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사당기鄕祠堂記
임훈林薰
사우(祠宇)를 세우는 일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옛사람으로서 한 가지라도 명절(名節)이 있는 사람치고 사우가 없는 사람이 없으니, 정말이지 덕(德)을 좋아하는 천성을 지닌 사람의 아름다운 마음으로는 그대로 그냥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道)와 덕(德)을 품은 선비로서 이윤(伊尹)이 뜻하던 바에 뜻을 두고 안연(顔淵)이 배우던 바를 배워, 비록 당세에 크게 시행되지는 못했더라도 조금이라도 우리 백성들에게 시행된 바가 있었던 분에 대해서라면, 우리 백성들이 흠모하고 사랑하여 오래될수록 더욱 잊지 못하는 것은 본디 당연한 이치이다. 우리 고을이 선생의 사우를 세운 것은 이런 까닭에서이다.
선생은 하동인(河東人)이다. 휘는 여창(汝昌)이고 자호(自號)는 일두(一蠹)이다. 그 도덕의 고매함과 학문의 순정함 같은 것은 이미 국승(國乘)에 환히 드러나 있고 사림(士林)에 다 알려졌다. 그러므로 그것을 말하고자 한다면 해와 달의 밝음을 찬미하는 것과 같을 것이니, 우선 우리 고을이 사우를 세운 의미를 말해 보고자 한다.
선생은 홍치(弘治) 갑인년(1494, 성종25)에 우리 고을에 수령으로 부임하여 5년 만에 사화(史禍)에 걸려 종성(鍾城)으로 귀양 갔고, 또 7년 만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5년 동안에 무릇 어진 정치를 베풀고 문명의 교화를 일으켜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마음으로 기뻐하고 진심으로 복종하게 한 것은, 또한 조목조목 나열하거나 하나하나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 부인은 현(縣)에서 20리 거리에 있는 함양(咸陽)에 살았는데, 현의 아전과 백성들이 세시(歲時)에는 반드시 모두 와서 절을 하며 밖에서 안부를 여쭈었고, 평상시에 그 집 문 앞을 지나가는 자들도 그렇게 하였으며,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현의 아전과 백성이 누가 명령한 것도 아닌데 자식처럼 몰려와서 장사(葬事)를 도왔다고 한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이 선생을 얼마나 추모했는지를 대개 상상해 볼 수가 있다.
선생이 관직에 계실 때에 백성 다스리는 방법 10여 조목을 만들었는데, 뒤에 온 후임자들이 대대로 그것을 지켜 모범으로 삼아 아무도 감히 고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고을의 부역이 다른 고을보다 가벼우니, 이른바 ‘백성들이 오늘날까지 그 혜택을 받는다’는 것이 이런 분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우리 고을이 사우를 세우려 한 지 오래되었으나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며 여지껏 못 이루고 있었으니, 어찌 우리 고을이 매우 부끄러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난해 봄에 고을 사람 윤할(尹劼)과 유세한(柳世漢)이 이 일을 고을 사람들과 의논하여, 드디어 전 현감 박후(朴侯)에게 아뢰어 이에 일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박후가 체직되어 돌아가고 윤할과 유세한도 일에서 물러나자, 이때 이 일을 맡아 할 사람이 없어서 일이 거의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이때 고을 사람 정유명(鄭惟明)과 정유문(鄭惟文)이 분연히 일을 떠맡아, 새로 온 현감 이후(李侯)에게 사유를 아뢰니, 이후가 말하기를 “나는 이 일이 오래도록 낙성되지 않은 것을 괴이하게 여긴다. 어찌하여 지금까지 늦어졌는가? 내가 사문(斯文)의 아름다운 일에 대해 어찌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하고, 명하여 다시 일을 하게 하였다. 이듬해 봄에 비로소 낙성되니, 고을 사람들이 나를 고을의 원로라 하여, 전말을 기록하여 돌에 새기기를 청하였다. 나는 글을 잘하지 못한다고 하며 사양하였으나 고을 사람들이 더욱 간절히 부탁을 하였다. 이에 마지못하여 이르기를,
“무릇 일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못함은 모두 운수에 달려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 고을이 사우를 세우고자 한 것은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누군들 생각지 않았겠는가마는 80여 년이 지나서야 이에 사우를 완성할 수 있었으니, 어찌 운수와 시대가 만난 것이 아니겠으며 또한 그 일을 할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겠는가. 두 정씨(鄭氏)가 스스로 일을 떠맡은 것은 훌륭한 일이고, 이후(李侯)가 정성을 다한 것은 어쩌면 이른바 ‘기운이 같으면 서로 구(求)한다’거나 ‘바람 소리를 듣고 호응하여 흥기한다’는 것이리라. 아니면 또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우를 세우는 것은 선생을 추모하는 것이고, 선생을 추모하는 것은 그 도를 추모하는 것이다. 우리 고을 사람들이 선생의 교화를 잊지 아니하고 모두 힘써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을 실천할 수 있다면 사우를 세운 의미를 제대로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사당은 그 이름만 사모하고 그 도는 잊어버린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보건대 옛사람들의 사우가 무릇 세워진 것은 몇이며 없어진 것은 몇인가. 그 처음에는 어느 것이든 세우는 사람이 있어서 세워졌으나 결국은 아무도 관리를 하지 않아서 없어졌다. 만일 후세 사람들이 혹시라도 향사(享祀)하는 일을 게을리하여 이 사우를 무너지게 한다면, 단지 우리 고을의 죄인이 될 뿐만 아니라 실로 이후의 죄인이 될 것이다. 이는 모두 후세 사람들에게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니, 다들 그렇다고 하였다.
