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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군 소이면 비산1리 방죽안 마을 뒷쪽에 자리한 음애동 계곡에 암석에 각자된 글씨이다
음애동이란 글자가 암석에 새겨져 있다.
조릿대 뒷쪽에 숨어 모습 드러내길 수줍어 하는 것 같다
그 옛날 조선의 문신 이자가 이 음애동계곡에서 띠풀로 초막을 짓고 유배생활에 세상향한 울분을 한줄의 시로 한잔의 술로 풀어내며
마음속의 아픔을 담아 이 곳 음애동 계곡에 각자하였을까?
음애 선생이 학문을 수련하던 곳이라 하여 지명마저도 음애동이 되였다.
음애(陰崖)는 바위에 글자를 새겨놓았다고 전해지는 조선 중기의 문신 이자(李耔)의 호이다. 음애(陰崖)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햇빛이 비치지 않는 낭떠러지'를 의미한다. 음애동 각자는 이자가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에 위치한 음애동(陰崖洞)에 거주하면서 새겨놓았다고 전한다.
글자는 '음애동(陰崖洞)'이라는 글자가 횡으로, 한문(漢文)으로 새겨져 있다. 각 글자의 크기는 각각 가로 15.5㎝, 세로 15.5㎝이다.
음애동이라고 쓴 바위의 맞은편 바위에 '탁영선탑(濯纓仙榻)'이라는 글씨를 새겨놓았다. 탁영선탑이란 '갓끈을 씻는 신선의 걸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탁영선탑(陰崖洞 濯纓仙榻)’이란 각자의 크기도 각각 가로 15.5㎝, 세로 15.5㎝이다.
이자가 지은 [음애집]에 기술되여 있는 "스스로에 대하여"라는 대목을 보면 다음과 같이 당시의 마음을 기술하고 있다.
....물러나 음애에 살면서 인사를 끊고 문을 닫고 잘못을 살폈다.
샘을 뚫어 못에 대고 풀을 베어 정자를 지었다.휘파람 불고 시를 읊어 회포를 풀었다.
때로 술을 얻으면 실컷 마시고 10여일씩 일어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양치질과 빗질을 하지 않아 때가 손톱에 가득하였다.
자빠지고 쓰러져 정신이 희미한데 빈터에 오락가락하여 마치 꿈속에 헛소리 하는것과 같고 혹 글자를 꾸며내서 시구를 만들어도 다시 놀랄만한 말이 나오지 않고 근심이 쌓여 습관이 되였다.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고려(高麗) 때에 가정 선생(稼亭先生)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과 목은 선생(牧隱先生)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 부자(父子)가 서로 이어 원(元)나라 조정에 들어가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이 천하에 알려짐으로부터 마침내 문헌 세가(文獻世家)가 되었다.
목은 선생의 둘째 아들 이종학(李種學)은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벼슬을 지냈는데, 선조(先朝, 고려조(高麗朝))에 대해 신하로서의 절의(節義)를 지키려다 개사(改社, 바뀐 사직(社稷)이라는 뜻으로, 조선 왕조(朝鮮王朝)를 가리킴)에 목숨을 잃었다. 밀직공(密直公)이 이숙무(李叔畝)를 낳았는데, 이분은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내면서 송사(訟事)의 판결(判決)을 잘하여 억울한 사람이 없었고, 집안에는 불필요한 사치품이 전혀 없이 청렴한 생활을 해나가다, 나중에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지냈으며, 시호(諡號)는 양도(良度)이다. 이분이 이형증(李亨增)을 낳았는데,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지냈고 몸가짐이 청렴 고결하여 티끌 하나라도 남에게서 취하는 법이 없었다. 첨지공(僉知公)이 이예견(李禮堅)을 낳으니 이분은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지냈는데, 가는 곳마다 청백(淸白)ㆍ근신(謹愼)으로써 이름이 높았고, 자제(子弟)를 교육함에는 몸가짐을 조촐하게 가지고 외면적인 겉치레가 없도록 하였다. 이분이 선산 김씨(善山金氏) 종사랑(從仕郞) 김관안(金寬安)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성화(成化) 경자년(庚子年, 1480년 성종 11년)에 서울에서 공을 낳았다.
