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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남북국 시대의 성립과 발전 제1절 남북국 시대의 정치 Ⅰ. 통일 신라 중대의 정치적 발전 구분 1대박혁거세~22대 지증왕 23대 법흥왕~28대 진덕여왕 29대 무열왕~36대 혜공왕 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삼국사기 상대(上代) 중대(中代) 하대(下代) 삼국유사 상고(上古) 중고(中古) 하고(下古) 1. 통일신라 중대 전제왕권의 확립 가. 통일 이후의 신라 확대된 영토와 백성을 지배하면서 국력을 신장시킬 수 있게 되었다. 나. 무열왕계의 왕통 성립 진골 출신 김춘추가 상대등 비담(毘曇)의 반란을 진압하고 상대등 알천(閼川)과의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4~661년)이 왕위에 오르고 이후 그의 직계자손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다. 왕권의 전제화 집사부의 시중(侍中)의 권한이 강화되고 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上大等) 세역을 억제되고 갈문왕(葛文王)제도가 소멸했다. 31대 신문왕(神文王, 681~692)은 681년 김흠돌(金欽突) 반란을 계기로 귀족세력을 숙청하고 개혁을 단행하였다. 신문왕 2년 682년 국학(國學. 경덕왕 6년 747년 태학감으로 개칭했다가 혜공왕 12년 776년 다시 국학으로 환원함)을 설립하고 5년 685년 9주(州) 5소경(小京)을 정비했으며 군대제도를 7년 687년 9서당(誓幢) 10정(亭)으로 개편하고 7년 687년 관료전(官僚田)을 지급하고 9년 689년 녹읍(祿邑)을 폐지하였다. 33대 성덕왕(702~737년)때에는 신라의 전제왕권은 안정되고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상징되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진골 귀족의 세력이 일반적으로 약해진 반면 6두품은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며 신분의 권위에 집착하는 진골에 대항하여 왕권과 결합하고 국왕의 정치적 조언자로 활동했다, 설총(薛聰), 강수(强首), 38대 원성왕(元聖王)의 꿈 해몽을 잘해 유명한 여삼(餘三), 상대등 충공(忠恭. 39대 소성왕, 41대 헌덕왕, 42대 흥덕왕의 동생, 40대 애장왕의 숙부, 44대 민애왕의 아버지)의 인사 행정에 대한 고민을 적절한 충고로 풀어준 녹진(祿眞), 진성여왕을 비판한 왕거인(王巨人), 최치원(崔致遠)이 모두 6두품 출신이었다. 2. 통일신라 중대의 체제정비 가. 중앙제도 법흥왕 18년 531년에 설치된 화백회의 의장으로서 귀족의 대표자격인 상대등이 여전히 존재했지만 상대등보다는 진덕여왕 5년 651년에 설치된 집사부(執事部. 중시→시중)가 핵심관부로서 위화부를 비롯한 13부의 기능을 총괄하게 하고 감찰기구인 사정부를 설치했다. 나. 지방제도 주군현(州郡縣)제도로서 신문왕 5년 585년에 9주로 정비되었다. 9주(九州)는 沙伐州(사벌주, 尙州), 歃良州(삽량주, 良州), 菁州(청주, 康州), 熊川州(웅천주, 熊州), 完山州(완산주, 全州), 武珍州(무진주, 武州)/漢山州(한산주, 漢州), 首若州(수약주, 朔州), 河西州(하서주, 溟州)이며 정복한 국가의 귀족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소경이라 하였고 5소경(五小京)은 中原京(충주), 北原京(원주), 金官京(김해), 西原京(청주), 南原京(남원)이었다. 주의 장관은 문무왕때 군주(軍主)에서 총관(摠管)으로 바뀌고 원성왕때 도독(都督)으로 개칭되었다. 주 밑에 郡(郡守), 현(縣令), 촌(村主)이 있고 향(鄕), 부곡(部曲)이라는 행정구역도 있었다. 다. 군사제도 통일전의 6정이 신문왕 7년 687년 9서당(九誓幢) 10정(十亭)으로 개편되었다. ⑴ 9서당(九誓幢) 진평왕 5년 583년 부터 시작하여 신문왕 7년 687년에 완성된 중앙군단 녹금서당(綠衿誓幢, 583) 자금서당(紫衿) 신라인 백금서당(白衿), 청금서당(靑衿, 687) 백제인 황금서당(黃衿), 벽금서당(碧衿), 적금서당(赤衿) 고구려인,보덕국성민(城民)군단2개 흑금서당(黑衿) 말갈인 ⑵ 10정(十停, 삼천당(三千幢) 통일신라의 9주(九州)에 각각 설치된 지방 군사조직으로 한주(漢州)는 다른 주에 비해 관할구역이 넓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그 중요성이 감안되어 2개(남천정(南川停)・골내근정(骨乃斤停))가 설치되었으므로 모두 10정이 되었다. 