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산동 일기 -
윤 태 열
옛적에 한 여인이 달서천에서 빨래를 하던 중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산이 날아와 떨어진 곳이라 하여 날뫼라고 불렀다. 대구 인근 시골에서는 너나없이 조그만 땅뙈기로는 생계가 어려워 큰 시장이라고 불리는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일품이라도 있을지 모르는 기대감으로 터를 잡았다. 더러 고향이 이북인 이들은 귀향길을 놓쳐 날뫼를 근거지로 하여 그들 특유의 부지런함과 근면성으로 삶을 이어갔다. 언덕으로 이어진 꼭대기 황토로 덮혀진 봉분은 오래전부터 원님의 무덤으로 전해졌고, 봉분 아래 부채꼴 모양으로 여러 가구가 형성되었다. 한 두어 집 에서는 하얀 염소를 키웠는데 연분홍 젖은 충분한 칼슘과 특유한 고소함으로 우리들의 성장에 도움을 주었으며, 염소가 수시로 때때때 하고 울던 꼭대기를 때때만데이 라고 불렀다. 때때만데이 부근 무덤 위에 올라서면 소방서의 망루도 보이고 더 멀리 대덕산도 아래로 보였다. 붉은 벽돌건물의 화장터에서는 검은 연기가 띠를 이루며 하늘로 이어지곤 했다. 형들은 사람이 죽어 시체를 태우는 것이라 했다.
어느 날 우리 집 곁방에 새로운 가족이 이사를 왔다. 할머니와 그 자식들인 터벅머리 총각과 간호원을 한다는 처녀였다. 할머니는 천주교 신자인데 늘 조용하고 말을 아끼곤 했다. 평소 찬물에 밥 말아 김치 몇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항상 십자성호를 긋고 하느님께 일용할 양식을 주신데 데하여 감사하곤 했다. 처녀는 간호학원을 마치고 기독교 계통의 병원에 근무하면서 할머니에게 가끔 생활비를 보태곤 하였다. 또 이른 아침이면 성가대원답게 목청을 틔우고 찬송가 한구절로 우리의 늦잠을 깨워주었다.
네모진 얼굴에 까칠한 수염을 가진 30대 중반인 총각은 뚜렷한 직업도 없이 동네 허드렛일을 해주고 밥술이나 얻어먹는 처지였다. 우리는 그를 홍씨 아저씨라 불렀다. 당시 언덕배기에는 수도시설이 없었다. 펌프에 마중물을 부어 끌어올린 지하수를 생활용수로 사용하였으나 가끔 먹기도 하여 배탈이 나곤 했다. 비가 오면 모여진 빗물은 비누가 잘 풀려 빨래는 용이 했으나(잘 되었으나) 그 양은 늘 턱없이 부족했다. 이러한 사정이 통하였는지 만데이 공터에 두어 평의 저수조가 만들어 졌고 물차는 염소 소독 냄새가 흠신(물씬) 풍기는 수돗물로 가득 채워졌다. 관리책임자로는 주위로부터 성실함을 인정받은 홍씨 아저씨로 정해졌다. 그가 주로 하는 일은 수조 밑 부분에 짧은 투브(튜브)를 묶어 접고 펴면서 물이 흐드러지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물장사라는 직업이 얻자 홍씨 아저씨에게는 혼담이 오갔고 드디어 수더분한 처녀와 결혼도 하였다. 단칸방이라 할머니가 거쳐할 곳이 없어 처녀의 방으로 옮겼다. 늦게나마 아들의 짝을 찾았음을 기뻐하였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크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어느 여름날 우리는 110 볼트 선풍기의 더운 바람과 함께 진공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무시무시한 법창야화에 귀를 모으고 있었다. 그때 대문이 열리며 아저씨는 양손에 아이스케이크를 잔뜩 쥐고 와서는 우리를 평상에 모이게 하고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는 묻지도 않았건만 갑자기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저씨의 고향은 지리산 끝자락인 산청이었다. 오천 석 집안으로 인근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집안이었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 되자 당시 군량미 보급을 구실로 수시로 공출을 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무기력하게 그들의 수탈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몇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드디어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옛말에 공성보다 수성이 훨씬 더 어렵다 했다. 재물은 곧 없어질 것이고 권력을 쥐고 있는 한 재물을 지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전문학교에 보내 신학문을 배우게 했고 총독부의 관리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할이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동료들과 함께 사회주의 동맹에 가담하여 활동 하였다. 해방이 되었으나 할아버지는 기운이 떨어지고 조금씩 쇠약해져 갔다. 마지막 숨을 고르면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너와의 인연은 여기까지 인갑다. 너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리해야지. 다만 식솔은 굶주리게 하지 마라. 그것은 죄악이다.” 라며 이승의 끈을 놓았다.
