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화墨畫 / 김종삼(1921-1984)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은 어느 성향이신지요? 조용하게 말하시나요, 아니면 큰소리로 말하시나요? 격앙된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김수영 시인이라면, 조용하게 말하는 사람이 김종삼 시인이라고 말합니다. 인용한 시에서도 보듯이 조용히 몇 마디 말로 표현하고 있으니까요.
시인은 「나의 본적」에서 “나의 본적은 인류의 짚신이고 맨발이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가난과 고통, 죽음에 깊이 있게 천착한 시인으로 지극히 작은 존재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짚신과 맨발의 시학’을 통해 그려낸 한 편의 명화가 「묵화」입니다. 흑백사진 같은 ‘먹그림’은 유화로 종이나 판자에 그려낸 이중섭의 그림과는 그 질감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이중섭의 피골이 상접한 <흰 소>는 6.25전쟁 이후 먹고 살기 힘들었던 상황을 강렬하게 표현했다면 시인의 먹그림 속에 있는 소는 연민의 정을 나누는 애틋함이 들어 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외양간에 들어 온 일소와 할머니, 소를 소재한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 같습니다. 주인이 관심만 가져주면 호랑이도 무서워하지 않는 게 소라는데 외양간에 돌아와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는 손을 얹어 위로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죽살이 잘 쳤다고요. 보통 소와 일소의 수명은 배나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일소의 수명은 30년까지도 산다고 하니까요. 최소한 십 수 년은 할머니 집에서 식구로 지낸 이력이 보입니다.
이런 연대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소는 지능이 좋아 자기 집도 잘 찾아가고, 자기를 부리는 사람의 일머리도 알아 호흡을 맞출 줄 아니 상일꾼 중에 상일꾼이라 합니다. 고된 하루를 보낸 소는 멱을 감고 싶었겠지만 물을 마시고 있습니다. 할머니도 많이 시장할 텐데 소부터 물을 먹이고 있는 할머니의 손이 “얹혀졌다”는 유일한 종결어미는 차례로 쉼표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이 하루”는 “함께” “서로” “서로” 보낸 하루입니다. 마침표 하나에 쉼표 셋 뿐인 이 시가 차지하고 있는 여백의 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습니다. 손동작 하나에 말 못하는 짐승이라지만 다 말했고, 다 알아듣고 있는 청정무구한 언어의 도량度量을 느낍니다. 청량감마저 느끼게 하는 언어의 깨끗하고 간결한 문체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서로는 “발잔등이” 부어오르도록 맨발로 일했습니다. 할머니는 아마 당신의 발잔등이 부은 것보다 더 마음이 아렸을 겁니다. 시인이 「나의 본적」에서 “맨발이다”라고 함같이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는 모세의 소명처럼 강렬하게 투영되었습니다. 하루를 살아낸 상처가 부어있습니다. 겸손한 노동이 신성하게 느껴지는 것은 소의 상처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할머니와 소는 고요하고 쓸쓸한 “적막”에 처해집니다. 세상 시끄러웠어도 서로에게는 드러누울 공간이 있기에 무거운 몸을 부려놓습니다. 여기에 영성적인 양상樣相이 보입니다. 이 영성은 너와 나는 하나라는 대자적 영성입니다. 우리는 반복하여 기도하고, 소는 되새김질(반추)을 합니다. 반추하는 시간, 고요하고 쓸쓸한 나만의 시간이 있어 내일도 묵묵히 살아갈 우리는 여백의 주인공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