남천정(南川停, 이천), 골내근정(骨乃斤停, 여주), 음리화정(音里火停, 상주), 고량부리정(古良夫里停, 청양), 거사물정(居斯勿停, 남원), 삼량화정(參良火停, 달성), 소삼정(召參停, 함안),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 나주), 벌력천정(伐力川停, 홍천), 이화혜정(伊火兮停, 청송). 삼국사기 직관지에 의하면 544년(진흥왕 5)에 10정이 설치된 것으로 나와 있으나, 10정은 통일 이후에 설치된 것이 분명하므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10정의 군관(軍官) 조직은 대대감(隊大監) 1명, 소감(少監) 2명, 화척(火尺) 2명, 삼천당주(三千幢主) 6명, 삼천감(三千監) 6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군관조직이 갖는 특징으로는 군관들이 대체로 기병 중심으로 편성되었다는 점과 삼국시대 정의 군관조직에 비하여 격이 한 단계 낮아졌다는 것 등이 지적될 수 있다. 라. 기타제도 상수리(上守吏)제도와 유학진흥을 위해 신문왕 2년 682년 국학(國學. 경덕왕 6년 747년 태학감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12년 776년 다시 국학으로 개칭)을 두었다. Ⅱ. 통일 신라 하대의 사회 변화 1. 통일신라 중대의 붕괴 가. 진골 귀족의 내부 분열 삼국 통일후 제35대 경덕왕(742~765년)때에는 신라의 문화가 절정기에 도달했지만 귀족들 사이에서 전제주의를 타도를 위한 운동이 일어나 경덕왕은 이를 막기 위하여 한화정책을 중심으로 정치개혁을 실시하였으나 혜공왕때 대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경덕왕 이후 사회발전은 진골 세력간의 유대를 이완시켜 분열을 가져왔다. 나. 왕위 쟁탈전 전개 중앙정부의 권위 실추로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력 상실하면서 정치적 혼란이 일어났다. 왕위 계승 싸움에서 혈통(신분)보다는 정치경제적 실력과 무장력이 중요시 되어 제36대 혜공왕이후 155년 동안 20명의 왕이 교체되었다. 정치적 혼란은 혜공왕 4년 768년에 일어나 대공(大恭)의 난은 3년간 계속되어 전국 96각간이 서로 싸우고 혜공왕 10년 774년에 김양상(金良相)은 정권을 장악하고 실권을 쥐자 김은거(金隱居) 등이 몇 차례에 걸쳐서 왕권의 회복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그 과정에 혜공왕은 피살되고 내물왕 10대손인 김양상(金良相)이 37대 선덕왕(宣德王)으로 즉위하였다. 선덕왕 뒤에 내물왕 12대손 김경신(金敬信)이 제38대 원성왕(元聖王)으로 즉위했는데 이리하여 무열왕계가 끊어지고 원성왕계가 왕위를 차지하였다. 선덕왕 이후를 신라 하대라고 하고 집사부의 중시 대신에 상대등이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시대적 흐름에 대한 반동이 있었다. 제41대 헌덕왕 13년 882년 3월 웅천주도독 김헌창(金憲昌)은 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긴 무역왕계의 김주원(金周元)의 아들로서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원한을 품고 웅주(熊州, 공주)에서 국호 장안(長安). 연호 경운(慶雲)으로 하고 대규모의 난을 일으켜 한때 무진주(武珍州, 광주), 완산주(完山州, 전주), 청주(菁州, 진주), 사벌주(沙伐州, 상주)등이 호응했으나 실패했고 다시 헌덕왕 16년 825년 김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이 다시 한산(한산, 서울)에 도움을 정하고 반란을 계속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전제왕권을 타도한 귀족간에도 상호항쟁과 대립이 일어났다. 경덕왕 16년 757년 녹읍(祿邑) 부활에 성공한 귀족들은 정치력의 증대를 목적으로 문객(門客)을 모으고 사병(私兵)을 모집하고 지기 소유의 노동(奴僮)이나 유민(流民)을 모집하여 무장하여 왕위계승전을 전개하였다. 