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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승람〔輿地勝覽〕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가야산(伽倻山) 서쪽에 있다. 신라 때 창건되었는데, 최치원의 서암(書巖)과 기각(碁閣)이 있다.
제시석(題詩石):해인사 동네를 세상에서는 홍류동(紅流洞)이라고 부른다. 동네 입구에 무릉교(武陵橋)가 있는데, 그 다리에서 절을 따라 5, 6리쯤 가면 최치원의 제시석이 있다. 후세 사람들은 그 바위를 일러 치원대(致遠臺)라고 한다.
독서당(讀書堂):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최치원이 가야산에 숨어 살다가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집을 나갔는데 갓과 신발만 숲 속에 남겨 놓았을 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해인사의 승려가 그날을 택해 명복을 빌고, 그의 영정을 그려서 독서당에 두었다고 한다. 독서당의 옛터는 해인사 서쪽에 있다.
창원(昌原)
월영대(月影臺):회원현(會原縣) 서쪽 바닷가에 있는데 최치원이 노닐었던 곳이다. 석각(石刻)이 있으나 마멸되고 부서졌다.
함양(咸陽)
명환(名宦):최치원
최치원이 해인사 승려 희랑(希朗)에게 부친 시 아래에 적기를 “방로태감 천령군태수 알찬 최치원(防虜太監 天嶺郡太守 遏粲 崔致遠)”이라고 하였다.
서산(瑞山)
명환:최치원
진성왕(眞聖王) 때에 이곳의 태수로 있다가 왕의 부름을 받고 하정사(賀正使)가 되었으나 도적이 창궐하여 길이 막히는 바람에 가지 못하였다.
태인(泰仁)
명환:최치원
최치원이 중국에서 공부하며 얻은 것이 많다고 스스로 생각하고는 동방으로 돌아와서 장차 자기의 포부를 펼쳐 보려고 하였으나, 쇠한 말세에 시기하는 자들이 많아서 용납받지 못하자 마침내 외방으로 나가 태산군 태수(太山郡太守)가 되었다.
상서장(上書莊)
경주(慶州) 금오산(金鼇山) 북쪽 문천(蚊川) 가에 있다. 진성왕 8년(894)에 선생이 상서(上書)하여 시무(時務) 10여 조를 진달하였는데, 그 글을 작성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고을 사람들이 지금 건물을 세워 수호하고 있다.
이종상(李鍾祥)의 시는 다음과 같다.
중국의 막부에 노닐 적에도 생각났을 상서장 西遊高幕憶書莊
막막히 동방에 돌아와서 뜻이 더욱 깊었으리 漠漠東還意更長
한번 가야산 들어간 뒤로 소식은 들리지 않고 一入伽倻消息遠
뜬구름 지는 해만 고도에 오늘도 바쁘구나 浮雲落照古都忙
독서당(讀書堂)
경주(慶州) 낭산(狼山) 서쪽 기슭에 있다. 선생이 글을 읽었던 곳으로, 옛 우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후세 사람들이 예전의 초석(礎石) 위에 집을 짓고 그 안에서 학업을 닦았다. 유허비(遺墟碑)가 서 있다.
월영대(月影臺) 달그림자가 바다를 비추는 넓이가 97억 3만 8천여 자가 넘는다고 한다.
고려 정지상(鄭知常)의 시는 다음과 같다.
아득히 푸른 물결 위에 우뚝 솟은 바위 碧波浩渺石崔嵬
그중에 봉래 학사님 노닐던 누대 있네 中有蓬萊學士臺
단 옆에 소나무 늙어 가고 잡초만 무성한데 松老壇邊荒草合
하늘 끝 구름 나직하니 조각배 떠오는 듯 雲低天末片帆來
백년의 문아 뒤에 나온 새로운 시구요 百年文雅新詩句
만리의 강산 위에 한 잔의 술이로세 萬里江山一酒桮
돌아보면 계림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回首雞林人不見
달빛만 공연히 해문을 비치며 배회하네 月華空照海門廻
채홍철(蔡洪哲)의 시는 다음과 같다.
