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함양박씨 치암공파 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만오
함양박씨의 시조는 1世 휘 선(善) 입니다.
아득한 1100년대부터 우리의 시조께서는 함양박씨의 뿌리를 다져 오셨습니다.
아래를보세요. 죽산박씨도 1100년대에 문과급제를 해서 활동을 하고있는것을 고려과방록에서 확인을 했습니다. 신라가 망하고 800년동안을 뿌리를 내려온 시조공 할아버지를 신라소원록의 8대군 왕자바람에 휘말려서 근거도 전거도없이 만들어진 박세욱의 조작극에 속함대군이 함양박씨의 시조가되고 시조자리를 지켜오신 시조공 휘 선(善)을 중시조로 내몰아부친 함양박씨의 대종회는 잘못된 과오를 뇌우치고 시조공묘소성역화를 위한 정비사업에 박차를 가하는뜻에서 미루워왔던 숙청사업으로 속함대군이하 5세까지의 설단과 속함대군단비까지를 제거하고 5세설단10위는 시조공묘역으로 단일화를 한다면 가을 시제도 일원화를 하면 모든 면에서 절약이 될것이며 제단소 자리에는 시조공을 위한 사당을 세우면 시조공의 위신도 새우면서 춘향제를 올리게 된다면 지방문화제 지정요건이 가추어 질것입니다
***********************************
박정유(朴挺蕤)에 대하여
1089년(선종 6)∼1145년(인종 23). 고려의 무신. 본관은 죽주(竹州: 지금의 竹山). 영후(永侯)의 아들이다. 예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경원군판관(慶源郡判官)이 되었다.
-------------------------------------------
방(박경백(朴景伯)
[고려문과] 선종(宣宗) 3년(1086) 병인(丙寅) 선종 3년 병인방(丙寅榜) [인적사항]
본관 죽산(竹山)
관직 상서(尙書)
[가족사항]
[부] 성명 : 박인량(朴寅亮)
---------------------------
박인량(朴寅亮)
[고려문과] 문종(文宗) 5년(1051) 신묘(辛卯) 문종 5년 신묘辛卯榜) [인적사항]
시호 문렬(文烈)
본관 죽산(竹山)
************************************************************
함양박씨는 시조를 바르게 알자.
박씨의 시조
박혁거세 로 부터 ~ 29世 경명왕 까지
경명왕이 죽으니 후사가 없어서 왕위는 동생 경애왕에게 돌아갇다
경애왕이 죽으니 왕위는 김씨에게로 가서 신라가 망하였다.
高麗朝 高宗24년(1237)에 응천군 신유(臣蕤)께서 김경손과 호남전에서 싸워서 응천군에 봉해젔고 아들인 之亮이 1271년(원종 12) 수로방호사(水路防護使)가 되어 상장군이 되었으며 원나라로부터 무덕장군 관군천호(武德將軍管軍千戶)의 벼슬을 받았다.
문원공 之彬의 아들4형제가 고려문과에 모두 급제를 했는데 하나같이 父는 지빈 祖 신유 曾祖 윤정으로기록이 되어있었다
함양박씨는 무오대동보(1678)를 4파 21世 慶後께서 편찬하였고 16년후인 갑술대동보(1694)를 잘못된곳을 수정해서 중간(重刊)을 하면서 관향은 함양박씨 시조(始祖)1世 상서공 휘 선(善)으로 족보가 만들어젔다
신라시조로 부터 27世 또는 37世라고 하니 고증을 할수가 없다고 기록되었다
시조공의 묘소는 함양읍 사금동에 있다
한때를 시조공 묘소를 실전했는데 승려 사흘이 숙종27년(1701)에 찾았다.
***************************************************************************
세월은 흘러 신라가 망하고 800여년이 지나간 1760년에 신라소원록(新羅遡源錄)이 발표가 되고 내용은 아래와 같다 신라소원록(1)은 上下2卷으로 上卷은 박세욱(朴世旭)이 편집 간행하였고 下卷에는 8대군분봉사실이 기록되었는데 박치화(朴致和)서문(序文)은庚辰(1760)이고 밀양 박성구(朴成矩)근식(謹識)은 영조45년戊子(1768)이고 밀양후 박세욱(朴世旭)은 戊寅(1758)6월이다.
