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 소설을 읽는, 고통스러운 즐거움
신승엽
1.
소설을 읽는 일은, 두말할 것 없이 소설가가 사회에 대해 던지는 진단과 물음에 대해 독자로서 응답하는 일이다. 소설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주어진 사회적 조건하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혹은 어떻게 살지 말아야 하는가 등을 둘러싼 소설가의 문제 제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은 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공할 수 없다. 명쾌한 해답은 비단 소설만이 아니라 오늘날 어떠한 담론도 제공할 수 없으며,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담론들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일종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개인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과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통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럼으로써 우리 스스로에게 현재의 삶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윤리적 모색을 촉구한다. 소설을 읽는 일은, 따라서 소설가가 소설을 통해 던지는 이러한 존재론적 물음에 대해 윤리적으로 응답하는 일이며, 이를 통해 소설가와의 대화에 나서는 일이다.
물론 오늘날의 소설에 대해 이와 같은 역할을 계속 기대할 수 있는지 회의도 없지 않다. 날이 갈수록 소설은 ‘사회와의 소통’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1980년대까지 이어지던 우리 소설의 강력한 사회적 관심과 비교해볼 때 최근 소설이 보이는 자폐적 혹은 초월적 경향은,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 종언’론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비록 문학을 가지고 마치 정치활동을 대신하거나 혹은 亞-정치활동으로 삼으려는 시대는 지났고 ‘고전적인 장편소설’과 같이 사회 전체의 구조와 발전 방향을 통째로 문제삼는 大 소설은 요새 보기 드물며, 그래서 이제는 문학이 ‘한갓’ 문학에 지나지 않는 시대가 되었을지라도, 對 사회적 발언으로서의 근대소설의 형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어쨌거나 소설은 형식 자체가 태생적으로 일종의 사회에 대한 총체적 진단이자 이를 통한 삶의 의미의 모색이며, 이를 대신할 형식이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영화는 가장 소설에 근접한 형식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영화는 소설만큼 ‘현실’에 직핍하지 않으며 나아가 독자로 하여금 소설만큼 대화와 반성의 길로 성실하게 인도하지 않는다. 물론 소설에서도 자신이 그리고 있는 세계가 ‘가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모르게 전제하고 있어 작가든 독자든 그것을 ‘현실’과 혼동하지 않는 장르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야기’일 뿐이지 ‘근대소설’이 아니다. 그리하여 여전히 소설은 어느 다른 장르가 대체할 수 없는,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진단 형식으로서, 이를 둘러싼 작가-독자(-비평가)의 눈에 보이지 않는 ‘대화와 토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장 의미 있고 유효한 소통의 형식이 된다.
나는 오늘날 한국에서 소설을 생산하고 있는 작가 중에서 정미경만큼 우리 사회의 삶의 모습들을 다면적으로 그려 보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묻게 만드는 작가를 많이 알지 못한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소설 속 인물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불안, 성찰과 행위가 결코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우리 사회 전반에 편재해 있는 것임을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 그것이 어느덧 우리 자신의 것으로 전이되며, 그러는 동안 어느새 그들과 함께 느끼고 몸부림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주인공들이 던지거나 혹은 주인공의 운명을 통해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곧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라는 독자 자신의 질문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정미경의 소설을 읽는 것은, 소설 속에 그려진 주인공의 운명을 통해 독자 자신의 삶이 처한 조건과 그것이 주는 고통 및 불안을 추체험하고 또 스스로의 삶을 반성하는 행위로 연결된다. 그러나 그 반성은 우리 개개인의 삶이 갈수록 고립화되어가는 시대에, 고통과 불안, 반성과 모색이 비단 나만의 일이 아니라, 주인공들 혹은 작가와 함께하는 것이라는 즐거운 인식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우리 시대에 정미경과 같이 고통스러운 반성의 즐거움을 선사해 주는 작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제, 정미경의 세번째 소설집 내 아들의 연인을 통해 그 고통스러운 즐거움의 길로 들어서 보자.
2.
