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동 세광상업전수학교 시절, 은사 박원필 수학 선생님을 찾습니다.
2018. 5. 11일 이경용 올림.
지금 현재,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추고, 글도 조금 쓰고, 경제적 발전을 이루게 된 단초를 만들어주신 분은, 국세청 공무원 시험의 수학과목을 100점 맞게끔 기초를 튼튼하게 가르쳐주셨던
세광상업전수학교 시절(1973, 5월 ~ 1976. 2월)의 박원필 수학 선생님이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 중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식당에서 일하던 16살일때에, 어떤 모르는 귀인이 나타나서, 이경용의 아버님에게 자식이 공부할 수 있도록 안내해주셨다.
중학교 3학년에 다닐 나이인 1971, 5월에 중학교 과정의 인가도 없는, 중계동의 동광고등공민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다. 중학교 1학년 과정을 건너뛰고 다니게 된, 동광고등공민학교는 3개월 후인 8월에 폐교되어 없어져 버렸다.
학교를 너무 다니고 싶었다. 세광고등공민학교에 1971.9.10일경에 편입하였다.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하였더니, 한달 뒤인 10월 중간고사에서 국어를 제외한 과목을 전부 100점 받아서, 평균 97점으로 1등을 하였다. 명문 중학교는 아니지만, 열심히 밤늦게, 아침 일찍 일어나 공부한 덕이었다.
학교를 다녀온 오후에는 밤 10시까지 식당에서 일하며, 늦은 밤에 공부를 하였다. 수돗물이 없어서, 지하수 물을 펌프질하여 바께스로 식당에 날라야 하였고, 식당 안 청소와 인근 공사장 등에 배달도 하며 4년간(1969년~)을 보냈다.
고등학교 갈 형편도 안되었지만, 고등공민학교 3학년때에는 병세가 깃든 아버님께서 공부를 못하게 하셨다.
공부하면 돈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당장 목구멍에 풀칠하기 힘든데 하시며 화를 내시어 식당 안에서 늦은 밤에도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친한 친구 세명은 과외를 다녀서 부러웠으나 시기하는 마음은 일체 없었다.
세광고등공민학교 3학년 다닐 적에 가난 때문에 공부를 못하게 하시던 아버님은 2년 뒤인 1974년도에 세상을 뜨셨다.
고등공민학교를 졸업후, 너무 살기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고등학교 과정의 진학을 포기하였으나, 공부를 해야 미래가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서 1973. 5월에 야간 전수학교 1학년에 중도 편입하였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3년간 막걸리 배달을 하면서, 오후에는 야간 전수학교를 다녔다. 집에서는 공부할 시간도 거의 없었다. 막걸리 배달의 자전거를 타고 상계동의 야간학교를 오갔다.
남녀 공학인 야간 반의 친구들은 주간에 대부분 공장 등에 출근하고 늦은 오후에 학교를 다녔다.
학생들이 너무 늦게 오다보니 첫교시 두교시를 거르기 일쑤였다. 다른 과목들은 외우고 이해하기 쉬우나, 수학만은 기초가 없으면 혼자하기 힘들었다.
3년 동안, 매년 수학 교과서 반도 마치지 못하고 끝냈으나, 수학선생님이 기초를 너무 잘 가르쳐 준 덕에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이해하고 넘어갔다. 열심히 하여 1등을 해도, 장학금을 주지 않아, 주야간 1등하기를 아예 단념해버렸다.
짐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 보니, 노가다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런 별명을 부르는 친구들은 이경용보다 더 좋은 환경에 있었다.
나를 낮춰 부르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자격도 안나오는 이름도 없는 야간전수학교를 나와서는 별로 좋지 않은 직장마저도 취직이 안되었다.
늦은 밤 10시가 넘어 집으로 가면서, 내가 이런 학교를 나와 장래 무엇을 하면서 살까를 생각해보면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달빛에 비춰진 자전거와 나의 그림자 모습을 볼때마다 초라한 현실과 암담한 미래를 생각하면 서글픔이 항시 몰려왔다.
막노동을 하며 살 수가 없어서, 막걸리 배달을 그만두어버렸다. 초라한 야간 전수학교의 학력으로는 직장 취직도 안되어서,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게 되었다.