처음 제42대 흥덕왕(興德王)의 4촌동생 균정(均貞)이 궁에 들어 가서 와이 되었으나 균정의 조카인 제륭(悌隆)이 실력으로 균정을 내쫓고 836년 제43대 희강왕(僖康王)이 되었다. 2년뒤 868년 희강왕도 죽음을 당하고 6촌형제인 김명(金明)이 제44대 민애왕(閔哀王)이 되었다. 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은 839년 청해진 대사 장보고(張保皐)의 군대 5000명을 빌려 민애왕을 축출하고 왕이 되니 제45대 신무왕(神武王)이다. 이후 장보고는 문성왕에게 딸을 왕비로 보내려다 실패하자 문성왕 8년 846년 난을 일으켰으나 중앙귀족이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피살되고 문성왕 13년 851년 청해진도 폐쇄되었다. 사건 내용 대공(大恭)의 난. 36대 혜공왕 4년 768년) 수도 및 5道 주군(州郡)의 전국 96명 각간(角干)이 서로 싸워 김대공이 피살되고 대란으로 확대되어 3년간 계속되었다. 김지정반란(36대 혜공왕 16년 780년)과 37대 선덕왕 즉위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대등 김양상(金良相)과 이찬 김경신(金敬信)이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혜공왕이 살해되어 김양상이 내물마립간 10대손으로서 37대 선덕왕(宣德王)으로 즉위하였다. 38대 원성왕(785년) 즉위 내물마립간 12대손 김경신이 38대 원성왕(元聖王)으로 즉위하였다. 39대 소성왕(昭聖王) 40대 애장왕(哀莊王) 42대 헌덕왕(憲德王) 김헌창(金憲昌)의 난(헌덕왕 14년 822년) 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긴 김주원(金周元)의 아들로서 웅주(공주)를 근거로 국호 장안(長安), 연호 경운(慶雲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겼으나 실패하였다. 범문(梵文)의 난(헌덕왕 17년 825년) 김헌창의 아들 범문이 한산(서울)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42대 흥덕왕(興德王) 43대 희강왕(僖康王, 836~838년) 흥덕왕의 사후 4촌동생 균정(均貞)과 조카 제륭(悌隆)이 싸워 제륭이 희강왕으로 즉위 4대 민애왕(閔哀王, 838~839년) 6촌 김명(金明)이 희강왕을 죽이고 민애왕으로 즉위 45대 신무왕(神武王, 839~839년) 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이 민애왕을 축출하고 신무왕으로 즉위 46대 문성왕(文聖王) 8년 846년 장보고난(張保皐難) 47대 헌안왕(憲安王) 48대 경문왕(景文王) 49대 헌강왕(憲康王) 50대 정강왕(定康王) 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나. 골품제도의 붕괴 성골은 통일전에 없어졌으며 통일 이후 1~3품이 소멸하고 4두품도 거의 평민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했다. 2. 6두품과 호족 세력의 성장 가. 6두품 세력의 대두 ⑴ 학문적 식견에 의한 정계 진출 6두품(得難, 득난)은 중대에는 행정 실무를 담당하고 왕권을 뒷받침했으나 진골 중심의 골품제도와 이를 옹호하는 불교에 대항하고 불만을 품고 있었다. 6두품은 신분적 제약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학하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학문적 식견에 의하여 정치적 참여의 길을 밟게 되었다. 임나출신의 6두품으로 외교문서의 작성에 공이 크고 불교를 세외교(世外敎)라고 비판하고 도덕을 사회적 출세보다 더 중요시한 강수(强首)와 원효(元曉)의 아들로서 6두품으로써 구결(口訣)로써 경서를 읽는 법을 만들고 풍왕서(諷王書, 花王戒(화왕계). 花王 : 모란, 白頭翁(할미꽃, 장부): 충신, 장미 : 간신)에서 국왕도 향락을 배격하고 도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설총(薛聰)과 같이 왕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유학자를 비롯하여 원성왕의 꿈해몽을 잘 해준 여삼(餘三), 상대등 충공(忠恭)의 인사고민을 적절한 충고로 풀어준 녹진(祿眞),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린 최치원(崔致遠), 후백제에서 벼슬을 한 최승우(崔承祐), 고려 왕건의 신하가 된 최인연(崔仁渷, 崔彦撝)이 모두 6두품 출신이었다. 