정미경 소설의 가장 눈에 띄는 미덕은 무엇보다 지금 이곳의 삶의 방식에 대한 다각적이고도 치밀한 접근일 것이다. 이미 상재되어 있는 두 권의 소설집과 두 편의 장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에 출간되는 세 번째 소설집에서도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자산관리인, 대학 강사, 사회운동가, 조각가, 가정주부, 교사, 영화감독, 의사(의학자), 유치원 계약교사, 연극무대 디자이너 및 스태프 등, 어느 작품에서든 그 나름의 독특한 직업세계를 가진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미 상재된 기존 작품집까지 더하면 정미경의 소설 속 인물들의 직업은 더 한층 다양해지는데(인상적인 것만 거론하더라도 펀드매니저, 보험사정인, 사진작가, 화가, 백화점 판매원, 방충업자, 광고감독, 텔레마케터, 도서관 사서, 간호사와 방사선 촬영기사, 방송이나 출판계의 구성작가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작가가 이 다양한 직업세계에 대해 전혀 서투르지 않게 충실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도 놀랍거니와, 이들을 종합하면 곧바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축도가 그려질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강남의 부유층에서부터 신빈곤층까지, 잘 나가는 전문직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프롤레타리아인 비정규직까지, 그의 소설에서 망라되지 않는 계층이나 직업군을 찾기는 쉽지 않다. 뿐 아니라, 이들 직업은 단순한 인물의 배경 역할을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 그들의 삶을 조건 짓도록 그려진다는 점에서도 정미경 소설의 미덕이 있다. 곧 직업이 인물의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행동과 사고에 직접적인 동인이 되도록 그려짐으로써 그의 소설의 리얼리티를 돋보이게 만든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을 알려면, 나는 서슴없이 정미경의 소설을 통째로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주인공들의 직업이 다양한 만큼, 소설 속에서 그들의 삶을 문제적이게 만드는 원인도 또한 다양하다. 「너를 사랑해」에서는 경제적인 이유로 해서 자신의 애인을 자신의 고용인의 여자친구로 소개해준 뒤 이를 되돌리고 싶어하는 주인공이 그려지고, 「들소」에서는 자본주의에 순응하지 않고 사회운동가의 길을 고집하던 남편과 이혼하려다가 남편이 암으로 죽는 바람에 혼외로 만나오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는 자신의 세계에 침잠해 들어가는 주인공이 그려진다. 「내 아들의 연인」에서는 아들과 그의 여자친구가 계층적인 차이로 인해 헤어지는 과정을 자신의 과거 추억과 오버랩시켜 관찰하는 중년주부의 이야기가 그려지며, 「바람결에」에서는 형식적인 부부관계를 맺어오던 주인공이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가져 탈출구로 삼고자 하다가 좌절하는 이야기가, 「밤이여, 나뉘어라」에서는 의학을 공부하다 천재였던 친구로 인해 좌절감을 맛본 뒤 영화감독으로 입지를 세운 주인공이 천재였던 친구를 오랜만에 찾아가 그가 망가져 있음을 발견하고는 연민을 느끼지만 망가진 현재의 그를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또 「매미」는 독일에서 문학을 전공한 뒤 귀국하였으나 교수직을 얻지 못하고 그 스트레스로 이명 현상이 생긴 주인공이 병원에서 만난 장애인 여성과 사귀게 되지만 그 여성이 유부녀로 자신과 혼외정사를 가져왔음을 알고는 그 여성과 자신의 처지를 동일시하며 살해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고, 「시그널 레드」는 젊은 시절부터 의붓어머니와 정을 통해온 한 무대 디자이너가 자살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인물들이 다양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지만, 「시그널 레드」를 제외하면(이 작품은 일상의 도덕을 뛰어넘는 주제와 이에 적당히 어울리는 요요한 배경을 담고 있고 또 프로페셔널한 직업 세계 속에서 전개되는 ‘쿨’하면서도 끈끈한 애정관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정미경 특유의 분위기를 살린 작품이라 할 수 있지만, 남자 주인공이 왜 자살하는지를 비롯해서 인물들을 위요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모호한 작품이다) 이들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는 병폐들이며, 누구든 그로부터 쉽게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다.
3.
