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붕래 선생님 글방 펌]
요(堯) 임금과 격양가(擊壤歌) 김붕래
<산서성 지도, 아래서부터 운성, 임분, 태원, 대동이라는 간체자 글씨가 보입니다>
1. 버스(巴士, 혹은 公共汽车) 마침 점심때여서 터미널 근처 식당에서 쌀국수 한 그릇을 5원주고 사먹었습니다 (맥도날드 커피 한잔은 7원). 한 3시간 정도의 거리였는데, 오후 12시에 출발한 버스는 5시는 되어서 임분에 도착했습니다. 당초 예정은 도착하는 대로 요임금 사당을 참관하고 다음날 일찍 능(陵)을 보고 싶었는데, 5시면 이미 문을 닫을 시간, 지도로 본 거리와 현실은 늘 이렇게 커다란 간격이 벌어집니다.
“뭘 그리 서두르나, 노구를 끌고 예까지 왔으니 우선 따뜻한 물로 몸이나 추스르게. 나는 예서 4천 년이나 자네를 기다렸다네. 빠르고 늦다는 것은 성급한 문명인들의 조바심일 뿐일세…….” 요 임금님의 인자한 가르침대로 우선 호텔을 찾아 여장을 풀었습니다. 외국 투숙객 구경을 별로 못한 프런트 사무원은 제 여권을 유심히 보다가 저희들끼리 킥킥 웃습니다. 1박에 180원인데 야진(押金)이라 하여 360원을 받습니다. 야진은 일종의 보증금입니다. 기물을 파손하거나 별다른 사고가 없으면 다음날 퇴실 시 180원을 돌려받습니다. 중국 장거리 버스의 운행 방식은 우리와 좀 다릅니다. 아직 버스는 단순한 통행 수단만이 아니라 화물의 운송도 겸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남서울 터미널에서 출발한 대전행 버스는 바로 고속도로로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가락 농수산센터에 들러 짐칸에 수박을 잔뜩 싣고 지방 도로를 달립니다. 수원쯤 오면 고속도로 진입로 입구에서 몇몇 승객을 태우고 고속도로에 진입합니다. 다시 청주 진입로로 빠져서 한 가계에 그 수박들을 내려놓고는 역회전해서 고속도로로, 신탄진 인터체인지쯤 와서 또 몇 명의 승객을 내려 줍니다. 처음에는 불합리한 듯 보였는데 차츰 이해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자기 차나 배달해 주는 차가 있어야 수박을 도매로 사올 터인데 그런 시스템이 없으니 고육지책이지요.
우리 집이 신탄진인데 서울에서 신탄진 가는 버스가 없습니다. 대전에 가서 다시 신탄진에 오는 버스를 타려면 그만큼 돈이 더 듭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승객들은 중국 버스의 그런 과외 활동(?)을 묵인하기도 하고 이용합니다. 아직 이들은 시간이 중요하기보다는 10원이라도 돈이 더 소중한, 1인당 국민생산 3천불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요.
2. 요 임금 사당(堯廟)
[요전, 요 임금을 향배한 곳, 일명 광운전이라고도 함. 위의 현판이 '요전', 아래 현판이 '광운전']
사당 정문에 들기 전, 광장에는 ‘중국 제일 화표(華表)’가 하늘 높이 솟아 있는데, 그 10m를 넘는 화표를 중심점으로 중국 모형 지도가 입체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서고동저(西高東低). 꿈틀대는 산악 사이로 가녀리게 빠져 나와 흐르는 황하. 동쪽 산해관에서 서쪽 사막 가욕관(嘉峪關)으로 연결된, 장강(양자강) 길이와 맞먹는다는 만리장성. 묘하게 이곳 화표의 위치는 중국 지도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광장 서쪽 벽에는 대문짝보다 크게 쓴 '화하자손 동근공조(華夏子孫 同根共祖)'라는 여덟 글자를 빼곡하게 에워싸고 1200여 성씨들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것만 읽어도 반나절은 즐길 수 있을 것 같게 글자마다 정자, 상형문자, 발음을 토 달아 놓았습니다. 서방 국가의 종교라는 개념을 이들은 이런 민족적 자부심으로 대치하는 것 같은 발상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문을 들어서니 긴 신도(神道)가 펼쳐지고 한참을 걸으니 일주문 형태의 의문(儀門)이 세워져 있습니다. 방문객은 여기서 의관을 정제하고 속세의 때를 씻어내라는 그런 장소입니다. 그리고 그 좌우 대칭되는 지점에 종루와 고루가 우뚝합니다. 보아서 오른쪽이 종루, 왼쪽이 고루입니다. 낮에는 종을 치고, 밤에는 북으로 시각을 알렸습니다. 요 임금 사당의 북은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종도 크기로는 우리의 것과 비교가 안 되었지만 그러나 종소리는 우리나라 사찰의 범종같이 은은하지는 못했습니다.
