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부 어린시절> 빛나는 섬 암태도
내 고향은 목포에서 배를 타고 서쪽 바닷길을 따라 하염없이 가다 보면 어느새 다가서는 자그마한 섬 암태도 이다.
요즘음 웬만한 섬은 행락객들이 남기고 간 도회의 찌꺼기들로 복구할 수 없을 만큼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암태도는 때묻지 않은 옛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섬 가운데 하나다. 중뿔나게 아름다울 것도 없고, 요란한 특산물이 있는 것도 아닌, 이를 데 없이 평범한 섬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평화이리라.
백날가도 발전이 없다고 탓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연속에 그대로 어우러진 넉넉한 삶을 어설픈 개발과 맞바꾼다는 건 밑져도 한참 밑지는 거래라는 게 내 생각이다.
개발 자체를 반대할 일은 아니다. 더 나은 삶을 누리려는 지향은 누구에게나 당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개발은 거의가 훼손을 전제로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개발이란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한편으로는 풍요로움이 밀려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황막함만 남기 일쑤였다.
그래서 고향에 갈 때마다 전처럼 출렁이는 바다와 아낙네들이 조개를 캐는 개펄, 여전히 푸르른 산과 들을 바라보며 저으기 안심하고는 한다. 무엇보다 인정이 옛 그대로인 게 참말 반갑다.
그럴 때는 암태도가 뭇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한 점이 없다는 게 천만 다행스럽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해서 암태도가 마냥 평범하기만 한 섬은 아니다.
암태도는 일제 때 소작 쟁의를 일으켜 성공한, 민족사적으로 큰 의미있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조선에 대한 지배 방식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었다. 그러나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를 효과적으로 수행해내려는 일제의 본질이 바뀐 것은 조선 민중들의 행동반경을 어느정도 넓혀 준 것은 사실이었다. 거기에 더해 3.1운동을 거치면서 가파르게 걸쳐 농민과 노동자의 투쟁을 불러일으켰다.
20년대 소작쟁의의 대표격인 "암태도 소작쟁의"는 이처럼 조선 민중과 일제의 변화된 힘관계를 배경으로 벌어졌다.
이때 지주 문재철이 암태도 농민들에게 받아내던 소작료는 무려 7~8할에 이르렀다. 이렇게 높은 소작료를 물던 암태도 소작농민들의 생활은 피폐하기 이를데 없었고, 더 이상 물러날 자리가 없었다.
벼르고 벼르던 농민들은 1923년 8월 추수를 앞두고 지주 문재철을 상대로 쟁의에 나섰다. 농민들의 핵심적인 요구는 소작료를 4할로 낮추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장장 1년여에 걸쳐 진행된 암태도 소작쟁의가 대장정에 돌입하게 된다.
일제 당국과 경찰의 힘을 믿은 문재철 지주 쪽에서는 소작농민들의 요구를 묵살해 버린다. 그때 마침 문재철 지주의 부친 송덕비가 파괴되는 사건이 일어나, 문씨 일족과 농민들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진다. 경찰은 이를 빌미로 소작회 간부들을 대거 구속해 버린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 농민들은 경찰서와 문재철의 집이 있는 목포로 나가 싸움을 벌인다. 암태도 소작쟁의를 유명하게 만든 "원정투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600여 명의 섬사람들은 목포 경찰서와 법원 마당으로 몰려가 죽기를 각오하고 농성에 들어간다. 당시 이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는 농성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대지를 요를 삼고 창곡을 이불을 삼아, 입은 옷에야 흙이 묻든지 말든지. 졸아드는 창자야 끊어지든지 말든지, 오직 하나 집을 떠날 때 작정한 마음으로 밤이슬을 맞으며 마른 정강이와 햇볕에 그을은 두 뺨을 인정없이 모기에 물려가면서 그날 밤을 자는 둥 마는 둥 또다시 그 이틀되는 9일을 당하게 되었다."
소작 농민의 편에 섰던 동아일보의 잇따른 보도는 이 사건을 전국적인 차원으로 만들었고, 끝내 문지주와 그를 비호했던 일제 당국은 무릎을 꿇지 않을수 없었다. "아사동맹"을 결성하면서까지 지주와 일제에 맞선 암태도 소작 농민들의 눈물겨운 싸움은 이렇게 해서 승리를 맞게 되었고, 그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우리 역사에 빛나는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어려서는 우리 섬에서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어른들 사이에서는 그 때의 이야기들이 오갔을 테지만 , 아이들의 귀에까지 닿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다만 소작쟁의를 이끈 서태석에 관한 이야기 한 토막은 지금까지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다.
"옛날 우리 섬에 말을 잘 하는 똑똑한 사람이 있었지. 그이가 사람들 앞에 나서 말을하면, 그 말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 그 사람이 어떻게 그리 말을 잘 하게되었냐 하면,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러가기 전에 미리 할 말을 중얼거렸기 때문이지. 그래서 결국은 큰일을 해냈지."
누구에게 들었는지도 모르는 전설의 한 토막은 이게 전부다. 이 이야기의 전말은 앞뒤로 훨씬 길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전후를 전혀 기억할 길이 없다. 다만 이 짧고 아득한 전설같은 이야기는 내 가슴에 깊이 새겨져 "우리섬에도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살았다"는 자부심으로 내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내가 "암태도 소작쟁의"에 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가고 한참이나 지나, 작가 송기숙의 소설 [암태도]를 읽으면서부터였다. 이 소설은 "암태도 소작 쟁의"의 전말을 충실히 다루고 있어 소설로서의 재미는 물론, 사건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준다.
소설 [암태도]를 읽으면서 내 고향이 훌륭한 역사소설의 배경이 되었다는게 마냥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고향 사람들의 의롭고 끈질긴 투쟁에 가슴이 벅차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고향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조차 무지하기 이를 데 없는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역사책을 뒤적여 "암태도 소작쟁의"에 관한 글을 찾아내 열심히 읽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야 어느정도 부끄러움이 탕감되었다.
우리 집안도 "암태도 소작쟁의" 와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호기심이 생긴 것도 이때였다. 그래서 고향에 내려가면 어른들에게 암태도 소작쟁의에 관해 옴니암니 묻고는 했다. 그러나 우리 집안은 지주도 소작농도 아닌, 작으나마 자기 땅을 부치던 자작농이었다. 그러니 소작 쟁의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리 없었다.
그럴 즈음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당 훈장 노릇을 하다 돌아간 증조부의 제자들이 스승의 송덕을 기려 세운 유적비가 마을 어귀에 서 있었는데, 놀랍게도 제자들 이름 가운데 바로 서태석 선생도 끼어 있었다. 나는 자랑스러움으로 뛸 듯이 기뻤다. 서해바다 한 켠에 오롯이 떠 있는 수수한 섬 암태도, 그러면서도 빛나는 역사를 간직한 암태도. 나는 내가 그 섬의 진정한 아들이기를 지금도 바란다.
<제1부 어린시절> 떠오르지 않는 '뽕돌'
나의 증조부는 평생 손에 흙 한번 묻히지 않고 글만 읽은 서생이었다. 그의 아들로 태어난 우리 할아버지는 어느 정도 교양을 갖추긴 했지만 아버지와는 달리 평생 농사를 지었다. 세상 물정에도 밝았고 한시도 손을 놀리지 않을 만큼 부지런했다. 할아버지의 이런 성품은, 노동을 하지 않았던 아버지를 대신해서 일찍부터 일곱 형제를 부양해야 하는 장남 노릇을 하면서 형성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할아버지는 근동에서 누구나 알아주는 알짜배기 농사꾼이었다. 내가 자랄 때 할아버지는 논 열두 마지기에 밭 스무마지기라는 비교적 넓은 땅을 경작했다.