세밀하게 분화되고 전문화된 직업의 세계와 그것을 관철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생활세계는 기존의 인간관계마저 변화시켜 전통적인 정체성의 준거들을 무너뜨리고 모든 사람들을 ‘단자’의 세계로 내몬다. 정미경 소설에는 최근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는 단자화의 과정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너를 사랑해」는, 한 돈 많은 노인의 자산관리인으로 일하고 있는 주인공 ‘나’가 노인의 채홍사로 나서서 노인에게 자신의 애인 Y를 연결시켜주는 이야기이다. ‘나’와 Y는 8년째 사귀고 있으나 결혼은 하지 않은 상태이며 서로의 이성친구에 대해서도 조언을 주고받는 ‘쿨’한 관계이다. ‘나’는 노인의 자산을 잘못 관리한데다가 자기 몫의 투자도 잘못되어 노인으로부터 더 많은 돈을 끌어내어 만회할 기회를 찾고 있고, Y는 지방대학에라도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발전기금 2억이 필요한 처지. 그래서 ‘나’는 Y를 노인의 여자친구로 소개해준다. Y가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결국 제의를 받아들여 노인과 만나게 되고 관계가 점점 무르익어가는 과정이 이어지자, ‘나’는 Y에 대한 열정이 살아나서 노인과의 거래를 없던 일로 되돌리려 ‘너를 사랑해’라고 외치지만, Y는 단호히 거절한다.
우린 꽤나 멀리 왔어. 돌아서면, 그 순간 우린 둘 다 소금기둥이 되는 거야. 봐. 이렇게 비가 끊임없는데, 소금기둥이 되어 녹아내릴 일만 남는 거야. 지금은 돌아설 수가 없어. 돌아갈 곳은 다 무너져버렸고, 그냥, 앞만 보고 걸어야 되는 거야.
Y의 이 선언은, 비단 그녀와 ‘나’와의 사적인 애정 관계가 더 이상 회복 불능한 처지에 들어섰음을 뜻하지 않는다. 또 노인과의 부도덕한 거래를 되돌릴 수 없다는 작품 내적인 발언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Y의 선언은 이미 우리 모두의 삶이 경제적인 동기에 의해 철저하게 조건지어지고 있으며, 그래서 그에 위배되거나 어긋나는 인간관계는 이제 더이상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것은 또한 불가역적이라는 의미로 확대된다. 경제적인 동기가 모든 인간관계에 가장 우선적으로 작동하게 되면, 모두가 평등한 경제 주체로, 즉 모두가 개개인으로 단자화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의 우리의 삶 또한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관계를 사랑으로 되돌리자는 ‘나’의 제안에 대한 Y의 거부를 단순하게 부도덕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게 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옭아매고도 있는 철의 법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4.
단자화됨으로써 관계로부터 고통을 겪는 인물은 정미경 소설에서 너무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애정관계에 놓이는 인물들은, 피상화된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이성에게서 출구를 찾지만 그것이 결코 이상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음을 체험하고는 다시금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매미」는 다소 충격적인 결말을 보인다. 주인공은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여인과 연인관계로 발전하지만 그녀가 유부녀이며, 다른 것을 바라고 불구인 자신과 결혼해준 남편과는 피상적인 관계를 유지한 채 외간 남자와의 데이트에서 삶의 탈출구를 찾는 여자임을 알고는 그녀의 목을 조른다. 스스로는 ‘운명의 느낌으로 다가오는 관계’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연출된 것이었음(물론 정말로 연출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여자의 ‘위악적’ 발언에서 표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에 배신감을 느낀 데 따른 행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영원히 변치 않는 건 다만 이 초라하고 지리멸렬한 삶 그것뿐이란 것’이라거나 ‘사소한 것들을 바꾼다 해서 내 운명이 달라질 거라는 기대는 오래 전에 버렸다’는,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가 털어놓는 절망적 인식에 ‘나’가 공감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바람결에」의 여주인공은 이성관계로부터 출구를 찾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인공수정을 통해서라도 자식을 얻고자 하는 바람에서 출구를 찾고자 하였으나, 실제로는 남편도 인공수정한 아이를 원치 않을 뿐 아니라 자신 역시 마찬가지임을, 즉 아이라는 출구는 결국 무의미한 바람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주인공은 결말에서 “…모든 게 어제와 똑같아졌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몸서리를” 치고 만다.