의문을 지나면 오봉루(五鳳樓)가 나옵니다. 봉황 다섯 마리가 노니는 궁궐. 큰 봉황은 요 임금이고 나머지 네 봉황은 ‘사악(四嶽)’으로 지칭되던 네 명의 대신이 정사를 살피던 곳. 우리 식으로 하면 광화문 오른쪽의 정부 종합청사쯤 되겠죠. 그 양 옆 보도 사이로 임분시 남쪽 양분현 도사촌 (襄汾縣 陶寺村)에서 발굴되었다는 요 임금 당시의 생활 용품들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오봉루 바로 앞에는 두 덩어리 바윗돌이 놓여 있습니다. '강구요(康衢謠)'와 '격양가(擊壤歌)'가 전서체로 새겨진 아담한 바위입니다. 이 오봉루 다음 건물이 요임금께 제사를 올리는 공간인 광운전(廣運殿)입니다. 그 앞에는 ‘요정(堯井)’이라는 우물이 있습니다. 요 임금이 판 우물, 세상에서 가장 단 물이라는 안내서가 보이네요. 중국은 물 사정이 한국처럼 아무데나 판다고 해결되는 곳이 아닙니다. 덕이 있는 자만이 우물을 팔 수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찾은 궁궐이나 사당마다 우물은 아주 정갈하고 성스럽게 모셔져 있습니다.
광운전 안에는 온통 금빛으로 번쩍이는 적당한 크기의 요 임금 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임금의 색상은 주황색이고 숫자는 9자입니다. 억새풀로 엉성하게 엮은 석자밖에 안 되는 토방에서 태평성대의 문을 열었다는 그분이 지금은 번쩍이는 황금 소상으로 모셔졌으니 생전에 검소하고 소박했던 요임금의 삶이 사후에 충분히 보상받는 호사를 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해마다 정월이면 이곳에 제사지내는 것이 산서성의 큰 행사의 하나라 합니다. 광운전은 요묘(堯廟)의 중심 건물로 춘추전국시대 진(晉)나라 때부터 모셔졌는데 현재의 광운전 3층 누각은 당나라 때 건립되어 지금까지 16차례 개수와 중건했다고 적혀있었습니다. 요정((堯井) 뒤로 있는 좌우 건물은 순임금과 우임금의 사당으로 양 옆에서 요 임금을 보좌합니다. 순 임금은 요 임금의 사위이고 우 임금은 순을 받들어 황하를 다스린 명군입니다. 거기를 지나면 화원과 침전이 나옵니다. 천년 묵은 아름드리나무들이 세월의 무게를 용케 버티고 있었습니다. 나무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장대해지는데, 왜 사람은 늙어가며 점점 초라하고 왜소해질까요? 광운전 추녀 사이로 가지를 뻗은 고백(古栢), 그 너머로 새파란 하늘. 이것은 천 년 전의 하늘 그대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격양가가 울려 퍼지던 요 임금 시절은 매일매일 진화하지 않고는 살아남지 못하는 고단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고향의 유년시절과 같은 매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고향의 시계는 멈춰서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파라다이스'는 과거의 일이었습니다. '에덴동산','유토피아', '무릉도원' 이런 낙원에서 지금의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하는 실낙원의 백성입니다. 공자님이 말씀하신 요순시대의 태평성대 또한 과거로의 회귀입니다. 가장 행복한 시절은 어머니의 태내에서 쪼그리고 앉았던 그 열 달이었듯이. 그래서 제가 그렇게 요 임금의 사당을 꼭 한번 보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3. 역사 요임금은 13세에 '도(陶')라는 땅을 영지로 받고, 15세에 '당(唐)'이란 곳을 다스려 요임금을 도당씨(陶唐氏)라고도 했습니다. 그 후 황제로 등극하여 이곳, 임분시에 터 잡으니 옛 이름은 평양(平陽, - 우리나라 평양은 平壤)입니다.) 까마득한 옛날, 우리 단군 할아버지가 고조선을 세웠을 때가 요임금 25년이라 『삼국유사』에 적혀 있으니, 기원전 2400여 년, 지금부터 4500년 전 이야깁니다. 중국 학자들은 임분시 남쪽 양분현 도사촌 (襄汾縣 陶寺村)이란 마을에서 요임금의 성터를 발견했다고 흥분한 적도 있습니다. 서양의 종교가 하나님으로 도배했듯 중국 사람들이 역사에 열광하는 것도 일종의 신앙 같았습니다. 이 요순 시절의 이야기는 우리 고전에도 회자됩니다.