공의 휘(諱)는 자(耔)이고, 자(字)는 차야(次野)이며, 세상에서는 음애 선생(陰崖先生)으로 불렸다. 공은 어렸을 때부터 의젓한 태도가 마치 성인(成人)같았고, 섣불리 실없는 장난을 하지 않으니 주위 사람들이 벌써 범상한 아이가 아님을 알았다. 공의 나이 겨우 7, 8세 되던 무렵에 아버지인 대간공(大諫公)이 처음 글을 가르쳤는데, 자세하게 가르친 것이 없는데도 1년 만에 벌써 구두(口讀)를 떼고 다시 1년 후에는 대의(大義)를 환히 알았으며, 조금 더 성장하자 학문에 더욱 힘을 써서 조용한 집에 물러나 지내기에 이르니, 마치 마음속에 뭔가 깊은 진리를 깨달은 듯하였다.
계축년(癸丑年, 1493년 성종 24년)에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있던 아버지를 따라가 모시고 있으면서, 마침내 두타산(頭陀山)의 중대사(中臺寺)에 올라가 ≪송사(宋史)≫를 읽던 중 개연히 의분(義奮)을 느껴 만언서(萬言書)를 지어서 스스로 조정에 올리려고 하였으나, 아버지인 대간공이 타일러 그만두게 하였다. 당시에 어떤 학식이 깊은 노승(老僧)이 그 절에 있었는데 계율(戒律)을 지켜 나가는 태도가 꽤 엄격하고 하는 말에 도리(道理)가 스며있었는데, 그 또한 공의 의견을 반가워하면서 동참하려고 하였다.
한편 그 절의 앞에는 절벽(絶壁)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겨우내 쌓인 눈이 찬란히 눈에 부셨는데, 공은 향 서린 등불 아래 기나긴 겨울밤을 고금의 역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급기야 서울에 돌아올 때가 되매, 공은 마냥 아쉬운 생각이 들어 때로는 깊은 걱정에 탄식을 길게 하면서 심지어는 간관(諫官)이 되어 당세(當世)의 일을 극언(極言)하려고까지 하였다.
홍치(弘治) 신유년(辛酉年, 1501년 연산군 7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니, 함께 급제(及第)한 김안국(金安國)ㆍ정충량(鄭忠樑)ㆍ성세창(成世昌)ㆍ유운(柳雲)이 다들 공의 벗이었다. 이따금 성균관(成均館)에 유학(遊學)하면서 남들에게 그다지 눈에 띄게 하지 않았는데도 다들 공을 덕망(德望) 높은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를 걸었다. 또한, 이장곤(李長坤)ㆍ심정(沈貞)ㆍ이공중(李公仲)ㆍ이효언(李孝彦)ㆍ김희수(金希壽)ㆍ송호의(宋好義)ㆍ송호례(宋好禮)ㆍ송호지(宋好智) 등과 함께 학문을 갈고 닦았으나, 매양 전일에 그들에게 기대했던 바가 이미 십중팔구는 손상된 점을 아쉬워하곤 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504년 연산군 10년)에 문과(文科) 제1등으로 뽑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고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충원되었으며,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천거(薦擧)에 의해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임명되었다. 당시는 연산(燕山)의 정치가 문란하던 때였는데, 공은 내키지 않는 벼슬에 소신을 굽히고 나아가, 오직 술을 마셔댐으로써 자신의 행실을 자오(自汚)할 따름이었다. 아버지인 대간공(大諫公)이 임금의 비위를 거슬려 처음에는 용궁(龍宮)에 유배(流配)되었다가 곧이어 성주(星州) 땅으로 이배(移配)되니, 공은 즉시 문소(聞韶) 고을에 외임(外任)으로 나가기를 자청(自請)하였는데, 그곳백성들을 다스리고 인재를 교육함에 있어 모두 올바른 방책(方策)을 한껏 베풀어 나갔으므로, 공이 그만두고 물러간 후에는 백성들이 공의 선정(善政)을 대대적으로 기려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칭송하였다.
