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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강 <특강> 공자의 예술관
제1부 어울림의 디자인
1. 열광적인 박수 소리
제가 82년도에 귀국을 해서 고려대에 부임했다가 군사독재정권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86년도에 양심선언이라는 것을 하고 고려대를 떠났다. 그래서 제가 대학교수를 정식으로 한 것은 제 인생에서 4년밖에 안 된다. 그런데 그때 저는 전혀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학생들이 제 강의를 들으러 왔다.
80년대 초에 우리나라는 여러모로 어떠한 갈구가 있었다. 억압과 소외된 가운데서 좌우이념에 관계없이 많은 젊은이들과 사람들이 고려대의 제 강의에 몰려들었다.
그때 시중에선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무도 몰랐다. 고려대 학생들과 전국에 있는 생각 있는 학생들만 저를 알고 있었다. 그때 제가 교실에서 들어봤던 박수 소리이래로, 오늘 처음 위대한 박수소리를 듣는 거 같다.
2. 김재권 교수의 수반론
우리나라에서 철학하는 사람들이 여러 학회를 형성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 철학계에 상당히 활발한 모임들이 많이 있었다.
혹시 여러분들이 신문지상에서 보셨는지 모르지만 김재권 교수라는 분이 계시다. 이 분은 지금 브라우니 대학에 계시는데, 한국 분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철학회의 회장까지 지낸 분이다. 그리고 아마도 20세기의 가장 훌륭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분이다. 지금 서울 대학교에 와서 잠깐 강의를 하고 계시다.
김재권(金在權, 1934~)
대구출생. 다트머스, 프린스턴대에서 수학. 미국 철학회 회장 역임. 대표작 [수반과 심리철학]
이 김재권 선생님의 강의가 연이어 있었다. 그리고 버클리 대학 교수인 존 써얼이라는 사람이 와서, 엊그제 서울대학교 강당에서 이 두 분과 김여수 선생님이라는 훌륭하신 분이 활발한 논쟁을 하셨다.
존 써얼(John R, Searle, 1932~)
미 콜로라도 덴버 출생. 1959년 이래로 버클리대 철학교수. 임상언어학과를 계승하여 욕망과 독립된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자연주의적 입장에서 분석했다. 대표작 ‘정신, 언어, 사회’
김여수(金麗壽, 1936~)
미 하버드대 철학과 졸. 독일 본 대학 철학박사. 서울대 철학과 교수. 현 유네스코 사무총장
이건 여러분들에게 너무 어려운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김재권 선생의 논의 중에 요새 문제가 되는 게 supervenience라는 개념이다. ‘수반’이라고 번역된다.
supervenience(수반)
정신이 물질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지만, 물질적 토대가 동일한 상태에서는 동일한 정신적 현상이 수반된다는 김재권 교수의 독창적 이론.
‘수반’이라는 게 뭐냐?
여러분들은 아직도 데카르트가 말한 대로 정신이 있고, 육체가 있다고 생각한다. mind와 body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정신과 육체 사이에는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라는 논의는 오늘까지도 서양의 철학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인 거 같다.
이 ‘수반론’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떠한 물질적인 여건이 형성되면, 항상 동일한 정신적인 활동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수반이라는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것이 전부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주 오묘한 말인데, 환원이 되진 않지만 물질적토대가 동일한 상태에서는 똑같은 정신적인 상태가 수반된다는 것이다. 여러분한테는 좀 어려운 이야기다.
예를 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지금 의학 기술이 대단히 발달해서 인간을 냉동시킬 수 있다. 그러다가 30년 후에 다시 깨어나게 할 수도 있다.
만일 내가 냉동되었다가 30년 후에 동일한 신체적 조건으로 다시 해빙되어 살아난다면, 그때 나의 정신적 상태가 냉동되기 전의 내 정신 상태와 똑같을까? 어떤 정신 상태일까? 만일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면 수반론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30년 있다가 깨어났을 때, 김용옥이 돌대가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강의할 내용을 모두 까먹었을지도 모른다.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이게 어려운 문제다.
그날 강당에서는 이런 등등의 논의를 했다.
3. 물리주의, 자연주의
모든 정신적 상태가 결국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된다고 하는 일반적인 생각을 우리 철학에서는 physicalism이라고 부른다.
physicalism(물리주의)
정신적 현상도 결국 물리적 토대에서 더 설명될 수밖에 없다는 20세기의 사조
물리주의라고 번역을 하는데, 조금 더 포괄적으로 말하면 요새는 naturalism을 그런 식으로 쓴다.
naturalism(자연주의)
물리주의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 쓰인다. 자연주의 역시 초자연적인 어떠한 질서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자연주의라는 말도 정신적인 것이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데에서 태어난 것이다.
뇌신경을 연구하는 의학자들이 기본적으로 인간의 정신적인 상태는 뇌 세포의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뇌신경의 생리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한다면, 사실 그건 수반론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유물론이 되는 것이다.
3. 김재권과 존 써얼의 논쟁
그러나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이 그렇게 전부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되고 만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나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이 물리적인 것에 모두 종속되어버린다면, ‘과연 인간이라는 것은 뭐냐?’라는 문제가 제기 된다.