덕분에 우리 집안은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이재에도 밝은 편이어서 마을에 담배포와 정미소를 차리기도 했다. 나중에는 그 가게들을 형제들에게 나누어주어 분가를 시킬 만큼 후덕한 분이기도 했다. 생각도 트인 분이어서 그 어려운 시절에 우리 아버지는 목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대학까지 다닐 수 있었다.
내 유년시절에 할아버지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부모님은 목포에서 살고 있었지만, 나는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줄곧 암태도에서 조부모 밑에서 살았다. 할아버지는 장손인 나를 멀리 두기가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곁에 두고 당신이 손수 가르치려 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나를 금이야 옥이야 끔찍이도 아꼈다. 내가 유년시절에 얻었던 "뽕돌"이라는 별명도 할아버지의 좀 유난스럽다 싶은 보살핌 때문이었다.
"뽕돌"이란 낚시할 때 추로 쓰는 돌을 일컫는 전라도 말이다. 굳이 요즘말로 풀이하자면 "맥주병"과 같은 뜻인데, 헤엄을 못치는 사람에게 붙이는 별명이다.
바닷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우리 마을에서 헤엄을 못치는 아이는 나밖에 없었다. 내가 헤엄을 치지 못하는 아이로 남은 것은 순전히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간혹 바다에서 헤엄을 치다가 익사하는 아이가 생기기도 했던 터라, 이유불문 헤엄은 금지였다.
동무들이 우루루 헤엄을 치러 갈 때면, 할아버지가 야속했지만, 워낙 단호한 명령이었기 때문에 헤엄칠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덕분에 어린 시절 내내 나는 한번 가라앉으면 떠오르지 않는 "뽕돌"이었다.
이렇듯 할아버지가 나를 아끼는 마음은 언제나 지극정성이었다. 그 시절의 사내아이들은 모두 머리를 박박 깎았는데 나는 앞머리를 조금 기르고 다녔다.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다니는 아이도 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특별한 아이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당신의 대를 이을 장손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테지만, 내가 어려서부터 영특하게 굴었던 때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렇듯 유별난 아이인 나를 친구들은 놀리거나 따돌리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가 있으면 따돌림을 넘어서 "한국판 이지메"를 가한다거나, 심한 폭력을 쓰는 일이 잦은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다.
요즘 이렇게 아이들의 세계가 험악해진 가장 큰 이유는 부모, 교사 가릴 것 없이 온 사회가 나서 아이들을 무차별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뜨리는 데에 있다. 경쟁 때문에 아이들은 실리적으로 위축되고 불안에 떨게 된다. 이것이 오랜 기간 지속되면 아이들의 정서는 점점 메마르고, 스트레스가 쌓이고, 절망감을 주체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폭력이란 더 이상 멀리해야 할 못된 짓이 아닌 정당한 욕구의 발산에 지나지 않게 된다.
내 어린 시절은 그런 경쟁에 노출되어 있지 않았다. 공부를 잘 하면 잘하는 대로 못 하면 못하는 대로 그저 어울려 놀면 그뿐이었다. 우리는 서로 눌러야 할 상대방이 아니라 그저 언제나 동무일 뿐이었다. 이 때문에 나 혼자 책가방을 메고, 좋은 옷을 입어도 따돌림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이미 마음 줄 자리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눈만 뜨면 그 소름끼치는 경쟁과 양육강식의 세계로 나서야 한다. 부모에게 시달리고, 선생의 눈치도 살펴야하고, 친구들에게 밉보이지도 말아야 한다. 도대체 우리 아이들을 살릴 방법은 어디 있는가.
교육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다지만 욕심에 사로잡힌 어른과 욕심에 사로잡힌 사회가 변화의 길을 찾지 않는 한, 우리 아이들은 더 오랫동안 불행하게 자라야 한다. 이처럼 가슴 아픈 일이 또 있을까.
다시 내 어린 시절로 돌아가자.
할아버지는 내게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짬만 나면 내게 하는 말씀이 "큰 선비가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나는 선비가 딱히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저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가끔 철딱서니 있는 생각이 들어 농사일이라도 거들 양이면 "일은 무슨 일을 한다고 그러냐. 어서 가서 책 보거라." 하면서 나를 집으로 쫓다시피 돌려 보내고는 했다.
할아버지는 모든 농사일에서 나를 제외시켰지만 못줄잡는 일만은 허용했다.
그 이유가 그럴 듯했다.
"못줄은 머리 좋은 사람이 잘 잡는 법이여. 그러니 선비도 해야 하는 일이지."
그런데 이 못줄 잡는 일처럼 심심하고 따분한 일도 없다. 모 한 줄을 다 심을 때까지 줄을 잡고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 하는 노릇이 참 고역스러웠다.
"할아버지는 참, 차라리 모심기를 시킬실 일이지...."
논둑에 웅크리고 앉아서 투덜거리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내게는 일을 시키지 않으면서도 할아버지는 언제나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늘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어린 시절의 나날들은 내 마음 깊은 곳에 남아, 도희의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지금도 내가 "농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한다.
<제1부 어린시절> 목포로 가는 뱃길
내게 암태도는 넓디 넓은 세상이었다, 옆 마을에 가려 해도 산을 넘어야 했고, 섬을 둘러싸고 있는 갯벌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러던 내가 나중에 지리도에 좁쌀 알갱이만하게 그려 놓은 암태도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내가 자란 마을은 바다와 연해 있지만, 염전을 하는 두어 집 말고는 바다와 큰 관련 없이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거의가 농사를 지었고, 마을 아이들도 조개를 줍거나 낚시를 다니기보다는 나무를 하거나 개암을 주우러 산으로 싸돌아다니는 일이 많았다.
우리 마을은 땅이 잘록하게 들어간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원래 암태도와 떨어져 있던 아주 작은 섬을 둑으로 이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 큰일을 치르기 위해 마을 소녀를 제물로 바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어린 내게 이 전설은 때로 바다에 대한 무섬증으로 다가오기도 했고, 그 깊은 곳 어딘가에 내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신비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런 신비스런 느낌은 오래도록 나를 바닷가에 붙잡아두고는 했다. 마냥 바라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바닷물 위에 내가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 품속에서 살포시 깨어날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 그러나 정신이 들면 바다는 언제나처럼 저만치 있고 나는 갯바위 위에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그럴 때면 제물로 물에 빠뜨렸다는 소녀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라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나는 바다와 섬과 갯벌, 그리고 그 모든 것 속에 담긴 전설의 일부로 자랐다.
뭍에 나간 부모님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보살핌이 살가웠지만, 어린 아이에게 부모님의 품은 늘 그립기만 했다.
이런 내 마음을 들여다 보기라도 했는지 할아버지는 나 혼자 배를 타고 목포까지 다녀올 수 있도록 가르쳤다.
"너도 이제 다 컸으니, 목포까지 혼자 다녀야 쓴다."
할아버지의 말씀에 와락 겁부터 났지만, 어른 대접을 하려는 할아버지의 배려를 마다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겁먹은 내색은 않고 군소리 없이 "알았어요." 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느니, 겁이 날만도 했다. 이때부터 나는 부모님이 있는 목포까지 혼자 오갔다.