*******************************
신라소원록(新羅遡源錄)이 발표가된이후 1931년에는 朴氏璿源世德編이 刊行되고 朴氏新羅璿源譜(全)單本에 內容이 分離된 朴氏新羅璿源世系 卷之上에는
신라시조왕1世~30世를 기록하고 卷之下는 30世8大君부터 各朴氏들의 50世~55世까지가 新羅紀元後2012年(西紀1955)乙未端陽節海伯公後裔永和謹跋이라고 기록이 되었다
속함대군은 30世이고 5대를 이름까지 기로하고 함양박씨의 시조1세는 36世가 되었고 6지파의 파조는 41世로 만들어서 세계(世系)의 대혼란이 일어났다.
************************************************************
함양박씨의 선조님들은 1100년대 부타 함양박씨의 뿌리를 이어오다가 1678년에 처음으로 족보를 만들때부타 고려조 예부상서를지낸 휘 선(善)을 시조 1世로 출범을 했는데 신라의 29세 경명왕이 왕위에 올리 제위7년에 죽으니 후사가 없어서 왕위는 동생 경애왕에게 돌아갇다. 경애왕이 죽으니 왕위는 김씨에게로 가서 신라가 망하였다.
신라가 멸망후 800여년이 지나간 1760년에 신라의 아무런근거와 전거도 없이 박세욱이 조작한 신라소원록(新羅遡源錄)을 조작 유포함으로써 경명왕의 8대군분봉사실이 유포되어 세상을 흔들어 놓았다
************************************
신라박씨소원록(新羅朴氏遡源錄)변역문
新羅朴氏遡源錄
◎新羅朴氏八公子兄弟分封序次
밀성대군 언침 밀양(密城大君 彦忱 密陽)
사벌대군 언창 상주(沙伐大君 彦昌 尙州)
완산대군 언화 전주(完山大君 彦華 全州)
죽산대군 언립 죽산(竹山大君 彦立 竹山)
속함대군 언신 함양(速咸大君 彦信 咸陽)
강남대군 언지 순천(江南大君 彦智 順天)
고양대군 언성 고령(高陽大君 彦成 高靈)
월성대군 언의 경주(月城大君 彦儀 慶州)
이때부터 신라8대군의 봉군사실이 현실화 바람을 타고 대종회에서는
속함대군의 설단을 하여 봉제사를 지내고 속항대군단비까지 새웠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2004년11월에는 속함대군이하 5대설단까지 추가를 했는데 대종회이사회에서는 그 공로를 인정해서 표성비까지 새워 놓았다
◎ 팔군분봉시대변(八君分封時代辨)
咸陽朴氏의 世譜紀傳에는 脫解王(신라 4대왕) 丁卯年(서기67)에 宗戚인 朴氏 八公子를 封하였다고 하였고 그 註脚에는 儒理王(신라 3대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宗이라 하고 妻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戚이라고 하였다 하였으며 또 八君의 封邑을 써놓고 咸陽派의 後裔인 黃澗縣監 朴斗益는 八君을 儒理王 때에 속한다고 하였다.
*******************************
역사는 과거의 사실로서 우리가 공통으로 인정하고 고증된 역사서기록과 문헌을, 그리고 고고학적 및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을 역사라고 한다.
종사(宗事)에 대하여서도 역사서와 문헌으로 고증된 것을 주장하고 서술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천년 전 미지의 조상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써 신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700년 전(지금으로부터는 1천여 년 전)의 조상을, 역사서에는 물론이고 어떠한 기록과증거도 없이 박씨소원록(朴氏遡源錄) 등에서 강남대군설을 두찬(杜撰 : 典據나 出處가 확실하지 못한 저술, 틀린 곳이 많은 작품)으로 남겨 많은 사람들에게 우를 범하게 하고 있다.
물론 이 박씨소원록에 대하여 이후에 2~300년 동안 역사적 문헌적으로 고증하며 이론 정연하게 그 허구성을 지적하여 비판을 많이 하고들은 있지만,
이상하게도 하면 할수록 역사적 근거와 문헌이 없는 그 두찬과 애매모호하고
허무맹랑한 소개서를 사실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고,
어떤 문중(門中)에서는 선조의 휘자(諱字)를 작명(作名)하고 상계(上系)를 이어 만들어서 조상으로 받들고, 설단(設壇)까지 하여 심지어는 봉사(봉사)까지 하고 있으니 비록 세계(世系)도 휘자(諱字)도 모르지는 참 조상님을 버리고 그 위치에 왕자란 허울을 씌워 가조상(假祖上)을 섬기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에[수정요청]
No. 4077 [수정요청] 신라박씨소원록 확인 중입니다.
