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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3장 10-13절. 나의 환난에 대해 낙심하지 말라
10절.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so that the manifold wisdom of God might now be made known through the church to the rulers and the authorities in the heavenly places.
이는 이제--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알게 하려 하심이니
ἵνα γνωρισθῇ νῦν ταῖς ἀρχαῖς καὶ ταῖς ἐξουσίαις ἐν τοῖς ἐπουρανίοις
so that should be made known now to the rulers and to the authorities in the heavenly places
직역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각종 지혜가 알려지도록 하기 위함이다’는 뜻입니다.
즉 ‘알게 하려 하심이니’(γνωρισθῇ)는 부정과거 가정법 수동태로서(should be made known) ‘알려지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주어는 ‘하나님의 각종 지혜가’(ἡ πολυποίκιλος σοφία τοῦ Θεοῦ)이고,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이라고 한글성경에 번역한 것은 수동태를 능동태로 바꾸어서 번역한 것입니다.
교회로 말미암아--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διὰ τῆς ἐκκλησίας, ἡ πολυποίκιλος σοφία τοῦ Θεοῦ,
through the church, the manifold wisdom of the God
1.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이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는’이란 ‘영원부터 감추인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경륜을 바울 사도에게 알게 해주신 것은’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본 절은 ‘영원 전부터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경륜을 바울 사도에게 계시해주신 것은 교회를 통해서 천사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시려는 웅장한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우주적인 웅장한 감격 속에서 사명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즉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스런 이방인 구원 계획에 따라 이방인 전도를 하였고, 교회들을 세웠는데, 이 영광스러운 구원의 사역은 자신이 비록 감옥에 갇혀있을지라도, 하늘의 천사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될 영광스럽고 웅장한 일이라고 선포합니다.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 찬송을 했던 것과 같이(누가복음 2:13), 바울의 복음 전도로 이방인들이 구원받고 교회들이 설립된 것은 하늘의 천사들도 보고 놀라고 찬송할 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감옥 밖에 있는 에베소 교인들보다 더 가슴에 영광스런 감격이 가득차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13절에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해서 낙심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2. ‘각종’이라는 말(πολυποίκιλος)은 다양한(manifold)이란 뜻입니다.
즉 무지개 빛처럼 다양한 것을 가리키는데, 예컨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공의가 나타난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나타난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각종 지혜’라고 했는데, 고린도전서 2장 13-14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이방인뿐만 아니라 결국 유대인도 구원받게 하신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1:31-33.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이방인)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유대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 본절은 하나님의 각종 지혜가 교회를 통해서 천사들에게 알려진다는 말씀입니다.
즉 교회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아볼 수 있는 전시물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 안에 전에 원수지간이었던 이방인과 유대인 신자들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을 보고, 천사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보고 놀란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원수된 담이 교회 안에서 허물어지게 하신 분이십니다.
에베소서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로마서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골로새서 3: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4. 천사들은 창조시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을 보고 찬양했을 것입니다.
또한 천사들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보고 찬양했습니다( 누가복음 2:13-14).
뿐만 아니라 천사들은 이전에 원수되었던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같이 교회에서 한 몸 이룬 것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4.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그 아름다움에 감탄했을 것이고,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놀랍다고 찬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마귀에게 속아서 타락하고 죽게 된 것을 보고 매우 안타깝게 여겼을 것인데, 예수님을 통해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지혜를 보고 감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508장(구 270장)에는 우리가 전도하는 것을 ‘천사도 흠모할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복음 전도를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12).
5. ‘하나님의 각종 지혜’는 9절의 ‘비밀’과 같은 것으로서,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경륜)을 가리킵니다.
원래 천사들은 죄인이 처벌 받는 것만을 알았고, 죄인이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에게 이방 죄인도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비밀을 계시로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교회 안에서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함께 예배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되고,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바울이 지금 로마 감옥에서 죄수로 갇혀있고 로마 황제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지만, 바울이 전하는 이방인 구원의 복음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이요 경륜이었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로마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하늘의 천사들도 감탄할 복음의 비밀을 선포하면서 감격에 차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환난을 극복해갈 수 있는 능력과 위로가 됩니다.
시편 119:50.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시편 112:1-3.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11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is was in accordance with the eternal purpose which He carried out in Christ Jesus our Lord,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κατὰ πρόθεσιν τῶν αἰώνων, ἣν ἐποίησεν ἐν τῷ Χριστῷ Ἰησοῦ τῷ Κυρίῳ ἡμῶν,
according to purpose of the ages, which He accomplished in the Christ Jesus of the Lord of us
직역하면 ‘영원하신 뜻에 따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가 그것을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그가 이루셨다’(ἐποίησεν)는 부정과거로서(He accomplished) 그가 과거에 확실히 이루신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것을’이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가리킵니다.