목포까지 가려면 소시리 선창에서 배를 타야 했다. 소시리 선창은 우리 마을에서 십 리쯤 떨어져 있었는데, 나는 늘 바다를 따라 이어진 갯벌을 맨발로 걸어 그 곳까지 갔다. 맨발에 닿는 갯벌 흙의 촉촉하고 보드라운 느낌은 지루함과 피곤을 씻어주기에 충분했다.
지금은 이런 운치도 사라졌다. 섬 안을 도는 버스와 택시가 있으니 걸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목포에서 암태도를 직통으로 이어주는 페리호 덕분에 뱃길도 간편하고 빨라졌다.
내가 어릴 때 목포까지 가려면, 우선 소시리 선창에서 "종선"이라고 부르던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야 했다. 그때 타던 종선은 노를 저어가는 무동력선이었는데, 요즘은 유원지의 놀잇배로나 쓰이고 있다.
종선이 바다 한가운데까지 나아가면 승객들은 기다리고 있던 연락선으로 갈아 탄다. 연락선으로 갈아탈 때에는 가느다란 사다리를 타고 올라야 했는데, 어찌나 겁을 먹었는지 발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성큼성큼 사다리를 오르는 어른들이 그 때 내 눈에도 정말 용감해 보였다. 나는 어른이 되어도 절대로 그렇게 용감하게 행동하지는 못할 것만 같아 불안하기도 했다. 이 모든 불편은 암태도에 큰 배가 닿을 만한 부두 시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섬 사람들은 아주 작은 풍랑에도 꼼짝없이 발이 묶였다. 그렇다고 해서 짜증을 내거나 투덜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오래도록 익숙해진 생활이어서 그렇기도 했을 테지만, 분식집에서 라면 한 그릇 먹으면서도 빨리 내놓으라고 아우성인 요즘 사람들의 조급증에 비하면 어렵게 살면서도 그만큼 여유롭게 생활을 꾸려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무튼 나는 어른들 틈에 끼어 오종종거리며 배를 타는 데 제법 익숙해지게 되었다. 종선에서 연락선으로 갈아탈 때의 무서움도 어느 정도 지나니 그런대로 견딜만 해졌다. 그러나 아무리 여러 차례 암태도에서 목포를 오가도 끝내 익숙해지지않는 골칫거리가 있었다. 배멀미였다. 보통 두 시간 걸리는 뱃길을 가는 동안 나는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며 멀미를 해대느라 얼굴이 노랗게 뜨고는 했다. 그때 기억 때문에 지금도 배를 보면 멀미부터 떠오른다.
목포를 뻔질나게 드나들어도 멀미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멀미에 대한 보상도 충분했다. 부모님을 만나 어리광을 부리는 것도 보상의 한 가지였고, 암태도로 돌아와 목포에서 보고 들은 것을 친구들에게 마음껏 떠벌이며 잰 체할 수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보상이라면 보상이었다. 그래서 암태도에서 목포로 갈 때에는 부모님 생각을 하고, 목포에서 암태도로 돌아올 때에는 친구들에게 늘어놓고 자랑거리를 생각하면서 멀미 공포를 쫓고는 했다.
내가 목포에 다녀오면 마을 아이들이 모두 내게로 몰려들었다. 그러면 나는 목포의 거리며, 자동차 행렬이며, 점포들에 관해 보도듣도 못한 것까지 섞어가며 대처 구경을 한 사람으로서 자랑하기에 바빴다.
물론 멀미로 고생을 했다거나 연락선으로 갈아탈 때 겁먹은 사실은 절대 입밖에 내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것도 모르고 나를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제1부 어린시절> 할머니의 유산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더불어 내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빠지지 않는 분이다. 할머니는 암태도 옆에 있는 섬인 자은도에서 시집을 와 할아버지와 평생을 암태도 섬에서 살았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암태도를 무척이나 닮은 분이었다. 암태도처럼 특별한 것도 유별난 것도 없는, 이 나라 어느 산천을 가나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아낙네였다. 학교 문앞에도 가보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당신의 이름 석자도 쓰지 못하는 분이었다.
없는 집안의 딸이었던 할머니는 처녀였음에도 재취로 시집을 왔는데, 시집이라는 곳이 식구가 모두 열 일곱명이나 되는 종가집이었다. 이런 집의 맏며느리로 들어왔으니 그 시집살이가 오죽했으랴. 하지만 할머니는 수더분하게 그 모질기만한 시집살이를 견뎌냈다.
시집살이가 유별나긴 했지만 그것이 그분의 내세울만한 특징은 아니다. 우리의 할머니와 어머니 가운데 고된 시집살이를 겪지 않은 분이 얼마나 될까?
이렇듯 할머니의 삶은 특별할 게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할머니의 삶에서 절로 우러나던 인간에 대한 애정은 내 삶의 근원적인 잣대를 마련해 주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추스릴 때마다,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과 함께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우리 마을을 자주 찾아오던 광주리 장수 어머니들이다.
광주리에 생필품을 담아 이고 바다를 건너와 쌀이나 보리로 바꾸어가던 방물장수 아주머니의 모습은 그 시절 어느 섬에서나 볼 수 있었다. 변변한 가게하나 없는 섬사람들에게 그들은 요긴한 물건을 공급해 주는 데다가 뭍 소식까지 덤으로 들려주는 소식통 노릇까지 해 주었다. 방물장수가 다녀가고 나면 아낙네들의 수다가 한층 활기를 띠는 것도 그런 연유였다.
방물장수는 섬에 오면 여러 날을 묵어야 했다. 섬을 한바퀴 돌며 하루 이틀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러니 묵을 곳과 식사가 늘 문제였다. 변변한 여관이나 식당이 있을 리 없고, 있다해도 방물장수의 수입으로 그런 곳을 이용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인심좋은 집 안주인과 잘 사귀어 그 집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던지라, 그런 집 한 곳 알아두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우리 마을에 찾아온 방물장수들은 누구나 우리집에서 자고 먹었다. 무슨 대가를 받은 것도 아니니 우리집은 방물장수들의 무료 숙소였던 셈이다. 이는 모두 할머니의 배려였다. 할머니는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들을 대접했다.
방물장수 아주머니들 중에는 유난히 과부가 많았다. 난리통에 남편을 잃거나 좌우익의 갈등으로 남편을 잃은 사연 많은 아낙네들이 대부분이었다. 할머니는 혀를 차며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오죽 살 길이 막막하면 가진 것이 뻔한 섬사람들한테 물건을 팔려고 그 먼 물길을 건너 왔을까?"
방물장수 아주머니들은 할머니를 "엄마"라고 불렀다. 그리고 정말 피붙이처럼 의지하고 따랐다. 방물장수를 그만두고 나서도 할머니를 찾던 아주머니가 여럿 있었던 것을 보아도 할머니의 인정이나 마음씀이 얼마나 지극하고 정성스러웠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이렇듯 할머니는 다른 사람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셨다. 어려운 사람에게 인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은 할머니의 삶에서 하나의 원칙이었다. 그 인정스러운 마음은 신분의 높낮음을 가리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 모두가 천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할머니 앞에서는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로 존중받았다.
할아버지는 혼자 농사를 짓기가 벅차 일꾼을 두었던 적이 있었다. 다들 10대 후반쯤의 나이였는데, 말이 일꾼이지 머슴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누구나 말못할 사연을 안고 이 되깐 섬까지 밀려온 사람들이었다. 해마다 이집 저집 옮겨다니며 몇 해 머물다가는 떠나고는 했는데, 할머니는 이들을 한 식구처럼 대했다. 우리 형제들은 물론이고 마을 아이들에게도 형이라고 깍듯이 부르게 했고, 우리가 조금이라도 버릇없이 굴면 따끔하게 야단을 치고는 했다.