문장의 풍조가 갈수록 험난해지는 지금 文章氣習轉崔嵬
문득 최후 생각에 누대에 한번 올랐소 忽憶崔侯一上臺
황학 따라 떠나지 않은 바람과 달이요 風月不隨黃鶴去
백구를 좇아 몰려오는 연무와 물결이라 煙波相逐白鷗來
비 갠 뒤의 산색은 난간에 짙게 드리우고 雨晴山色濃低檻
봄 지난 뒤의 송화는 술잔에 마구 떨어지네 春盡松花亂入桮
더구나 진토를 격해 금심이 있으니 更有琴心隔塵土
다른 때 비구름 데리고 돌아오리라 佗時好與雨雲廻
또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기문(記文)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라의 역사를 보면 진성왕(眞聖王) 때에 최치원이 있었다. 처음에 당 희종(唐僖宗)을 섬기다가 천하가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그곳을 떠나 귀국하였는데, 신라도 정치가 쇠퇴하였으므로 마침내 세상을 버리고 숨어 살았으니, 이로 인해서 ‘닭을 잡고 오리를 잡는다〔操雞搏鴨〕’는 말이 있게 된 것이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최치원이 월영대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그 옆 해상에 고운대(孤雲臺)가 있다.”
고운대에 늙은 감나무가 있는데, 선생이 손수 심은 것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쌍계사(雙溪寺)
지리산(智異山)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선생이 여기에서 글을 읽었다고 한다. 뜰에 오래된 괴목(槐木)이 있는데, 그 뿌리가 북쪽으로 시내를 건너서 얽혀 있으므로, 그 절의 승려가 다리로 이용하는데, 이 나무도 바로 선생이 손수 심었다고 한다. 동구(洞口)에 두 개의 바위가 마치 문처럼 서서 대치하고 있는데, 선생이 손수 ‘쌍계석문(雙溪石門)’ - 동쪽 바위에 쌍계라고 새기고, 서쪽 바위에 석문이라고 새겼다. - 이라고 썼다 한다. 또 선생이 지은 비(碑)가 있고, 사찰 안에 영신암(靈神庵)이 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시는 다음과 같다.
쌍계사 안에서 고운을 생각하나니 雙溪寺裏憶孤雲
당시의 일 분분해서 들을 수가 없네 時事紛紛不可聞
동해로 돌아와서도 다시 방랑의 길 東海歸來還浪迹
야학이 닭들 속에 뒤섞여 있겠는가 祇緣野鶴在雞群
또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단성(丹城)에서 서쪽으로 약 15리쯤 험한 길을 구불구불 다 지나고 나면 널찍한 언덕이 나온다. 거기에서 단애를 따라 북쪽으로 3, 4리쯤 가면 곡구(谷口)가 나오는데, 그 입구에 바위를 깎아 새긴 ‘광제암문(廣濟巖門)’이라는 네 글자가 있다. 글자의 획이 강직하고 고아(古雅)한데, 최고운의 수적(手迹)이라고 세상에서 전한다.
석문(石門)에서 1리쯤 가면 귀룡(龜龍)의 고비(古碑)가 있는데, 그 비액(碑額)에 전자(篆字)로 ‘쌍계사고진감선사비(雙溪寺故眞鑑禪師碑)’라는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옆에 ‘전 서국 도순관 승무랑 시어사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이 분부를 받들어 짓다. 광계 3년(887, 진성여왕1)에 세우다.〔前西國都巡官承務郞侍御史賜紫金魚袋臣崔致遠奉敎撰光啓三年建〕’라고 적혀 있다.
광계(光啓)는 당 희종(唐僖宗)의 연호이다. 갑자를 따지면 지금 어언 600여 년이 지났으니, 역시 오래되었다고 하겠다. 인물의 존망과 대운의 흥폐가 무궁히 이어지는 속에 이 무심한 비석만이 홀로 없어지지 않고 서 있으니, 탄식을 한번 발할 만도 하다.
내가 비갈(碑碣)을 본 것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단속사(斷俗寺) 신행(神行)의 비석은 원화(元和) 연간에 세워졌으니 광계보다 앞선다고 할 것이요, 오대사(五臺寺) 수정(水精)의 기문(記文)은 권적(權適)이 지었으니 그 또한 일세의 문사(文士)라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이 비석에 대해서 감회가 끝없이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고운의 수택이 여전히 남아 있는 데다가 고운이 산수 간에 소요할 수밖에 없었던 그 금회(襟懷)가 백세(百世) 뒤에까지 계합되는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가령 내가 고운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가까이 시봉하며 따름으로써 고운으로 하여금 고독하게 불교를 배우는 자들과 지내지 않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령 고운이 오늘날에 태어났더라면 또한 반드시 큰일을 할 만한 지위에 거하면서 나라를 빛낼 문장 실력을 발휘하여 태평의 시대를 장식했을 것이요, 나 또한 그 문하에서 필연(筆硯)을 받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끼 낀 비석만 매만지고 있으니, 그 감회가 어떻다고 하겠는가.
