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사모 15주년을 돌아보며
남사모 창립 연구위원, 현 경기도박물관장 조 유 전
「남사모」는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을 줄여서 부르는 명칭이다. 남한산성은 조선 인 조선시대인 1636년 12월 청나라 태종이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 왔을 때 인조왕이 급히 강화로 피할 겨를도 없이 급하게 남한산성으로 들어왔지만 청군에 포위된 체 45일간 버티다가 결국 지금의 서울 송파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한 치욕의역사현장으로 각인되어 왔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교육이 오로지 그렇게 가르쳐 왔기 때문이고 특히 일제강점기 때엔 산성 내에 있는 광주군 치소인 군청과 산성에 거주하는 많은 사람 들을 산성 밖으로 몰아내기도 했다.
이러한 치욕적이고 부정적인 역사를 간직한 것으로만 알려져 오고 있는 남한산성에 대해 학술적으로 접근해서 새로운 역사적 해석을 통해 남한산성의 진면목을 밝혀내고자 1996년 4월 28일 결성된 모임이 바로 “남한산성을사랑하는모임”이다. 처음 지금은 고인이 된 당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철수 교수를 비롯하여, 허창무, 허흥식, 이광호 등의 교수와, 한양대 배기동 교수, 경원대학교 천화숙 교수, 신구대학 전보삼 교수, 경기대학교 조병로 교수 등 성남과 분당에 거주하는 전공별 교수를 중심으로 결성하고 필자도 분당에 거주하고 있어 모임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필자는 당시 국립민속박물관장으로 재직 중이었고 분당 야탑동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장철교수와는 대학 선후배관계로 호형호제 하며 가끔 만나 대포도 나누는 사이였다. 결국 장 교수의 권유에 따라 남사모의 취지에 동감했기 때문에 오로지 교수가 아닌 관료로 유일하게 참가하게 되었다.
모임은 매월 마지막 일요일로 정하고 남한산성의 답사는 남한산성 성주라고 불리는 전보삼 교수가 안내했다. 산성 답사 후 모임을 갖고 그날의 토론을 시작해서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았다. 「남사모」의 결성취지는 첫째, 남한산성이 결코 치욕의 역사현장이 아니란 것을 학술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연구를 위한 정기답사 둘째, 산성지역 역사와 문화의 학제간 공동연구를 통한 국제적인 학술회의 개최 셋째, 산성내 무질서하게 난립되어 있는 식당과 특히 러브호텔을 산성 밖으로의 이전 내지는 철거하고 행궁을 복원하는 등 자연과 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정책개발에 두었던 것이다. 사실 첫째와 둘째 취지는 교수나 연구자로서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산성호텔을 들어내고 행궁을 복원한다는 것은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일이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문제는 결국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나서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필요성에 따른 정책개발에 힘 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남사모」가 결성되고 그해 10월 성남문화원과 합동으로 중국, 일본의 산성 연구가를 초빙해 제1회 남한산성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다. 국제학술회의를 마치고 「남사모」제8회 모임에서 회원의 자격으로 연구회원과 일반회원으로 구분하기로 하고 일반회원은 언제든지 참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남한산성이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와 관련이 있어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도 직할사업소의 설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도에 건의하기로 하는 한편 행궁 터 매입기금 조성 범시민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아울러 경기도의회 이영성 의원과 도의회 내 「남한산성보존 협의회」 구성에 대한 논의를 가졌다. 이렇게 되어 이듬해인 1997년 4월 3일 경기도의회 내 「남한산성보존협의회」가 결정되어 이영성 의원을 회장으로 하고 광주출신 임성균 의원과 하남출신 엄종섭 의원을 부회장으로 하여 진용을 갖추었다. 「남한산성보존협의회」를 줄여 「남보협」이라 부르기로 하고 「남사모」와 「남보협」이 유기적인 협의를 하게 되었다.