다른 집에서 일하는 일꾼들도 부당하게 대접받지 않는지 늘 챙기기까지 했으니, 내가 나중에 "인권변호사"가 된 것도 자생적 인권주의자이자 평등주의자이던 할머니의 정신적 유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할머니의 이 평등주의적 사상은 맏손주인 나에게도 어김없이 관철되었다. 할아버지가 나를 특별하게 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만약 할머니마저 나를 할아버지처럼 대했다면 나는 잘난 체 깨나 하는 아이로 자랐을 테고, 어른이 되어서도 몰지각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무진장 널려 있는 것이 군것질거리지만 그때는 군것질거리는커녕 밥 세끼 챙겨 먹기도 어려웠다. 우리 반에는 고구마 두 개로 점심을 때우는 아이가 여럿 있었다. 맨밥에 고추장일망정 도시락을 싸갈수 있었던 내 처지는 매우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니 누구네 집이라 할 것도 없이 보리개떡 한 쪽도 남주기 어려웠다. 그래서 친구집에 놀러 가서도 끼니때가 다가오면 집으로 돌아오는게 꼭 지켜야 할 예절이었다. 이런 시절에 할머니는 금쪽같은 손주에게 군것질거리마저 특별대우를 하지 않았다. 어쩌다 먹을거리가 생겼을 때, 친구들이나 동네 사람들이 찾아오면 내 몫은 산산 조각이 나 버렸다. 보통 할머니들은 먹을거리를 숨겨 두었다가 아무도 없을 때 자기 손주에게 내주는데, 우리 할머니는 손주라고 해서 더 주는 법도 덜 주는 법도 없었다. 개똥이나 말순이나 귀한 손주나 언제나 똑같이 나누어줄 뿐이었다.
어린 마음에 내 몫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주시겠지 하고 기대하다가 헛물만 켜고 서운해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싫은 내색을 하면 할머니는 언제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아가,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대접을 해야 쓴다."
그때는 너무 섭섭해서 할머니에게 삐진 일도 여러차례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이 말은 내 인격 형성의 주춧돌이 되었다.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평생 동안 서울은커녕 광주 한번 나가 본 일이 없으니 보고들은 것도 많지 않았을 할머니, 그 분은 대체 어디서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대접해야 한다."는 깊고 너른 생각을 품게 된 걸까. 끝없이 뻗어난 바다가 가르친 것일까. 평생을 살아온 암태도가 가르쳤을까. 아니면 세월이 가르쳐주었을까.
할머니의 평등주의는 내가 "인권변호사"로 나서는 데 잠재적인 계기가 되었고, 나 자신의 이익보다는 명분과 양심을 중시하는 삶의 태도를 유지하는 밑거름이었다.
차츰 나이가 들면서 나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때로는 할머니를 기쁘게 해 드릴 궁리를 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아침 군불 때는 일을 자청하고 나서기도 했고, 한때는 돈을 벌어 할머니를 호강시켜 드린다는 생각으로 토끼를 기르기도 했다. 토끼장을 잃어버리고 몇날 며칠을 슬퍼하면서 아무 소득 없이 끝난 일이기는 하지만. 가끔은 굴을 따러 가는 할머니를 따라 나서기도 했다. 날카로운 칼로 굴껍질을 깨고 알만 건져 담는데, 암태도 사람들은 "굴 따러 간다"고 하지 않고 "굴 좃으러 간다"고 표현한다. 때로는 굴을 따러 다른 섬이나 무인도까지 원정을 가기도 했는데, 굴따는 일이 힘겹다는 것을 알고나서는 할머니가 가엾어 보이기까지 했다.
지금도 가끔씩 바닷바람에 그을린 내가 할머니를 따라 굴 따러 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나를 할머니의 모습에 비추어 보고는 한다.
"나도 할머니처럼 평생을 너른 가슴으로 살 수 있을까, 할머니의 유전자를 우리 아이들에게 전해 줄 수 있을까.........
<제1부 어린시절> 믿지 못할 해시계
요즘은 어디를 가나 시계가 널려 있다. 집안을 둘러보면 마루, 주방은 물론 방마다 시계가 놓여 있다. 사무실은 말할 것도 없고 거리의 상점마다 시계가 걸려 있다. 혹 시계를 지니지 않았다 해도 물어 볼 사람이 지천이고 물어보는 것마저 귀찮다면 슬쩍 상점 안을 들여다보면 된다. 우리 두 딸아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이미 시계를 차기 시작했다.
이 흔해빠진 시계가 예전엔 구경도 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우리집에는 시계 하나 걸어두지 못했다. 우리집 뿐만 아니라 우리마을을 다 뒤진다 해도 시계가 두어 개쯤이나 나왔을지도 의심스럽다.
시계가 그만큼 값비싼 물건이기도 했지만, 동이 틀 무렵에 논밭으로 나가 일하다가,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쯤 점심을 먹고, 해질녘에 집으로 돌아오면 그만인 농부에게 시계가 그리 요긴한 물건도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에 맞춰 학교에 가야하는 아이들에게는 사정이 달랐다. 해가 노상 같은 시간에 뜨고 지지는 않으니, 해를 기준삼을 수만은 없었다. 그렇다고 달리 기준삼을 것도 없었다. 그러니 천상 해시계에 기댈 도리밖에 없었다.
"해가 산 위에 올라왔으니 이제 학교에 갈 시간이다."
아이들은 이렇게 대충 감으로 맞추어, 책보를 챙기고 학교에 갔다. 할아버지에게 특별대우를 받던 나도 다른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어른들이 일어날 때 덩달아 일찌감치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동네 아이들과 삼삼오오 어울려 놀았다. 그러다가 누군가 "학교 갈 시간이야"하고 소리치면 우르르 떼지어 학교로 몰려갔다. 그런데 시간을 잘못 알아 학교에 늦은 일이 가끔씩 일어났다.
우리집에서 학교까지 1km쯤 떨어져 있었고, 학교근처 마을에는 작은할아버지댁이 있었다. 나는 학교 가는 길에 꼭 작은할아버지 댁에 들러, 나보다 한 두살 위인 5촌 당숙 둘과 함께 학교에 갔다.
그날도 나는 당숙들과 놀다가 학교에 갈 생각을 하고 일찌감치 집에서 나섰다. 그리고 다른 날처럼 두 당숙과 어울려 놀았다. 그런데 한참을 놀다 보니 멀리서 학교 종소리가 울렸다. 우리 셋은 화들짝 놀랐다.
"어어, 아직 해가 산 위로 안 올랐왔는데…."
"큰일났다!"
"빨리 뛰어."
우리는 울상이 되어 학교 쪽으로 내달렸다. 그런데 한 당숙이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뛰나 걸으나 지각하기는 마찬가지인데 뭐하러 뛰어."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터덜터덜 걸어가며 앞으로 다가올 운명을 점쳐 보았다.
"우리는 지각하면 회초리 열 대야."
"우리는 첫째 시간 내내 손들고 서 있어야 하는 걸."
나는 그때 저학년이었기 때문에 지각을 해도 그리 큰 벌을 받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두 당숙이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는 은근히 겁이 났다.
"정배야, 우리 오늘 학교 가지 말자. 그럼, 벌을 받지 않아도 되거든."
"학교 안 가고 뭘 해?"
