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 이야기
나는 모임이 많은 편이다. 근사한 명칭부터 이름 없는 모임까지 합쳐보니 열 개가 좀 넘는다. 몇십 년을 습관처럼 해오던 모임이 언젠가부터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더 어려워지기 전에 몇 개는 내려놓아야겠다고 마음먹는데 모든 모임이 한결같이 역사가 길다. 가파른 산도 날아올라 갈 듯이 풋풋할 때 시작해서 평지도 절뚝이며 걸어야 하는 지금까지, 세월과 함께 한 모임은 내 삶의 발자국이기도 하다.
둘째 아이를 가져 입덧할 때부터 시작한 가람회는 45년이나 되었다. 직장에서 만난 세 가정의 부부 여섯 명에서 지금은 손주들까지 스물두 명으로 식구가 늘었다. 늘 변함없는 마음에, 가슴 가득 사랑을 담고 사는 사람들이다 보니 이제는 모임이라기보다 서로에게 잘 녹아든 가족 같다.
제일 연장자 가정의 장남이 결혼할 때였다. 우리 남편보고 주례를 서달라 부탁해서 깜짝 놀랐다. 훌륭한 분께 부탁하라고 사양했더니 당신 아들을 오랫동안 가까이서 보아 왔고, 모범적인 가정을 이루며 사는 분께 주례를 부탁하고 싶었단다. 당신 아들도 우리처럼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니 거절하지 말라고 하여 결국은 주례를 선 적도 있다. 성공한 직장인으로 중년이 된 2대와 고등학생부터 갓 돌 지난 3대 손주들까지 스물두 명 모두 한자리에 모여봤으면 좋겠다는 게 우리 원조들의 바람이다.
이름처럼 늘 다정하게 붙어 다니던 친구들의 모임 다정회는 여고 친구들 일곱 명과 남편들까지 열네 명이 함께 하는 모임이다. 달달한 맛이 나는 이 모임은 삼십 년이 넘도록 매월 한 번씩 만나고 있다. 젊었을 때는 해외여행과 국내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모두 일흔이 넘은 지금은 식사와 세상 사는 이야기가 전부다. 뇌졸중으로 수술을 받아 걸음걸이가 불안정한 친구가 있다. 불편함이 없도록 모든 시중을 들어주는 그 남편에게 다정보다 훨씬 깊은 사랑과 헌신이 담긴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이들 부부의 아름다운 모습은 좋은 영화처럼 감동을 준다. 이번 모임에서는 한 친구의 남편이 팔순이라며 그 집 아들이 와서 우리 식사비를 내고 갔다.
섭섭이네는 우리 형제자매 이름의 돌림자 ‘불꽃섭’을 따서 만든 모임이다. 8남매지만 여섯째인 나부터 그 아래 두 동생이 뭉쳤다. 우리 부부 그리고 남동생과 올케, 여동생과 제부까지 여섯 명이 만나는 데 그야말로 쫀득쫀득한 관계다. 여행을 참 많이 다녔는데 비행기를 오래 타지 못하는 나 때문에 이제는 국내 여행으로 방향을 바꿨다.
모임은 담담하게 인생을 써 내려가는 수필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임마다 각기 다른 색깔과 역사와 분위기가 있으니, 덕분에 나는 잘 버무려진 인생을 살아온 듯하다. 모임을 통해 나는 삶의 지혜를 얻었고 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상대를 배려할 줄 알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 씀도 배운 것 같다. 모임을 나가면서 내 삶이 윤기가 돌고 풍성해졌다. 내가 이만큼 평온하고 활기차게 하루하루를 맞을 수 있는 건 모임 속 끈끈한 인연 덕분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서로에게 친구이자 동료이고, 언니이며 동생이기도 하고 이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지역에 살고 있어 가끔 만나지만 이름 없는 모임이 있다. 대학 동기이자 여고 동창이기도 한 다섯 명의 모임인데 얼마 전 한 친구가 우리가 일 년에 한 번씩 만난다 해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만나겠느냐고 해서 가슴이 서늘했던 적이 있다. 스무 명 회원을 가진 모임에서 우리는 몇 명 남을 때까지 이 모임을 계속할까? 라는 한 친구의 말에 두명? 세명? 농담인 듯 진담인 듯 대답하는 말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쓸쓸해질 때가 있다.
지금까지 경조사비를 다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미 받은 사람 기준으로 지급하겠다며 청진회와 가람회, 여울목에서는 제법 무거운 액수를 내 통장으로 입금해 주었다. 시집 안 간 딸의 결혼 축의금을 이렇게 받으니 덩달아 마음도 무거워졌다. 회원 구성원이 다른 모임인데도 똑같은 결정을 한 것이 신기할 정도다. 또 다른 모임에서는 회비가 너무 많이 모아졌으니 통장 무게 줄인다며 식사비 용도로 몇백만 원 남겨놓고는 전원에게 나눠주었다. 이미 두 분이 세상을 뜬 장구회는 남은 회비 돌려주고 모임을 접었다.
다정회 친구는 남은 생은 더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자며 시간 되면 아무 때나 만나자고 한다. 작은 물병 여러 개 있는 가방에서 병 하나 집어 들고 한 모금 마셨더니 락스 원액이었다는 친구의 한탄이나 지갑이 없어져 반나절을 정신없이 찾다가 결국 카드 분실신고까지 했는데 나중에 잘 모셔둔 지갑을 발견했다는 웃픈 실화도 다 내 이야기니 웃을 수가 없다.
칠십이 넘었으니 살아갈 날이 훨씬 더 적게 남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둘 모임을 정리하는 일인 것 같다. 그렇다고 당장 급하게 인연을 접을 수는 없으니. 이 빠진 자리처럼 사진 속에서 사라지는 회원이 늘어나는 모임부터 줄여 나가야겠다.
그렇게 마음먹지만, 40여 년이 넘도록 만나고 이어온 모임을 정리한다고 생각하니 왠지 서글프고 쓸쓸하다. 강산이 일곱 번 이상 변했으니 이젠 사는 일에 담담해져도 될만한데 아직 아닌가 보다. 나만 이럴까.
수필가 변인섭
윤곽
2023년 한국산문 신인상으로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여백문학회 회원
이메일 주소: rosaria3819@da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