그런데 이 수반론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 말했듯이, ‘정신적인 것이 전부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고 이야기하는데, 김재권 선생은 최근에 수반론의 경지를 넘어서서 환원론까지 나아가는 거 같다. 그러니깐 상당히 철저한 물리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아까 말한 존 써얼이라는 사람은 그러한 환원주의에 반대한다. 내가 손을 든다면, 들려는 생각이 있고 나서, 손을 든다. 손을 드는 순간에는 내가 생각을 했으니깐 손을 든 것이라고 말한다.
그날도 존 써얼과 김재권 선생이 팔을 여러 번 들었다 내렸다 했다.
그런데 김재권 선생은 그 손을 든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이미 손을 든다는 생각의 물리적 기초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손을 든다는 것은 뇌세포에서 이미 내가 손을 든다는 생각이 먼저 나게끔 물리적 조건이 있어서, 그것이 수반된 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니깐 우리가 손을 든다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그것은 벌써 물리적 현상이라고 한다. 그러한 식으로 인정을 해버리면, 인간이라는 것은 완전히 물질적인 것으로 되어 버린다.
그런데 존 써얼은 웃기지 마라. 손을 든다면 드는 것이지, 손을 든다는 생각을 야기시키는 뇌의 생리학적인 물리적 조건이 선행해야 한다는 인과적인 설명은 반드시 있어야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서로 논쟁했다.
김재권은 인과는 물리적 사건들 사이의 관계에만 한정(causal closure)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지만, 써얼은 인과 관계가 반드시 물리적 관계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4. 도올의 선택
그런데 그날 나는 그분들에게 이런 코멘트를 했다.
이러한 싸움을 백날 해보았자 결국 철학이 공허해진다. 그것을 따져서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현재까지 그러한 것이 아직도 철학의 주류적인 문제가 되어 있다.
이러한 논의를 하는 것은 정신과 물질이라고 하는 것이 항상 이원적으로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신과 물질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서 어떻게 환원이 되든지 간에 이러한 논의를 백날 해보아야 소용이 없다.
무엇인가 출발부터 ‘정신이다, 물질이다’라고 하는 것은 이미 언어다. 그러니깐 출발부터가 달라야 한다. ‘정신이다, 물질이다’라고 일방적, 인위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어떠한 새로운 개념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뭐냐? 나는 그것을 기(氣)라고 하자는 것이다.
氣는 동양인의 우주관의 기초개념이며, 그것은 물질(matter)도 정신(mind)도 아닌 새로운 언어적 선택이다.
정신이나 물질은 우리말이 아니다. 영어의 matter냐 mind이다. 그건 너희들 언어이고, 너희들 언어 전통에서는 그것이 문제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한테는 개똥같은 의식이라는 것이다. 우리한테는 그건 문제가 안 된다.
뭔가 처음부터 다른 전제 위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당신들이 아무리 논쟁을 해봐야,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선택에 불과한 거다. 입장의 선택에 불과한 거다.
모든 철학적 주장은 정교한 논리를 가장해도 결국 형이상학적 선택에 불과하며, 일상 언어 전통의 맥락 속에서 규정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입장을 선택해서 출발하지 않겠다.
5. 디자인
내가 이야기를 어렵게 풀어나가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여러분들과 이야기하려는 것은 ‘디자인’이라는 문제다. 요즘 예술대학에서 말하는 예술이라는 행위 전체는 디자인이라는 문제랑 걸린다.
여기 강당도 보다시피 디자인된 것이다. 건축가가 설계를 한 것이다. 내 옷도 의상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것이다. 이 백묵도 백묵 만드는 사람들이 디자인을 했을 것이다. 모두 디자인이다. 이 코는 어떤가? 이 코도 하나님이 디자인한 것이다. 나무도 디자인한 것이다. 우주 전체에 디자인이 아닌 게 없다.
그럼 이 디자인이라는 게 과연 뭐냐? 최근 디자인에 대해 우리말인 ‘어울림’이라고 하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어울림이라는 말을 만들어서, 정보디자인 시각디자인, 산업디자인, 건축디자인 등 모든 디자인에서 한국 디자인의 이념적 기초는 어울림이라고 하고, 세계적으로 근 몇 년 동안 이 ‘어울림’이라는 철학을 계속 강조해왔다.
그런데 이 어울림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철학적으로 설명을 해달고 해서, 최근 ICOGRADA라고 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Millenium Congress에서 제가 발표를 했다. 그 내용이 바로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페이퍼다.
그래서 오늘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6. 기(氣)란?
전통적으로 우리 동양인들에게 기(氣)라는 것은 허령불매(虛靈不昧)한 것이다. 기(氣)라고 하는 것은 정신적인 것이 아니다. 없는 게 아니다.
허령불매(虛靈不昧) : 잡된 생각이 없이 마음이 신령하여 어둡지 아니함.
하여튼 이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를 기(氣)라고 한다면, 기(氣)라는 것은 최소한 시공간적인 연장성이 있어야 된다.
시공간적 연장성(spatio-temporal extension)
시공간을 구체적으로 점유한다는 뜻, 정신은 연장성이 없다.