한편 97년 5월 10일 남한산성행궁터를 경기도 문화재기념물로 지정하여 향후 정비의 단초를 마련했다. 이어 5월 21일 경기도의회에서 남한산성보존협의회 특별위원회를 개최하여 행궁복원 및 산성복원 보존 장단기 계획 수립(안)을 보고 하게 되었다. 이 후 97년 6월 30일 「남사모」와 「남보협」 합동으로 행궁 터 복원사업비 지원 건의서를 국회 및 행정 당국에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남사모」가 결성되고 겨우 1년을 넘겼지만 남한산성의 보존에 필요한 여러 문제점을 찾아내었던 것이다.
98년 10월에는 당시 임창열 경기도지사에게 “남한산성복원정비계획”이 보고되어 드디어 “남한산성종합발전방안” 연구용역이 도 주관으로 발주되고 이에 따라 남한산성복원추진기획단이 도에 마련되면서 먼저 행궁복원을 위한 발굴조사가 99년 12월부터 실시하게 되었다. 2000년 1월에는 임창열 지사에게 남한산성복원정비 사업계획이 보고되면서 남한산성복원정비계획이 착착 진행되어 갔다. 2001년에는 경기문화재단으로 위탁과 수탁사업 업무가 맡겨졌다. 이렇게 되어 발굴조사가 완료된 행궁의 상궐이 2002년에 복원 준공되면서 행궁 터의 면모를 바꾸어 나갔다. 행군권역에 난립되어있는 식당문제도 대토를 마련 옮기게 하고 아울러 산성호텔 역시 보상 처리하여 행궁복원에 따른 걸림돌들을 제거해 나갔다.
2003년 7월에는 “남한산성복원정비사업계획변경안”이 당시 손학규 지사에 보고되고 변경안에 따라 경기문화재단과 변경협약을 체결하여 2004년 8월에는 행궁의 좌전을 복원 준공했다. 2006년 하궐 발굴조사과정에 드러난 통일신라신대의 대 창고건물지의 전모가 이듬해인 2007년에 밝혀지기도 했다.
이 때 김문수 지사가 초도 순시차 남한산성의 현황을 둘러보는 가운데 당시 필자가 몸담고 있던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장으로서 통일신라시대 대형건물지 발굴에 대에 설명하고 남사모가 추구해온 남한산성의 당면 과제인 성남, 광주, 하남 3개시 관할로 나누어져 있는 것을 도 직할로 해야만 업무의 효율성은 물론 보존과 관리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기회가 있었다. 이듬해 행궁의 하궐 발굴조사가 완료되고 도에서는 다시 남한산성복원정비사업단계별 사업추진계획을 김문수 지사에게 보고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이듬해인 2009년 3월 남한산성의 보존과 관리를 전담할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이 경기문화재단 소속기관으로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2010년 9월에는 하궐의 복원공사가 완료되어 준공됨으로서 남한산성 조선행궁의 면모를 대부분 갖추게 되었다. 「남사모」가 결성되고 14년이 흐르고서야 행궁권역의 정비와 복원이 대부분 완료 되게 되었고 행궁권역의 인화관 복원이 최종적으로 남았다. 이제 명실상부한 전담부서인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이 맡아 보존과 관리를 맡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세계유산등재를 위해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와 같이 남사모가 결성된 후 15년의 경과를 더듬어 보았다. 이제 남한산성의 보존과 관리를 체계적으로 하고 아울러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을 조직하게 한 현 김문수 경기지사의 결심이 있었기에 앞으로의 남한산성은 그 진가를 더욱 발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난 기간 「남사모」가 활동하는데 있어서 성남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와의 관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남사모」연구위원인 장철수, 전보삼, 조병로, 허창무, 백남욱, 천화숙등 제 교수가 연구소장을 맡으면서 남한산성에 관한 학술대회를 주도하는 등 많은 활약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남사모」가 결성된 후 전보삼 교수(현 한국박물관협회장 및 만해기념관장)와 당시 이영성 도의원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임창렬 당시 경기도지사의 남한산성복원과 행궁복원에 필요한 예산을 그야말로 통 크게 책정하게 된 것을 모두가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남사모」의 결성에 따른 취지는 앞서 말한 바같이 3대 목표가 있었지만 사실 남한산성이 결코 치욕의 역사현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은 의외로 간단했다. 