물론 정미경 소설의 인물들이 모두 다 이와 같은 절망의 확인에서 그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제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법칙이 철두철미하게 관철되고 있고 그로 인해 진정한 인간관계가 점점 더 불가능해져 가고 있지 않은가. 정미경 소설 역시 이러한 세계의 견고함에 대해 치밀하고 줄기차게 형상화해내고 있으며 바로 거기에 머무르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러나 강철과 같이 견고한 세계의 변화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서는, 정미경 소설에서와 같이, 도대체 변화시킬 수 없으리라 보이는 저 도저한 세계에 대한 절망적 인식과 단호한 승인이 전제되어야 한다. 세계가 철과 같이 강고하다면, 그 강고함을 간과하고서는 강고함을 극복할 방향을 찾을 수 없을 터이다. 강고함을 강고함 자체로 인식하기에 앞서 강고함을 넘어서는 방향을 찾는 데 급급하다면 결국 강고한 세계를 진정으로 넘어서기보다는 허위로, 단지 머릿속으로만 넘어서는 데 머무르고 말 것이다.
5.
도저히 변화할 것 같지 않은 세계에 대한 인식은 그 자체로도 사실은 그 세계에 대한 반성적 인식이므로, ‘다른 세계, 다른 삶’의 가능성에 대한 지향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정미경 및 그의 인물들은 ‘다른 세계, 다른 삶’에 대한 가능성에 쉽게 유혹당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경제적인 동기에 의해 모든 관계가 사물화되는 지금 이 세계로의 진행이 불가역적이라면, 그 불가역적인 과정이 진전된 이후에는 또 다른 변화가 가로놓여 있을 것이며, 역으로 그 불가역적인 진행의 이전에도 ‘다른 세계, 다른 삶’이 존재하고 있었을 터이다. 정미경의 소설에도 지금 이 세계의 차가운 비정함에 대조되는 ‘다른 세계, 다른 삶’에 대한 추구가 없지 않다.
그 가장 손쉬운 방향은 과거로의 여행이다. 작가에게 우리나라 유수의 문학상을 안겨준 「밤이여, 나뉘어라」도 지금의 시점에서 옛 친구를 찾아나서는 여행을 담고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과거로의 여행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 자신을 좌절시켰던 천재 친구를 오랜만에, 그것도 이국 땅에서 찾아나선 주인공이지만 친구는 알콜릭이 되어 있어 실망한다는 내용인데, 빛나던 과거에 비해 초라해진 현재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므로 두드러지는 것은 과거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친구가 어떤 이유로 현재의 초라함으로 전락했는지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으며, 친구를 방문하는 주인공의 의도나 지향도 뚜렷하지 않아 빛나는 과거가 지금 이곳의 삶에 대해 어떠한 ‘다른 삶의 가능성’으로 기능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과거와 현재의 대조가 현재적 삶의 문제성을 대단히 잘 비추어주는 작품은, 이 작품집에서도 명작으로 손꼽을 만한 「내 아들의 연인」이다. 강남의 부유한 집 가정주부인 주인공이, 아마도 대학원생일 아들이 계층 차이가 두드러지는 가난한 집 출신의 여자친구(도란이)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가 헤어지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이야기인데, 아들은 도란이를 만난 것을 처음에는 대단한 행운으로 생각하지만 날이 갈수록 생활 감각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에 사로잡히고, 도란이를 만나본 ‘나’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과거 여대생 시절 자신을 좋아했던, 역시 가난했던 남자친구 ‘초핀’과의 기억을 떠올린다. 