사찰 북쪽에 고운이 올랐다는 팔영루(八詠樓)의 옛터가 있는데, 지금 거승(居僧) 의공(義空)이 자재를 모아 누대를 일으킬 예정이라고 한다.”
청량산(淸凉山)
안동부(安東府) 재산현(才山縣) 서쪽에 있다. 치원봉(致遠峯)과 치원암(致遠庵)이 있는데, 선생이 일찍이 이곳에서 글을 읽었으므로 그렇게 일컬은 것이다.
주신재(周愼齋 주세붕(周世鵬))의 〈유청량산록(遊淸涼山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운이 대당(大唐)에 들어가 황소(黃巢)의 격문을 지은 뒤로 명성이 천하에 진동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 동방의 문장의 시조가 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그가 대명(大名)을 등에 지고 동방으로 돌아오자 동방의 사람들은 마치 신선의 한 사람인 것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그가 한평생 돌아다니며 노닌 물 하나 바위 하나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계속해서 일컬어 마지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령 고운이 참으로 숨김없이 바른말을 하며 배격하였더라면, 5백 년 사직의 고려가 꼭 그와 같이 혹독하게 불교에 빠져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풍혈(風穴)은 극일암(克一庵) - 극일암(極一庵)으로 된 판본도 있다. - 뒤에 있다. 풍혈의 입구에 두 개의 판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최치원이 앉아서 바둑을 두던 판이라고 한다. 그런데 판이 동굴 안에 있어서 비를 맞지 않았기 때문에 천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내 치원암에 들러 총명수(聰明水)를 마셨는데, 그 물이 단애의 갈라진 틈 사이에서 나와 돌 웅덩이에 가득 차 있었으며, 투명하기가 명경과 같고 차갑기가 빙설과 같았다.
그 암자에 들어가 보고 그 누대에 올라가 보니 고운에 대한 감회가 더더욱 사무쳤다. 아, 당시에 임금이 간신을 멀리하고 현인을 가까이하였더라면, 계림(雞林)의 잎이 꼭 그렇게 느닷없이 누렇게 변하여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운은 시운에 맞게 은둔하여 그 이름이 일월과 빛을 다투게 되었지만, 동도(東都 경주(慶州))의 여러 왕릉은 논밭이 됨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더더욱 서글픈 일이다.”
그리고 그의 시 〈치원대(致遠臺)〉는 다음과 같다.
금탑봉 앞 치원대에 올라서니 金塔峯前致遠臺
열한 개 절 문 열린 것이 멀리 보이네 遙看十一寺門開
석양 속의 높고 낮은 푸른 절벽이여 高低翠壁斜陽裏
누가 용면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고 誰倩龍眠圖畫來
또 〈감최고운(感崔孤雲)〉은 다음과 같다.
중국에 갔다가 불우해서 다시 동방으로 西行不遇復東行
끝내 산에서 굶은 한을 그 누가 풀겠는가 竟餓空山恨孰平
무열왕릉 속에선 황금 발우가 나오고 武烈陵中金椀出
가야산 위에는 달 바퀴가 환히 빛나네 伽倻嶺上月輪明
또 〈치원대(致遠臺)〉는 다음과 같다.
산봉우리는 다투어 김생의 필법을 드러내고 衆峯爭露金生法
외로운 달엔 지금도 치원의 마음이 걸려 있네 孤月猶懸致遠心
사흘 묵은 산속에서 사람을 볼 수 없어 三宿山中人不見
천추의 누대 위에 홀로 옷깃을 적시노라 千秋臺上獨霑襟
학사루(學士樓)
함양(咸陽)의 객관(客館) 서쪽에 있다. 선생이 태수(太守)로 재직할 때 올라가 감상하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뒤에 병화(兵火)로 소실되었는데, 고을 관아를 옮길 때 누대도 옮겨 지으면서 그대로 학사루라고 일컬었다. 또 손수 심은 나무숲이 10여 리에 걸쳐 이어져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서 이 일을 기록하였다.