시공간적인 연장성이 있다면, 시간, 공간에서 어떠한 부피를 차지해야 한다. 그런 부피가 없으면 생각과 같은 것이다. 생각이라는 것은 부피가 없다.
그런데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최소한 무엇인가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연장성이 있다고 한다. 길이가 있고, 부피가 있고, 체적이 있고, mass가 있는 것을 철학에서는 연장성이 있다고 한다. 그런 게 있어야만 이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
여기 있는 물병이 불교에서는 눈 깜짝할 새에 없어진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좌우지간 이 물병은 있는 것이다. 이게 헛꿈은 아니다. 내가 물을 이렇게 마시면 분명히 물이 들어간다. 연장성이 있는 물체가 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물론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론에서 이것조차도 ‘하나님이 나를 속이고 있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자꾸만 회의를 한다.
하지만 좌우지간 기(氣)에 연장성이 있다고 하면, 기(氣)라는 것은 하늘과 땅으로 나눌 수 있다. 하늘적인 기(氣)가 있고 땅적인 기(氣)가 있다는 것이다.
하늘적인 기(氣)는 무형적 기(氣)다. 무형이라는 말도 조심해야 한다. 무형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빈 공간은 무형이다. 하지만 공기와 같은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다.
동양적 세계관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vacuum, 무(無)라는 것은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없는 것은 없다. 없다는 것은 없을 수가 없다.
기철학적 세계관 속에서는 진공(vacuum)은 인정될 수 없다. 장횡거(張橫渠)는 ‘정몽(正夢)’에서 '無無'(진공은 없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무형적인 세계를 우리는 하늘적 기(氣)라고 하고, 땅적인 기(氣)는 유형적 세계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보이는 세계다. 어떤 의미에서 하늘적 기는 뭔가 입자가 미세하다. 땅적 기는 거칠다. 거칠어서 항상 형태를 만들어 낸다.
하늘 : 무형(無形)의 세계 : 미세한 기(氣)
땅 : 유형(有形)의 세계 : 거친 기(氣)
기(氣)라는 것은 기(氣)의 종류별뿐만 아니라, 하나의 기(氣)에서 조차, 하늘적 기(氣)와 땅적 기(氣)가 있다.
하늘적인 기를 내 철학에서는 혼극이라고 부른다. 땅적인 기를 백극이라고 부른다.
혼극(魂極) 기의 정신적 장(場)
백극(魄極) 기의 물리적 장(場)
7. 정기신(精氣神)
우리가 정신(精神)이라는 말을 쓸 적에, 엄밀하게 말하면 정(精)이라는 것은 백(魄)에 해당되는 말이다. 그리고 신(神)이라는 것은 혼(魂)에 해당되는 말이다.
정(精)-백(魄)-땅의 세계
신(神)-혼(魂)-하늘의 세계
이걸 합쳐서 정신이라고 그러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정신(精神)이 서양언어의 mind에 해당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정신(精神)은 마인드(mind)가 아니라 精(하초)와 神(상초)의 합성어이며, 반드시 몸(MON)전체와 관련되어야 한다.
동양에서는 정액이니 정력이니 하는 말처럼 하초와 관련된 것을 정(精)을 가지고 번역했다. 그리고 신(神)은 상초이고, 정(精)은 하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중초에 해당되는 게 기(氣)라는 것이다. 이게 소위 동의보감에 나오는 정기신(精氣神) 사상이라는 것이다.
神(上焦)
氣(中焦)
精(下焦) : [동의보감]의 身形論
많은 사람들이 정기신을 혼동해서, 대단하고 엄청난 뭐가 있는 줄 아는데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옛날에 상초, 중초, 하초의 개념으로 나눈 것이다. 그래서 동의보감의 처음은 그렇게 시작한다.
그런데 이 정기신(精氣神) 전체를 기(氣) 하나에서 논해야 한다. 물론 ‘나’라는 존재는 어마어마한 기(氣)의 덩어리들이 모인 것이다. 나는 이 기(氣)의 덩어리들을 사회(社會)라고 부른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물체는 기(氣)의 거대한 사회(society)들이다.
이 강의장에 많은 사람이 모였다. 이건 우리가 말하는 기(氣)의 사회다. 우리가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8. 어울림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동양 사람들이 말하는 기(氣)라는 것은 최소단위라는 말도 쓰기 어렵다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최소단위라는 말을 쓸 때 atom이라는 말을 쓴다. tom은 ‘자르다’는 말이다. a라는 것은 부정형이다. 그러면 atom은 자를 수 없는 것이다. 즉 더 이상 분할 가능하지 않은 최소 단위라는 뜻이다.
atom, 더 이상 분할 가능하지 않은 최소단위
서양 사람들이 ‘아톰’이라는 말을 쓰든, 데카르트 이래로 ‘실체’라는 말을 쓰든, 어떤 의미든지 서양 사람들은 최소단위를 생각할 적에,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단위는 실체이고, 이 실체라고 하는 것은 라이프니찌에 말을 빌리면 창문이 없다는 것이다. 즉 교섭이 안 된다는 것이다.