조선시대 소리꾼들이 부르던 유산가의 한 구절에 나오는. "소부 허유 문답하던 기산영수(箕山潁水) 예 아니냐?" 그 부분이 바로 요 임금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편에 요 임금이 천하의 현인 '허유(許由)'를 찾아가 대신 나라를 맡아 달라 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일월이 환한 대낮에 횃불을 밝힌들 그 빛이 얼마나 밝겠습니까? 내 능력의 한계를 잘 아니 나대신 나라를 다스려 주십시오." 라는 요임금의 말에 허유는 "명예는 실존의 그림자이니 어찌 그림자 때문에 내 몸을 번거롭게 할 것인가."라고 거절합니다.
황보밀(皇甫謐)이라는 이가 엮은 <고사전(高士傳)>에는 그 후일담도 나옵니다. '영수(潁水)'에 가서 귀를 씻는 허유를 보고 마침 송아지 물 먹이려던 소부(巢父)가 까닭을 묻습니다. ‘요 임금한테 속세의 때 묻은 소리를 들어 귀를 씻는 중’이란 말을 듣고 소부는 송아지를 상류로 끌고 가며 소리칩니다. "공연히 허명(虛名)만 세상에 떠내려 보내는 자네의 더러운 귀 씻은 물을 우리 송아지에게 먹일 수는 없다네."
기산과 영수는 하남성 정주시 등봉현에 있습니다. 임금 자리를 선뜻 양보하려는 요 임금이나 그것을 완강하게 거절하는 허유나 그런 허유에게 '허명' 운운하며 통렬한 야유를 퍼붓는 소부, 모두 공자님이 '태평성대'로 예찬한 바로 '요순' 시절의 백성이었습니다.
중국 최초의 역사책은 공자가 저술한 <서경(書經-尙書)>일 것입니다. 여기에는 요, 순과 하, 은, 주 삼대의 이야기밖에 없습니다. 그 후 5백년이 지나 사마천의 <사기>에는 더욱 상대(上代)로 거슬러 올라가 <오제본기>(황제, 전욱, 제곡, 요, 순)를 적었는데, 한나라 말부터 수인, 복희, 신농 같은 삼황도 등장해서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염황(炎黃)의 자손이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남성 정주 ‘황하 유람구’에 가보시면 산봉우리를 깎아 만든 어마어마한 큰 바위 얼굴 두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염제 신농씨와 황제 헌원씨의 얼굴입니다. 지금 중국 사람들은 자신의 역사를 시공을 초월하여 이렇게 요란하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우리 단군 할아버지도 <삼국유사>에서 현실로 끌어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실증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인문학적 증거야 어떻든 우리들은 단군의 자손, 배달민족인 것을 자랑으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서해안 간척지나 김제만경 넓은 벌 어디쯤, 향 바른 따스한 곳에 아주 괜찮은 테마공원 하나 만들어 널찍하게 단군도 모시고, 수로부인도 예쁘게 단장시키고, 공무도하가의 노래도 흘러나온다면 그 또한 아름답지 않을까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했던가요? 지금으로부터 4500여 년 전이라 한다면 기독교식으로 하면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시절과 연대가 비슷한가요? 온 천지가 물바다이고 파충류가 극성을 부렸다니, 중국에는 곤(鯤)이나 우(禹) 임금 같은 치수의 달인도 당연히 있었을 거라면, 그곳보다 생활 환경이 좋았을 만주 벌판이나, 한반도에도 빛나는 인물이 있었던 것은 당연하겠지요. 환인 환웅, 치우 같은 분들은 우리 역사 속에 좀 더 친근해야 하겠습니다.