옥계(玉溪) 노진(盧禛)의 시 〈학사루운(學士樓韻)〉은 다음과 같다.
산과 물로 둘러싸인 하나의 별천지 山水縈廻別一天
이곳에 누대 있어 신선이 노니는 듯 樓居此地怳遊仙
촌에 이어진 대숲의 서늘한 기운 자리에 스며들고 村連碧篠涼侵席
연무 자욱한 긴 숲의 그림자 연석에 잠기누나 煙暝長林影蘸筵
점필의 풍류도 벌써 백년의 해를 넘기고 佔畢風流年過百
고운의 묵은 자취 천년이 되어 가는구나 孤雲陳迹歲垂千
인간 세상 부앙하며 공연히 배회하였나니 人間俯仰空延佇
난간에 기대어 읊조리던 소년 시절 생각나네 嘯詠欄楯憶少年
임경대(臨鏡臺)
최공대崔公臺라고도 한다. 양산梁山 황산강黃山江 절벽 위에 있는데, 선생이 일찍이 이곳에서 노닐며 시를 지었다.
청룡대(靑龍臺)
김해(金海)에 있다. 선생이 손수 쓴 글씨가 돌에 새겨져 있다. 왼쪽 옆에 선생의 성명이 적혀 있다.
해운대(海雲臺)
동래(東萊) 동쪽 18리 지점에 있다. 산의 절벽이 마치 누에머리처럼 바닷속에 들어가 있다. 선생이 일찍이 누대를 쌓았는데, 그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다.
주신재(周愼齋 주세붕(周世鵬))의 시 〈등해운대(登海雲臺)〉는 다음과 같다.
대 아래는 가없어서 바로 넓은 바다인데 臺下無涯是大洋
유선 한번 떠나가매 학은 아니 날아오네 儒仙一去鶴茫茫
구만리 치고 날아갈 날개 생길 듯 搏搖九萬欲生羽
술잔 가득 부어 고금을 씻노매라 滌蕩古今呼滿觴
눈 들어 조각구름 보면 대마도도 들어오고 目極片雲看馬島
마음이 나는 곳 어디냐 하면 바로 부상이라네 心飛何處是扶桑
이 유람 너무도 좋아 내 평생 최고이니 玆遊奇絶平生冠
소매 가득 하늘 바람 불어온들 대수리오 滿袖天風吹不妨
가야산(伽倻山)
합천(陜川) 야로현(冶罏縣)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선생이 일찍이 가족을 데리고 여기에 은거하였는데, 지금도 치원촌(致遠村)이라는 곳이 있다. - 후세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공경하여 치인촌(治仁村)이라고 고쳐 불렀다. -
점필재(佔畢齋)가 선생의 시에 차운하여 제시석(題詩石) - 선생의 시가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제시석이라고 칭한다. - 에 다음과 같이 제(題)하였다.
맑은 시의 광염은 푸른 봉우리 내쏘는데 淸詩光焰射蒼巒
먹으로 쓴 흔적은 새긴 바위에 희미해라 墨漬餘痕闕泐間
세상에서는 신선 되어 떠났다 말을 할 뿐 世上但云尸解去
빈산에 무덤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네 那知馬鬣在空山
또 해인사(海印寺) 현판의 시에 화운하여 다음과 같이 지었다.
고운은 시운을 알고 은둔했나니 孤雲嘉遯客
태양처럼 대명이 밝게 전한다오 白日大名聞
갓과 신발은 매미가 허물 벗듯 巾屨同蟬蛻
풍채와 의표는 학의 무리 속에 風標混鶴群
속절없이 긁히고 깎인 바둑판이요 棋盤空剝落
반으로 갈라진 제시석이라 詩石半刳分
소요하던 땅을 가만가만 밟노라니 細履徜徉地
추모의 생각만이 절로 간절하구나 追懷祇自勤
주신재(周愼齋)의 시 〈가야즉사(伽倻卽事)〉는 다음과 같다.