1. 그런데 이 비밀의 경륜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구원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 교회에서 다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계획하시고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영원 전부터’(κατὰ πρόθεσιν τῶν αἰώνων)란 직역하면 ‘여러 세대들의 뜻에 따라’(according to purpose of the ages)로서 창세 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이(엡 1:3) 여러 세대들을 통해서 이루어져 왔고, 때가 차매(엡 1:10, 3: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정하신’에 해당하는 단어(ἐποίησεν)의 원형(ποιέω)은 ‘만들다, 건축하다, 행하다’(make, manufacture, construct, do, act)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이 단어는 부정과거형이므로 ‘그가 행하셨다, 그기 이루셨다, 그가 성취하셨다’( He did, He accomplished, He carried out)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계획하신 그 뜻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ἐν τῷ Χριστῷ Ἰησοῦ. in the Christ Jesus) 이루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계획하신 인류 구원의 계획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주셨습니다.
에베소서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시고, 교회를 통해서 이루신다는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의 예정을 잘못 오해해서 길에서 남의 지갑을 주어서 수천만 원을 획득한 것을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잘못 생각하는데, 그것은 유실물 습득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이진다는 것은 헤롯대왕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아기 예수를 애굽으로 피신시키신 것도 바로 하나님의 예정을 이루신 경륜이었습니다.
또한 사울이 교회를 핍박해서 교회를 말살하려고 했으나, 부활하신 에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회개시키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일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교회에 예정하신 뜻을 이루어가시는 경륜인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구원 계획을 영원 전부터 예정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그런데 어떤 교단은 예정교리가 해롭다고 안 가르칩니다.
즉 예정을 가르치면, 공부도 안 하고, 노력도 안 하고, 전도도 안 하고 운명에 맡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건전하게 노력하고, 공부하고, 전도하도록 예정하셨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예정은 사람들의 미련한 전도를 통해서 구원하기로 예정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그러므로 예정을 핑계로 전도도 않고, 공부도 않고, 노력도 않는 것을 잘못입니다.
사람의 미련한 전도를 통해서도 예정된 사람은 순수하게 믿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지혜로운 말로 전도해도 예정되지 않는 사람은 끝까지 믿지 않습니다.
4. 우리 인간도 예정과 주권으로 일해갑니다.
닭을 기를 때도 어떤 닭은 씨암탉으로 정해놓고 다른 닭을 잡아먹습니다.
어미 개가 강아지를 여러 마리 낳았어도 어떤 개를 대를 이어서 기르기로 작정하고 다른 강아지들은 다른 사람을 주든지 내다 팝니다.
농사를 지을 때도 어떤 옥수수는 씨앗으로 남기고, 어떤 호박도 씨호박으로 남기고 어떤 가지도 씨받이로 남깁니다.
자식을 기를 때도 어떤 자식은 공부를 시키고, 어디로 결혼시키고, 무엇을 주기로 마음에 작정합니다.
물론 자식 일은 예정대로 잘되지 않지만, 우리는 주권적으로 예정하고 일해갑니다.
하물며 가장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섭리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격적이신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적 섭리는 무당들이 말하는 운명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은 인격자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인간사에 특별 섭리와 간섭을 하기도 하십니다.
5. 성경에서 말씀한 예정은 운명론과 다릅니다.
운명 철학이란 태어날 때부터 사주팔자 연월일시에 따라 해달별들의 역학에 의해서 사람의 운명이 정해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예정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사람들의 인격활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계획을 이루어가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누구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더라도, 사람이 전도도 하고, 전도 받는 사람이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버림을 받습니다.
로마서 11: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 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예정은 우리의 인격 활동을 허용하면서 예정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래서 바울도 내 속에서 역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나도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6. 이것이 하나님의 인격적인 예정과 섭리입니다.
즉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는 인간의 인격 활동을 인정하면서 이루어집니다.
예컨대, 누가 범죄하여 하나님께서 벌하기로 작정하셨는데, 그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정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면 용서하시고, 다시 범죄하면 벌하셨습니다.
이것은 에스겔 18장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겔 18:24-29.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 만일 의인이 그 공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그로 말미암아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이요,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은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의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 아니냐.
7. 니느웨 백성의 회개와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 선지자를 통해서 40일 후면 니느웨 백성이 멸망하리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니느웨 백성이 요나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금식하고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벌주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철회하시고, 니느웨 백성을 용서하고 살려주셨습니다. (요나서 3:9-10).
그러자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신 대로 니느웨 백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신다고 원망 불평을 했습니다. (요나서 4:1-4).
그 때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박넝쿨 하나를 아꼈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어린아이만 12만 명이나 되는 니느에 백성을 하나님께서 아끼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요나서 4:10-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큰 죄인일지라도 복음 전도를 통해서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12절.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in whom we have boldness and confident access through faith in Him.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ἐν ᾧ ἔχομεν τὴν παρρησίαν καὶ προσαγωγὴν ἐν πεποιθήσει, διὰ τῆς πίστεως αὐτοῦ.
in whom we have boldness and access in confidence, the through the faith in Him
여기 동사(ἔχομεν)는 현재형입니다(we have).
