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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하고 중국이 붙으면 어디가 이길까? (3)
1편에서는 일본하고 중국을 싸움 붙였다면, 2편에서는 물리력(군사-경제력)과 정신력을 싸움 붙였다. 1편의 질문이 “전쟁을 하면 이기는 것은 어느 쪽일까?”였다면, 2편의 질문은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인가?” 즉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어느 쪽인가?”하는 것이다. 2편은 1편보다 진보한 것이다. 그러나 그 방향으로 조금 더 나아가야 한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등 여러 가지 주변적인 것을 말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나아가겠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혹은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정신력’이라는 용어를 버려야 한다. 여러 번 말한 대로, 이것은 내 동창생의 용어이다. 내 동창생이 이 용어로 내 주장을 해석할 때 -- “음, 너는 정신력을 말하는 것이로구나.” --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저항감을 느꼈었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알겠다. 내가 저항감을 느낀 것은 ‘정신’ 쪽보다는 ‘력’ 쪽이다. 정신력이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건, 물리력과 유사한, 혹은 대등한 힘으로, 심지어 물리력과 환산가능한 힘으로, (특히 전쟁과 같은 일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 저항감은, ‘정신력’을 대신할 나 자신의 용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어느 정도 납득될 것이다. 사실, 마땅한 용어가 없다. 꼭 내어놓아야 하는 형편이니 내어 놓는 것이지만, 내 용어는 ‘도덕성’이다. 유학 생활을 포기하고 자기의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를 전쟁에 참여하는 것, 원조 받은 무기를 적군에게 팔아넘기지 않는 것, 자기나라의 지도자를 암살한 테러리스트의 명분과 인품을 추모하는 것 등등이 도덕성이다. 그러나 ‘정신력’과 ‘도덕성’이 별개의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 같다. 정신력의 원천이 도덕성인 것이다. 다시 말해, 도덕성을, 그것이 발휘하는 (특정) 기능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이 정신력이다. 어쩌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무엇이 있는데, 그것을 (특정) 기능의 측면에서 보면 정신력이고, 그것을 또 다른 모종의 다른 측면에서 보면 도덕성이다. 하여간 정신력과 도덕성은 별개의 실체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정신력이라고 보는가, 도덕성이라고 보는가 하는 것 사이에는, 즉 정신력이라는 용어로 말하는가, 도덕성이라는 용어로 말하는가 하는 것 사이에는 크나 큰 차이가 있다.
나는 이제 도덕성이라는 용어로 말하려고 한다. 나는 이제 물리력과 정신력을 싸움 붙이는 것이 아니라 물리력과 도덕성을 싸움 붙이려고 한다. 그리고 도덕성 쪽에 승리를 부여하고자 한다. 나는, 어째서 도덕성이 이긴다는 것인지를 설명하여야 할 것이며, 그 이전에, 내가 새로이 붙인 싸움이 무슨 싸움인지 — 즉 질문이 무엇인지 — 를 설명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을 하는 데에는, 2편과 특히 1편에서 한 것처럼 세상에 관한 사실을 인용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으며, 내 동창생이 한 것처럼 통계 수치 등의 정보를 끌어오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희랍의 신화를 한 편 말하겠다. 이것은 고대 희랍의 철학자(프로타고라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로, (특히 뒷부분에서) 철학적으로 각색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에피메테우스가 동물들에게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주었다. 솔개에게는 밝은 눈과 강한 날개를 주었고, 곰에게는 두꺼운 털가죽과 날카로운 발톱을 주었으며, 다람쥐에게는 예민한 귀와 빠른 발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깜빡 실수로 인간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프로메테우스가 나타나 인간의 딱한 처지를 보았다. 그는 에피메테우스를 나무란 후 불을 훔쳐다가 인간에게 주었다. 인간도 살아갈 방도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불만 가지고 살아갈 수가 없었다. 인간은 모여 살아야 하는데, 불은 여기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최고의 신인 제우스가 나섰다. 