이름 : 이재옥 등록일 : 2011-01-07 조회수 : 19
신라박씨소원록을 저희 장서각 아카이브에서 이미지 서비스를 하고 있어서
현재 확인중입니다. 분명 이곳에 경명왕 8공자 분봉 사실이 있네요.
성씨본관 집필은 참고문헌에 나와있는 것과 같이 소원록을 보고 한 건 아닙니다. 한국의 성보, 성씨의 고향 등을 참고로 작성한 것입니다.
--------------------
경명왕이 924년에 승하하시니 후사가없어서 동생이 왕위에 올랐는데 소원록은 1760년에 上卷은 박세욱(朴世旭)이 편집 간행하였고 下卷에는 8대군분봉사실이 기록되었는데 박치화(朴致和)서문(序文)은庚辰(1760)이고 밀양박성구(朴成矩)근식(謹識)은 영조45년戊子(1768)이고 밀양후박세욱(朴世旭) 戊寅(1758)6월이다.
--------------------------
소원록의 8대군 봉군한 기록사실이 경명왕재임시 기록한 사실과 일치하기때문 에 소원록의 내용을 발표를 했다면 그 전거를 알려 주시고 전거도 없이 발표를 했다면 임의로 조작된 소원록의 발표는 잘못이라고 할수 있으니 소원록의 근거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경명왕의 8대군의 조작봉군한 사실때문에 모든박씨들은 시조를 바꾸어 놓았는데 지금에 와서 이사실이 날조된것이라 한다면 그 엄청난 피해를 누가 보상하겠습니까?. 신중한 판단을 기다리겠습니다
---------------------------
No. 4088 [기타의견] 몇가지 의견 개진합니다
이름 : 이재옥 - 등록일 : 2011-01-11 조회수 : 4
경명왕이 후사가 없었다는 근거는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동생에게 양위했다고 후사가 없다고 단정 짓는 것은 추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려나 조선에서도 후사가 있으면서 동생에게 양위한 경우가 있습니다.
중국의 송나라 태조 조광윤도 동생에게 양위해서 조광의가 태종이 됩니다.
고려에서는 2대, 3대, 4대인 혜종, 정종, 광종이 모두 형제간입니다.
조선에서는 2대, 3대인 정종, 태종이 형제 사이입니다.
이런 이유로 윗대 왕의 후사가 없다고 단정 할 수는 없습니다.
조선 정종은 적장자는 없었지만, 아들이 15명이나 됩니다.
그래서 경명왕에게 후사가 없었다고 단정하기는 힘듭니다.
삼국사기 본기 경명왕조에 후사가 없어서 동생에게 양위했다고 하는 기사가 없습니다. 이는 그간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자식이 어려서 왕 노릇하기 힘들거나 아니면 동생의 세력이 강하면
후사가 바뀌기도 합니다.
신라 경명왕 때는 후삼국의 난립 시기로 정치가 매우 어려운 때입니다.
그리고 경명왕 즉위 때 동생 경애왕[위응]이 2인자인 "상대등"을 맡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서지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신라박씨소원록』의 진위를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책을 저술할 때 어떤 근거로 8대군 분봉을 기록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구전을 기록했는지, 아니면 어떤 문헌을 참고했는지.
다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8대군 분봉을 부정한다면
밀양·고령·함양·죽산·상주·전주·순천·경주박씨 등 8개 성씨에서
시조 연원이 모두 바뀌어 버립니다.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족보의 시조들은 대체적으로 신라의 왕실이나 고려 왕실 아니면 고려 때 탁월한 벼슬을 지낸 사람들을 시조로 여깁니다.
그래서 족보를 보면 시조로부터 몇 대 후손까지는 단 한사람으로 내려옵니다.
누가 아들을 1명만 두었다고 생각하겠습니까?(물론 1명만 둘 수도 있지만)
이는 역사적 기록이 없어서 이런 식으로 기술을 하게 된 겁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이런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건 묵시적으로 인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고려 중기부터 조선조에는 고려사 또는 조선왕조실록, 방목 등등의 역사적 기록이 있기 때문에 족보에서 역부환조(易父換祖)하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위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의견을 드렸습니다.
**********************************************
No. 4090 [수정요청] 기타의견 의 답변
이름 : 박노용 등록일 : 2011-01-11 조회수 : 17
이재옥 선생님의 말슴 잘 읽어 보았습니다
역시 사학가들의 견해와 저와의 차이는 현저 합니다.
