 今皆非之.乃至單複具足亦非之.方顯中道意耳.[참고]
「삼계의 삼계 보는 것과는 같지 않다」함은 이종(二種)의 삼계의 중생이 보는 삼계의 상(相)과는 같지 않다는 뜻이다.
오직 부처님 한 분만이 여실(如實)히 삼계의 진실을 샅샅이 비추사 안에 실지(實智)의 작용을 갖추고 계시니, 이는 또한 수자의어(隨自意語)가 되며, 또한 「혹은 자기 몸 설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대품(大品)에서는 이르되,「제일의(第一義) 중에는 분별하는 바가 없느니라.」고 하셨다.
그러나 여래의 권지여량(權智如量)으로 삼계의 상을 지견(知見)하심은 곧 삼계중생의 보는 것과 같으시다. 여실히 이사(二死) 없음을 지견하시건만 중생의 정도를 따라 이사의 몸을 보이시며, 이사가 있다고 설하신다. 물러남도 없고 나옴도 없건만 중생의 정도를 따라 물러남이 있고 나옴이 있다고 설하신다. 또한 재세(在世)와 멸도(滅度)가 없건만, 중생의 정도를 따라 세간에 생(生)을 보이시고 열반에 들어감을 보이시며, 재세가 있으며 멸도가 있다고 설하신다.
진실됨이 없건만 열반의 진실임을 설하시고, 거짓됨이 없건만 삼계의 거짓임을 설하신다. 삼세의 다름이 없건만 다름이 있다 설하시고, 진제(眞諦)의 같음이 없건만 같음이 있다고 설하신다. 그러므로 삼계의 삼계를 봄과 같음은 다 수타의어(隨他意語)니, 이를 일러 「혹은 남의 몸을 설하시며, 남의 일을 보이신다」고 하는 것이다. 이같이 여래의 이지(二智)는 분명히 이제(二諦)를 통달하시는 것이니, 그러므로 형언(形言)의 두 이익이 다 진실하여 거짓이 없으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원섭보살 번역
不如三界見於三界者.不如二種三界衆生所見三界之相.唯佛一人 如實窮照三界之實.內具實智之用.亦是隨自意語.亦是或說己身之事.故大品云.第一義中 無所分別也.如來權智如量.知見三界之相.卽如三界衆生之見.如實知見無二死.而隨他意示二死身 說有二死.無退無出 而隨他意說有退有出.亦無在世及滅度者.而隨他意示生世間示入涅槃.說有在世有得滅者.無實而說涅槃之實.無虛而說三界之虛.無三世之異 而說有異.無眞諦之如 而說有如.同於三界 見於三界.皆是隨他意語.名爲或說他身事 示他身事.如來二智 明審二諦.所以形言兩益.皆實不虛也.
-偈頌-
寶雲地湧菩薩 無有錯謬合掌
一乘妙法蓮華經 一切諸佛神通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