제우스는 인간에게 정의와 타인존중의 정신을 주었다. 모여 사는 데에는 그러한 정신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후 인간은 모여 살 수 있게 되었고 멸족하지 않게 되었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상징하는 것은, 물론, 군사력과 경제력을 포함하는 물리력이다. 프로메테우스 자신이 상징하는 것도 있다. 에피메테우스는 ‘행동하고 나서 생각하는 자’라는 뜻이며, 프로메테우스는 ‘행동하기전에 생각하는 자’라는 뜻으로, 간단하게 말해서 전자는 생각 없는 자요, 후자는 생각하는 자이다. 프로메테우스는 냉철한 현실주의자, 철저한 합리주의자에 가까운 것이다. 이에 대해 제우스의 정의와 타인존중의 정신이 상징하는 것은, 물론, 지금 우리가 도덕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신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에게는 물리력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성도 요구된다는 것일까?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요점은 이 신화로부터 내가 뽑아내려고 하는 교훈은 아니다. 특히 이 3편에서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위의 요점은 “인간이 멸족하지 않고 생존하는 데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력만이 아니다.”거나,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 차라리 도덕성이다.”로 진술될 수도 있는데, 이런 요점을 말하는 것은 2편의 주제로 되돌아간 것이기 때문이다. 구태여 이 신화를 들먹이지 않아도, 전쟁에서 한 국가가 이기는 데에도, 인간이 멸족하지 않는 데에도 도덕성이 필요하며, 도덕성이 중요한 기능을 발휘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해 보자.
도덕성에 초점을 두고 생각해 보건대, 도덕성은 어째서 필요한가? 방금 말한 대로, 그것은 한 국가나 인류를 생존시키는 데에서 필요하다. 맞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가? 우리는 색다른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위의 신화는 여타의 동물들과 인간이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어떻게 다른가? 프로메테우스의 신화에 의하면, 인간은 짐승들과 달리 불, 즉 물리력을 발전시키고 활용한다. 그러나 철학자가 들려준 신화에 의하면, 인간은 짐승들과 달리 정의와 타인 존중의 정신, 즉 도덕성을 학습하고 구사한다. 도덕성이 인간을 규정짓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도덕적 존재이다. 동일한 요점을 약간 상이한 문답으로 나타낼 수도 있다. 인간이 추구할 최고의 가치는 무엇인가? 도덕성이다. 이런 내 주장은 물론 다음과 같은 대안적 주장에 대립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불과 도구, 즉 물리력을 구사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추구할 최고의 가치는 무엇인가? 물리력과 물리력이 제공하는 가치들이다. 나는 내 동창생이 이러한 대안적 주장을 취할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대안적 주장을, 설사 입으로는 말하지 않을지 몰라도, 자신의 행동과 삶으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편에서와 달리 3편에서는 물리력과 도덕성을 싸움 붙였다. 싸움의 내용, 즉 질문은 “인간을 규정짓는 것은 어느 쪽인가?” 혹은 “최고의 가치는 어느 쪽인가?” 하는 것이다. 2편에서는 (1편에서 사실을 문제삼은 것과 달리) 원리를 문제삼았다.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물리력이다.”는 주장이나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정신력이다.”는 주장은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원리’라는 말 대신에 ‘과학적 원리’라는 말을 사용하여야 하겠다. 3편의 주장 역시 원리이다. “인간을 규정짓는 것은 도덕성이다.”는 주장이나 “최고의 가치는 도덕성이다.”는 주장은 아마도 도덕적 원리나 윤리적 원리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며, 형이상학적 원리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적 원리는 사실적 원리로, 그 원리의 타당성을 경험적으로 밝힐 수가 있다. 현실적으로는 밝히기가 어려울지 몰라도 원칙적으로는 밝힐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원리는 그렇지 않다. 나는 “인간을 규정짓는 것은 도덕성이다.”라거나 “최고의 가치는 도덕성이다.”는 주장을 내어 놓았지만,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대안적 주장, 즉 “인간을 규정짓는 것은 물리력이다.”라거나 “최고의 가치는 물리력이다”는 주장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도 그렇지 않다. 그것도 사실은 또 다른 형이상학적 원리요, 도덕적, 윤리적 원리이다.