기록을 보면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 때 당나라와의 전투를 위한 후방 보급기지로 활용하기위해 주장성을 쌓아 결국 당나라 세력을 매초성 전투에서 몰아내고 명실공히 삼국을 통일시켰던 역사를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고려시대에도 몽고 병의 침입이 있었으나 남한산성은 함락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도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보장처로서 마련되었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청군이 남한산성을 침범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남한산성의 본성 밖 망월산과 신남성에 청군이 자랑하는 대포인 홍이포(紅夷砲)를 성내로 발사해 피해를 입힌 일은 있지만 청군의 말발굽에 짓밟힌 일은 어느 기록에도 없었다. 이 사실은 바꿔 말하면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는 것이다. 비록 인조가 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조아리며 항복문서에 서명한 일이 치욕이긴 하지만 산성만은 오로지 그 자태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항복문서에 보이는 남한산성은 절대 돌 하나라도 성벽을 보완하거나 수리하는 일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남한산성의 위상을 역으로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이 사실들을 강조하여 사람들이 알게 하면 해결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간 많은 사람의 인식변화가 따랐음을 알 수 있기도 하다. 그리고 보존과 관리를 위한 사업단 조직이 탄생했기 때문에 대부분 「남사모」가 추구했던 일들이 일괄적으로 해결되고 있어 문제의 심각성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결성당시의 취지는 모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남사모」 15년을 돌이켜 보면서 몇 가지 생각나는 것을 정리하는 것으로 마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하는 모임을 줄여 “사모”로 한 것은 그러니까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의 긴 이름을 간단히 「남사모」로 한 것이 시초라 할 수 있어 자부심이 크다. 「남사모」가 결성된 후의 활동이 언론에 소개되면서 이 후 “사모”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북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즉 「북사모」 등 무엇을 사랑하는 모임은 뒤에 “사모”만 붙이면 되는 간단하면서도 강력한 주장이 되기 때문에 급속도로 애용되었다. 이렇게 생간 “사모”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역시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인 「노사모」의 결성일 것이다. 「노사모」는 2003년 노무현 대통령후보를 제 16대 대통령으로 만든 일등공신이 되었다. “사모”의 위대한 진화라 할 수 있다. 이 후 「박사모」, --사모 등등 이러한 모임이 유행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붐이 일줄 알았다면 “사모”를 브렌드로 등록하여 아무나 사용 못하게 했다면 아마도 여기저기 난립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저작권이라도 챙겼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아무튼 최초로 공식화해 사용한 것은 남사모의 자랑이다.
이제 남한산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과 문화재청이 나서서 노력을 기우리고 있다. 이제 「남사모」가 중점적으로 할 일은 어떻게 하면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이 되도록 도울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할 때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더 이상 남한산성이 치욕의 역사현장이 아니란 것을 분명히 가르치는 교과서의 내용을 수정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1개월에 한 번 만나 등산하는 것으로 남사모의 명맥이 유지되고 있겠지만 이제 15년 전의 초심으로 돌아가 「남사모」가 다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2011년 5월
남사모 창립기념 답사를 마치고 좌로부터 허흥식, 허창무, 조유전, 장철수, 전보삼 교수
남사모의 유적탐방 기념
행궁 하궐 터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대형 건물터
행궁권역 정비 전 식당모습
인화관 터에 있었던 식당의 모습
복원을 기다리는 인화관 터 발굴모습
2010년 9월 행궁 하궐 복원 입궁식 광경(김문수 지사)
남한산성 행궁복원 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