실체(substance) 서양철학사의 기본개념으로 우주의 본체를 의미한다. 데카르트는 실체는 자기존재를 위하여 타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서양 근세철학은 이 정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기라는 존재를 위해서, 자기가 존재하기 위해서 ‘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족적인 존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주의 가장 본질적인 궁극은 자기가 스스로 자족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서양 사람들의 모든 실체에 대한 생각들이다.
그런데 나는 이게 개똥이라고 본다.
아까 물질과 정신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이유도, 물질은 물질이고, 정신은 정신이라고 서로 이미 개념적으로 확연하게 교섭이 없는 것으로서 설정이 되었기 때문에 자꾸만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물질과 정신이 서로 영향을 준다. 수반이 된다. 환원이 된다.’ 이러지만, 그 전제에 물질과 정신이라는 것이 두 가지로 항상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의 동양사상은 근본적으로 그런 식으로 출발하는 게 아니다.
처음부터 기(氣)라고 하는 것은 창문이 뿡뿡뿡뿡 뚫려 있다는 것이다. 기(氣)는 창문이 없는 게 아니라, 창문이 뻥뻥뻥뻥 나 있다. 창문이 난 존재이기 때문에 이 존재들은 서로 간에 서로서로 교섭을 한다. 서로 왔다 갔다 한다.
기(氣)는 서양의 실체가 창문이 없는 것(windowless)과는 달리, 수없는 창문으로 열려있다(windowful.)
모든 존재를 하나의 기(氣)라는 입자로 생각할 적에도, 그것을 최소단위로 생각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거 자체가 열려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할 때 ‘나’라는 존재가 나 혼자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나’라는 존재는 이미 항상 관계되어 있고, 끊임없이 교섭되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교섭되는 것이 기(氣)인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교섭을 하냐? 교섭을 하는 과정에서, 항상 교섭을 서로 해가면서 무엇인가 이접적인 서로 다른 多者들과 교섭을 하면서 무엇인가 통합된 一者를 만들어가는 것이 기(氣)의 삶이다. 통합된 일자(一者)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어울림(Oullim)이란 이접적인 多者(disjunctive Many)가 연접적인 一者(conjunctive One)를 창출하는 과정이다.)
여기에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다. 생각도 다르고, 집안 배경도 다른, 모두 다른 기(氣)들이다. 그러나 이 순간에 우리는 일치된 한 마음으로 강의를 듣고 있다. 한 마음으로 모여지는 그것이 일(一)이라는 것이다. 나는 다(多)에서 일(一)로 창출되는 과정을 ‘어울림’이라고 하자는 것이다.
그러니깐 여기서 모든 게 어우러지는 것이다. 그래서 완벽하게 어우러져서 한마음이 되는 강의가 이루어져서 한 마음이 딱 된다면, 그 상태가 영원히 가겠나? 딱 어우러지는 동시에 이 강의는 딱 끝나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다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깐 모든 어울림이라고 하는 것은 시작이 있고 반드시 종말이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동양 사람들은 항상 기(氣)라고 하는 것을 생멸(生滅)이 있다고 한다.
기(氣)는 모든 순간에 생멸(生滅)한다.
생(生)하여 지고 멸(滅)한다. 멸하지 않고 영원한 것은 동양적 세계관에서는 없다. 그러나 멸(滅)이라고 하는 것은 멸(滅)하는 동시에 다시 생(生)의 자료가 된다.
멸(滅)의 순간이 곧 생(生)의 순간이다.
서로 교섭되어서 어우러지는 관계이기 때문에, 이 우주는 끊임없이 어울리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일자(一者)를 생성해 낸다.
우주의 생성은 끊임없이 새로운 一者를 창출하는 과정이다.
나의 몸이라는 것은 여러 다른 기(氣)의 양태들로 형성되어 있고, 모든 세부적인 것이 어울리면서 ‘나’라는 존재가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이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그렇게 어떤 어울림의 과정에 있고, 그 어울림의 과정이 ‘나’라고 하는 존재의 어떤 아이덴티티 즉 하나의 동일성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되면, 그 아이덴티티는 없어지는 것이다.
아이덴티티(identity)
생성 과정 속에서 유지되는 존재의 동일성
9. 서양적 사고와 동양적 사고
‘내가 가고 있다’는 말을 할 적에 서양 사람들은 ‘I go.’라고 한다. 가고 있는 것에 앞서서 ‘내’가 있어야 한다. 서양말로는 ‘내’가 있고, 그 ‘내’가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동양적인 생각은 ‘내’가 있는 게 아니고, ‘가고 있다’고 하는 행위 속에서만 ‘내’가 있는 것이다. 이건 이야기가 다른 것이다.
서양에서는 ‘나’라고 하는 불변의 선험적 자아가 있어야 하고, 그러한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자아가 있기 때문에 나를 걸어가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선험적 자아를 파악해 들어가면 결국 하나님에게 가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적 세계관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한다. ‘내가 가고 있다’에서 주어라는 것이 없어지고 술어 속으로 들어와 버린다. 주어가 없어진다. 명사가 없어진다.