연하를 밟을 목적으로 나막신 신고 오니 爲躡煙霞理屐來
단풍 진 산비탈 구월 경치 정말 아름답고녀 楓崖九月正佳哉
비통함 머금은 반일 동안의 애장사요 含悽半日哀莊寺
눈물을 흩뿌린 천년 세월의 치원대라 灑淚千秋致遠臺
만사에 무심한데 어찌 풍악 좋아할까 萬事無心寧喜竽
백년 인생에 술 있으면 입을 적실 뿐 百年有酒卽銜桮
갓끈 씻고 노년을 보내고픈 홍류동에서 濯纓終老紅流洞
붓을 드니 포사의 재주 아님이 부끄러워 泚筆慙非鮑謝才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깎아지른 낭떠러지와 넓고 평평한 바위에 이름을 지어 깊이 파 놓은 그 글자의 획이 완연하다. 홍류동(紅流洞), 자필암(泚筆巖), 취적봉(吹篴峯), 광풍뢰(光風瀨), 제월담(霽月潭), 분옥폭(噴玉瀑), 완재암(宛在巖) 등은 모두 그가 이름 지은 것들인데, 세월이 오래 지났어도 마멸되지 않았으므로 여기에 유람을 온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로 제공할 만하다. 또 최고운이 지은 절구(絶句) 한 수가 폭포의 석면(石面)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 매년 장마에 물이 넘쳐 광란하듯 씻겨 내려가는 바람에 온통 닳아 없어져서 지금은 다시 알아볼 수 없게 되었는데, 한동안 만져 보다가 겨우 희미하게나마 한두 글자를 분별할 수가 있었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가야산기(伽倻山記)〉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해인사(海印寺)는 신라의 고찰로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보관하고 있다. 남쪽의 바위 절벽은 신라 최 학사(崔學士)가 은거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천석(川石) 사이에 홍류동, 취적봉, 광풍뢰, 음풍대(吟風臺), 완재암, 분옥폭, 낙화담(落花潭), 첩석대(疊石臺), 회선암(會仙巖) 등이 있으며, 동구를 나서면 무릉교(武陵橋)와 칠성대(七星臺)가 있는데, 모두 학사의 대자(大字)를 돌에 새겨 놓았다.”
학사대(學士臺)
해인사 서쪽에 있다. 그 옆에 100자나 되는 늙은 회(檜)나무가 있는데, 둘레가 3장(丈)을 넘었다. 이 나무를 고운이 손수 심었기 때문에 여기에 누대를 세우고 그렇게 일컬은 것이다. 대는 아직도 우뚝 서 있다.
농산정(籠山亭)
홍류동(紅流洞)에 있다. “일부러 물을 흘려보내 산을 온통 감싸게 하였다.〔故敎流水盡籠山〕”라는 고운의 시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은 것이다. - 정자 뒤로 몇 걸음 떨어져서 고운의 영당(影堂)이 있다. 그리고 현재 정자 앞에 비를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월류봉(月留峯)
가야산의 한 지맥이 서쪽으로 나갔다가 남쪽으로 돌아온 곳에 있다. 봉우리 아래에 청량사(淸涼寺)가 있는데, 고운이 노닐었던 곳이다.
무릉십이곡(武陵十二曲)
가야산 입구에 있다. 무릉교(武陵橋)에서 치원리(致遠里)까지 10여 리에 걸쳐 흰 돌이 깔린 맑은 내가 붉은 절벽과 푸른 골짜기를 뚫고 지나가는데 참으로 절경이다. 고운이 각 구비마다 품평을 하며 제목을 붙였고 좌우의 봉우리와 골짜기에도 모두 품평을 하며 이름을 붙였다. 신유한(申維翰)이 선생을 사모하여 경운재(景雲齋)를 세우고 시도 지었다.
벽송정(碧松亭)
고령현(高靈縣) 서쪽 30리 지점인 평림(平林) 안에 있었는데, 고운이 노닐며 휴식을 취한 곳이다. - 지금은 수해(水害)로 무너져서 산언덕으로 옮겨 세웠다.
[주1] 상서장(上書莊) : 이 상서장부터 아래의 가야산(伽倻山)까지는 《동국여지승람》의 기사를 근간으로 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모아 엮은 것이다. 상서장에 대해서 이곳에서는 고운이 진성왕(眞聖王) 때 올린 시무 십조(時務十條)의 상소문을 이곳에서 썼으므로 상서장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상도 경주부〉와 한국문집총간 198집에 수록된 《성호전집(星湖全集)》 권7 〈해동악부(海東樂府)〉에는 “고려 태조가 일어날 때, 고운이 ‘계림황엽 곡령청송(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구절을 이곳에서 지어 올렸으므로 상서장이라고 하였다.” 하였다.
