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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배 전선, [2025-11-11 오후 12:57]
789노동자대투쟁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현장조직,
노동자계급 해방운동의 씨앗이 되다
2025년 11월 12일
단언컨대, 모든 조직은 역사의 구체적 산물입니다! 탁상공론에 갇힌 마르크스주의는 필요 없습니다. 우리 운동가의 사명은 격동하는 대중의 움직임 속에서, 투쟁의 파고 속에서 가장 전형적인 혁명적 맹아(싹)를 포착하고 이를 노동자 계급 전체의 전략으로 일반화시키는 것입니다.
글 차례
Ⅰ. 현장 조직의 역사적 정당성: '이론보다 현실이 풍부하다'
Ⅱ. 1987년 7·8·9월 대투쟁: 노예적 굴종을 끊고 세상의 주인이 되다
Ⅲ. 거제 대우조선 '노민추': 어용 집행부에 맞선 조직적 창조
Ⅳ. 현장 조직의 전략화: 5월 동맹의 이론과 현대자동차 노동운동에 적용
Ⅴ. 한국적 현장 조직의 독자적 탄생과 역할 (심층 분석)
Ⅵ. 혁명적 전위-현장 조직-노조: 투쟁을 위한 삼위일체 전략
Ⅶ. 현장 조직의 개량화, 권력 도구화: 역사의 쓸쓸한 퇴장과 우리의 교훈
Ⅰ. 현장 조직의 역사적 정당성: '이론보다 현실이 풍부하다'
역사는 우리에게 '이론보다 현실이 풍부하다'는 준엄한 교훈을 이미 주었습니다.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 시기를 보십시오. 전위 조직인 '당'과 대중 조직인 '노조'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도식적인 인식을 뒤엎고, 노동자들은 소비에트라는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자발적으로 탄생시켰습니다. 레닌은 당장 그 조직이 자신의 이론적 틀에 맞지 않더라도, 이미 만들어진 현실이자 광범위한 호응을 얻는 대중 권력의 싹이었기에 즉각적으로 그 활용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 노동계급 운동사에서 19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은 이 소비에트와 같은 자연 발생적 현장 조직이라는 혁명적 씨앗을 뿌렸습니다. 1987년부터 1992년까지 노동 운동이 가장 왕성했던 이 시기, 현장 조직은 한국 노동 운동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비록 오늘날(2025년) 그 수명이 다한 듯 보이나, 그 역사적 역할은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Ⅱ. 1987년 7·8·9월 대투쟁: 노예적 굴종을 끊고 세상의 주인이 되다
우리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6·29 선언이라는 기만적인 타협을 목도했습니다. 그러나 탄압의 쇠사슬이 잠깐 이완된 그 작은 틈을 노동자 계급은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울산 현대에서 불이 붙었습니다! 82~83년부터 노조 건설을 준비해 온 현대엔진 동지들이 7월 5일, 기습적으로 울산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민주노조의 깃발을 치켜들었습니다. 이 깃발은 이후 석 달 동안 전국을 태풍처럼 휩쓸었습니다. 울산에서 거제, 마산, 창원, 진주, 부산을 지나 서울의 구로공단, 인천공단까지! 전국적, 전업종에서 3천여 건의 파업과 1천여 개의 민주노조 건설이라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한국전쟁 휴전 이후 최대 규모의 노동자 투쟁이었습니다!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살아가던 노예적 굴종을 단숨에 떨쳐버리고, 노동자들이 '생산의 주인이 세상의 주인'임을 만천하에 선포한 역사적 대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양김(김대중, 김영삼)은 민주노조가 혁명적 운동과 연계될 조짐을 보이자, 전두환-노태우 정권의 탄압에 보조를 맞추며 노동자들의 파업 물결을 석 달 만에 사그라들게 했습니다. 노동자 계급에 대한 적대성은 이때부터 단 한 번도 어김없이 자행되었으며, 형식만 바뀌었을 뿐 현 정부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동지가 공장 앞에서 희생된 사건은 이러한 적대성의 비극적인 인용 사례입니다.)
