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찾으십니까?
피로와 낭만의 정점에서 불을 밝히는
나는 편의점입니다
일인 분씩 포장된 가벼운 욕망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필요는 유리문 안에서 방울 소리로 떠오를 테니
필요한 것이 없다 함부로 단정 짓지 마십시오
24시와 25시의 경계에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청춘이
욕망의 바코드를 찍을 때
그의 눈을 마주치지 마십시오
유통기한을 알 수 없는 노동의 시간을 달려
폐기 직전의 도시락을 먹는 사내를 보아도
쉽게 무릎 꿇어 기도하지 마십시오
1+1로 묶인 삼각김밥처럼 교복을 맞춰 입은 아이들이
컵라면에 노을을 담고 덜 자란 날개 파닥일 때
박수치며 응원하지 마십시오
나는 꺼지지 않는 유목민의 불입니다
이 땅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이들이여
see you again
―김성예, 「편의점」 전문
편의점은 맞벌이 부부나 독신자 등 목적 성향이 두드러진 고객을 겨냥하여 미국에서부터 시작한 연중무휴, 장시간 영업하는 소매점을 말한다. 지금은 도시, 시골 어디든 편의점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다. 편리성이나 무형의 서비스가 제공되는 소비자 가까이에서 입지를 띄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 《겨자씨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김성예 시인의 시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시인의 시 「편의점」이 특히 그렇다. 현실성 있는 문제의식을 조용히 엮어가는 시적 행보에 눈길이 갔기 때문이다.
시인의 「편의점」은 단순한 일상이나 모습들을 그려내고자 함이 아니다. 시인은 ‘편의점’이 되어 깍듯한 인사로써 무엇을 도와줄 것인가를 통해 나에게 들어오는 사람(이웃)과 소통의 창을 열고 맞이하며 보내고 있다. “무엇을 찾으십니까?”에서부터 “see you again”으로 끝나는 시행 속에 화자는 무엇을 팔고, 얼마를 벌 수 있다는 상업적 수완을 들어내지 않고 있다.
편의점(나에게)에 차려진 것은 “가벼운 욕망”이다. 그도 그럴 것이 편의점의 특성상 잡화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 주로 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벼운 욕망은 바코드에 찍혀있고, 알 수 없는 노동의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생을 삼키고 있는 덜 자란 어린것들의 날갯짓에까지 인식된 표이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길, 유목민(nomads)의 길 근처에 있는 “가벼운 욕망”의 공간 「편의점」은 네 번의 부정형을 이끌고 있다. 그 네 번의 부정형은 단정 짓지 말고, 마주치지 말고, 기도하지 말고, 응원하지 말라는 것이다.
일인 분씩 소포장도 돼 있는 편의점으로 “필요는 유리문 안에서 방울 소리로 떠오를” 것이니 주저하지 말고 들어오라고 권한다. 방울 소리는 인식의 또 다른 방식이다.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처럼 방울 소리로 존재의 방향을 확장해 나간다. 그러므로 방울 소리는 투명한(“유리문 안에서”) ‘나’의 인기척일 것이며, “가벼운 욕망”에 대한 요청으로 나타나는 단정 짓지 말아야 할 신호와 같다.
편의점은 연중무휴를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자정이 넘도록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청춘이” 편의점에서 욕망을 살 때 마주치지 말아야 할 건 그의 눈이다. 그는 “24시와 25시”의 경계인으로 이 시대의 젊은이들의 다른 이름이다. 『25시』는 1949년 발표된 게오르그의 소설이다.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인간의 인간다움을 깊이 캐묻고 있는 『25시』는 모든 구제의 시도가 무효가 된 시간, 인간이 노예가 된 시간, 최후의 시간에서도 한 시간이나 지난 무력한 시간이다. 이 경계인의 눈을 마주치는 것은, 그의 분노를 더 자극할 수 있기에 화자는 눈을 마주치지 말라고 금하고 있다.
시인은 식사 기도에 대하여 재고할 것을 알린다. “유통기한을 알 수 없는 노동의 시간”과 “폐기 직전의 도시락”은 이 시대의 강력한 은유다. 대가와 한계가 조마조마하다. 불안하기 짝이 없다. 형식적인 감사기도를 드리는 처지와 너무 격이 맞지 않는 상황을 시인은 환기하고 있다. “쉽게”라는 말이 얼마나 난무하는 시대인가. 그 쉬움에 대하여 단호하게 차단하는 시인의 결 고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왜 마지막 부정형은 손뼉 치며 응원하지 말라는 것일까. 정형의 틀(“삼각김밥”)에 매인 아이들에 대한 강력한 배려이다. “컵라면에 노을을 담고”라는 말은 낭만의 정서가 아니다. 늦게까지 시달린 아이들은 1+1처럼 세상이 내놓은 덤을 풀어야 하는 아이들이다. 그 어린 것들이 면발을 건져 올리며 꿈꾸는 세상, 아직 날지 못하는 어린 새 같은 아이들에게 “박수”는 옳다거나 응원이 될 수 없다.
김성예 시인은 “유목민의 불”로 자처하며 안타까운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그 꺼지지 않는(연중무휴의 편의점) 내면에 장착한 따뜻한 응시로 이 혼돈의 시대에서 잠시 위로받는다. 편의점을 찾는 사람들 모두에게 다시 만나자는 말(“see you again”)은 상투적인 말이지만, 모국어로는 다하지 못한 언사로 다민족까지 아우르는 온정을 놓지 못하고 있는 시인의 마음이다. 이 ‘애까심’을 놓지 못하고 있는 시인의 밤은 오늘도 그래서 불을 끄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