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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3장 22절- 4장 1절. 그리스도인의 직장 윤리
1. 골로새서 1장부터 3장 11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놀라운 용서와 사랑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러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의 삶>에 대해서 골로새서 3장 12절 이하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첫째로 <교회 생활>을 용서와 사랑으로써, 아름답게 해나가야 할 것을 골로새서 3장 12절로 17절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교회 생활의 연장으로서, 아름다운 <가정생활>을 해야 할 것을 골로새서 3장 13절로 21절에서 말씀드렸습니다.
2. 오늘은 아름다운 가정생활의 연장으로서, <직장>이라는 계급 사회에서 <상전과 종간의 윤리>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3. 오늘의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3장 22-25절. 사회적으로 <종의 신분>을 가진 성도들이 상전들에게 해야 할 윤리
4장 1절. 사회적으로 <상전의 신분>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종들에 대해서 행해야 할 윤리
4. 오늘의 설교 제목은 <그리스도인의 직장 윤리>입니다.
3장 22-25절. 사회적으로 <종의 신분>을 가진 성도들이 상전들에게 해야 할 윤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1. 본문은 고대 농경사회의 노예제도에 있어서 노예와 주인의 윤리를 다루고 있으나, 현대 산업사회의 직업생활에 있어서 고용인과 고용주간의 윤리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농경사회에서의 주종관계를 현대 산업사회의 직업생활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예제도에서의 노예는 직업의 선택권이나 자유가 인정되지 않았으므로 노예 생활을 현대의 직업생활에 적용할 수도 없고, 현대 산업사회의 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는 원칙상 평등 관계이지 주종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대에서의 모든 생산 활동과 편의 생활이 노예제도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생각할 때, 노예 제도상의 기독교 윤리는 사회생활을 제도적으로 유지해주는 사회윤리라는 측면에서 현대산업사회의 직업윤리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은 직업윤리에 있어서도, 주님이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이기심을 버리고 섬기는 마음으로, 주님께 하듯이 직장 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22-23절.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처럼 직장 생활을 할 때도, 사람의 눈가림만 하려는 자세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성실히 행해야 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3. 첫째는, 장차 유업의 상급을 하나님께 받을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눈가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직장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24절.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둘째는, 하나님은 상전이라고 더 잘 봐주고, 종이라고 안 봐주시는 분이 아니고, 이 세상의 신분의 차별이 없이, 외모가 아니 그 사람의 진실을 보고,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25절.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4. 주종관계의 노예제도에 대해서
22절.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Slaves, in all things obey those who are your masters on earth, not with external service, as those who merely please men, but with sincerity of heart, fearing the Lord.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Οἱ δοῦλοι, ὑπακούετε κατὰ πάντα τοῖς κατὰ σάρκα κυρίοις,
the slaves, obey in all things according to flesh master
‘순종하되’(ὑπακούετε)는 현재 명령형으로서(obey) 평상시에 항상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μὴ ἐν ὀφθαλμοδουλίαις, ὡς ἀνθρωπάρεσκοι,
not with eye services, as men-pleasers
동사가 없으나 좋은 번역입니다.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ἀλλ’ ἐν ἁπλότητι καρδίας, φοβούμενοι τὸν Κύριον.
but sincerity in heart, fearing the Lord
직역하면 ‘그러나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마음에 성실함으로 (하라)’는 뜻입니다.
‘두려워하여’(φοβούμενοι)는 현재분사로서(fearing) 언제나 항상 두려워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1) 원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평등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와 타락으로 인해서 노예제도와 같은 계급구조가 발생하게 되었다.
노예가 되는 원인은 주로 전쟁포로나 가난으로 인한 매매 때문이었다.
(2) 성경에서는 여러 곳에서 노예제도를 다루었습니다. (본문, 골 3:22-4:1, 고전 7:21-23, 딤전 6:1-2, 딛 2:9-10, 벧전 2:18-25, 몬 등).
그러나, 이것은 노예제도를 찬성하기 때문이 아니라, 제도적 현실 속에서 올바른 윤리를 가르쳐, 제도를 초월한 참된 인간관계를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 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3) 이 부분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은 노예제도라는 제도의 개혁이 아니라, 노예제도라는 제도상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원칙적으로 직장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일하고, 하나님께 상급 받을 줄 알고 일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하기 때문에, 주인이 없을 때도 성실히 일하고, 주인의 눈가림만 하는 자세로 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2절 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23절.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atever you do, do your work heartily, as for the Lord rather than for men,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ὃ ἐὰν ποιῆτε, ἐκ ψυχῆς ἐργάζεσθε, ὡς τῷ Κυρίῳ καὶ οὐκ ἀνθρώποις,
whatever if you might do, from soul work, as to the Lord and not to men
‘하든지’(ποιῆτε)는 현재 가정법 동사입니다(you might do).
‘마음을 다하여’는 직역하면 ‘마음으로부터 일하라’는 뜻이고(from soul work), ‘하여’(ἐργάζεσθε) 현재 명령형으로서(work) 언제나 마음을 다 하여 하라는 뜻입니다.