그러니깐 우리 동양 사람들의 일상 언어를 생각해 보면, 순수한 우리말을 보면, 전부 주어가 없다. ‘안녕하세요.’ ‘진지 잡수셨어요.’라고 한다. ‘너 안녕하세요.’ ‘당신 안녕하세요?’ ‘당신 지금 진지 잡수시고 계십니까!’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우리 언어에는 ‘나’라고 하는 주어가 없다. 그게 우리적인 세계관에서 나온 말 습관이다. 주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있는 동안에 먹고 있는 주체로서만 있는 것이다. 어떤 행위를 하는 주체로서만 있는 것이다.
내가 미쳐서 다른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날 존중하지 않는다. 정신병자가 되어서 정신병동에 가서 1년 정도 있다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 여기 서면 ‘아! 위대한 김용옥’이라고 하겠나? ‘나’는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 때의 ‘나’를 지금의 ‘나’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 차리고 살아야 된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제법무아’라고 한다.
제법무아(諸法無我) : 모든 법(法 다르마, dharma)은 자아(아트만, atman)가 없다. 불교 삼법인의 제1명제
제법무아라는 것은 모든 다르마에는 아트만이 없다는 것이다. 我가 없는 것이다.
여기 책상이 있는 게 아니다. 내가 걸터앉으면 걸상이 된다. 책상이라고 하는 절대적인 자아가 지금 없다. 어떤 행위에 따라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백묵도 던지면 무기다. 그 행위, 술어만 있고 주어는 없다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것이 제법무아다. 이것이 불교적 세계관이다.
그런데 이것이 근세에 내려와서, 디자인의 세계에 오면,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한다고 하면, ‘내가 이 책상을 디자인 했다’고 그런다. 이것을 디자인했으니깐 내가 디자이너라고 한다. 이게 내가 보기엔 개똥이다.
내가 디자이너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그 사람은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디자인했다는 말 자체가, ‘나’라는 디자이너가 ‘나’라는 실체로 떨어져 있고, 그 어떠한 대상적 세계를 조합해서 내가 만든 작품이라는 생각 자체가 사실은 개똥이다.
내가 이것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내가 디자이너가 아니라, 내가 이것을 디자인한 동시에 사실 나는 이것에 의해서 내가 디자인된 측면도 있다. 이게 좀 어렵나?
하나님이 이 세계를 디자인했다고 한다면, 나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디자인하고 있다는 것만 인정한다. 그러나 신은 이 우주에 대해 디자이너가 될 수 없다. 왜냐? 디자인되어 가고 있는 행위 속에 있는 것이 신이다.
이 세계가 디자인되어 가고 있다면 하면, 그걸 하나님이 디자인하고 있다는 것은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세계가 디자인되어 가고 있는 과정 속에 하나님이 있는 것이다. 그 행위 속에 하나님이 있는 것이다.
신은 이 우주를 디자인한다. 그러나 신은 이 우주의 디자이너가 아니다. 신은 디자인됨 속에 있을 뿐이다.
이렇게 동양적 세계관은 크게 달라지는 것이다.
10. 바우하우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디자인 운동으로 바우하우스라는 것이 있다. 이게 원래 하우스바우라는 말을 거꾸로 뒤집은 것이다.
바우하우스(Bauhaus, 1919~1933)
건물의 집이라는 뜻의 창조적 예술학교. 그로피우스, 끌레, 칸딘스키, 피어닝거, 이텐, 모홀리 등이 참여, 나치의 등장으로 폐교됨.
위대한 독일의 예술가이며 건축가인 그로피우스라는 사람이 바이마르에서 1919년 처음 설립하였다. 우리나라에선 3.1운동이 일어났고, 중국에선 5.4운동이라는 신문화운동이 일어날 적에 유럽에서는 바로 바우하우스 운동이 개시되었다.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
독일의 건축가며 교육자, 1928년까지 바우하우스의 교장. 미국으로 망명하여 하버드대학의 건축대학원(GSD)을 설립
이 바우하우스에는 여러분들도 잘 아는 폴 끌레, 칸딘스키, 이튼 같은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참여했다.
끌레(Paul Klee, 1879~1940)
스위스 출신의 화가, 색채의 천재. 그의 작품은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특유한 추상성과 유머를 과시한다.
바우하우스는 독일에서 창조적인 여러 방면의 예술가들, 건축가들, 공예가들이 한 곳에 모여서, 아주 창조적으로 소수 정예 교육을 시키는 학교를 한 것이다. 그 학교가 바로 바우하우스였다.
바우하우스의 정신이라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작은 일품공예로부터 건축, 토목공사, 가구, 실내장식 등이 모두 하나의 디자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우하우스 이전의 모든 디자인이라고 하는 것은 주로 부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바로크, 로코코 같은 것들은 부자들이 주문해서 정교하게 만든 의자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고 다양한 소재가 개발되었다. 과거에는 철근, 시멘트 같은 것은 없었다. 옛날에는 돌로 쌓아서 지었다. 따라서 아무리 대단한 고딕 성당을 짓는다고 해도 몇 미터 높이로밖에 못 지었다. 쾨른 성당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지금은 별거 아니다. 그런데 엄청난 마천루들을 마음대로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유리 같은 소재가 대규모로 들어왔다. 유리라는 소재의 재미난 점을 무엇일까? 물리적인 차단은 되지만 시각이 통과한다.