즉 지금 우리가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1.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담대함’(παρρησία)이란 단어는 ‘언어의 자유, 담대함, 확신’(freedom in speech; boldness, confidence)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두려워서 떨지 않고,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경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6절에도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원래 구약 성전에서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죽을까 두려워 떨었었고, 모세조차도 시내산에서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심히 두렵고 떨린다고 했습니다(히브리서 12:21).
물론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린다는 말씀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즉 우리가 심히 두려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덕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목숨을 바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믿고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가서 온갖 도우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찬송가: 왠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3.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간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원래 하나님은 몹시 두려우신 분이신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친근한 아버지 앞에 나가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원래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 같이 두려우신 분이시고(히브리서 12:29), 인간이 가까이 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분이십니다(디모데전서 6:16).
그래서 모세도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나갈 때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히브리서 12:21)고 했지만, 이제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 덕분으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두려움은 형벌 때문인데,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아냅니다(요한일서 4:17-19).
다시 말해서 성도들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서 하나님 앞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4. 둘째로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면서, 필요한 것을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 예수 믿은 우리들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로마서 8:15, 갈라디아서 4:6).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가서 기도할 때 좋은 것을 주시고, 성령을 주십니다.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서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야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5. 그런데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에서 동사(ἔχομεν)는 현재형이 때문에(we have), 언제든지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말씀의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군수나 구청장에게도 아무 때나 도움을 청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어느 때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성령으로 도와주시고, 우리의 영적인 양식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얻게 해주십니다. 할렐루야!
비록 바울 사도는 감옥에 갇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참된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나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의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성령 충만하시고, 늘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3절.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erefore I ask you not to lose heart at my tribulations on your behalf, for they are your glory.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διὸ αἰτοῦμαι μὴ ἐνκακεῖν ἐν ταῖς θλίψεσίν μου ὑπὲρ ὑμῶν,
Therefore I ask (you) not to lose heart the tribulations of me for you
직역하면 ‘그러므로 너희를 위한 나의 환난들에 대하여 낙심하지 않도록 내가 구한다’는 뜻입니다.
한글번역은 잘된 번역입니다.
‘구하노니’(αἰτοῦμαι)는 현재형으로서(I ask) 현재 내가 요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낙심하지 않도록’에서 동사(ἐνκακεῖν)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입니다(to lose heart).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ἥτις ἐστὶν δόξα ὑμῶν.
which is glory of you
동사(ἐστὶν)는 현재형입니다(is).
1. ‘그러므로’란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으므로’란 뜻입니다.
‘나의 여러 환난’이란 바울이 에베소에서 당한 환난(행 19장)과 예루살렘에서 당한 환난(행 22-23장)과 가이사랴에서 당한 환난(행 24-26장)과 바다에서 당한 환난(행 27장)과 로마 감옥에서 당하고 있는 환난(행 28장)을 모두 포함한 환난을 가리킵니다.
‘낙심하지 말라’는 것은 일부 에베소 교인들이 바울의 로마 투옥을 보고 낙심해 있었던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로마 투옥이 교회의 영광이므로 낙심하지 말고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2. 바울 사도는 전도하면서 여러 번 환난을 당했습니다.
1차 전도 여행 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의 반대와 핍박을 당했고(행 13:45), 이고니온에서도 유대인들이 방해하고 돌로 치려고 했고(행 14:5),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때는 돌에 맞아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행 14:19).
2차 전도 여행 때는, 빌립보에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었고(행 16:22-23), 데살로니가와 베레아에서 유대인이 죽이려고 해서 도망갔고(행 17장), 고린도에서는 유대인들이 고소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행 19장).
3차 전도 여행 때는 에베소에서 3만명의 군중이 데모해서 죽을 뻔했고(사도행전 19장), 그 후로도 예루살렘(사도행전 22-23장)과 가이사랴에서(사도행전 24-26장)와 바다에서(사도행전 27장)와 로마 감옥에서(사도행전 28장) 환난을 당했습니다.
3. ‘낙심하지 말라’
이처럼 바울 사도가 여러 가지 환난을 당할 때, 교회의 일부 성도들은 낙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부모가 이유야 어떻든지 여러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매를 맞고, 감옥에 들락거린다면, 자녀들은 부끄럽게 생각하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순교자인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 주광조씨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일본 순사들에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가고 사람들이 자기 집 식구들을 원수 보듯이 했습니다.
그래서 주광조씨는 한 동안에 낙심해서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한국교회가 주기철 목사님을 훌륭한 순교자로 추대하니까, 그제서야 아들이 교회에 다니기 시작해서 훌륭한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위해서 핍박을 당하면, 당시 사람들은 훌륭하다고 존경하기보다 낙심하고 욕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자신의 여러 환난을 보고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4.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바울은 복음 전도를 위해서 당한 자신의 환난들이 성도들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장차 영광을 받기 위해서 현재 고난도 당한다고 했습니다(로마서 8:17-18).
그리고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이 장차 지극히 큰 영광을 이루게 한다고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위해 받는 고난을 기뻐하고,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에게 채운다고 했습니다.(골로새서 1:24).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귀신 섬기는 불신자들에게 당하는 고난에 대해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장차 받을 영광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고 성령 충만하여 잘 전진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