최치원의 시무 10조 時務十餘條(급선무로 시행해야할 시국대책 10여조항)이다. 내용은 전하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신라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골품제를 완화하고 과거제에 의한 인재등용을 하라는 건의 등이 피력되었을 것"(하현강 '한국의 역사' 95면)이다. 그리고 10여 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 선생의 평소 소신인 다음 내용도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임금의 덕화는 치우침도 편벽함도 없어야 한다. (귀순군 손단) * 정치는 인을 가지고 근본을 삼고 ........백성을 건져주는 것으로서 인을 이룬다.[政以仁爲本.......仁爲推濟衆之誠] (대숭복사 비명) * 신하를 알아보기는 어진 임금밖에 없다 (절서주보사공) * 비상한 인재가 있어야 비상한 일이 있고 비상한 일이 있어야 비상한 공이 있다. (서주나성도기) * 천하를 다스리려면 먼저 부정 출세를 막아야 하고 어진 선비의 진출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 (양관청치사표) * 장차 곤궁에 빠진 백성을 살리려면 진실로 유능한 관리들에게 의지해야 할 것이다. (수고패권지강주군주사) * 아래사람이 이탈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대개 윗사람이 온전한 덕이 없기 때문이다. (소의성린) * 예나 지금이나 사치란 다 몸을 망치는 법이다. (변하회고) * 풍속을 순화시키는 데 제일 먼저 할 일은 권농이다[撫俗所先 勸農爲最]. (허권섭관찰아추충홍택순관) ⑵ 신라의 골품제도 비판 6두품은 신라의 골품제도를 비판하고 반신라적 경향도 띄었다. 도당유학생(宿衛學生)으로서 김운경(金雲卿)은 도당유학생으로서 헌덕왕 13년 821년 최초로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우감문위수부병조참군(右監門衛率府兵曹參軍)・연주도독부사마(渷州都督府司馬)를 지냈다. 최치원(崔致遠)의 10여조의 시무책에는 과거제도에 의한 인재등용을 주장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그 외에도 최승우(崔承祐)는 후백제에서 벼슬을 하고 최인연(崔仁渷, 崔彦撝, 최언위)는 고려의 신하가 되었다. 나. 호족의 대두 ⑴ 해상무역의 발달과 해외에의 관심 골품제에 중앙정치의 참여의 길이 막히자 지방세력들은 해외로 눈을 돌려 해상무역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조공(朝貢) 형식의 공무역외 당과 일본, 대만에 민간무역을 하게 되었다. 중국 산동반도나 대운하, 회수유역에 신란인의 거류지인 신라방(新羅坊), 거류민 관할 행정기관인 신라소(新羅所), 거류민의 안전을 기원하는 사원(寺院)이 세워졌고 사원중에는 장보고가 문등현 적산촌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이 가장 유명하였다. 해상무역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사람은 청해진(靑海鎭, 완도)의 장보고(張保皐)였으며 그 외에도 강주(康州, 진주)의 왕봉규(王逢圭), 송악(松岳, 개성)의 작제건(作帝建, 왕건의 조부) 등이 있었다. ⑵ 군진세력의 대두 북진(北鎭, 삼척), 패강진(浿江鎭, 平山) 등 신라의 군진은 변경수비를 위해 육지에 설치했다. 그러나 해상에서 해적들의 활동이 심해지자 청해진(靑海鎭, 완도), 당성진(唐城鎭, 남양), 혈구진(穴口鎭, 강화) 등과 같이 해안요지에도 차례로 군진을 설치하게 되었고 가장 유명한 것이 패강진(浿江鎭)과 청해진(靑海鎭)이다. 북진(北鎭, 삼척)은 태종무열왕 5년 658년, 패강진(浿江鎭, 平山)은 선덕왕 3년 782년, 패강진(浿江鎭)은 선덕왕 3년 782년에 세워진 것으로 예성강(禮成江) 이북과 대동강(大同江) 이남을 광범한 지역을 담당하는 군진이었다. 청해진(靑海鎭)은 흥덕왕 3년 828년에 장보고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다. 