의외의 제안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뭘 하긴 뭘 해. 학교 끝날 때까지 실컷 노는 거지."
실컷 논다는 말에 나는 귀가 솔깃했다. 결국 우리 셋은 실컷 놀자고 합의했다. 그리고 뒷산에 올라가 정말이지 신나게 놀았다.
그때 함께 학교를 빼먹었던 당숙 가운데 한 사람은 지금 검찰청 계장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전남대 교수로 있다. 어린 시절에 한두 번쯤 "땡땡이"를 치는 일은 그리 나무랄 일도 아닌가 보다. 하지만 요즘은 결사적으로 땡땡이를 막아야 한다. 우리는 땡땡이를 치고 뒷산에서 놀았지만, 요즘 아이들이 땡땡이를 치고 어떤 험한 곳으로 갈지 알 수가 없다. "땡땡이"의 낭만이란 이제 기억 속에서 밖에는 찾을 길이 없는 것이다.
아무튼 시계가 없어 학교까지 빼먹었던 내가 비로소 시계를 갖게 된 것은 목포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중학교 때에는 손목시계를 찬 친구들이 여럿 있었지만, 나는 3년 내내 손목이 허전한 채 학교를 다녔다. 그러다가 드디어 중학교를 졸업할 때 1등 상으로 손목시계를 받았다. 그 시계는 아버지에게 드리고, 나는 아버지가 차고 다니던 낡은 시계를 물려받아 차고 다녔다.
이 고물 시계는 오랫동안 나의 재산 1호였다. 그 이상 값진 물건이 내 차지가 된 것은 먼 훗날이었다.
<제1부 어린시절> 끝내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
암태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는 부러울 것이 별로 없었다. 살림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배를 곯을 지경은 아니었고 오히려 마음은 언제나 넉넉했다.
그러나 마음껏 읽을 책이 없다는 것은 큰 아쉬움이었다. 동화나 잡지는 고사하고 참고서조차 구경하기 힘들었다. 책이라고는 교과서가 거의 다였다.
책읽기를 좋아했던 나는 언제나 읽을 거리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그래서 집에 굴러다니는 책과 학교에 있는 책을 몽땅 읽어 버리고 나서는 동네 어른들이 보다가 던져둔 "농원"이라는 농민잡지까지 모조리 읽어 치웠다.
그마저 다 읽고 나면 읽을 것이라고는 더 이상 없었다. 이때부터 내가 할 일은 방학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었다. 방학이 오면 친척집에 다니러 오는 서울 아이들이 하나 둘 우리 마을에 나타났다. 그 아이들은 대개 동화책이며 참고서를 가지고 왔는데, 그 아이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정작 내가 반가운 것은 책이었지만, 아이들까지도 덩달아 반가웠다.
서울 아이들이 온 날이면 나는 그 집 주위를 빙빙 돌면서 기회를 잡아 책이나 참고서를 빌렸다. 빌린 책은 마냥 볼 수가 없어 그날 밤을 꼬박 새워 다 보고는 했다. 바로 돌려주지 않아도 될 때에도 밤을 새워 읽어야 직성이 풀렸다. 손에 책을 잡으면 다 읽을 때까지 놓지 않는 버릇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늘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변변한 장난감 하나 없었지만 놀 거리는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우리 마을에는 나와 한 학년이던 남자 친구가 다섯 명이었고, 여자 친구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한 학년에 한 학급밖에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6년 내내 같은 반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그야말로 엉덩이에 난 점까지 서로 알 수 있을 만큼 가깝게 지냈다.
친구들과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노는 것은 우리에게 하루 일과였다. 그 시절 우리 마을에는 공기놀이가 한창 유행이었다. 다른 고장에서는 주로 여자아이들이 하던 놀이였다는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 마을에서는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암태도에서는 공기놀이를 "모짜꽁"이라 불렀다는데, 남자 아이들은 공깃돌 다섯 개로 노는 "다자꽁"을 많이 했다.
나는 공기놀이보다는 제기차기를 좋아했다. 제기차기라면 우리 마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을 만했다. 때로는 백 번을 넘게 차고도 불만스러워 일부러 제기를 잡고 다시 차는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낚시도 많이 다녔다. 낚시라고 해 봐야 막대기에 실을 묶은 장비가 고작이었지만 물고기는 곧잘 걸려들었다. "문저리"라고 부르는 망둥어 종류를 주로 낚았는데, 볕에 말려 주었다가 날로 베어먹어도 맛있었고, 구워먹으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살살 녹았다.
"한 망태기 잡아서 말려둬야지."
한번은 이렇게 다부지게 마음을 먹고 낚시를 갔다. 해가 어둑해질 때까지 갯바위에 서서 낚시를 드리웠는데, 고작 두 마리밖에 잡지 못했다.
"에잇, 이게 뭐람."
나는 적잖이 실망해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는 낚시에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그뿐만 아니라 공기놀이나 제기차기는 물론이고, 친구들과 뛰노는 일도 시들해졌다. 어느덧 나는 철이 들고 있었던 것이다.
놀이보다는 공부를 하거나 책을 보는 일이 더 재미있어지기 시작했고, 혼자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아졌다.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더 이상 그전처럼 신나게 뛰놀지는 않았다. 이제 우리는 모든 놀이의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고, 그와 함께 어린시절도 끝이 나고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목포로 유학을 갔다. 그러면서 내 어린 벗들과도 헤어졌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한시도 그들은 여전히 한치의 허물도 없는 친구로 남아있었다.
지금도 때때로 어린 시절의 친구들을 만난다.
한 친구는 공장에 다니고, 또 한 친구는 광주에서 자그마한 닭집을 한다. 그리고 서울에서 버스 운전을 한 친구는 연락이 끊겨 있다.
그 친구들은 나와 사뭇 다르게 살아왔다. 내가 대학에 가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 노릇을 하는 동안 친구들은 사우디에 돈벌러 가거나, 공사판을 떠돌며 살았다.
나나 친구들이나 이제 그만 그만한 자식이 하나 둘 딸린 가장이 되었지만, 언제나 서로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한다. 그렇지만 막상 만나면 처음엔 반가워 어쩔줄을 모르다가도 조금 시간이 흐르면 서먹해지고 만다. 서로 다르게 살아온 세월이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관심사나 취향이 달라져 함께 나눌 얘깃거리가 금새 바닥이 나고 만다. 완전히 하나가 되어 뒹굴었던 친구들의 삶이 이렇게 멀찌감치 떨어져 버렸구나 생각하면 가슴 한켠이 싸아 저려온다.
그 친구들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옆 마을에 살던 친구들 가운데에는 혼자 힘으로 뒤늦게 공부를 해서 문화체육부 사무관이 되기도 하고, 신안구청의 공무원으로 일하는 친구도 있다. 하지만 그 친구들을 만나도 할 이야기가 옹색하기는 마찬가지다.
서울에 사는 암태도 사람들의 모임에 가 보아도, 술 마시고 고스톱 치는 것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다. 가끔 정치 얘기가 불거져 나오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이야기는 즐겁지가 않은 것이다.
이렇듯 고향 사람, 고향 친구를 만나도 편치를 않고 오히려 마음에 걸릴 때가 많다. 그래도 나는 친구들을 그리워하고 고향 사람들 만나는 자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친구들과 고향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내가 잊고있던 일들이 되살아나곤 한다. 강팍하고 어지러운 삶을 이어온 그들은 이 땅에서 가장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한다. 그들은 애써 꾸미지도 않고 감추지도 않는다. 아니, 이미 꾸밀것도 그들에겐 없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우스개 소리에 함께 박장대소를 하노라면 어느새 내 마음마저 맑아진다. 이것을 나는 민중성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속해 있는 법조인의 세계는 우선 먹고 살 걱정없고, 나아가서는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무언가 가진 것이 있는 집단인 것이다.