해방 이후의 현실은 참담했다. 미군정 하에서 좌와 우의 이념으로 갈라져 사회는 더욱 혼란스러윘다. 아버지는 소작인을 모아 각자의 능력대로 배당하고 소작료를 대폭 낮추어 주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은 서울 대전을 거쳐 경남 일대도 점령하고, 그들의 세포조직을 이용해 인민해방 공동분배라는 명분 아래 고리대금업자와 악덕 지주들을 색출해 처단하는데 열을 올렸다. 다행스럽게 이버지는 부락민의 인심을 얻어 자아비판 선에서 끝이 났다. 국군의 9 28 서울 수복이 이루어지자 퇴로가 막혀버린 패잔병들은 지리산을 근거지로 하여 항전에 들어갔다. 이들은 우리가 흔히 빨치산이라고 하는 산사람으로 불리었다.
군·경의 토벌과 동시에 공산주의 사상에 동조하거나 부역한 자도 색출해 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요행이 없었다. 억울하게 가장을 잃어버린 가족들의 밀고를 아버지는 결코 피해갈 수 없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아버지는 “임자 살고 봐야 합니다. 여기 토지문서는 요긴할 때 쓰시오. 또 만나게 될꺼요. 미안하오. 정말 미안하오. 잘 견디시오.”라며 커다란 가죽가방에 옷을 구겨 넣고는 떠나고 말았다. 죽음을 예고하는 검색이 좁혀 오자 어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고향을 떠났다. 여러곳을 전전하였으나 빨갱이 가족이라는 굴레는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주변에서는 차가운 시선과 심지어 돌멩이까지 날아들었다. 이곳저곳 여러 곳으로 피해 다니다 마침내 어떤 인연이 닿았던지 반고개를 넘어 날뫼 부근 비탈진 언덕을 올라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두어 해가 지나자 어떤 행색이 초라한 노년의 남자가 홍씨 아저씨 가족을 찾아 왔다. 조심스럽게 이것저것을 물어보더니 마침내 아버지의 이름을 대며 그간의 행적을 알려 주었다. 아버지가 산으로 올라왔을 때에는 북으로부터 모든 보급이 끊어져 어쩔 수 없이 인근 마을로 내려가 식량을 강탈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사회주의 사상을 인정받아 조직과 교육을 담당했다고 했다. 산사람 중에는 여성 동무도 여러 명 있었는데 그중 단발머리를 양쪽으로 묶고 방울을 달고 다녀 쌍방울이라 불렸던 여자도 있었다고 했다. 그 여인은 동작이 민첩하여 연락책 업무를 맡았는데 하도 신출귀몰하여 군경에서 현상금을 내걸 정도였다고 한다. 아버지와 쌍방울은 서로 연민의 정을 느껴 사상적 동지가 되어 버렸다. 포위망이 점차 좁혀 오자 아버지는 동지였던 나이든 사내에게 한 덩이의 금을 내주며 식구들을 찾아서 전해 달라고 당부하며 끝내 북으로 떠나 버렸다고 했다.
할머니는 저간의 사정을 다 듣고는 갑자기 십자 성호를 그으시고 ‘주님 남편을 살려 주시어 감사합니다.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라며 마른 가슴을 쓸어내고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할머니는 금덩이를 반으로 갈라 절반을 미사때 예물로 바치고 나머지로는 잔치를 벌였다. 그날은 마침 수돗물 배급 날이기도 했다. 여느 때처럼 양동이와 물지게가 참 길게도 이어졌다. 아저씨는 연신 웃으며 손놀림이 바빴다. 오래 말문을 닫았던 할머니의 말문은 틔었고 입가에서는 모처럼 환한 웃음도 찾을 수 있었다.
첫댓글 한국 현대사의 한 시대의 아픔이 녹아 있네요. 감동적이고 짠한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이야기는 기록되어야 한다는 걸 절감하게 만드는 글이었습니다.
귀한이야기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년시절의 궁핍했던 옛애기를 지방 사투리도 넣어가며 진솔하게 쓰셨습니다. 잔잔한 감동이 옵니다.
날뫼 비산동의 유래도 정겹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저도 생활수필을 발굴해 보겠습니다.
24기 신입생으로 선배님의 지도와 안내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저도 잘 읽었습니다 떼떼만데이 가 그렇게 생겨난 줄 이제 알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