당성진(唐城鎭, 남양)은 흥덕왕 4년 829년, 혈구진(穴口鎭, 강화)은 문성왕 6년 844년에 설치되었다. 장보고(張保皐, 弓福, 弓巴) 제42대 흥덕왕 3년 828년 장보고의 청에 따라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에 청해진(淸海鎭, 莞島, 828~851)을 설치하였다. 당에 가서 군인으로 출세하여 해적이 성행하여 신라인을 잡아다가 노비를 매매하는 일에 분개한 그는 본국에 돌아와서 흥덕왕에게 청하여 남해의 요해지인 완도에 청해진을 두고 청해진 대사에 임명되어 사병적 성격의 1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해안지대를 경비하여 해적을 제압하고 당 및 일본과도 활발히 무역을 하여 황해의 해상왕이 되었다. 해상왕 외에도 중앙정치에도 간여하여 김우징(金祐徵)을 도와 44대 민애왕(閔哀王)을 축출하고 45대 신무왕(神武王)에 오르게 하였다. 46대 문성왕(文聖王) 5년 846년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들이는 문제를 계기로 하여 중앙귀족이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암살되고 문성왕 13년 851년 청해진은 폐지되고 그 군대 1만명은 벽골군으로 옮겨 재생이 억제되었다. ⑶ 성주의 자립 지방의 호족이나 진골, 성골, 6두품 출신의 몰락한 중앙귀족, 촌주들은 일정한 지역에 성을 쌓고 성주 또는 장군으로서 칭하면서 실질적으로는 군현의 장관을 대신하는 위치를 차지하고 지방민에게 조세(租稅)와 역역(力役)을 부과하고 농법도 전하면서 촌락민들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게 되어 신라의 중앙정부의 경제력을 잠식하고 있었다.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 약화를 틈탄 지방 호족들이 독자적 세력 형성하고 중앙 정부에 항거하기에 이르렀다. 3. 농민 봉기와 후삼국의 성립 가. 농민의 봉기 지방 성주들의 지방민에게 조세(租稅)와 역역(力役) 부과로 중앙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중앙정부는 주・군에 대하여 조세를 독촉항기에 이르렀고 중앙정부와 지방성주들로부터 이중으로 부담을 지게되어 농민들은 반란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농민반란은 정치의 부패, 지배층의 불법적인 농토 확대, 가혹한 수탈, 부패․무능한 신라 왕실에 대한 불만 고조의 결과로서 반란의 첫 봉화는 진성여왕 3년 889년 사벌주(沙伐州, 상주)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였고 이어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사벌주(沙伐州, 상주)의 원종(元宗)・애노(哀奴)의 난 진성여왕 3년 889년 북원(北原, 원주)의 양길(梁吉) 죽주(竹州, 안성 죽산)의 기훤(箕萱) 완산주(完山主, 전주)의 견훤(甄萱) 철원의 양길의 부하 궁예(弓裔) 891년 죽주(竹州, 죽산)에 웅거한 기훤(箕萱) 밑으로 들어가 892년 양길에게 의탁하여 899년(효공왕 3년) 국원(國原, 충주)을 비롯한 30여 성(城)의 강병(强兵)을 이끈 양길과 회전에서 선제공격으로 양길을 제압하여 이후 충청도 지역은 대부분 궁예의 세력권이 되었고 901년 창업. '삼국사기' 궁예전에는 궁예의 아버지가 신라 제47대 왕 헌안왕(재위 857~860년) 또는 제48대 왕 경문왕(861~875년)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나. 후삼국의 성립 ⑴ 후백제(後百濟)의 건국(900) 견훤(甄萱, 867~936)은 진성여왕 3년 889년 무진주 점령하고 진성여왕 6년 892년 왕을 자칭했으며 효공왕 4년 900년 완산주(전주) 점령하고 자신이 거느린 군사와 전라도 지역의 호족 세력을 토대로 완산주(全州)에서 후백제를 세웠다. 견훤은 군인세력을 배경으로 호족세력과 연합하여 세력을 키워서 전라도와 충청도의 대부분 지역 차지하고 있었다. 견훤은 미륵신앙에 근거한 전제군로서 행세하였다. ⑵ 후고구려(後高句麗)의 건국(901) 일찍이 기훤(箕萱)에 투신한 궁예(弓裔)는 뒤에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고 다시 양길을 타도하고 고구려 부흥을 기치로 효공왕 5년 901년 송악에서 후고구려국을 건설하였다. 