그렇지만 경명왕의 사후 83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는 고려조를 거처서
이조 영조36년 까지는 경명왕의 왕자가 있었다는 기록을 본적도 들은적도 없었을때 여러사람들에 의해서 전거없이 만들어진 신라소원록이란 간행물을 검증도없이 사실화 시킨것을 지금에 와서 그 실체를 알았기 때문에 근거를 알고저 하는것입니다.
해명을 하신바와 같이 박씨들의 피해는 말을 할 여지도 없지만 소원록 자체를
공식적으로 인정을 해서 사용을 한다면 보다 더큰 피해가 온다는사실도 고려하지 않을수는 없는 일입니다. 각자가 사실을 인용해서 사용하는것은 자유이 겠지만 사용할수도 있다고 권장해서는 아니 될것입니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 합니다
*********************************
No. 4091 [기타의견] 답변드립니다.
이름 : 이재옥 등록일 : 2011-01-11 조회수 : 8
저희 연구원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절대 문중(종친회) 일에는 개입하지 않습니다.
저희 성씨본관에서는기존에 알려진 성씨 본관에 대한 소개만 하는 곳입니다.
즉, 성씨의 고향이나 한국의 성보에 소개된 글을 인용해서 서비스하는 것입니다. 생님 의견이 맞고 틀리고 그런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 연구원에서 8개 박씨분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습니다.
8개 박씨들이 경명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라 8공자에 연원을 두게 된
시점을 먼저 조사해보시죠?
신라박씨소원록이 1700년대에 쓰여졌으니, 8개 박씨들의 족보를 살펴보고 1700년 이전에 쓰여진 족보에도 8대군 분봉 사실이 적혀 있으면 신라박씨소원록이 8대군 분봉에 대해서 언급한 최초의 문헌이 아닐 것이고
1700년 신라박씨소원록 저술 이후에 간행한 박씨 족보에 8대군 분봉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면 이 책을 근거로 8개 박씨들이 시조를 신라 경명왕까지 소급한 것이라고 추정이 됩니다.
밀양박씨 박세욱이란 분이 구전으로 가문에 내려오는 전설을 기록한 것이지,
어떤 문헌을 참고했는지 현재 알 수 없습니다. 여하튼 저희 연구원은 성씨들에 대해서 소개하는 곳이지 이런 책(신라박씨소원록의 8대군 분봉)이 맞고 틀리다는 것을 판단하는 곳은 아닙니다.
그리고 함양박씨에서도 함양 남산에 중시조 박선 무덤옆에 속함대군 단비를 세웠다고 알고 있는데, 함양박씨 종중에서도 팔대군 분봉을 부인하고 있는지요?
신라박씨소원록 원본이미지(http://221.150.168.65/DLIWEB20/components/searchir/viewer/frame.aspx?type=FILE&cid=101615&rid=26)
************************************************
아래는 내가 이런일을 미리 짐작 하고 작성한 글이다.
속함대군이 우리에게 밀요하다면 상징적인 인물로 (본관:함양)득관조인데
문헌(文獻)과 고증(考證)이 실전되어 루대가 실휘되어 소목계대(昭穆系代)를 밝힐수가 없어서
고려조(高麗朝)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휘(諱) 선(善)을 시조(始祖)1世로 모시고 관향(貫鄕)을 咸陽朴氏로 기세(起世)를 하였다
**********************
咸陽朴氏 의 上系
<위의 도표는 경명왕 이후의 세계는 확실한 고증이 있을때가지 유보를 한다>
◇선대의 전통을 후대에 이어 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첫댓글 위 시조공묘소 를 실전을 했는데 승려사흘이 숙종23년(1697)에찾았다.(족보의 기록이고 )
시조공묘표에는 숙종23년 (1697)으로 되어있어서 대종회에서 수정결정을 하였으니
바로 잡아 주세요. 내가 쓴 글이지만 수정이 불가해서 입니다.
경모님 내가 쓴글을 여기에 까지 소게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글을 읽어보고서도 속함대군 운운하면서 시조 휘 선을 중시조라는 종인들은 없겠지요.
속함대군의 조작이 1662년도 발행한 밀양박씨 임인보에서 조작과정을 확인을 했으니 이제는
대종회의 결의를 거쳐서 속함대군의 정리를 하는일이 남았으니 잘 부탁을 합니다.
지금까지도 속함대군이하 5세의 제사를 게속하고 있는 우리들의 대종회가 바로잡아 줄때까지
여러분들의 투쟁을 게속 해 주실것을 당부를 드립니다. 용기를 내시어 폐기되는 그날까지 잘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