4 노래 이야기가 빗나갔습니다만 공자가 춘추시대라는 약육강식의 혼란기를 살면서 최초의 역사책 <서경(상서)>에 최고의 이상형으로 요 임금을 꼽은 것은 아마도 그 분의 무위이치(無爲而治)에 있었을 것 같습니다. 다음 두 노래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요 임금은 나라를 다스린 지 50년. 자신의 정치가 어땠는지 궁금해 거리로 나갔다가 아이들의 노래를 듣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잘 사는 것은 / 모두 임금님의 지극한 덕이네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 임금이 정하신대로 살아가네. (立我烝民 莫匪爾極 不識不知 順帝之則 - 강구요) 밭 매는 노인들도 부른 배를 두드리며(含哺鼓腹-함포고복) 노래합니다. 해 뜨면 농사짓고 / 해가 지면 쉬네 우물 파서 물 마시고 / 밭 갈아 밥 먹으니, 임금님의 힘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于我何有哉 - 격양가)
<격양가의 내용이 전서체로 적혀 있습니다>
요 임금은 30세 된 순(舜)을 발탁하여 30년간 후계자 교육을 시켜 자신의 제위를 물려줍니다. 아황 여영(娥皇女英)이란 두 딸의 그의 아내로 줍니다. 아황 여영은 문왕의 모친과 아내 ‘태임 태사(太妊太似)’와 함께 천하의 현숙한 여인으로 이름을 남긴 분입니다.
"요는 바로 방훈이다. 그는 하늘처럼 인자하고 신처럼 지혜로웠으며 사람들은 마치 태양에 의지하는 것처럼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만물을 촉촉이 적셔주는 비구름을 보듯이 그를 우러러보았다. 그는 부유하였으나 교만하지 않고 존귀했으나 오만하지 않았다."
4500여 년 전 요 임금의 사람됨을, 2000여 년 전 사람인 사마천이 『사기』에 써 놓은 명문입니다. 요임은 석자 마루와 삼단 흙 계단의 집에서 지붕은 띠풀로 엮어 거처를 마련했습니다. 거친 잡곡밥에 명아주나 콩잎 국을 먹었으며 여름에는 칡 베옷 겨울에는 사슴 가죽을 입는 근검한 생활을 하면서 사해에 인자한 덕을 베푼 분이 요 임금입니다. 요 임금 사당 관람 시간은 5시까지입니다. 이곳에서 3시간 동안, 중국말을 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르는 제가 예서 기웃 제서 기웃 혼자 상상의 안테나를 곤두세운들 뭐 크게 대수로운 공부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만 일상에서 벗어나 영혼이 자유로워지면 시공을 넘나들며 천리 밖의 5천 년 전 일을 '지금 여기' 현장에서 조금은 실감할 수 있는 것이 여행이 주는 보너스이겠지요.
요임금 사당을 나오자 광장에는 일상을 살아가는 인파가 시장같이 분주했습니다. 넓은 광장을 가로지르자 알록달록 자동차의 긴 행렬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중국의 상술은 상식을 거부합니다. 요묘(堯廟) 앞에 조성된 넓은 광장에선 승용차를 전시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공존한다고 할까요. 가까이 가보니 반갑게도 '기아자동차'도 위풍당당하게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이곳에서 타고 다녔던 택시도 기아차였습니다. 저 같은 백면서생이 중국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대륙을 휘젓고 다닐 수 있는 것도 우리나라 기업들의 활발한 진취성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대한민국 만세입니다.
진열된 자동차가 보이는 사진의 북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웅장한 관문은 중국 사람들이 파리의 '개선문'보다 높다고 자랑하는 '천하제일문(天下第一門)'입니다. 문루가 세 개인 것은 중국 역사의 최고 성인 요, 순, 우 임금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여정의 끝을 알리듯 서녘에 저녁놀이 곱게 깔리고 있었습니다. 이 글이 답사 보고서거나 격식 갖춘 기행문이라면 쓰기 참 힘들었겠지요. 그냥 나이 들어 혼자 노는 일이니, 한적 속에 자적(自適)이 깃듭니다. 아무 것도 스스로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슬쩍 스쳐주기만 해도 스스로 베일을 벗는 아름다운 것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습니다. 떠나보면 아무것도 예사로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요 임금을 만난 것은 제 노년의 축복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