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선생유고 발(明齋先生遺稿跋)
아, 선생이 후학들을 버리고 떠나신 지 지금 이미 19년이 되었는데, 우러러 존경할 분이 계시지 않은 데 대한 슬픔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질 뿐이다. 지금으로서는 오직 선생이 남기신 글들을 수습하여 후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들 자손이나 문인들이 해야 할 일이나 편집하기가 쉽지 않고 정밀하게 교정하기도 어려워 지금까지 미루어 왔던 것이다. 당숙부 부솔공(副率公 윤충교(尹忠敎) )과 재종제 동원(東源)이 나에게 와 상의하기를,
“남기신 글을 아직 인쇄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사실 조금도 후회됨이 없을 정도로 정밀하게 발췌하고 손질하고자 함이지만, 우리들의 부족한 식견으로 가령 앞으로 10년을 더 늦춘다고 해도 흠결 없이 아주 정밀하게 되리라는 보장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세월만 끌다가는 이루어질 기약이 없고 또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도 알 수 없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드디어 원본(原本)을 약간 손질하여 《주자대전(朱子大全)》의 범례대로 서차를 정한 뒤 활자로 약간 부(部)를 인쇄하였는데, 신해년(1731) 5월에 시작하여 그 이듬해 3월에야 일을 끝냈다. 책수는 모두 50권인데, 별집(別集) 4권은 회천(懷川)과 왕복한 서신으로서 선생께서 변절(變節)을 당하신 일이므로 모두 수록하여 백세 이후의 공론을 기다려야지 감히 함부로 빼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선생께서는 평소 저술을 별로 안 하셨는데, 누군가 그러면 후인들에게 무엇을 남겨 주시겠냐고 말하는 이가 있자 선생이 말씀하기를,
“옛 분들은 저술을 농기구나 질그릇, 풀무와 같이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해야만 했다. 지금이야 경전(經傳)으로부터 정주(程朱) 등 여러 저서가 고루 다 갖추어져 있으므로 그중에서 골라 익숙히 읽고 깊이 생각하여 그 내용을 완전히 이해한 다음에는 힘써 행하는 것이 바로 진짜 학문을 하는 것이고 진짜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 힘쓰지 않고 그저 저술만을 일삼아 오히려 옛 분들보다 더 많은 저술을 남기려고 들면 그것은 실질에 힘쓰는 학문이 아니다.”
하셨다. 이것이 또 선생의 평소 뜻이었음을 후인들이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옛날에 우리 퇴도(退陶) 선생의 문집이 선생이 서거하신 후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완성되었는데, 이때는 월천(月川 조목(趙穆) ), 한강(寒岡 정구(鄭逑) ) 같은 분들이 그 일을 주관했음에도 그렇게 정중하게 다루었던 것이다. 지금은 소자(小子)와 같이 식견이 몽매한 자가 그나마도 단기간에 완성하였으니, 필시 잘못된 곳이 많은데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공자(孔子)의 제자들이 다 죽기도 전에 공자의 도가 이미 어두워졌던 것과 같은 형국일 것이다. 그러니 진실로 두렵기가 일시적인 잘잘못으로 인하여 일을 담당한 자에게 책임이 돌아가는 정도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힘입어 선생께서 남기신 글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후세에 선생의 도덕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이들이 이 문집을 가지고 더욱 대조 검토하여 바로잡기를 주 부자(朱夫子)가 이정(二程)의 글에 대해서 했던 것처럼 감정함으로써 정밀함을 지극히 하고 후세에 오래 전해질 수 있도록 할 것이니, 그렇게 된다면 오늘의 이 일이 후학과 사문(斯文)을 위해 큰 다행일 수도 있을 것이다.
동원이 나로 하여금 책 끝에다 몇 마디 쓰도록 했는데, 선생의 깊은 조예와 높은 도덕은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문집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고, 또 이 후생(後生) 말학(末學)이 형용할 수 있는 바도 아니다. 그러므로 감히 개략적으로 언급하지 못하고 다만 의례(義例)의 대략과 책을 만든 시말에 대해서만 이상과 같이 적는다.
숭정(崇禎) 기원 이후 두 번째 임자년(1732, 영조 8) 4월 상순에 종손(從孫) 동수(東洙)는 삼가 쓰다.
明齋先生遺稿跋[尹東洙]
嗚呼。先生之棄後學。今已十有九年矣。安仰之痛。久而愈深。唯收拾遺文。垂示來裔。實我子孫門人之責。而編摩之不易。修删之難精。因循遷就。以至於今矣。堂叔父副率公。再從弟東源甫。卽余而謀曰。遺文之尙未付梓。實欲精抄要删。罔有欠悔。而吾輩見識不逮。假令更遲十年。安保其精粹無欠。拖延歲月。底成無期。而前面事故。亦有不可料者。遂就原本。略加節删。依朱子大全凡例。爲之序次。以活字印若干件。役始于辛亥五月。訖功于翌年三月。凡爲冊五十卷。而別集四卷。則往復懷川書也。此是先生所遭之變節。不可不備載。以俟百世之公論。不敢有所徑删焉。先生平日。罕有編述有言。其將無以惠後人者。先生曰。古人所作。如耒耟陶冶之不可無。然後爲之。今則經傳以來。以至程朱諸書。無不畢備。就其中。熟讀精思。知其必然。而力行之。乃眞爲學也。乃眞自得也。苟不務此而徒事著述。以求多於前修。非務實之學也。此又先生之雅意。後之人不可不知者也。昔我退陶先生之集。成於數十年之後。如月川,寒岡諸公。實任其役。而猶且鄭重如此。今以小子輩之蒙識謏見。乃成之於造次。必多差謬。而不可悔者。不待七十子喪。而大義已晦者。誠可懍惕。不但一時得失之議。歸責於 執役者。是懼而已。然賴玆之役。使遺書不泯。則後之尊先生之道。慕先生之德者。就此而更加勘訂。如朱夫子之於二程書。以致其精。以壽其傳。則斯役之得成於今日。猶可爲斯文後學之一大幸事也。東源使東洙。題數行語於卷末。噫。先生造詣之淺深。道德之高下。善觀者。自可得之於集中。又非後生末學之所可形容。故不敢槩及。而只記義例之大略。編成之始末。如右云。
崇禎紀元後再壬子四月上澣。從孫東洙。敬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