나는 “인간을 규정짓는 것은 도덕성이다.” 혹은 “최고의 가치는 도덕성이다.”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이것이 나의 최종적 주장이다. 그런데,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내 동창생은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내 대답은, 우리는 도덕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물리력이 아니라) 도덕성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개인도, 국가도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위의 내 주장은 단지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식으로 진술되는) 당위에 관한 주장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무엇이다.”는 식으로 진술되는) 사실에 관한 주장이기도 하다. 요컨대, 도덕성이 사실상으로도 물리력을 이긴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도덕성이 우월한 민족은 물리력이 우월한 민족을 전쟁에서 물리친다는 점(2편의 주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예컨대) 도덕성이 우월한 민족이 설사 전쟁에서 지더라도 도덕성의 면에서는 상대 민족을 지배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한족(漢族)은 몽고족 등에게 패배하고 지배를 받았지만, 문화적, 도덕적으로는 상대 민족을 지배해왔다. 상대 민족이 한족의 문화와 도덕을 배우기 때문이다. 고대 아테네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개인에 대해서도 똑 같이 말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당했지만, 그는 지금까지도 살아있지 않은가? 여기에는 보다 자세하고 명료하게 따져보아야 할 것이 많이 들어있지만(말미의 주석 참고), 이 정도에서 그치겠다. 한편으로, 내 능력이 달리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내 동창생이, 혹은 당신이 이런 이야기를 계속 듣기를 원하는지가 의심스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대답을 내어 놓을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이 아예 서로 다른 질문을 내어놓을 수도 있다. 질문이 다르면 관심이 다른 것이요, 곧 사람이 다른 것이다. 동창회에 나갔다. 어떤 테이블에 앉을까? 사실에 관하여 열띤 토론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과학적 원리에 관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자리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간혹 형이상학적 원리나 그와 유사한 것이 화제가 되고 있는 자리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세 번째 테이블에 슬며시 끼어들어간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더욱 똑똑하게 알게 되었다. 세 번째 테이블은 드물다. 내가 말하고 싶고 듣고 싶어 하는 것은, 내 동창생들이 흔히들 내어 놓을만한 대답과 상이한 대답일 뿐 아니라, 내 동창생들이 흔히들 제기할 만한 질문과 상이한 질문에 관한 것이다. (끝)
주석: 예컨대 이런 것도 따져 볼 수 있다. 첫째, “중국은 물리력이 강하다.”는 식의 발언이 있다. 이것을 1, 2편에서는 ‘사실’에 관한 발언이라고 불렀다. 둘째, 원리를 나타내는 “물리력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것과 같은 발언이 있다. 이것을 3편에서는 보다 정확하게 나타내고자 ‘과학적 원리’에 관한 발언이라고 불렀다. 내가 따져보고 싶은 것은 세 번째 종류의 발언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세 번째 종류의 발언이 어떤 것일지를 생각해보기 위해서는 첫째, 둘째 발언을 조금 더 명료하게 규정하여야 한다. 둘째 발언은 원리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과학적’이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다. 첫째 발언은, 사실에 관한 발언이라고 부르기보다 그 원리의 사례에 관한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 첫째, 둘째 발언은 각각 사례와 원리에 관한 것이다. 물론 예물과 개념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셋째 것은 사례도 아니요, 원리도 아닌 것이다. 내가 위에서 ‘형이상학적 원리’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보통의 의미의 원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일종의 사례이기도 한가? 즉 일종의 사례에 관한 발언이기도 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