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 교수와 강단사학자 여러분!
장수태왕은 요양평양으로 천도했지
-지금의 북한평양성(장안성)으로 천도하지 않았답니다..
장안성(북한 평양성)으로 천도한 왕은 평원왕입니다/[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평원왕]二十八年 장안성으로 천도하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거란의 요나라가 동경으로 삼은 요양입니다..[요사]
[遼史地理志] 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 東京道"북위 태무제(A.D 423-452년)의 사자가 (고구려왕 장수태왕이) 기거하는 평양성에 왔는데, 이 곳은 요의 동경(요양)이다. 당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이 곳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元魏太武遣使至其所居平壤城遼東京本此 唐高宗平高麗 於此置安東都護府」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설치한 안동도호부가 지금의 북한 평양이 아니라 요양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그런데 윤명철 교수를 포함한 강단사학자들은 왜 장수왕이 북한 평양성으로 천도했다고 국민에게 세뇌주입을 시키는 것인가? 밥 먹고 역사연구하면서 왜 문헌비교연구를 하지 않는 것인가?
장수왕이 고국원왕 이후 도읍인 국내성을 떠나 427년 새로 정착한 평양은 [요사/ 지리지]에 기술하고 있는 요나라 시대의 동경도(東京道)에 대한 기록 등을 볼때 오늘날의 북한 평양일 수 없으며, 요녕성 요양이다.
이 요사 지리지에서는 지금의 요양 일대인 동경도가 본래 조선(고조선) 땅이며,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고구려왕 장수왕이) 거주하고 있는 요양 평양성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3자인 북위 입장에서 기술한 내용이 정확히 맞는 것이다.
요양에 도읍한 고구려가 결국 지금의 북한평양으로 옮긴 것은 [삼국사기] 기록 등을 존중할 때 제25대 평원왕(재위 559-590) 시기다다.
북경에 사신을 다녀온 연암 박지원이 "평양은 원래 한 곳이 아닌데 모두 조선 땅 평양 하나만을 생각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음에도, 식민지시대 일본학자들이 고착화해 놓은 학설에서 우리 학계가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
고로 장수태왕 14년에 천도한 평양성은 현재의 북한평양이 아니라 요양(평양)이다. 장수태왕은 광개토태왕 때 백제로부터 빼앗은 요서지방(遼西地方)을 지키기 위하여 요양으로 천도하기 2년 전인 A.D 425년에 북위(北魏)와 동맹을 맺었고, 북위와 전쟁 가능성이 없어지자, 수도를 요양으로 옮겼다.
이 요양의 평양성은 문자태왕, 안원태왕, 양원태왕, 평원태왕 때까지 사용되었다가 평원태왕 때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노리자,다시 북한의 평양성(장안성)으로 천도하여 고구려의 최후와 함께 했다.
[한단고기-고구려국본기]"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 산월 좌월이있었다. 문자제(문자태왕)의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홍콩)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를 삼았다. 이 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의 진평 등의 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장수태왕은 북위왕에게 국서를 보내 북위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정벌하자는 개로왕에 분노하여 한성백제를 초토화시키고 개로왕을 참살하였다. 그리고 남진하여 충북 단양에 중원고구려비를 세우고 한반도지역의 패권을 장악하였으며, 장수태왕의 손자인 문자태왕 시기에는 중국동해안 지역인 서백제 지역을 차지하여 수.당이 중국을 통일이전까지 그야말로 무적 고구려 천하를 실현하였다./윤복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