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4보루: 아차산 일원의 보루는 원형 또는 타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기본 적으로 외부의 성관과 건물을 비롯한 내부 시설물로 구성되어 있다. 외부의 성벽은 주변에 서 구하기 용이한 화강암 석재를 이용하였는데, 아차산 4보루처럼 치석을 하여 잘 다듬은 석재를 사용하여 비교적 정교하게 축조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 치석되지 않은 석 재가 많이 사용되었다. 보루내부의 시설물로는 지상 건물과 저수지 시설, 배수 시설등이 일 반적이나 그 외에도 보루의 특징에 따라 여러 가지 시설물이 설치되었다. 아차산 4보루와 용마루 2보루의 경우 건물지 외곽에 간이 대장간 시설이 설치되어 있어서 철기류에 대한 간단한 수리 정도는 직접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차산 4보루에서 출토된 유물들: 고구려 초소 요즘에 내무반에 해당하는 건물지 유적 우연 히 발견된 평지의 가매장 흔적, 주거 흔적 등을 통해 백제 유적이겠거니 했다가 산에서 유 물들이 나오기 시작하며 전형적인 고구려 유적임을 알게 되었다. 색이 붉고 고구려 형식의 토기들, 그리고 그릇보다 더 많이 나오는 창, 화살촉, 칼 도끼 철퇴, 투구(투구 정수리 부분 의 복발) 등의 무기류가 많이 나옴으로써 이곳이 주거시설이라기 보다는 군사 관련 시설, 그것도 능선을 따라 산성을 지키는 초소의 흔적임을 확신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등자 나 갑옷 등이 나오면서 중무장 기병들 즉 고구려 최정예부대를 포함한 고구려군이 이 보루 성에서 근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아차산 보루의 고구려 군들은 소대, 중대, 대대의 부대 체제를 갖추고 운영되고 있었으며 보병, 기병, 궁병 등이 전술적으로 소대를 이루고 그 위에 중대 그 위에 대대 등으로 편성 되어 있는 부대였음을 알 수 있다. 초소 안에 물을 길어다 놓고 썼으며 쓰고 남은 오폐수는 별도의 배수구를 만들어 배출했다. 그리고 식량은 거의 자급 자족을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간단한 농기구로 볼 수 있는 유물들이 아차산성 보루들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지휘관은 따로 방을 만들고 온돌 시설 도 비교적 잘 갖추어져 그 당시에도 지휘관은 예우를 해주었던 것을 알 수 있고 각 보루마 다 취사장이 있고 끼니마다 밥을 지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고구려 산성 등에는 가끔 탄화 미라고 해서 산능선의 유적에서 불탄 볍씨들이 발견되어서 이런 추측에 사실감을 더한다.
▲이곳에서는 한강을 비롯하여 주위는 그야말로 일망무제이다. 아차산에서 바라본 한강: 고구려군의 가장 유명하고 유능한 장군이었을 온달은 평강공주의 남편이라는 허울 좋은 지위보다 대장군으로서 존경을 받았을 테고 그가 이렇게 신라에 빼앗 긴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다 전사한 것은 고구려 군의 사기를 많이 꺾어 놓기에 충분했을 것 이다. 그리고 온달은 평온왕, 그리고 온달이 죽은 해 왕이 된 영양왕 등에게 큰 죄를 지은 몸이니 사실 그 시체를 가지고 평양성으로 가져 오기엔 뭐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단양의 온달산성에 그를 묻었다느니, 아단성에서 죽은 그의 주검을 옮기는데 너무 억울한 마음이 남아 있던지 관이 움직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길에 무덤을 썼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 오는 것 같다. 하지만 단양 영춘면에서 발견된 적석유구지는 무덤은 아니었던 것으로 발굴 결과가 나왔다. 과연 온달은 이 아차산 어디 아니 산 아래 저 북쪽 어디쯤에 묻혀 있는 것 일까?
▲아차산 4보루에서 가며 본 우측으로 용마산이 보인다.
▲아차산 4보루를 뒤돌아본다.
▲소나무숲 암반 능선으로 아차산 3보루로 간다.
▲아차산정상3보루295.7m으로 올라간다.