창호지라는 것의 특별한 의미는 무엇일까? 시각은 통과하지 않지만, 기(氣)는 통한다는 것이다. 막은 있지만, 공간적인 간격은 생기지만 통한다.
유리 같은 소재는 굉장히 혁명적인 20세기의 재료들이다. 이런 재료들이 대량으로 나오면서 건축개념이 변하기 시작한다.
당시 사람들은 테크놀로지와 아트는 별개라고 생각했다. 즉 장인들이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테크놀로지고, 그런 기술에서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그로피우스라는 사람은 여기에 착안하여, 오히려 대량생산되는 것이야말로 20세기에는 우리 삶에 있어서 예술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테크놀로지와 아트를 결합시킨다.
바우하우스의 정신은 테크놀로지(Technology, 기술)와 아트(Art, 예술)를 융합시키고, 순수미술(fine)과 응용미술(applied)의 구분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이 사람이 이야기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도 장인을 천시하였는데, 이 사람은 장인과 아티스트의 이분법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바우하우스는 장인(craftsman)과 예술가(artist)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그로피우스가 처음 바우하우스를 만들면서 쓴 창립선언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The artist is a heightened manifestation of the craftman,
-바우하우스의 창립 선언문-
예술이라는 것이야말로 장인의 지고의 표현이다. 이제는 장인과 예술가 사이의 거만한 장벽을 다 부셔버리자.
Let us together create the new building of the future which will be all in one; architecture and sculpture and painting.
-바우하우스의 창립 선언문-
페인팅, 건축, 조각과 같은 것이 모두 하나로 통합되는 새로운 예술이 나와야 한다고 한다. 이것이 바우하우스의 정신이다.
11. 부엌의 변신
지금 우리가 앉아있는 의자 같은 것도 전부 바우하우스에서 만든 것이다. 한샘에서 만드는 싱크대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옛날에는 부엌이 꼭 집 밖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부엌이 안방으로 들어왔다. 옛날에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부엌이 밖에 있으면 여자들의 세계는 집안과 떨어진다. 만날 부뚜막에서 일해야 되고, 집으로 들어오려면 보통일이 아니었다. 밥상을 차려서 마당을 지나 툇마루로 걸어오려면 죽을 맛이었다. 물론 중간문을 만들기도 했다.
마당굿에서 조왕신제사는 격절된 여자들의 부엌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엌이라는 게 지대가 낮다. 아궁이가 있어서 낮을 수밖에 없지만, 여자들이 사는 세계는 낮게 해놓고, 남자들이 사는 데는 높은 안방에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거실에 부엌이 딱 붙어 있다. 여자들의 세계가 집안의 센터로 들어왔다. 디자인이 바뀌면서 인간 삶의 양식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여자들이 지금 얼마나 편한가? 이 새로운 부엌의 구조가 전부 바우하우스에서 만들었다. 서양에서도 당시엔 없었던 것이다. 우리도 근세에 와서 가장 크게 바뀐 가옥 형태는 부엌이 바깥에서 안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여자가 얼마나 편해졌는가?
디자인이라고 하는 것은 디자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디자인이 인간의 행위를 유발시킨다. 그리고 인간 삶의 양식을 바꾼다.
어포던스(affordance)
행위유발성, 디자인은 인간의 행위를 유발시킨다는 개념.
만약 공간이 있었는데 벽을 세우면, 그 공간은 갑자기 분할된다. 그 벽에 농구대를 붙이면 아이들이 농구를 한다고 몰려들 것이다. 농구대 하나 때문에 엄청난 행위가 유발된다.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디자인이다. 디자인이라는 게 무서운 것이다. 하나님보다 더 강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해 주면, 디자이너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의 세계를 창조한다.
12. 형태는 기능에 종속된다.
그런데 바우하우스의 사람들이 내거는 가장 유명한 말이 ‘Form follows function’이다. 이게 유명한 바우하우스의 기치이다. 근세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기치다.
Form follows function
형태는 기능에 종속된다. 바우하우스의 기능주의(functionalism)의 모토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것이다. 형태는 기능에 종속된다고 한다.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집을 가면 목욕탕이 있다. 거기에 이상하게 긴 욕조가 있고, 물 빠지는 구멍이 바닥에 있고, 물을 넘치지 않게 하는 배수관이 욕조 언저리에 뚫려 있다. 여기에 물을 채우고 목욕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욕조에 앉아 있으면 무릎이 밖으로 나온다. 우리나라 5천만 민족이 이따위 엉터리 욕조에서 살고 있다. 이것은 서양 사람들의 목욕 생활습관에서 나온 것이다.
垢を流す。때를 벗긴다는 뜻의 일본말. 때를 벗기는 습관은 이 지구상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일본사람들도 ‘아까오 나가스’라고 하는데, 서양사람들은 때를 벗긴다는 생각도 없고, 개념도 없다. 우리는 때를 벗기는 게 목욕이다. 때를 벗긴다는 것은 우리 표피 조직의 가장 외곽층을 벗겨내는 일이다. 사실 때를 벗기는 게 좋은 거 같지만, 피부적으로 말하면 끔찍한 일이다. 각질층을 벗겨내는 것이다.