Ⅲ. 거제 대우조선 '노민추': 어용 집행부에 맞선 조직적 창조
이 투쟁의 최전선, 남도의 끝자락, 거제 대우조선소를 기억하십시오. '소금꽃이 피어난다'는 비참한 열악함과 산재 사고가 빈번했던 조선소에서 노동자들이 일어섰습니다.
피와 땀으로 만든 민주노조, 그러나 초대 위원장이었던 '털보 사나이' 양동생은 기쁨도 잠시, 곧바로 사측의 어용이 되는 황당한 배신극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혁명적 선진 노동자들은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민노련(인천지역 민주노동자 연맹)의 조직적 성과를 바탕으로 '노조민주화 추진위원회(노민추)'를 결성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어용에게 투쟁의 성과를 갈취당할 위기에서 일궈낸 기막힌 반전이었습니다!
노민추는 조직적 완결성을 보여주었습니다. 형식적인 대의원 제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0명당 1명의 소위원을 선출하여 대중적 기반을 튼튼히 다졌습니다. 2년 후 민주 집행부를 장악한 뒤에도, 노민추는 해산하지 않고 존속을 결정했습니다. 그 목적은 명확했습니다. 민주 집행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며, 힘을 실어주고, 집행부가 구속·수배될 경우 새로운 지도부를 만들어 투쟁을 계승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장 조직이 지향해야 할 상설적이고 견고한 모습입니다!
Ⅳ. 현장 조직의 전략화: 5월 동맹의 이론과 현대자동차 노동운동에 적용
오월동맹 지도부는
90년대 초, 거제 대우조선 2기 민주 집행부 당선 직후, 노민추 지도부와의 토론을 통해 현장조직에대한 결정적인 인식이 확립되었습니다. 적어도 2,000명 이상의 대공장에서는 현장 조직이 상설적으로, 전략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략적 필요성은 울산, 마산, 창원, 포항, 부산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혁명적 전위 조직인 '5월 노동자 계급 해방 투쟁 동맹'(이하 5월 동맹)에 의해 이론적으로 정립되었습니다.
1. 5월 동맹의 조직론 정립과 3대 필요성
5월 동맹은 현대자동차 현장 조직과의 연대를 통해 조직론을 발전시키면서, 노민추를 상설적 현장 조직의 원형으로 삼아 대공장에서 현장 조직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보았습니다.
첫째. 공식 노조 체계의 한계 보완
노조의 공식 체계(위원장, 상근 간부, 대의원)만으로는 거대한 대공장의 민주노조를 제대로 운영하기에 역부족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현장 조직은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여 노동자 대중을 민주적·노동 해방적으로 의식화하고 훈련함으로써 투쟁에 나서게 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조직 형태였습니다.
둘째. 준전시 상황에서의 투쟁 지속성 확보
대공장에서 사측과 독재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동원해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고 지도부 구속·수배는 다반사였습니다. 이러한 준전시 상황에서 현장 조직이라는 일상적 활동 체계가 존재하면, 지도부 공백 시 곧바로 노조 운영의 주체로 대두되어 투쟁을 계승할 수 있습니다. 5월 동맹은 현장 조직만이 비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셋째. 혁명 정당 건설의 기초 세포 역할
혁명적 전위 조직을 지향한 5월 동맹은 대공장 노동조합이 노동 해방 혁명의 요소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혁명 정당의 기초 세포로서 각 공장에 공장위원회를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현장 조직은 엄혹한 탄압 속에서 노조 공식 조직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공장위원회의 대중 사업에 결정적인 연결고리가 되었습니다. 1990년 현대중공업의 골리앗 파업(투쟁)이 그 전형적인 예입니다.
2. 울산 현대 계열사로의 적용
이후 현장 조직의 필요성은 논리적으로 이론화되어 울산의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정공 등 현대 계열사에 적용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주 집행부가 들어섰던 현대중공업은 90년 골리앗 투쟁 이후 한참이 지난 1995년에야 '전진하는 노동자'라는 전 공장적 현장 조직을 결성했습니다. 반면, 대우조선처럼 어용(이영복)에게 1기 집행부를 빼앗긴 현대자동차에서는 곧바로 '노조민주화 추진위'가 조직되었고, 이는 대우조선의 경험과 5월 동맹의 이론적 토대를 바탕으로 전 공장적 조직 형태로 가장 체계적으로 발전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대우조선이 선도적이고 자생적인 현장 조직의 원형을 만들었다면, 현대자동차는 그 경험을 이어받아 가장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형태의 현장 조직을 완성한 것입니다.