[주2] 이종상(李鍾祥) : 1799~1870. 본관은 여주(驪州), 호는 정헌(定軒), 경주 출신이다. 서양 학문이 국내에 번지자 이를 근심하고 이 사설(邪說)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1866년(고종3)에 미국의 배 셔먼호가 침범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경주진 소모장(慶州鎭召募將)이 되어 의병을 모으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정헌문집(定軒文集)》이 있다.
[주3] 독서당(讀書堂) : 고운이 글을 읽었다고 하는 독서당은 여기에서 말한 경주 낭산(狼山)에 있는 것 이외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지리산 단속사(斷俗寺)와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도 있다.
[주4] 황학(黃鶴) : 옛날 선인(仙人)인 자안(子安)이 황학을 타고 내려온 곳에 황학루(黃鶴樓)라는 누각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이를 소재로 읊은 당(唐)나라 최호(崔顥)의 시 〈등황학루(登黃鶴樓)〉에 “황학은 한 번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흰 구름만 천년토록 부질없이 떠 있도다.〔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 금심(琴心) : 가야금 연주를 통해서 애모하는 마음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탁왕손(卓王孫)의 딸 탁문군(卓文君)을 금심으로 유혹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주6]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기문(記文) : 한국문집총간 98집에 수록된 《기언(記言)》 권28하 〈월영대기(月影臺記)〉를 말하는데, 현재 판본의 〈월영대기〉에는 이 글의 끝부분에 나오는 감나무를 심었다는 내용은 없다.
[주7] 닭을 …… 잡는다 :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흥한다는 뜻이다. 저잣거리에서 이인(異人)이 고경(古鏡)을 팔고 있기에 당(唐)나라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구입해서 보니 그 거울에 글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중에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잡는다.〔先操雞後搏鴨〕”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이 말은 먼저 계림을 장악한 뒤에 영토를 압록강까지 넓힌다는 뜻으로, 고려의 왕건이 신라를 멸하고 새 왕조를 세우는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사략(朝鮮史略)》 권4와 《어정전당시(御定全唐詩)》 권875 〈고려경문(高麗鏡文)〉에 이 내용이 실려 있다.
[주8] 단속사(斷俗寺) …… 것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0 〈진주목(晉州牧) 불우(佛宇) 단속사〉에 “신라 병부 영(兵部令) 김헌정(金獻貞)이 지은 승려 신행(神行)의 비명(碑銘)이 있다.”라고 하였고, 오대사(五臺寺) 조에 “수정사(水精寺)라고도 한다.”라고 하고, 권적의 기문(記文)을 실었다. 권적은 고려 말의 문신(文臣)인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준(權準)의 아들로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고 두 차례나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길창군에 봉해졌다. 원화(元和)는 당 헌종(唐憲宗)의 연호로, 806년에서 820년까지이다.
[주9] 용면(龍眠) : 송대(宋代)의 저명한 화가 이공린(李公麟)의 별호(別號)인 용면거사(龍眠居士)의 준말이다.
[주10] 점필의 풍류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고운의 유적을 찾아와서 시를 읊고 노닐었던 것을 말한다.
[주11] 이 …… 최고이니 :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남만(南蠻)에 와서 죽을 뻔했어도 나는 원망하지 않아, 이 유람 너무도 좋아 내 평생 최고였으니까.〔九死南荒吾不恨 茲游奇絶冠平生〕”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43 六月二十日夜渡海》
[주12] 애장사(哀莊寺) : 신라 애장왕(哀莊王) 3년(802)에 창건된 가야산 해인사(海印寺)를 가리킨다.
[주13] 포사(鮑謝) : 남조 송(宋)의 시인인 포조(鮑照)와 사영운(謝靈運)을 병칭한 말이다.
[주14] 신유한(申維翰)이 …… 지었다 : 신유한(1681~1752)은 조선 후기의 문장가로,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주백(周伯), 호는 청천(靑泉)이며, 고령(高靈) 출신이다.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특히 시(詩)와 사(詞)에 능하였다. 그의 문집으로 한국문집총간 200집에 수록된 《청천집(靑泉集)》 권2에는 〈경운재게(景雲齋偈)〉, 〈경운재가(景雲齋歌)〉, 〈제경운재(題景雲齋)〉 등의 시가 실려 있다.
출전 : 한국고전번역원 이상현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