정덕(正德) 병인년(丙寅年, 1506년 종중 원년)에 정국(靖國, 중종 반정을 가리킴)이 이루어져 대간공(大諫公)이 조정에 돌아오게 되자 공은 또 양천(陽川)에 외임(外任)으로 나가기를 청(請)하였는데, 미처 부임(赴任)을 하기도 전에 공의 문학(文學)이 고문(顧問)에 대비할 만하다고 말한 자가 있었으므로, 이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제수되었다.
경오년(庚午年, 1510년 중종 5년) 겨울에 대간공(大諫公)의 상(喪)을 당하여 그 이듬해 봄에 용인(龍仁)의 기곡리(器谷里)에 여막(廬幕)살이를 하면서 장례(葬禮)와 제사(祭祀)를 예(禮)로써 지내니, 향리(鄕里) 사람들이 본받아 따랐다. 상기(喪期)를 마친 후 선롱(先壟, 선산(先山)) 아래 남계(南溪)의 바위틈에 단풍 숲이 끼어 자라는 것을 보고서는, 내심 그것을 사랑한 나머지 자호(自號)를 ‘풍림 거사(楓林居士)’라 하였다.
계유년(癸酉年, 1513년 중종 8년) 봄에 부교리(副校理)ㆍ부응교(副應敎)ㆍ사간(司諫)에 승진되었는데, 그 이듬해인 갑술년(甲戌年, 1514년 중종 9년) 8월에 대부인(大夫人)의 상(喪)을 당해 슬퍼하는 정성이 더욱 깊어, 상기(喪期)를 마치고 장차 돌아가려 하면서 종[奴]의 손을 쥐고 말하기를, “너를 여기에 남겨 혼자 묘소를 지키게 하니, 의리가 형제나 똑같다.” 하고는 오열해 마지않았다.
병자년(丙子年, 1516년 중종 11년) 9월에는 직롱(直壟) 남쪽 양지바른 곳에 한 칸의 집을 짓고 처마를 올리고 담장을 둘러 재숙(齋宿)하는 장소로 삼고는 이름을 사암(思庵)이라고 하였다. 또 기문(記文)을 지어 그 뜻을 밝혀서 판(板)에 쓰기를, “나의 허물을 징계하려는 뜻이다.” 하고, 한편으로는 규계(規戒)를 삼아 걸었다. 대체로 그 의도는 종신토록 그렇게 살다가 여생을 마칠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해 겨울에 다시 응교(應敎)에 제수되었고 곧이어 전한(典翰)ㆍ직제학(直提學)에 승진되었으며, 정축년(丁丑年, 1517년 중종 12년) 여름에는 부제학(副提學)에 승진하여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에 이임(移任)되었다.
무인년(戊寅年, 1518년 중종 13년) 5월에 조정에서 변무(辨誣, 종계 변무(宗系辨誣))에 대해 주청(奏請)할 일을 의논하였는데, 임금이 사자(使者)를 폭넓게 선발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전조(銓曹, 이조)에서 그럴 만한 사람을 얻기 어렵다고 하여 시종신(侍從臣)에 추천된 공을 보내고자 청하면서 부사(副使)에 의망(擬望)하니, 임금이 특별히 직질(職秩)을 높여 주었다. 이에 공은 한사코 사양을 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으므로, 마침내 명(明)나라에 들어가 진주(進奏)하고 다시 예부(禮部)에 등서(謄書)하니 종백(宗伯)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제본(題本)이 올라가자마자 즉시 유음(兪音)이 내렸으므로, 이에 칙서(勅書)를 받들고 압록강을 건너 본국에 돌아오니, 등급을 건너뛰어 한성 판윤(漢城判尹)에 승진을 시키고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시키는 한편, 토지와 노비를 하사(下賜)하였다. 그해 3월에는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옮겨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임하였고, 얼마 안 있어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이 되어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임하였다.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의 사화(士禍)가 일어나자 공은 연루되어 벼슬에서 물러나 음성(陰城) 고을에 살면서 비로소 ‘음애(陰崖)’라 자호(自號)하였다. 일체 왕래를 끊고 두문 불출 하면서 허물을 반성하고 조촐하게 처신하는 한편, 쌀독이 누차 비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마음을 편하게 지내고 오직 좌우에 있는 도서(圖書)에만 뚫어지도록 정신을 집중하여 주목하니, 집에서 심부름하는 아이조차 공의 얼굴을 보기가 드물 정도였다. 또한 틈이 생기면 학자(學者) 서너 사람을 데리고 문암(門巖)의 시냇가를 배회하면서, 간혹 천류(泉流)를 터서 연못에 끌어들이고 띠풀을 베어 정자(亭子)를 지은 다음, 시(詩)를 읊조리며 회포를 털어놓기도 하였으며, 이따금 술을 마련하여 실컷 마셔댐으로써 가슴속에 쌓인 응어리를 씻어 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글짓기도 좋아하여 늘 붓 가는 대로 자기 생각을 표현함으로써 자오(自娛)하곤 하였다.