Ⅴ. 한국적 현장 조직의 독자적 탄생과 역할
전원배 전선, [2025-11-11 오후 12:57]
현장 조직이 한국에서 독특한 조직 형식이 되었고 강력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반적인 노동 운동의 흐름과 다른 한국 사회 특유의 역사적, 구조적 요인이 있습니다.
첫째. 혁명적 사상과 조직의 공백을 메우다.
일반적으로 사상적 선진 조직이 먼저 발생하고 시차를 두고 대중 운동이 뒤따르지만, 한국은 달랐습니다. 1987년 대투쟁 이후 자생적인 혁명 열기가 분출했을 때, 현장 조직은 사상적 조직과 대중 운동 사이의 심연 같은 공백을 밑바탕에서부터 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둘째. 대공장 노조 체제 운영의 필수적 보완책이 되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은 국가 주도의 산업화로 울산(현대시), 포항(포철시)처럼 거대한 대공장이 산업의 주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거대 공장의 노조를 위원장, 상근 간부, 대의원 체계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현장 조직은 혁명의 요소가 되어야 했던 대공장에서의 활동을 수월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셋째. 일상적 민주주의 훈련의 장이 되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 사회는 명망가 중심의 지시 통제가 만연한, 민주적 문화가 부재한 사회였습니다. 노조 내에서도 권위적인 사회 문화가 반영되어 명망가들에게 좌지우지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현장 조직은 이러한 무지막지하고 뿌리 깊은 권위주의를 집단적 지도 체제, 즉 민주주의적 활동 방식으로 극복해 나가는 효과적인 훈련 장소이자 무기였던 것입니다.
Ⅵ. 혁명적 전위-현장 조직-노조: 투쟁을 위한 삼위일체 전략
1. 조직 관계의 삼위일체(三位一體)
혁명적 전위조직, 현장 조직, 그리고 노동조합(노조)은 삼위일체를 이루며 유기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들 각자는 고유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노동 해방을 위한 노동자 계급 투쟁 운동의 전체 구성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2. 노동조합의 이중적 특성과 현장 조직의 견제 역할
공식 대의 기구로서의 노동조합은 두 가지 상반된 특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교두보 역할(공적 성격)과 어용화 위험(조직적 낙후성)입니다. 이 때문에 "당선된 날만 민주노조"라는 조롱 섞인 표현까지 존재했던 것입니다.
현장 조직의 역할: 현장 조직은 바로 이 부분을 공개적이고 대중적으로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현장 조직이 매우 일상적이고 체계적으로 노조가 사측이나 정권 측으로 기울어짐을 필사적으로 막아냈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활동가들이 훈련되었고, 차기 집행부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응축되었습니다.
3. 혁명적 전위조직 공장 세포의 역할: 학습과 훈련의 학교
혁명적 전위조직의 공장 세포는 특히 현장 조직의 주요 활동가들을 학습시키고 조직 투쟁 훈련을 실시하는, 그야말로 노동 해방 운동의 학교였습니다. 여기서의 학습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비효과적 방식 (고전 학습의 한계): 마르크스-레닌의 고전, 특히 『자본론』을 초기부터 학습시키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천박한 이해 수준으로 인해 결국 활동가들을 고립시키고 말았습니다.
매우 효과적 방식 (현실 매개 학습): 구체적인 현실의 일을 매개로 계급적 해석을 전달하고, 특히 한국 근현대사를 매우 심도 깊게 학습하여 전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두 번째 방식을 택한 조직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4. 체계적인 의식 조직 활동의 훈련
학습 모임에서 다듬어진 내용은 대중적으로 전파되면서 현장 조직 활동가들의 영향력을 매우 키웠습니다. 조직 활동 방식에 있어서는 사측과 정권의 태도, 그리고 노조 집행부의 이중성·삼중성에 대해 미리 분석하며 대응책을 마련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집단 토의와 집단 결정, 추후의 반성 등이 이루어지면서 매우 체계적이고 실천적으로 의식화 및 조직 활동이 훈련되었습니다.