각질층(stratum corneum)
조직학의 용어. 표피(edidermis)의 최외각층
그런데 서양사람들은 이런 개념이 없다. 서양사람들의 목욕은 비누로 슬쩍 닦는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를 벗겨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몸을 물에 담그지 않으면 안 된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야 한다. 그래야 때가 벗겨진다.
그런데 몸을 담그고 때를 벗기는데 한 없이 불편한 이런 놈의 이상한 욕조를 5천만이 똑같이 쓰고 있다.
일본만 가도 이런 욕조는 없다. 이런 것은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다. 일본에서는 반드시 네모 모양으로 하고, 스페이스를 더 줄여 욕조를 깊게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리를 꼬고 책상다리로 앉으면 물이 목까지 잠긴다. 그럼 스페이스도 적게 차지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욕조의 언저리에 물이 넘치지 않게 배수구를 뚫어 놓았는데, 가뜩이나 무릎이 나와서 불편한데 왜 물을 버리나? 왜 그런지 아나? 서양 사람들은 욕조 밖에 카펫이 깔려 있어서 물이 넘치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목욕탕 바닥에 전부 수챗구멍이 있어서 배수가 되어도 상관없다. 전혀 개념이 다른 것이다.
우리가 목욕을 하려고 할 때, 욕조는 우리 몸이 원하는 기능이 있어야 한다. 생활 측면에서 기능은 욕구를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 즉 기능을 형태가 따라야 한다. 그런데 지금 형태에 삶의 기능이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욕조 형태는 어디서 왔느냐? 우리와 관계없는 서양에서 날아온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는 디자인의 희생물로 불편한 인생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봐줄 수가 없다.
길거리에 지나가면서 누가 아무런 이유 없이 칼로 쑤신다면, 우리는 그 행위에 대해 이유 불문하고 도덕적 분노를 느낀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그냥 막 찔러 죽일 수 있나!!? 도덕적 분노를 느낀다.
그런데 나는 길거리를 지나다가 형편없는 건물을 보면, 그와 똑같은 심리적 분노를 느낀다.
도덕적 분노(moral indignation) 못지 않게 심미적 분노(aesthetic indignation) 또한 삶의 고귀한 가치다.
빨리 우리 민족이 깨어나서 심미적 분노를 느낄 줄 아는 민족이 되어야 한다. 건축가들에게 돈을 바치면서 왜 그렇게 불편한 집을 짓고 있느냐 말이다.
건축구조에서 지붕의 구조는 두 가지 밖에 없다. 맛배지붕과 둥근런 원뿔 지붕이 그것이다. 이렇게 보면 건축이라는 것은 간단하다. 비를 피하면 되는 것이다.
옛날에는 맛배지붕을 하고, 기와를 올리고, 추녀를 만들고, 축대를 쌓아 올려 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올리면, 그 마루 밑은 공기가 통했다. 이러한 집은 비록 소박하지만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비가 샐 염려가 없다. 습해지지도 않는다. 아무리 허당으로 지어도, 아무리 장마가 와도 제대로만 지으면 비가 새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위대한 건축들이 많이 있는 거 같아도, 여름에 비만 오지게 오면, 건물의 8, 90퍼센트는 모두 비가 샌다.
우리 삶의 기본이 해결되어 있지 않다. 옛날만 못하다. 옛날에는 나름대로 확실하게 해결을 했다. 나는 장마만 지면 여기저기 고치느라 정신이 없다. 기본이 해결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썩어빠진 디자인 속에 우리의 삶이 희생당하고 있다.
20세기의 Form follows function이라는 것은 엄청난 논쟁거리다. 형태가 기능을 따라한다는 이 주장을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세계의 디자인학계가 까고 있다.
바우하우스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는냐가 소위 포스트모던이즘의 과제라는 말을 한다. 모던이즘이 뭔지도 모르는 놈들이 전부 포스트모던이즘을 이야기한다. 컨스트럭션이 뭔지도 모르는 놈들이 디컨스트럭션을 이야기한다.
근대(modernism)을 모르는 자, 탈근대(post-modernism)를 논할 수 없고, 구성(construction)을 모르는 자, 탈구성(deconstruction)을 말할 수 없다.
형태가 기능을 따른다는 말을 요새는 모두 깐다.
형태가 기능을 따른다는 말에서 기능이라는 게 의자 하나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의자 중에서 편안함을 주는 의자가 몇 개나 되나? 사람의 척추는 기본적으로 고유한 커브가 있다. 그런데 등 부분을 둥글게 만들면 틈이 생긴다.
우리 몸은 요추와 경추에 고유한 곡선(spinal curve)이 있다. 의자는 이러한 자연곡선에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한다.
아무리 근사하게 만들어도 척추를 지탱해주는 게 없다. 허리받침을 푹신한 것으로 만들면, 시간이 지나면 커브가 다 죽어서 하등의 쓸모가 없다.