기축년(己丑年, 1529년 중종 24년)에는 다시금 깊숙이 은거할 생각을 가지고는 충주(忠州) 땅의 달천(獺川) 상류(上流)에 있는 토계(兎溪)로 거처를 옮겨 자그마한 정사(精舍)를 지어 ‘몽암(夢庵)’이라고 명칭을 하고서, 간혹 ‘몽옹(夢翁)’으로 자호(自號)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 산은 높다랗고 으슥한 데다 물은 한결 깨끗하여 인적이라곤 전혀 없었고, 인가(人家) 또한 자연히 드물어서 물가의 새들과 산짐승들이 마음놓고 평화롭게 왕래하였다. 한편 전(前) 교리(校理) 탄수 선생(灘叟先生) 이연경(李延慶)과 더불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기에, ‘계옹(溪翁)’이라 자호(自號)하고서 바람이 맑고 달이 밝은 날이면 배를 타고 서로 찾아가 도의(道義)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주고받으면서, 가슴속에 스민 생각을 훌훌 털어놓으며 즐거움을 만끽하고 근심을 잊곤 하던 일을 1기(一紀, 1기는 12년임) 남짓 계속하다 계사년(癸巳年, 1533년 중종 28년) 12월 15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享年) 54세로 선영(先塋) 곁에 장사지냈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뛰어나 외모(外貌)는 더없이 멋있고 마음가짐은 활짝 트여, 바탕이 넓고 두터우며 도량이 더없이 크고 밝았다. 그리하여 남을 상대할 때는 온화하면서도 엄하였고, 일을 처리하는 데는 까다롭지 않으면서도 빈틈이 없었으며, 부모를 섬김에는 자식으로서의 효심과 공경심을 다했고, 형제간에는 공순(恭順)함과 사랑을 다하였다. 또 향사(享祀)에 성의가 독실(篤實)하였고 집안 단속에 장엄(莊嚴)하였으므로, 가정 내의 질서가 깍듯하여 비록 나이 어린 아이들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였다. 늘 어려운 빈객(賓客)을 대하듯이 조심성 있게 지내고 나태한 행동을 하는 일이 없었다. 성세창(成世昌)ㆍ정충량(鄭忠樑) 두 공(公)이 더불어 종유(從遊)하였는데, 승려(僧侶)처럼 고행(苦行)하는 자세를 마음속으로 우러러 본받고는 찬탄하기를, “이런 사람은 노력을 꾸준히 하여 본래 그런 것처럼 되었으니, 배울 만한 사람이다.” 하였다.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게 되어서는 언짢아도 표정에 드러냄이 없으니, 당시 사람들에게 존중과 믿음을 받았고, 조정에 출입한 지 십수년 사이에 누차 임금의 칭찬을 받아 누구보다도 남다른 은우(恩遇)를 입었으나, 날마다 신명을 다 바쳐 은혜에 보답할 길만을 생각하였다. 당시에 국가는 법이 오래 됨에 폐단이 생기고 게다가 난정(亂政)까지 겪었으므로, 그때 상황이 원우(元祐,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 연간에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개혁할 때와 같을 뿐만이 아니었다. 이에 제현(諸賢)이 기용(起用)되어 건명(建明)한 바가 많았는데, 나이 젊고 성미가 급한 젊은층이 앞다투어 탄핵을 일삼고 위험스러운 일을 무릅써서 물정(物情)이 크게 어그러졌다. 그리하여 산직(散職)에 있는 자는 원망하는 심정이 뼈에까지 사무쳐 종적을 감추고 곁에서 기회를 노리는 판국이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공은 신상(申鏛)공ㆍ조광조(趙光祖)공ㆍ권벌(權橃)공과 더불어 두 세력을 적절히 조절함으로써 조정이 바뀌는 사태까지는 이르지 않게 하고자 하였는데, 한두 공(公)이 불가하다고 하는 바람에 이미 일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게 되고 북문(北門, 신무문(神武門))의 풍우(風雨, 기묘 사화(己卯士禍)를 가리킴)가 일어난 것이다.