이러한 유기적 활동을 통해 현장 조직은 민주 노조 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할 수 있었으며, 이것이 곧 혁명적 전위조직-현장 조직-노조의 관계가 대단히 중요한 삼위일체였던 이유입니다.
Ⅶ. 현장 조직의 개량화, 권력 도구화: 역사의 쓸쓸한 퇴장과 우리의 교훈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역사의 흐름은 현장 조직의 혁명적 사명을 뿌리부터 흔들었습니다.
1991년 소련 붕괴와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혼란에 빠졌던 혁명 진영은 결국 IMF 사태로 지리멸렬해집니다. 특히 혁명적 전위 조직과 노동조합이라는 두 힘을 빌려 발전했던 현장 조직은 이 사태를 겪으며 거의 유명무실하게 되었습니다.
혁명적 조직을 지향했던 조직들이 소련 붕괴라는 충격파 속에서 혁명을 포기하고 개량주의의 늪으로 급격히 해소(와해)되면서, 투쟁이 아닌 선거(표)를 얻는 방향으로 노선을 급격히 전환한 것이 현장 조직 변화의 결정적 원인이었습니다.
국내적으로는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문민 정부를 표방하며 합법적 공간을 부여했고, 노동 운동 탄압 정책 역시 일방적인 탄압에서 합법적, 개량적 흐름을 포용하며 혁명적 세력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교묘하게 전환된 것 역시 커다란 변화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소위 혁명적 진영은 합법주의적인 의회 개량 정당과 주로 교섭을 중심에 두는 산별노조론이라는 소위 양날개론으로 노선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1987년부터 1992년까지 위세를 떨쳤던 현장 조직들은 겉모습은 유지했지만 내용은 급격히 변화했습니다. 결국 소수 명망가 중심으로 집행권을 장악하고 이를 통해 사측과 보조를 맞추며 영달(개인의 이익)을 꾀하는 조직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현대자동차 민주노조 위원회(민투위)가 이러한 현장 조직의 타락을 보여주는 가장 전형적인 사례가 됩니다. 2000년대 초 현대자동차 집행부를 장악한 민투위는 당시 현대자동차에서 제기된 비정규직 노조 운동을 지원하고 연대하기는커녕 오히려 탄압했습니다!
급기야 2005년 9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대의원이었던 류기혁 동지의 자결(분신) 이후, 그것이 명백히 사측의 탄압 속에서 이뤄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민투위는 이를 류기혁 개인의 신병 비관 자살로 치부하며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열사의 죽음을 외면하는 비극적인 행위였고, 전국적으로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힘있게 출발했던 현장 조직의 역사는 이처럼 매우 씁쓸한 퇴장의 상징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현장 조직은 그 수명을 다하고, 그 잔여 역량들이 여전히 지속되고는 있으나 과거의 위용을 되찾을 길은 없는 상태입니다.
결론: 우리의 교훈과 미래를 향한 모색
우리가 현장 조직의 탄생, 진행, 그리고 붕괴를 이야기해 온 것은 단 하나의 교훈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조직은 당대의 구체적 역사적 현실 속에서 발생하고 쇠락한다"는 준엄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2025년 현재, 인공지능(AI), 초지능, 휴머노이드 로봇 등이 생산에 광범위하게 투입되면서 고용 환경 전반에 급격한 변화가 있고, 198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계 경제가 긴밀히 연관된 상황입니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어떠한 사상과 혁명 전략, 그리고 현장의 조직들이 이 새로운 시대의 노동 운동을 추동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장 조직은 단순한 소모임이 아닙니다! 그것은 노동자 대중의 의식과 힘을 결집하고, 노조 지도부의 배신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 투쟁을 영속시키는 노동자 해방의 상설적인 전진 기지입니다!
우리는 그 역사를 잊지 않고, 과거 현장 조직 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의 투쟁을 새롭게 모색해야 하는 절박한 의미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당장, 행동해야 합니다!
이외 노동해방문학 199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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