박후(朴侯)는 이름이 문룡(文龍)이고 본관은 함양(咸陽)이며, 이후는 이름이 유(悠)이고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드디어 아울러 돌에 새겨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우가 처음에 어떻게 해서 지어졌는지를 알게 하는 바이다.
[주1] 기운이 …… 구한다 : 《주역(周易)》 〈건괘(乾卦)〉에 “소리가 같으면 서로 호응하고 기운이 같으면 서로 구한다.〔同聲相應 同氣相求〕” 하였다. 하늘과 땅은 서로 감응하여 각기 같은 기운끼리 서로 호응한다는 말인데, 취향이 같거나 기질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서로 이끌리거나 서로 모이게 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鄕祠堂記[林薰]
祠宇之設尙矣。古人有一名一節者。莫不有祠。誠以秉彝好德之良心。自有所不能已也。況於懷道抱德之士。志伊尹之志。學顏淵之學。雖不能大行於當世。而有一分見施於吾民者。則吾民之欣慕愛悅。愈久而不能忘者。固其理也。吾鄕之立先生祠宇者此也。先生。河東人。諱汝昌。自號一蠹。若其道德之高。學問之醇。旣已昭著於國乘。顯敭於士林。如欲言之。有類於贊日月之明。姑以吾鄕立祠之意言之。先生於弘治甲寅。出宰于縣。居五年而罹史禍。謫鐘城又七年而卒于謫所。五年之間。凡所以施仁政興文敎。使吾民心悅而誠服者。亦未暇條陳而縷說也。先生之沒。夫人居咸陽。距縣二十里。縣之吏民。歲時必齊拜問候于外。常時過其門者亦然。夫人之歿。縣之吏民。不令而子來。以供葬事云。 當時人民之追慕先生。蓋可想已。先生之居官也。有治民十餘條。後來繼之者。世守爲範。莫敢有改。吾縣之賦役。視他邑爲輕。所謂民到于今受其賜者。非斯人歟。吾鄕之欲立祠者久矣。而狃於因循。迨不能有成。豈非吾鄕之深可愧也。去年春。鄕人尹劼,柳世漢。議諸鄕中。遂白于前縣監朴侯。乃擧役未幾。朴侯遞歸。尹與柳亦退。無能任其責。事幾無成。鄕人鄭惟明,鄭惟文。奮然自任。告由于新縣監李侯。侯曰。吾怪此事久無成。何至今其稽也。吾於斯文美事。安敢忽諸。 命復擧役。越明年春。始成。鄕人謂余爲縣中老民。請記顚末。刻之于石。余以不文辭之。鄕人請之愈勤。不獲已而諗之曰。凡事之成虧。莫不有數存焉。吾鄕之欲立祠者。自先生去後。孰不有思。而八十餘年。乃克有成。豈非數與時會。又得其人歟。兩鄭之自任。猶可尙也。而李侯之致誠。豈所謂同氣而相求。聞風而興起者歟。抑又有說焉。立祠。所以慕先生也。慕先生。所以慕其道也。使吾鄕之人。能不忘先生之化。皆勉爲孝悌忠信之行。則於立祠之意。得矣。不然則此堂不 幾於慕其名而忘其道乎。又曰。觀古人之有祠宇者。凡幾興而幾廢也。其始也。莫不有人而興之。其終也。莫不無人而廢之。倘使後之人。或怠於祀事。使此祠不免於摧敗。則不徒爲吾鄕之罪人也。實爲李侯之罪人也。此皆不可無戒於後人者也。咸曰然。朴侯名文龍。咸陽人。李侯名悠。廣州人。遂幷刻之。尙俾來者。知作者之所始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