엉덩이가 닿는 부분을 아주 근사한 가죽으로 해놓아도, 미끈미끈한 가죽으로 만들어서 결국 엉덩이가 앞으로 밀려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한없이 불편한 의자들뿐이다. 정말 여러분들 마음에 맞는 의자가 하나라고 있나? 난 없다. 내가 없으니깐 여러분들도 당연히 없을 것이다.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렇게 모든 삶이 개판이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얼마든지 개선이 가능하다.
문제는 이렇게 바우하우스의 functionalism은 20세기를 통해서 무차별적으로 획일화되었다. 여러분이 앉고 있는 의자만 해도 전부 똑같다. 대량복제이기 때문에 한번 잘못되면 모두 잘못되는 것이다. 디자인을 잘 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엉터리다. 우리 삶과 관계가 없다.
13. 기능주의에 대한 비판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오면서, Form follows function이라는 명제를 전부 비판하고 있다. 왜냐하면 function이라는 것이 획일주의화, 무차별화되고, 인터네셔널리즘이라고 해서 완전히 국제주의로 가면서 전부 다 획일화된다.
기능주의적 디자인이 오히려 단순한 면만을 생각하고 삶의 고유한 기능을 상실해갔다.
인터내셔날리즘(internationalism)
지역간의 고유성이 무시되는 획일적인 무차별주의
전라도를 가건, 경상도를 가건, 서울을 가건 모두 똑같아 지고 있다. 이것은 모두 바우하우스 정신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것을 하기 위해서 바우하우스의 기능주의를 까야 했다.
14. 기능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
그런데 나는 바우하우스의 기능주의는 깔 게 없다고 생각한다. 바우하우스의 functionalism이라고 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해석하면, 어떤 의미에서, 동양에서 말하는 用과 體로 말한다면, 用 속에 體가 있다는 것이다.
體(주어적 세계)는 用(술어적 세계)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생각은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로부터 조선유학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사상이다.
그래서 항상 기능 속에서 form이 들어난다는 이야기는 동양사상인 체용론(體用論)에 있어서 用 속에 體가 있다는 이론이나 거의 같게 해석될 수 있다.
Form follows function라는 메시지를 21세기에 들어와서 사람들이 다 이것을 공격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은 공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정신은 옹호되어야 한다. 이것은 동양사상으로 말한다면, 用 속에 體가 있다고 하는 우리 동양철학의 기본적인 사상과도 일치될 수가 있다.
왜냐? function이라는 것은 동사적인 세계이고, 부사적인 세계이다. 움직이는 세계이고 동적인 세계이고 술어적인 세계이다. 그런데 form이라는 것은 명사적인 세계이고 주어적인 세계이다. 그러니깐 주어적 명사적 세계가 술어적인 세계로 환원이 될 수 있다면, functionalism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근본적인 해체주의로 이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형태(體)가 기능(用)을 따른다는 생각은, 주어적 세계의 해체를 유발하는 매우 근원적인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로 이해될 수도 있다.
주어가 해체되어 버린다. 그래서 이 기능주의는 동양적 세계관에 기막히게 더 맞는 것이다.
기능주의(functionalism)의 본래적 정신은 제법무아(諸法無我)나 변화(生生之謂易)를 말하는 동양적 세계관과 일치한다.
우리는 이 function이라고 하는 것을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function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기계적이고 물리적이고 무생명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니깐 바우하우스의 오류는 20세기의 대량복제가 되는 세계 속에서 기능이라는 것을 너무 좁게 너무 물질적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기능이라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동양적으로, 생명적인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이 functionalism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차한 장식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아름다운 문명을 디자인한다고 하지만, 이파리 하나의 모습도 어디까지나 이것 자체가 탄소동화작용의 기능에 의해서 형태가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러이러하게 형태를 만든 게 아니다. 형태에 기능이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적인 것이다. 우리 동양적 세계인 스스로 그러한 세계는 항상 기능이 앞서고 있으며, 기능의 동사적 술어적 세계를 형태가 따라갈 뿐이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의 세계는 형태를 선행시키지도 않으며 조작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우리의 진정한 삶의 기능을 다시 해석해야 하고, 이것을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형태들이 따라 가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는 그 기능을 만족시키면 되지, 그 기능을 만족시키는 것 이상의 구질구질한 장식을 하지 말아야 한다. 장식하고 꾸미는 이런 것들이 우리 사회를, 우리 세계를 다 망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써놓은 이야기를 보면 된다.
‘기능은 생명이다. 기능은 생명의 스스로 그러함이다. 기능은 기의 어울림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이다. 기능은 디자인이다. 기능은 디자인하고 디자인 되어진다. 기능은 神的이다. 기능은 氣와 理를 매개한다. 기의 기능은 理를 氣로 진입시킨다. 기능은 협애한 목적성의 기계적 속성이 아니다. 기능은 생명의 만족을 달성시키는 과정이다. 기능은 어떠한 경우에도 심미적 목적을 배제할 수 없다. 기능은 아름다워질려고 노력한다. 기능은 삶의 질서이다. 기능이 진정으로 생명적일때, 그것은 장식하지 않는다. 조작하지 않는다. 나뭇잎파리 하나의 기능도 불필요한 장식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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