가진 것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지켜야 한다. 그들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좀체로 여는 법이 없다. 허물은 감춰야 하고, 때에 따라서는 허장성세도 부려야 한다. 그러니 이 세계에서 뒷맛이 개운한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더더구나 친구처럼 터놓고 지내는 사이까지 발전하기란 정말 어렵다.
그러나 고향 친구들과 어울릴 때는 다르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어 더 팍팍할 것 같지만 오히려 그들의 삶은 더 넉넉하다. 그들은 돈을 빌려 달라고하면, 남에게 꾸어서라도 돈을 빌려준다. 나중에 그 친구가 돈을 갚지 않아 마음에 피멍이 드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미리 계산하는 법이 없다.
가진 것 많고, 배운 것도 많은 사람이라면 어떨까. 우선 그들은 그 사람이 돈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 따져본다. 그리고 자신이 빌려주었다는 소문이 나면, 너도나도 손을 벌리지 않을까 하는 요상한 걱정까지 하기 일쑤다. 그러고는 마음속으로 거절할 핑계거리를 찾기 시작한다.
이는 매우 합리적인 방법이어서 손해볼 일도 없고, 뒷탈이 나서 쓸데없이 골치를 썩을 일도 없다. 그러나 그런 방식의 삶을 지혜롭다고 판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메마른 마음으로는 스스로 행복을 얻기 힘들뿐더러 진정한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손해를 보고 어리석은 사람이 되더라도,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 상대방과 나를 동일시하는 마음이 우리의 세상을 지금보다 조금은 나은곳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이런 마음을 가르치고 싶다.
<제1부 어린시절> 아직 다 갚지 못한 빚
고향을 떠나 도시에 살면서 나는 많은 친구를 얻었다. 그들과 함께 공부하고 어울려 놀면서도 내 마음속에서는 늘 고향 친구들이 떠나지 않았다. 대부분 상급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하고 집안 일을 거들거나, 돈벌 궁리를 하고 있을 그 친구들을 생각하면 나만 호의호식하는 것 같아 언짢았다.
그래서 나는 타지의 친구들에게 "내 고향 친구들은 다들 똑똑하다."고 말하고는 했다. 농담처럼 하는 말이지만 내 마음속에는 늘 고향 친구들에 대한 부채의식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 친구들은 큰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처지와 환경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이 내 탓은 아니지만, 마치 부당하게 큰 이익을 챙긴 사람처럼 지금도 나는 양심에 찔린다.
한때나마 같이 살았던 고종사촌 누나 생각을 하면 더욱 그렇다. 6.25 전란때 남편을 잃고 살기가 힘겨워진 고모는 나보다 두 살이 많은 사촌 누나를 암태도 할아버지에게 맡기고 돈벌이를 하러 도시로 갔다.
맏이었던 나는 갑자기 누나를 얻은 것이 마냥 기뻣다. 밤이 되면 누나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만들고는 귀신 이야기며 도깨비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다. 누나의 이야기가 얼마나 실감이 났던지 우리 남매들은 침도 못 삼키고 얼어붙은 채 이야기를 들었다. 누나는 똑똑했고, 공부도 무척 잘했다.
그렇지만 초등학교를 마친 뒤에는 아무리 머리가 좋고 제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소용없었다. 친손자를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던지 할아버지는 누나를 중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고향 친구들과 사촌누나가 나처럼 마음놓고 공부를 할 수 있었다면 지금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적어도 나보다 10년이 더 늙어 보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소박함, 솔직함, 거침없음을 사랑하지만, 거기에 더해 세상을 보는 안목과 문화를 향유하는 정신적으로 풍부한 삶이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자신의 권리 한 뭉텅이를 빼앗기고 산 셈이다.
이제는 누구나 충분한 교육을 받고 있는가. 나는 그렇다고 단정하지 못한다.
꽤 오래 전 일이지만 사법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고향에 내려갔을 때, 모교의 교장 선생님이 내게 아이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나는 그 요청을 수락하고 고향 아이들에게 "내가 섬에서 태어났지만…"하고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줄 이런저런 말들을 해 주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그 아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그들의 부모처럼 여전히 사회의 밑바닥을 헤치며 살아야 한다는 예감을 하고 있었다. 차마 그 말을 아이들에게 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 었다.
누구에게나 교육받을 권리가 보장되고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로 가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할까. 얼마나 더 오랫동안 걸어가야 그런 나라를 만나게 될까.
<제1부 어린시절> 수석 인생이 들려주는 이야기
목포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비로소 나는 암태도를 떠나 목포의 부모님과 살게 되었다. 내가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에는 목포에서 살던 남동생과 여동생이 암태도 할아버지댁으로 가서 학교에 다녔다.
이렇게 우리 남매들은 목포와 암태도를 서로 번갈아 오가면서 자랐다. 그러던 차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이제 우리들 남매들은 더 이상 암태도에 머물 수가 없었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할머니는 두 동생을 목포로 데리고 오셨다. 이 때 비로소 우리 가족은 한 지붕 밑에서 모두 모여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목포에서 교사를 하시다가 공무원으로 직업을 바꾸셨는데, 내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집안이 매우 쪼들렸다. 공무원 월급에서 다섯 남매의 교육비를 떼고 나면 겨우 굶지 않고 사는 정도였다.
당시 목포중학교는 목포 인근에서 공부를 잘 한다는 아이들이 다 모여들었는데, 부잣집 아이들도 꽤 많았다. 그 아이들에 비하면 텔레비전도 전화도 없는 우리 집은 매우 가난한 축이었다. 교복을 입던 시절이어서 티를 내지 않으면 빈부의 차이란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을 숨길 수는 없었다. 친구들에게 공개해야 하는 도시락 반찬은 그 집안의 재산명세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나는 도시락 반찬으로 거의 매일 김치와 고추장밖에 싸가지 못 했다. 그러니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은 반 아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 때문에 주눅이 들지는 않았다.
나는 암태도에서 공부를 아주 잘 하는 아이로 일찌감치 소문이 나 있었다. 6학년 때 군 학력경시대회에서 1등을 하고부터는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그 소문은 목포까지 퍼져 있었다. 신동 소리를 듣는 내가 쩨쩨하게 도시락 반찬 때문에 주눅이 들어서야 쓰겠는가 하는 오만함도 마음 한 자리에 있었다. 아무튼 도시락 반찬 때문에 나를 무시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목포중학교 입학시험 수석을 목표로 공부하던 아이들 사이에서는 암태도에 사는 천정배라는 아이가 수석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꽤 유력하게 거론되고는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정작 나나 집안 어른들은 음악, 미술은 제대로 배울 기회조차 없었고, 과외는커녕 변변한 참고서 하나 없었던 내가 목포중학교에 붙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양쪽의 불길한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나는 수석도 아니었고 떨어지지도 않은 것이다. 그럭저럭 괜찮은 성적으로 목포중학교에 입학한 나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만 몰아놓은 "우수반"에 배치되었다.