1. 아무리 성실히 일했어도 사람은 알아주지 않고, 요셉이나 다니엘처럼 오히려 모함을 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상급을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일하라는 말씀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충성하고, 왕 앞에서도 법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불평 없이 사자 굴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살려주셨지만, 다니엘을 국법을 준수하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욥도 친구들과 사람들이 자기를 범죄자라고 비난하면서 회개하라고 했을 때, 자신은 결백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그들이 무고히 정죄한다고 여겨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사람과 다투지 않았습니다.
요셉도 주인의 아내에게 무고히 모함을 당하여 감옥에 가게 되었으나, 아무 변명 없이 감수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순전함을 지키며, 하나님과 계속 동행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24절.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knowing that from the Lord you will receive the reward of the inheritance. It is the Lord Christ whom you serve.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εἰδότες ὅτι ἀπὸ Κυρίου ἀπολήμψεσθε τὴν ἀνταπόδοσιν τῆς κληρονομίας.
having known that from Lord you will receive the reward of the inheritance
직역하면 ‘기업의 상을 주께로부터 너희가 받을 줄 알므로’란 뜻입니다.
‘너희가 받을 줄’(ἀπολήμψεσθε)은 미래형입니다(you will receive).
‘아나니’(εἰδότες)는 완료분사로서(having known)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τῷ Κυρίῳ Χριστῷ δουλεύετε·
the Lord Christ you serve
‘섬기느니라’(δουλεύετε)는 현재형으로(you serve) 현재 섬기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1) 인간의 모든 행위는 선악 간에 하나님께서 다 감찰하시고(창16:13), 그 행위에 따라 선악 간에 판단하시고 보응 하신다는 사상은 모든 사회윤리의 기본적 개념이 됩니다.
창세기 16: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2) 그러기 위해서, 종들은 육신의 상전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자의식(自意識)을 가지고, 신앙적 양심과 신전의식(神前意識: Coram Deo)을 가지고 섬기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5-7.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직장 생활을 하실 때나, 사업을 하면서 손님을 대할 때, 직장의 상관이나 가게에 찾아온 손님을 주님을 대하듯이 기쁜 마음으로 성실하게 잘 모시기를 바랍니다!
25절.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he who does wrong will receive the consequences of the wrong which he has done, and that without partiality.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ὁ γὰρ ἀδικῶν κομίσεται ὃ ἠδίκησεν,
the (one) for doing wrong will be repaid what he did wrong
직역하면 ‘왜냐하면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가 행한 불의에 대해서 보응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불의를 행하는’(ἀδικῶν)은 현재분사로서(doing wrong) 불의를 행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가 불의 행한 것’에서 동사(ἠδίκησεν)은 부정과거로서(he did wrong) 과거에 확실히 불의 행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보응을 받으리니’(κομίσεται)는 미래형으로서(will be repaid) 장차 미래에 보응받을 것을 가리킵니다.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καὶ οὐκ ἔστιν προσωπολημψία.
and not there is partiality
직역하면 ‘거기에는 편파성이 없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동사(ἔστιν)는 현재형입니다(there is).
(1) 이 성경 말씀대로 손님을 주님 모시듯 하는 성도님들은 사업에 다 성공하시는 것을 봅니다.
공부하는 학생도 공부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으로 알고, 정말 시간을 아껴가면서, 주님 앞에서 언제나 성실히 공부하는 학생은 성공하고, 전도도 잘합니다.
그러나, 맨날 놀다가 주일에는 교회 가서 일한다고 하루 종일 교회에 있는 학생은 공부도 뒤떨어지고, 전도도 안 됩니다.
(2) 과거에 의대 다니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엄마와 두 여동생이 오빠 의대 공부시키려고, 학교와 직장을 그만두고, 빵 장사를 해서, 의대 학비를 댔습니다.
그런데, 그 의대생은 공부는 않고, 매일 교회에서 키타 치고, 인기가 최고였고, 여학생들의 우상이 될 정도로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98%가 합격이라는 의사고시에 3년을 떨어지고, 다른 교회로 옮겨갔습니다.
그 가정은 신앙을 버리고, 너무나 비참해졌습니다.
(3) 옛날 시골 교회에서 보니까, 두 집사님이 농사를 지었습니다.
<김 집사님>은 주일에는 교회에 가서 살고, 평상시는 사람들에게 좋다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 일을 열심히 안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들이 김 집사를 다 좋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농사가 잘 안 되어서, 교회에서도 헌금을 많이 못하고, 사람들에게 전도해도 결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물론 주일에는 교회 일을 잘합니다.
그런데, 평일에는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쌀농사만 가지고는 경제 타산이 안 맞으니까, 비닐하우스를 지어서, 밤에도 전기불을 켜고, 딸기 농사를 지었습니다.
신 집사님은 부자가 되었고, 교회에 말없이 헌금도 많이 하고, 전도의 결실도 잘 맺혔습니다.
(4) 도청에 근무하는 두 안수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배 집사님>은 근무 시간 중에도 동료에게 전도하는 열심을 부렸습니다.