공이 일찍이 (주청사(奏請使)로) 연경(燕京)에 있을 때 상사(上使)인 남곤(南袞)이 병에 걸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었는데, 공이 갖은 고생을 해가며 병구완을 하자, 서장관(書狀官)이 귓속말로 이르기를, “저 놈이 필시 사류(士類)들을 몰살시킬 것이오.” 하였으나, 공은 정색(正色)을 하고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우리와 함께 온 사신(使臣)이오. 그대 말은 잘못한 것이오.” 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그때 사행(使行)에 별달리 패란(悖亂)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공의 덕분이었다고 말들을 전한다.
공이 동서인 김안로(金安老)의 간사하고 음흉하여 이리저리 흉계를 부리는 점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는 하였지만, 공이 그를 더욱 두터이 대하고 정의를 한껏 베푸니, 저도 감히 버릇없는 말을 공에게 뱉지 아니하였다.
평소에는 담담히 세상사(世上事)를 잊은 듯 지내다가도 정치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여러 날을 두고 탄식을 하였고, 일찍이 남을 훈도(訓導)하다가 진동(陳東)을 죽인 일1)에 이르러서는 채 서너 줄도 읽어 내려가기 전에 목이 메도록 흐느끼면서 소리조차 낼 수 없을 만큼 격하게 분노하여 슬퍼하는 기색이 얼굴에 가득 차고 슬픈 눈물이 눈자위를 적시니, 학자(學者)들이 그윽히 바라보다가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어 서둘러 물러갔다. 또한 늘 스스로 말하기를, “재 너머에 약간의 논마지기가 있으니 벼슬을 그만두고 떠나도 끼니는 해결할 수 있으나, 용구(龍駒)가 자꾸 멀어지니 내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또 그 맏형인 이운(李耘)을 공경하고 걱정해주는 태도가 마치 사마온공(司馬溫公, 송(宋)나라 때 사마광(司馬光))이 (그 형) 사마 백강(司馬伯康)에게 하던 것처럼 극진하여, 함께 고향의 선산(先山)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북녘을 향하여 우두커니 바라보며 한없는 눈물을 줄줄 흘리곤 하였다. 일찍이 그와 함께 성묘(省墓)를 가기로 약속을 하였는데 맏형이 먼저 도착하였고, 고을의 원님으로 있던 성임(成霖)이 그를 찾아왔다. 그런데 성임은 자기 형인 성운(成雲)의 세력을 믿고서 기세를 부리며 의기 양양하게 청류(淸類)들을 원수 보듯 하고 방약 무인(傍若無人)하였는데, 공이 야윈 말을 타고 누추한 차림새로 들어가 자리에 앉으니, 성임이 저도 모르게 풀이 꺾여 달아나려다가 억지로 나와 절을 하고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체 땀을 뻘뻘 흘리다가 밖으로 나가 말하기를, “저절로 경외심(敬畏心)이 생기더라.”고 하였다.