나는 목포 생활에 그런대로 잘 적응하면서 학교 생활도 무리없이 해 나갔다. 이 무렵, 나는 문학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목포 예술제에 글을 내서 여러 차례 상을 받은 것이 내 문학성을 한껏 부풀려 놓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중학 2학년 때 전라남도 학술경시 대회에서 1등을 했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나를 신동이라고 떠받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내 인생은 공부와 떼놓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나는 그 인생을 받아들였다. 공부를 재미있어 했던 나로서는 거부할만한 다른 까닭이 없었다. 문학은 그 시절 잠시 들뜬 기분처럼 내 어린 가슴을 스쳐지나갔을 뿐이었다.
이 때부터 나중에 서울대에 입학할 때까지 나는 수석 입학과 수석 졸업을 거듭하는 그야말로 "수석 인생"을 살았다.
그러다보니 선생님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친구들은 나를 경외의 대상으로 바라보거나, 아니면 희한한 동물로 취급하려 들었다.
어떤 선생님은 집으로 고깃근이나 사들고 와서는 어머니에게 "공부를 하려면 체력이 중요합니다. 정배 해먹이십시오."하기도 했고, 지역의 어른들에게 받은 칭찬과 격려도 한 트럭은 될 성싶다.
미처 "보릿고개 시대"가 끝나지 않은 60년대에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그저 공부를 잘 하는 것으로 그치는게 아니라, 그 지역 사람들 모두의 희망이고 자부심이었다. 그 시절의 목포는 유독 더 그랬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희망과는 달리 나는 남 앞에 잘 나서지 못 했으며, 리더십도 없었다. 초중고교 십이 년 동안 반장 한 번 못 해 본 것만 봐도 얼마나 내가 주변머리가 없었는지 알고도 남을 것이다. 보통 공부를 잘하는아이는 좋든 싫든 반장을 떠맡게 된다. 그런데 줄곧 "수석 인생"을 살아온 내가 반장 한 번 못 해보았다니, 얼간이 아니면 머저리가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그런 시시한 건 안 해도 돼"라고 못박아 놓고 있었다.
속으로 조금 잘난 체를 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세속적인 발달이 매우 느린 아이였던 것 같다. 수줍음도 많이 타서 선생님을 만나도 머리만 꾸벅 숙일 뿐, 때와 장소에 맞는 근사한 인사말 한번 늘어놓을 줄 몰랐다.
지금도 아주 내성적이지는 않지만 사람 많은 곳에서 앞에 나서려면 먼저 중압감이 온다. 낯선 곳에서 강연을 할 때에는 더 그렇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면서도 속으로 쩔쩔맬 때가 많다.
사람들이 귀중한 시간을 할애한 만큼 나도 그에 상응하는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려다 제풀에 부딪치는 어려움이 이런 것인가 보다. 아무튼 나는 남 앞에 나서는 일도 별로 없었고, 무슨 감투를 선망해 본 적도 없다. 다만 내가 어김없이 지켜온 태도는 어떤 일이든 완전하게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태도가 나를 "수석 인생"으로 만드는 데에 일조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여러 차례 수석을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 하게 되지요?"하고 묻기를 좋아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학교 다닐 때 나는 공부에 관한 한 경쟁심리나 불안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1등이라는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억지로 공부를 한 기억도 없고, 꼭 1등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없었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1등이 아니라 진리를 탐구하는 학자였다. 그러려면 공부도 남다르게 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영어로 일기를 쓰기도 하고, 남들은 다 시험 공부에 매달리고 있는 때에 밤을 새워가며 철학책을 탐독하기도 했다.
나는 모범생이었지만, 알고 보면 기존의 질서를 부정하려는 기세도 대단히 컸다. 무엇보다 학교에서 배운대로,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라는 것이 싫었다.
한번은 공업 시간에 "공공 시설에 화장실 비율은 남자와 여자가 4대 1, 소변기와 대변기는 4대 3으로 배치한다"는 대목을 외워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 관심 밖의 지식이었고, 따라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공부였다.
나는 그날로 공업책을 덮어버렸다. 그래서 내 고등학교 성적표 공업란에는 난데없이 "양" 한 마리가 튀어나온다. 덮어버린 공업책은 대학예비고사 하루 전에 다시 펼쳤고, 그날 밤을 꼬박 새워 공부를 했다. 그리고 만점을 받았다. 이는 이미 공업책을 덮을 때 작정한 바였다.
이렇게 늘 내 멋대로 공부를 하다보니 과외를 할 형편도 못되었지만, 과외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럼에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과외를 받아가면서 대학시험을 치렀던 아이들보다 내 성적이 더 뛰어났던 것은 집중력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집중력은 공부가 재미있기 때문에 생겨났고, 공부가 재미있었던 까닭은 낙관적인 성품과 부모님의 잔소리로부터 완전에 가깝게 자유로웠기 때문인 듯 하다.
우리 부모님들은 섭섭하다 싶을 만큼 자식들에게 아무런 강요를 하지 않았다. 주위의 기대를 그만큼 받는 아들을 두었다면 한번쯤 당신들의 욕심을 기대해 볼만도 할텐데, 단 한번도 "공부하라"느니 "무슨 학과를 가라"느니 간섭하는 법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무념무상의 교육방식이 내게서 공부에 대한 중압감을 모두 날려보내 준 것 같다.
내 학창시절의 경험을 하나의 특수한 사례로 보아 넘기려 할 사람도 있겠지만, 단연코 나는 오늘의 부모들이 간직해야 할 무언가가 내 경험 속에 들어있다고 믿는다.
<제1부 어린시절> 살아남은 자의 괴로움
민주화 운동이 최고조에 달해 있던 80년대 중반 무렵, 한 후배가 "잔존자의 죄의식"이라는 이상한 말을 들먹이며 자신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형,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가서 고초를 겪고 있는데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 후배는 민주화 운동을 해야 하는 이유와 그 방법에 대해 몸소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 못지 않게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있는 셈이었다. 양심과 비양심, 정의와 불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형국으로 그는 몹시 큰 자책감에 휩싸여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누군가 감옥 들어갔다 나오면 환영식이나 하고, 그러다가 잔존한 자의 죄의식에나 시달리는 일 뿐입니다."
나는 후배를 크게 꾸짖었다.
"죽든지 살든지 뛰어들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서 그게 무슨 소린가. 내가 듣기에는 끝내 잔존하려는 자의 핑계에 불과해. 과거에 그랬다면 지금 용감하게 뛰어들어 목숨을 걸든지 그도 아니라면 아예 그 괴로움을 집어 치워!"
나는 끝내 역정까지 내면서 시무룩하게 고개 숙인 후배에게 바보 같은 짓 말라는 극언을 했다.
그날 밤, 나는 문득 나 역시 한때 그 후배와 비슷한 괴로움에 뒤척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대학에 다니던 때의 일이다. 고향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서울 법대를 다니게 된 나는 한동안 세상 모든 것이 손을 뻗기만 하면 얻어지는 양 자신에 차 있었다.
난생 처음 가족의 품을 떠나 객지에서 하숙을 하면서 낯선 생활에 적응해야 했지만, 그것쯤은 자신감에 찬 나에게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오직 마음껏 학문을 탐구하고 정말 공부다운 공부를 하겠다는 꿈으로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학교 생활을 두어 달 하면서 법대에서의 공부가 내 기대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실리적인 법 이론을 공부하는 게 어떨까, 아니면 경제학이나 철학처럼 더 스케일이 크고 학문적 깊이도 있는 공부를 하는 게 어떨까 하며 진로를 놓고 고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잠깐 머물렀다 지나갔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진로를 바꾼다고 선언해도 부모님은 달리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겐 그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법률이라는 울타리에 머물러 버렸다.