▲아차산(峨嵯山,해발295.7m): 아차산은 서울과 구리시에 걸쳐 있는 아차산은 해발 295m의 야트막한 산으로 산세가 험하지 않아 구리와 인근 시민들이 가벼운 산행을 위해 자주 찾는 곳이다. 조선 시대에는 지금의 봉화산을 포함하여 망우리 공동묘지 지역과 용마봉 등의 광범위한 지역 모두 아차산으로 불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백제의 도읍이 한강 유역에 있을 때 우뚝 솟은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일찍부터 이 아차산에 흙을 깎고 다시 돌과 흙으로 쌓아 올려 산성을 축조함으로써 고구려의 남하를 막으려는 백제인의 노력이 있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맞은 편 남쪽에 있는 풍납동 토성과 함께 중요한 군사적 요지로서 백제의 운명을 좌우하던 곳이기도 하다. 아단성(阿旦城), 아차성(蛾嵯城), 장하성, 광장성 등으로 불리우기도 하여 백제, 신라, 고구려가 한강을 중심으로 공방전을 장기간에 걸쳐 벌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서울특별시의 광진구, 중랑구와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 위치한 산이다(고도:286m). 조선 시대에는 양주목에 속하였다.『삼국사기』에는 '아차(阿且)'와 '아단(阿旦)' 2가지가 나타나며, 『고려사』와『세종실록』「지리지」에는 '아차(峨嵯)'로 기록되어 있다. 아단성(阿旦城)이 아차성(阿且城)으로 다시 아차성(峨嵯城)으로 표기가 변화되어 오늘날의 지명으로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경기지』 양주조에는 "화양사(지금의 영화사)가 악계산(嶽溪山)에 있다."고 되어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 양주목에 "주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와 『여지도서』 보유편에 "아차산봉수는 망우리면에 있다. 관아의 남쪽으로 50리이다. 북쪽으로 한이산 봉수의 신호를 받아 남쪽으로 15리에 있는 목멱산 봉수에 신호를 보낸다."하고 전한다. 용마봉(349m)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주목에 보여지는데, 수릉(綏陵)에 대해 "헌종 병오년에 용마봉으로 옮겼다가····"로 언급하였다. 한편, 일부 사료에는 아차산성이 장한산성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현재 용마봉 정상에는 해발 높이를 측정하는 기준점이 설치되어 있다. 아차산(阿嵯山·峨嵯山·阿且山) 기슭에 사는 사람들은 아차산을 아끼산·액끼산·에께산·액계산·액개산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다. 옛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에는 ‘아차(阿且)’ 또는 ‘아단(阿旦)’으로 언급되며, 조선시대에 쓰인 『고려사』에는 ‘아차(峨嵯)’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특히 태조 이성계의 휘가 ‘단(旦)’이기 때문에 이 글자를 신성하게 여겨 ‘단’이 들어간 이름은 다른 글자로 바꾸면서 ‘단’ 대신 이와 모양이 비슷한 ‘차(且)’로 고쳤는데, 이때 아차산도 음은 그대로 두고 글자만 고쳤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아차산·용마산·망우산 등을 모두 ‘아차산’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아차산에서 바라본 한강: 고구려군의 가장 유명하고 유능한 장군이었을 온달은 평강공주의 남편이라는 허울 좋은 지위보다 대장군으로서 존경을 받았을 테고 그가 이렇게 신라에 빼앗 긴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다 전사한 것은 고구려 군의 사기를 많이 꺾어 놓기에 충분했을 것 이다. 그리고 온달은 평온왕, 그리고 온달이 죽은 해 왕이 된 영양왕 등에게 큰 죄를 지은 몸이니 사실 그 시체를 가지고 평양성으로 가져 오기엔 뭐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단양의 온달산성에 그를 묻었다느니, 아단성에서 죽은 그의 주검을 옮기는데 너무 억울한 마음이 남아 있던지 관이 움직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길에 무덤을 썼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 오는 것 같다. 하지만 단양 영춘면에서 발견된 적석유구지는 무덤은 아니었던 것으로 발굴 결과가 나왔다. 과연 온달은 이 아차산 어디 아니 산 아래 저 북쪽 어디쯤에 묻혀 있는 것 일까?
▲아차산 정상 3보루(해발295.7m): 예전에는 아차산 4보루가 아차산 정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적인 아차산 정상은 3보루 이며, 지형도상 '아차산' 표기지점 보루를 설명하는 안내판에는 阿且山, 지도에는 峨嵯山으로 한자표기가 다르다.
▲인구 천만 메트로시티 서울의 거대한 도시화로 수락지맥 마루금의 흔적을 찾기란 아예 불가 능해졌지만 그래도 어린이대공원과 서울숲 등으로 그 명맥은 유지되고 있음이다.
▲.마루금 우측 긴고랑(중곡사거리)계곡과 서울시내을 바라본다.
▲긴고랑과 용마산으로 올라가는 능선
▲아차산에 대한 유래는 옛날에 홍계관이라는 겁쟁이가점을 잘 본다는 소문이 있어서 명종이 불러 시험을 해볼려고 할 때 여기 상자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아 맞히라는 문제를 냈고 홍계관은 잠시 생각하더니 쥐 다섯 마리가 들어있다고 얘기하자 왕이 상자를 열어보니 여기에는 쥐가 한 마리 들어있었다. 그 걸 본 왕은 사람을 속인 죄로 홍계관을 산(아치산)에서 처형하라고 명령하라고 명령한 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쥐의 배를 갈라 보았더니 뱃속에는 새끼4마리가 들어있자 왕은 후회를 하고 아차 내가 잘못 알았구나하고 후회했다고 해서 하인을 시켜서 처형하지 말라고 했으며 하인이 산으로 가서 처형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지만 그걸 본 처형 수는 빨리 처형하라는 소리인 줄 알고는 처형해 버려 아차 했다는 이야기에서 아차산이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아차산의 이름이 이미 있은 후에 홍계관의 이야기를 삽입한 경우이기 때문에 신빙성은 많이 떨어진다. ▲좌측 둘레길이 있으나 우측 삼각점봉으로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