내가 며칠 밤을 모시고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보니 독서(讀書)를 하고 나면 반드시 술을 서너 잔 마신 후 시(詩)를 함께 짓기도 하고 사건을 기록하기도 하였으며, 다시 단정히 앉아서 책을 펼치기 시작하면 글을 읽는 소리가 집 밖에까지 들릴 정도였는데, 이런 식으로 밤을 지새우고 하루 해를 보내면서 온화하고 윤기 있는 안색과 꿋꿋하고 위엄 있는 기개가 그 얼마만큼 깊이를 지니고 있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공은 문장(文章)에 대해 애당초 달가워하지 않아 힘을 들이지 아니하다가 노년에 이르러 비로소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는데, 청순(淸淳)하고 평실(平實)한 글을 지을 뿐 다듬어 꾸미거나 외설(猥褻)적인 글에는 얼씬 조차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공이 지은 ‘즉사(卽事)’라는 시(詩)에 이르기를, “연못 바닥이 평평하니 분수 지킴을 알겠고, 물이 흘러드니 웅덩이가 차기를 기다리네. 구름의 그림자는 본디 종적이 없고, 하늘의 용태는 언제나 흐트러짐이 없구나. 술이 깨면 정신이 말끔히 맑아지고 시가 엮어지면 자세가 흔들흔들 흥이 나네. 이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나이건만, 그런대로 온갖 시름을 씻을 만하네[池平知守分 水注待盈科 雲影本無迹 天容長不頗 酒醒神散朗 詩就坐婆娑 此是人中景 聊焉滌百疴]” 하였고, 그 밖에 다른 시들도 대부분 이와 같은 유(類)였다. 또한 회암어록고해후(晦庵語錄考解後)라는 공의 글이 가장 순정(醇正)한 글로 손꼽힌다. 한편 ≪음애집(陰崖集)≫이 있는데, 거의 다 산일(散逸)하고, 시(詩) 3천 6백 56수(首)와 명(銘)ㆍ표(表)ㆍ부(賦)ㆍ사(辭)ㆍ전(傳)ㆍ기(記)ㆍ서(序)ㆍ설(說)이 합해 74편(篇)으로, 식자(識者)들이 애지중지하여 보배로 여기고 있다.
공은 일생 동안 손에서 책을 뗀 적이 없었으나, 집에 들어가서는 상자를 열어 논저(論著)를 해도 밖에 나가서는 아는 체하지 않고 굳게 입을 다문 채 지내니, 사람들이 공이 무슨 일을 하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또 범 태사(范太史, 송나라 태사 범조우(范祖禹))의 ≪당감(唐監)≫을 모방하여 ≪사평(史評)≫을 저술하기에 정력(精力)을 한껏 들이다가 미처 완성을 보지 못하자, 임종(臨終)할 무렵에 자기의 소회(所懷)를 말로 남길 수 없으리라는 점을 생각하고서는, 몽암관화유문(夢庵觀化遺文)을 지어 자질배(子姪輩)에게 보였으니, 대체로 사생(死生)의 원리를 환히 깨닫고 고향의 선산에 묻힐 때가 가까워졌음을 슬퍼하는 내용이었다. 또 말하기를, “상장(喪葬)의 제반 일은 모두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 따라 거행하되, 염(殮)할 때는 시복(時服)을 쓰고 제사 때는 가찬(家饌)을 써라. 선부군(先府君)이 ‘유밀과(油蜜果)를 쓰지 말라.’고 타일렀기 때문에 감히 그 말씀을 어길 수 없어 시종 1첩(貼)만을 진설하였지만, 내 생각에는 1첩도 진설하지 않는 것이 옳겠다. 그리고 상제(喪祭)에는 고기를 쓰지 않는 것이 우리 집 구풍(舊風)이니, 오직 삭망(朔望)에만 포혜(脯醯)를 간략히 진설토록 하거라. ≪가례≫ 가운데 시행할 수 없는 것은 뒷부분에 써놓았다.”고 하였다.