이후 국호를 904년 마진(摩震)으로 연호를 무태(武泰), 성책(聖冊)으로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고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 정개(政開)라고 하면서 반신라 정책 강화와 통일 정책을 추진하였다. 광평성, 대룡부, 수춘부 등 관부를 두고 정광을 비롯한 9관등을 설정하여 국가면모를 갖추었다. 궁예는 자신을 미륵불(彌勒佛)이라 하고 아들은 보살(菩薩)이라 하면서 폭군행세를 하다가 신하들에게서 내쫒겨났다. ⑶ 신라의 위축 신라는 후3국의 정립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Ⅲ. 발해(渤海)의 건국과 발전 1. 발해(渤海)의 건국 가. 당나라의 이민족 분열정책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은 요동지방을 안동도호부 관할에 놓고 고구려 유민을 무마하기 위하여 보장왕(寶藏王)을 요동도독 조선군왕에 임명하였으나 반란을 꾀하여 소환하고 연이어 손자 보원(寶元), 아들 보덕(報德)과 덕무(德武)를 파견했으나 점차 독립적인 지위를 확립하여 소고구려국으로 부르게 되었다. 당은 고구려 유민, 거란인, 말갈인을 영주(榮州, 朝陽)으로 강제로 이주시킨뒤 감시하였다. 영주에서 거란족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나. 건국 과정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靺鞨人)은 거란인(契丹人)의 반란을 계기로 대조영(大祚榮)은 영주를 탈출하여 천문령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동모산(東牟山, 돈화)을 근거로 자립하여 698년 진국왕(震國王),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고 후에 발해(渤海)로 고쳤다. 이로서 남부국시대가 되었다. 발해는 2원적 민족구성으로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이었다. 발해는 고구려 계승 의식 차원에서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국호 “고구려국” 사용하였다. 연도 인물 내용 677 보장왕(寶藏王) 조선군왕 임명. 부흥운동. 소환~682년 사망 685 보원(寶元) 보장왕 손자. 태자 복남의 아들. 조선군왕. 부흥운동 686 보원(寶元) 충성군왕. 부흥운동 698 보덕(報德) 조선군왕. 부흥운동 699 덕무(德武) 보장왕의 아들. 안동도독.부흥운동 698 대조영(大祚榮_) 대진(大震). 발해(渤海, 698~926) 류득공의 발해고(渤海考)ᆞ이종휘의 동사(東史)ᆞ정약용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ᆞ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ᆞ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ᆞ서상우의 발해강역고(渤海疆域考)ᆞ홍석주의 발해세가(渤海世家) 등 조선 후기의 역사서들은 발해를 우리 역사로 적극 인식했다. 특히 발해고와 대동지지는 남북국 용어를 사용하였다. 2. 발해의 발전 왕 연호 내용 2대 무왕(大武藝. 719~737) 인안(仁安) 만주와 대부분의 연해주를 차지했다. 당과 신라의 협공을 막기 위해 일본과 돌궐과 통교했다. 아우 대문예(大門藝), 사촌동생 대일하(大壹夏), 외숙 임아상(任雅相)을 시켜 흑수말갈(黑水靺鞨. 흑수라고 불렀던 헤이룽 강(黑龍江)이 동류하여 쑹화 강(松花江)과 만나는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을 치는 한편 14년 732년 장문휴(張文休)를 시켜 산등을 공격하여 등주자사 위준(韋俊)를 죽였다. 당은 33대 신라 성덕왕때 733년 발해의 반역자 대문예(大門藝, 대조영의 차남)과 김사란(金思蘭)을 시켜 발해 남부를 공격했다.일본에 사신으로 영원장군 낭장 고인의(高仁義)외 24명을 외교문서와 함께 보냈다. 3대 문왕(大欽茂. 737~793) 대흥(大興.737), 보력(寶력.744) 통치체제 3성 6부를 정비했다. 당과 화친을 맺었다. 국립대학격인 주자감(冑子監)을 설치했다. 수도를 동모산에서 중경, 상경, 동경으로 옮겼다. 신라와 상설교툥로(신라도)를 개통했다. 