가난하지만 거리낌이 없고 부잣집 아들과의 연애와 결혼보다는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가는 것을 선택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는 도란이와, ‘독한 여드름 자국이 선명한 얼굴 뒤에 감추어져 있던, 그(초핀)의 순정’의 기억은 등가를 이루면서, 지금 이곳에서의 주인공의 삶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 대조를 통해, 비록 물질적으로 훨씬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오히려 자신의 삶이 ‘피곤하진 않으나 생기는 없는, 아무 갈망이 없이 가난한 얼굴’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초핀과의 과거 추억은 강렬한 생명력으로 넘치고 초란의 입술은 생생한 점막으로 갓 빚어낸 듯이 사랑스러운데, 그에 비해 과거에도 초핀 대신 ‘교활한 계산법’으로 남편을 선택한 이래 지금 이곳의 ‘나’의 삶이란, 무엇이든지 반듯하고 안정감을 갖추기를 요구하는 남편, 돈을 크리넥스 뽑아 코 풀듯이 쓰는 자식들과 함께, 물질적인 부가 가능하게 해주는 온갖 서비스 시스템에 ‘길들여져’ 있다. 하지만 주인공은 아들이 도란이와 헤어지는 것에 개입하지 않으며 방임한다. 결국 주인공은 아들의 연인과의 만남을 계기로 하여 자신의 현재 삶의 불모성에 대한 반성적인 인식에는 이르지만 그 반성의 결과 ‘새로운 삶’을 도모하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않는데, 이 역시 작가의 리얼리즘이 냉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의 반성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기존하는 자신의 삶의 조건과 그것을 이루는 삶의 관계들이 어떤 문제를 내포하는지를 파악한 이후의 삶은 외면적 조건이 바뀌지 않는다 하더라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이르러, 도란이가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친해지지 않으려 애쓴 자신을 돌아보며 ‘이젠 저지르는 죄마저 이렇게 하찮고 비겁하고 졸렬하다’고 깨닫고 있으며, 또 도란이로 인한 자신의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도란이는 내게, 어쩌면 한 권태로운 여행지에서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있다 우연히 찍게 된 유에프오 같은 존재로 남을 것이다. 나는 그걸 보았고, 내 메모리에는 그 모습이 남아 있지만, 현실의 네트워크 속에서 그저 그대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누구의 공감도 끌어낼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침묵해야 하는, 빛을 발하는 존재. 그러나 그걸 만나기 전과 이후의 나는 달라져버린, 미확인 비행물체.
「내 아들의 연인」에 비해 지금의 삶으로부터 다른 삶으로의 ‘변화’로 한 걸음 더 나아간 작품으로 「들소」를 들 수 있겠다. 주인공은 조각가인 수혜. 북한 돕기 운동을 하던 남편 하윤이 너무나 ‘천사’같기만 한 데 질려서 대학 동창인 명조와의 사랑에서 도피구를 찾았지만, 하윤에게 더 이상 같이 살지 못하겠다며 이혼을 요구한 뒤 곧바로 하윤이 말기 암 진단을 받아 죽게 되자 명조와의 관계도 정리하고서 조각 작업에 몰두하면서 자신의 삶을 찾아나간다는 내용이다. 하윤이 죽기 전의 수혜의 삶은 ‘지금 이곳의 삶’을 대변한다. 하윤이 ‘명분이 아름다운’ 그러나 돈은 안 되는 사회운동에 몰두하는 사이 수혜는 조각가로서 주로 팔릴 만한 작품의 생산에 골몰했고, 당연히 생활에 찌들리는 상태가 된다. 하윤과 함께 북한을 방문했을 때에도 북한 사람들의 끊임없는 요구에 거부반응을 보이지만 하윤은 아무런 내색 없이 사비(라고 해도 결국 수혜가 번 돈)까지 털어가며 활동을 계속하자, 결국 하윤의 “자신을 매료시켰던 바로 그 부분이, 더이상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고 느끼고는 하윤에게도 “난 천사와 살고 싶지 않아. 이기적이고 졸렬하고 제 식구나 챙기는 쪼잔한 남자와 살고 싶어”라고 내뱉는다. 하윤에 비해 명조는 수혜와 ‘너무 닮은’ 현실주의자이며 그래서 수혜는 하윤과의 관계에 진절머리가 나자 명조와의 관계에서 도피구를 찾았을 터이며, 명조가 수혜의 예쁜 발을 좋아하는 반면 하윤은 조각 작업으로 거칠어진 수혜의 손을 좋아했다는 사실도 각각 명조의 현실주의와 하윤의 이상주의를 상징할 것이다. 그러나 하윤과 헤어지자고 말한 직후 하윤이 죽을 운명에 처하자 수혜는 하윤이 죽는 날까지 하윤을 위해 가능한 모든 헌신을 다하고, 결국 하윤이 죽자 명조와의 관계도 정리해 버린다. “너는 나하고 너무 닮았어. 알아? 나는 내가 싫다”는 대사와 함께. 그 후 수혜의 삶은 변한다. 하윤이 죽고 나서야 ‘우리는 모두 우주만한 추위를 이고 사는 존재임을 알게 되고’, 그래서 온몸으로 추위를 견디며 얼음 위를 걸어다녀야 했던 빙하기의 들소들을 작품의 소재로 삼아 창작 활동에 전념, 1년 후 작품전을 여는데, 이처럼 변화한 수혜의 삶은 다음 구절로 요약 가능하다.