공의 학문은 (≪소학(小學)≫의) 쇄소응대(灑掃應對)를 계제(階梯)로 삼고, (≪주역(周易)≫의) 궁신지화(窮神知化)를 귀결점으로 삼아, 충양(充養)함이 올바른 방도를 얻고 체용(體用)이 모두 완비되었다. 자기를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고 또한 쉽사리 남에게 이야기하지도 않았으며, 실없는 말을 좋아하지 않고 오직 실지(實地)로 해나가기에만 힘썼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만년에 이르러서는 참된 노력이 꾸준히 쌓인 끝에 의리가 정밀하고 인애가 습숙(習熟)해짐으로써 일거 일동(一擧一動)이 모두 법도에 맞았다. 비록 그가 가르친 것을 들어보지는 못하였으나 그가 도달한 경지를 보면 이미 극도에까지 이르렀으니, 호걸의 재주를 지니지 않았다면 어찌 이처럼 해낼 수가 있었겠는가?
아! 자나깨나 나라를 걱정하던 그의 마음은 오래도록 시골구석에 묻혀 뜻을 펴지 못한 채, 당당히 나서서 세상을 구제하려던 포부가 느닷없이 지하에 묻히고 말았으니, 이야말로 이른바 ‘이 사람이 없어지면 천하 또한 복(福)이 없게 된다.’는 것이니, 그 어찌 천하를 위해 슬피 여길 사람이 아니겠는가?
당시의 만사(輓詞)에 심언광(沈彦光)이 지은 한 편이 있는데, 그 만사에 이르기를, “영묘하고 고아한 회포 노숙한 이와 같아, 일세(一世)를 경장(更張)하니 세상이 놀랐도다. 애오라지 처음 마냥 학문이나 닦을 걸, 세상을 다스림이 반생을 그르칠 줄이야. 벼슬하고 마는 것은 하늘의 뜻에 있으니 기뻐하고 성낼 것이 없고 참담하고 펼친 것은 처지에 따라서 쇠퇴와 번영이 있었네. 막다른 상황에선 지조를 바꾸는 것이 보통의 일인데, 10년 세월 촌에 살며 좋은 평판 얻었구나.[英妙高懷擬老成 更張一世世曾驚 聊將詩禮修初服 豈意經綸誤半生 仕已在天無喜慍 慘舒隨地有枯榮 窮途易節尋常事 十載林泉尙令名]” 하였다. 비록 유도자(有道者)의 기상을 형용한 것이라고 이해하지 않지만, 또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전송(傳誦)되고 있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되던 해에 중종[中廟]이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의 일을 크게 깨닫고는 남아 있는 노성인(老成人)을 모두 수용하였는데, 사림(士林)이 기운을 내 서로 매우 애석히 여겨 말하기를, “하늘이 우리 동방(東方)을 평안히 다스려주지 않으려는가 보다.”라고 하였다. 이 점이 더욱 슬프기 짝이 없다.
공의 전부인(前夫人)은 의령 남씨(宜寧南氏)인데 후사(後嗣)를 두지 못했고, 후부인은 인천 채씨(仁川蔡氏)로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지낸 채수(蔡壽)의 딸인데,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 이추(李秋)는 문학(文學)이 섬부(贍富)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들 이배(李培)를 낳았는데 가정을 꾸렸으나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요절하였다. 공의 맏딸은 사족(士族)인 이효백(李孝伯)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박응성(朴應星)에게 출가하였고, 막내는 종실(宗室)인 봉릉 부수(鳳陵副守)에게 출가하였다.
이자 [李耔]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노수신 지음
탁영선탑이란 각자가 되여있는 바위이다.
걸터앉기 편하게 바위가 평평하게 되여있다.
녹음이 우거진 음애동계곡 날씨가 가물어 수량이 적은것이 흠이랄까?
비가 내려 수량이 풍부해지면 음애선생을 생각하며 가족단위 피서지로 좋을 듯 하다.
첫댓글 아까운인재가 응애동계곡에서 세월을 보내다니...
한많은 마음을 바위에다 풀었군요.
필체가 참 좋습니다. ^^
작은 계곡...
이자의 흔적은 바람에 실려가고
글자만이 바위에 남아 옛세월을 깁고 있습니다.
가보지 못한 곳............
상세한 설명과 사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