회식 때로 술을 안 먹고 전도만 해서 “예수 계장”이라는 별명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김 집사님>은 근무 시간에 일만 하고, 동료 직원에게 교회 가자는 말을 한마디도 안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도청에서 가장 착실한 직원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교회에서 전교인 전도 초청 잔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예수 계장”이라고 불리었던 배 집사님이 직원들에게 교회 가자고 하니까, 모두 핑계를 대고, 한 사람도 교회에 안 나왔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모범적으로 근무하던 김 계장님이 직원들에게 이번에 전도 잔치가 있는데, 교회 한 번 가자고 하니까, 직원들이 4명이나 교회에 나와서 등록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오늘 말씀을 잘 기억하시고, 직장의 상관이나 가게의 손님을 주님 모시듯이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섬기시므로, 천하보다 귀중한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전도의 사명을 다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4장 1절. 사회적으로 상전의 신분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종들에 대해서 행해야 할 윤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1절.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New American Standard Bible: Masters, grant to your slaves justice and fairness, knowing that you too have a Master in heaven.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Οἱ κύριοι, τὸ δίκαιον καὶ τὴν ἰσότητα, τοῖς δούλοις παρέχεσθε,
the masters, that which (is) righteous and that which (is) equal, to the slave give
‘베풀지니’(παρέχεσθε)는 현재 명령형으로서(give) 항상 베풀라는 뜻입니다.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εἰδότες ὅτι καὶ ὑμεῖς ἔχετε Κύριον ἐν οὐρανῷ.
having known that also you have Master in heaven
직역하면 ‘너희도 하늘에 상전을 모시고 있음을 알므로’라는 뜻입니다.
‘너희’(ὑμεῖς, you)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모시고’(ἔχετε)는 현재형입니다(have).
‘알지어다’εἰδότες)는 완료분사로서(having known)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1. 상전이 종들을 대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공평과 의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상전들은 육신의 종들을 자신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생각하여, 하나님을 모독하는 비윤리적인 압제나 공갈 협박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9절에는, “종들에게 공갈을 그치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권력을 남용하여 인격을 무시하고, 생존을 위협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2.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찌어다.
(1) 주인도 종을 대할 때 신전의식(神前意識)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종들을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유인이라고 해서, 절대자는 아닙니다.
종들은 인간을 상전으로 모시고 살지만, 자유인인 상전도 하나님 앞에서는 생사가 달린 종이라는 사실을 각심하라는 말씀입니다.
(2)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종이며, 평등합니다.
골로새서 3:11. 그리스도 안에서는 종이나 자유인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도,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이니라”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으십니다.
골로새서 3:25.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사회적 신분이나, 종족으로 차별이나, 빈부의 차별이나, 유무식의 차별이나, 남녀노소의 차별을 떠나서 평등하다는 말씀입니다.
빌레몬서 1장 16절에서는 “노예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주인과 동등한 사랑받는 형제”라고 했다.
그래서, 노예제도 폐지는 결국 이러한 기독교 정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현대사회의 모든 조직체 -교회조직, 행정관료 조직, 개인 기업체 조직, 심지어 군대조직-속에서도, 이러한 평등에 대한 기독교 정신은 구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한번 생각해봅시다.>
내가 속한 사회조직체 속에는 지위를 이용하여 공갈 협박, 압제하는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도님은 교회나 직장의 조직 속에서, 하급자로서 상급자를 대할 때, 신전의식(神前意識)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 앞에서 굽신거리며 종노릇하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성실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혹시 성도님은 교회나 직장에서, 서로 믿는 형제라고 상급자에 대한 예의가 없이 무례히 행치는 않습니까?
디모데전서 6: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고린도전서 13:5.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성도님은 교회나 직장의 조직 속에서, 상급자로서 하급자에 대해서, 신전의식을 가지고, 겸손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행동하고 계십니까?
혹시, 성도님은 교회나 사회조직 속에서, 상급자에게 공갈 협박을 당했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입니까?
베드로전서 2:18-20.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님들이 생활하고 계시는 직장 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무슨 일을 하시든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로 일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섬긴다고 생각지 마시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믿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하나님이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혹시, 좋지 않는 상관을 만나서,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주 예수님이 무고히 고난과 죽음 당하신 것을 생각하면서, 끝까지 하나님께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까다로운 주인 밑에서 애매히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유 할 수 있으면, 자유 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상전들께서는 부하 직원이나 종업원들에게 공갈 협박적인 자세로 압력을 행사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사람들의 존경과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이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사람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6장 36절에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면, “하나님께서 후히 되어, 누리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주리라”고 했습니다.
욥기 29장에서, 욥은 사람들에게 도움과 은혜를 많이 베풀어서, 그 가련한 사람들이 욥만 보면, 늘 축복을 해주었다고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말엽에 수많은 백성들이 가난에 굶주릴 때, 부자로서 동포들에게 인정을 많이 베풀었던 부자들은, 해방 후 인공군이 처들어 왔을 때 죽지 않았으나, 물인정 하고 압제하고 일제의 압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들은 재산을 물수 당하고,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무쪼록 “너희 하늘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는 누가복음 6장 36절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