어느덧 한 학기가 지나고 2학기가 되었다. 이때쯤 나는 우리 사회가 어딘가 비뚤어져 있다는 것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그 비뚤어짐이 박정희 정권의 전횡에서 비롯된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2학기가 무르익을 무렵 "10월 유신"이 발표되었다.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은 하나 둘 정권을 비판하며, 감옥으로 끌려갔다. 나는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어쩔 줄 몰랐다. 그저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판단과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행동에 대한 말없는 지지를 보낼 뿐이었다.
눈앞에 펼져진 탄탄대로, 그길을 따라 그대로 걸어가기만 하면 나타날 장미빛 미래를 마다하고, 고통의 길로 들어설 용기가 내겐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괴로움을 털어놓던 그 후배처럼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서 소득도 없는 몸부림만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유신 반대에 앞장서는 친구들에게 존경과 지지의 눈길을 보내며, 그들의 언저리를 맴돌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친구들은 감옥으로 끌려갔고, 나는 술을 마시며 괴로움을 달랬다.
70년대 우리 사회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논리적으로 비판을 감행할 수 있을만큼 내 고민이 깊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 역사에 대해서도 천박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역사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리할 능력도 없었다. 내 괴로움의 칼끝은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고 외칠 용기가 내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깊은 성찰없이 주위의 기대에 떠밀려 판검사가 되려 한다는 자괴감이 울컥울컥 목울대에서 밀려 올라왔다.
마음껏 공부에 빠져보려 해도 무수한 상념으로 머리는 헝클어져 버렸다. 게다가 동기생들은 고시 공부를 하느라 속속 절로 들어가 수업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후배의 표현대로 하면 "잔존자의 죄의식"에 허덕거렸던 셈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가파른 역사에 끼지도 빠지지도 못하는 부유물로 둥둥 떠다녔던 것이다.
그리고 보면 "잔존자의 죄의식" 운운하며 선배랍시고 상담을 청해왔던 후배에게 나는 좀더 관대하게 대했어야 한다. 닭모가지 비틀듯 일언지하에 그 괴로움을 핑계에 불과하다고 못박은 것은, 어쩌면 과거의 나에게 한 못박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제1부 어린시절> 고시 합격기를 쓰지 않은 까닭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으레 "나중에 서울 법대 가라."는 말을 듣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법대가 무얼하는 곳인지, 왜 가야 하는지, 가서 무얼 할 것인지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내 목표는 서울 법대로 정해져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우선 목표는 달성했지만, 그 다음은 속수무책이었다. 대학시절의 방황은 어쩌면 오래 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대학 1학년 내내 갈피를 못 잡고 휘청거리던 나는 "10월 유신"으로 강제 휴교령이 내리는 통에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에 내려와서도 심사가 어지럽고 내가 나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음을 정돈한다는 생각으로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법대생들은 1학년 동안 실컷 놀다가 겨울 방학때쯤 정신을 가다듬고 고시 준비를 했다.
시험에 붙겠다는 생각도 없이 공부를 시작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해 1차시험에 합격을 했다. 10월 유신으로 헌법이 바뀌면서 그 해 사법고시 1차 시험이 몇 달 늦추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1학년을 마치자마자 1차 시험을 통과한 것을 친구들은 놀라워했다.
"넌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길래 벌써 1차 시험을 통과하는 거냐. 비결 좀 가르쳐 다오."
누가 그럴라 치면 "내가 객관식 시험에 강해. 잘 구르는 연필을 갖고 있거든"하고 답하고 말았다. 실은 나도 그 비결을 모르기 때문에 달리 대답할만한 말도 없었다. 이듬해 2차 시험이 있었지만 나는 시험조차 보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나는 어정쩡하게 서서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3학년이 되자, 법조인이 되어 할 일을 찾자는 쪽으로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되었다. 그래서 다시 1차 시험을 치렀고 합격했다. 시험보러 가기 전에 절은커녕 도서관에 가본 일도 없었는데, 어떻게 합격을 했는지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노릇이었다.
2차 시험은 그 해 말쯤에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꼭 합격해야 한다고 이를 악물고 있지는 않았다. 어쨌든 2차 시험을 보러 가기는 갔다. 2차 시험은 오전에 한 과목을 보고 점심을 먹고 난 뒤에 다시 한 과목을 보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하루 두 과목씩 나흘에 걸쳐 여덟 과목의 시험을 치르는 것이다.
그런데 시험 둘째 날인가 무슨 객기가 발동했는지, 점심먹고 나서 친구들과 함께 당구장으로 몰려갔다. 나는 당구도 잘 못치면서 얼떨결에 따라가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 입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 "에이, 그냥 오후시험 보지 말아버리자."고 말했다. 누구 하나 싫다는 사람이 없어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그대로 흘러갔다. 그날 나를 비롯한 여러 명의 친구들은 아무 까닭도 없이 그냥 당구장에서 죽치고 말았다.
나중에 <김&장 법률사무소>에서 같이 일하기도 했던 양영준 변호사는 당구를 못 친다며 오후시험을 치른 유일한 친구였다. 그래서 양영준 변호사는 우리 가운데 가장 먼저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후일 그는 자신의 고시합격기에 그때 벌어졌던 희한한 상황을 적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시험을 포기해 버린 내가 2차 시험에 합격한 것은 대학 졸업을 앞둔 때였다. 이 때에도 공부를 많이 하지는 못했는데, 공부가 부족한 만큼 배짱으로 밀어 부쳤기 때문에 합격하지 않았나 싶다.
2차 시험은 한 과목에 2 문제가 나오면 논문처럼 답안을 작성하게 되어 있었는데, 형사소송법 시험에 '피의자의 보전에 대해 논하라'는 문제가 나왔다.
"피의자의 보전"은 듣도 보도 못한 개념이었다. 형사소송법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한 사람도 그 뜻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형사소송법 책에는 없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예 '피의자의 보전'을 '피의자의 보호'라고 추측하고 답안을 쓴 사람도 많았다. 나는 그들과는 달리 "증거 보전"처럼 피의자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거나, 피의자가 증거를 없애지 못하도록 잡아두는 것이 아닐까 판단했다. 피의자 보전이란 구속과 비슷한 상황을 이르는 것일 테고, 거기에다 내 주관적인 견해를 덧보태어 답안을 써냈다.
시험을 치르고 나서는 "틀림없이 이 문제 때문에 떨어지겠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합격이었다.
나중에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그 과목 성적이 전반적으로 너무 낮아 심사위원들이 일괄적으로 점수를 올려주었단다. 게다가 내 멋대로 판단해서 써 낸 답안이 생각 밖으로 좋은 점수를 얻어 형사소송법에서 80점대에 가까운 점수를 얻었다. 사법시험 합격선이 평균 50~60점이었으니, 형사소송법은 내 전체 점수를 평균 3점 정도를 올려놓았고 나는 무난히 2차에도 합격을 한 것이다.
고시에 합격을 하고 나면 누구나 한번쯤은 고생담 절반에 공부한 요령과 시험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주는 격려를 절반쯤 버무려 고시 합격기라는 지면에 싣는다.
그러나 나는 도무지 쓸 얘기거리가 없었다. 별다른 고생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젊은이들은 온갖 고통을 무릅쓰고 정의를 위해 싸우는데,고시 합격이 무슨 큰 자랑거리가 된다고 합격기까지 쓰겠는가"하는 마음이 컸다. 그래서 나는 고시 합격기를 쓰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