이래도, 이래도 하며 삶은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툭툭 던져놓는다. 뾰족한 방법 같은 건 없다. 그저 앞으로 걸어갈 뿐이다. 꽃핀 길이라고 멈출 수도, 얼음판이라고 건너뛸 수도 없다.
물질과 안락함과 예쁨과 편함을 추구하는 생활에 휘둘리는 ‘쪼잔한 삶’을 벗어나서 ‘얼음과 초원과 꽃과 사막과 돌무더기를 지나’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삶, 그것이 곧 수혜가 ‘지금 이곳의 삶’을 벗어나 새로 추구하고자 하는 새로운 삶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경지는 너무 시적이고 초월적이지 않은가? 그것은 변화하기 이전 수혜의 ‘지금 이곳의 삶’과 대조를 이루었던 하윤의 삶이 다소 현실감 없이 그려진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터인데, 그렇다면 여전히 ‘쪼잔한 삶’에 사로잡혀 있는 「너를 사랑해」의 Y(Y 역시 작품 말미에 ‘그냥 앞만 보고 걸어야 되는 거야’라고 주장하지만, 이것과 수혜의 ‘그저 앞으로 걸어갈 뿐이다’는 유사한 발화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향하는 방향은 전혀 다르다), 「매미」와 「바람결에」의 주인공들은 어떻게 그저 앞으로 걸어갈 수 있을까? 그저 앞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이들을 옭아매고 있는 현실 법칙들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아직 작가는 이러한 의문에 대해 대답을 내놓고 있지는 않은 듯싶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미경은 무엇보다 ‘생의 의미의 탐색’이라는 근대소설 본연의 ‘고전적인’ 임무를 오늘날 한국 작가 가운데서 가장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작가로 보인다. 정미경의 인물들은 주어진 세계를 자명하게,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느 날 문득 모종의 계기로 해서 세계와 존재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탐색을 강제 당하게 된 주인공이 성실하게 그 탐색의 과정을 이행하는 것이 소설의 주요한 골간을 이룬다. 남편 혹은 연인의 죽음(「들소」와 「시그널 레드」 외에 「나의 피투성이 연인」, 장밋빛 인생 등의 과거 작품)이든, 아들의 여자친구와의 만남(「내 아들의 연인」)이든, 자기 부부가 인공수정한 배아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모습(「바람결에」)이든, 우연히 찾아든 원룸 방의 이웃들과의 조우(「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이든, 이들을 계기로 하여 주인공들은 자신의 삶의 조건과 과정, 자신을 둘러싼 관계를 돌아보고 그 관계들을 규정하고 있는 세계를 인식하며, 나아가 이 세계 속에서 자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계속 살아도 되는 것인가를 묻고 또 묻는다. 이러한 반성의 결과 도달하는 세계인식과 자기인식, 또 이를 매개로 하여 알아차리게 되는 희미한 변화의 기미를 제시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나의 삶은 어떠한가’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의 소설 주인공들이 겪어나가는 이러한 반성과 모색의 과정을 궁극적으로 완성하는 것은 바로 그의 소설을 읽어나가며 작가의 문제 제기에 응답하는 우리 독자의 몫이 될 것이다.
첫댓글 아니 이건 또 언제 올리셨대요?
얼마전 사망했더라구요. 슬프네요.
정미경의 소설을 읽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