딱 한달 뒤인, 1976. 10월에 있을 국가공무원(국세청 5급 을류)시험에 붙기 위하여, 죽기살기로 공부하였다. 국사. 일반사회는 외우고 이해하기 쉬우나, 수학이 제일 걱정이었다. 영어도 너무 걱정이었다.
한달 계획을 짰다. 1주일에 공통수학과 수학1의 해법수학 2권을 마치려면 하루에 약 35장을 독파해야 했다. 한달 동안, 독서실만 다녔고, 매일 오후 5시경이면 수학을 끝마칠 수 있었다.
박원필 수학선생님이 기초를 잘 가르쳐준 덕에 혼자 독파가 가능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날 그날의 수학 하루 분량을 마치면 무조건 영어단어. 숙어. 문법 등을 공부했다.
국사와 일반사회는 각각 2일씩 4일에 마치려하였으나, 5일이 걸렸다.
1,500명 뽑는데 75,000명이 응시하여 약 50대1의 경쟁이었으나, 공무원 1차발령 220명 속에 100등 안에 들었을 정도로 시험성적은 괜찮았다. 100등이면, 750대 1의 경쟁률인 것이다.
앞으로 1년간을 열심히 공부하게 된다면 자가당착일지 모르지만, 연고대는 합격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공부할 형편도 아니고, 동생들 3명과 외할머니와 어머님까지 부양하며 살아야 하였다.
대학갈 생각은 아예 접어버렸다. 내 일신의 영달을 꿈꾸지 않았다. 훗날, 내 자식들이라도 대학을 잘 가면 그만이고, 가족을 잘 부양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친구들처럼 자신을 위해 대학을 가는 친구들을 보면 따라하고 싶지 않았다.
수학, 국사, 일반사회 3과목은 만점이었다. 1달 동안, 죽기살기로 공부하였더니, 몸무게가 10kg(70kg→60kg)이나 빠져서, 완전히 말라깽이가 되어 버려서, 머리가 핑하며 어지럽기도 하였다.
박원필 선생님이 수학의 기초와 원리를 잘 가르쳐주신 덕에 수학을 혼자 독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래지향적인 훈화와 노래를 가르쳐 주시기도 하였다. 현실을 암담하게 보지 말고, 항상 긍정적으로 밝은 미래를 보라 하시었다.
그 당시, 가수 장미화가 밝게 웃으며 쾌활하게 노래를 불러서 좋다고 하셨고, 노래 “얼굴”을 학생들과 함께 부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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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얼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무지개 따라 올라갔던 오색빛 하늘나래
구름 속에 나비처럼 나르던 지난날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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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필 수학선생님을 만나지 못하였다면, 공무원 시험을 합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국가공무원을 17년 하다보니, 세법. 민법. 기타법률을 알게 되었고, 그런 공무원 경력 뒤에 있었던 1997년도의 공인중개사시험은 2달 공부하여 쉽게 붙을 수 있었다.
대학을 나와도, 공인중개사 시험도 붙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 실력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국세청에 있을 때, 가난하여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공직에 들어온 직장 동료들은 거의 대부분이 서울의 야간대학을 나왔다.
이경용은 대학을 다니든 상관하지 않았다.
매일 제일 먼저 출근하여 부족한 업무분야 책을 읽었으며, 어느 정도 업무실력을 인정받아서 국세청에서 전국 세무상담관도 역임하였다.
건축사와 관할 시청에서 안된다는 대지 분할(국토부의 유권해석 답변받음)을 성사시키고, 도시계획과 건축관련의 각종 어려움을 해결하고,
지방세와 국세 등의 잘못된 세금부과 등을 시정(국민신문고 답변받음)할 수 있는 것은 대학간판이 아니라, 그만큼 지식을 쌓은 노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초등학교만 정식으로 졸업하고서, 대입 검정고시 합격증이 내학력의 전부이다.
지난날의 초등학교만 정식졸업하고 난 뒤에, 중도 편입한 고등공민학교와 야간 전수학교를 다닌 전 학력 중에서, 어려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수 있도록 나에게 제일 큰 영향을 주신 분은 박원필 수학 선생님이라 여겨져서,
이 글을 올리며, 은사이신 선생님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2018. 5. 11일 제자 이경용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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