많은 유학생을 당에 보내 빈공과에 합격했다. 758년 보덕장군 양승경(陽承慶)과 귀덕장군 양태사(陽太師)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안록산난(安祿山亂756~757. 연국. 연호 성무)을 계기로 소고구려국에도 힘을 뻗어 요동까지 지배하였다. 6대 성왕(成宗, 大華興 , 793~794) 중흥(中興) 수도를 동경에서 상경으로 옮겼다. 10대 선왕(宣王, 大仁秀. 818~830) 건흥(建興) 말갈을 복속시켜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했다. 최대의 판도(동 沿海州, 서 遼河, 남 咸南, 북 黑龍江)를 이룩하여 5경, 15부, 62주 등 지방제도를 정비했다.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리게 된 시기이다. 15대 대인선(大諲譔, 907~926) 926년 거란에 멸망함 3. 발해의 제도 발해는 중앙에 선조성(宣詔省, 門下省), 중대성(中臺省, 中書省), 정당성(政堂省, 尙書省) 3성과 충부(忠部. 吏部), 인부(仁部. 戶部), 의부(義部. 禮部), 지부(智部. 兵部), 예부(禮部. 刑部), 신부(信部. 工部) 6부제로 하여 정당성의 장관 대내상(대내상)이 선조성 장관 좌상과 중대성 장관 우상으로 하는 제도였다. 정당성(政堂省, 尙書省) 대내상 충부(忠部. 吏部) 인부(仁部. 戶部) 의부(義部. 禮部) 지부(智部. 兵部) 예부(禮部. 刑部) 신부(信部. 工部) 선조성(宣詔省, 門下省) 좌상 중대성(中臺省, 中書省) 우상 지방은 국도인 상경(東京城, 용천부)을 중심으로 중경(中京), 동경(東京), 서경(西京), 남경(南京)의 5경이 있었으며 전국을 15부(府), 62주(州). 현(縣)으로 정비하였다. 15府(都督) 62州(刺史) 縣(縣丞) 刺使史 5京 5경 상경용천부(東京城) 黑龍江城 永安縣 牧丹江 渤海鎭 : 당 장안성 영향 동경용원부(琿春) 중경현덕부(敦化, 東牟山) 서경압록부(臨江) 남경남해부(北靑) 군사제도는 중앙군으로 10위가 있었으며 각 지방에 지방군이 편성되어 있었다. 4. 발해의 멸망 가. 발해 이질적인 백성 구성 발해인은 소수의 고구려인과 다수의 말갈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유력 귀족 가운데 고구려 유민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말갈인들의 거란의 침입으로 발해의 지배력이 약해지자 발해에서 자주 이탈했고 거란의 침입에 전 백성을 동원하여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나. 내분 격화 900년 무렵부터 귀족들의 권력다툼이 심화되었다. 다. 거란의 침입 92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의 침입으로 보름만에 망했다. 고구려계 지배층은 고려에 귀화하였다. 왕자 대광현(大光顯)은 고려에서 왕계(王繼)라는 성을 주어 동족의식을 심어주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라. 부흥운동 발해 유민들은 약 200년간 부흥운동을 전개했지만 결국은 실패로 끝났다. 처음에는 대씨(大氏)가 압록부(鴨綠府, 臨江) 일대를 중심으로 후발해(後渤海, 926년? ~ 938년?)를 나중에는 열씨(烈氏)가 정안국(定安國, 938~938)을 세웠으나 실패했다. 열만화(烈萬華, ?~976년?, 재위: 935년 또는 938년?~976년?)는 발해의 왕족이자 정안국의 첫 번째 왕으로서 935년을 전후로 해서 정변을 일으켜, 대씨 정권이었던 후발해를 무너뜨리고 오씨 정권을 세운 뒤 국호를 정안국으로 개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970년에 정안국 국왕 열만화라는 이름으로 송에 서한과 공물을 전했다. 그 뒤는 불명확하며 그 전에 죽었거나 내분으로 자신이 암살을 당해 열씨 정권이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976년을 전후해서 자신의 찬탈을 도와준 오제현(烏齊顯)의 후손인 오현명(烏玄明, ? ~ 986년 재위: 976년 ~986년)이 정안국에서 정변을 일으켜 두 번째 왕으로 등극했다. ④ 왕권의 전제화 독자적 연호 사용 : 인안, 대흥, 건흥 -중국과 대등함, 왕권의 강대함 표현 관료 조직 정비 : 당의 3성 6부제 도입 독자적 운영, 중정대 왕위 계승의 장자 상속제 확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