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장전리 155
서무터 공소는 본래 성주군에 속했으나 1906년에 지례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김천군에 속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곳은 수도산(1316m)과 형제봉 사이의 마을로 긴 밭이 있었으므로 진밭 또는 장전이라 했다. 장전리는 마고실, 봉답, 청청이 서무기를 통틀어 말하는데 마구실(마고실)은 장전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마고 할머니가 성만재에서 쉬었다 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편 서무터는 장전 동쪽에 있는 부락이다. 첩첩 산중의 마을로 옛날부터 뒨들목과 돌목재(석학령)를 넘어 성주군 가천면 신계동 독산과 성주군 가천면 용사동의 신자들과 서로 왕래하였다.
장전리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병인박해가 끝날 무렵인 1873년 경기도 광주군 텃골에 살던 안주원 공사가 가정이 전라도 무주군 설천면 산막터를 거쳐 이곳에 정착해서 살기 시작해서부터 이며 그때부터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그 가정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1873년 경 저녁을 먹다가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아들 4형제(종화, 종남, 종학, 종성)을 데리고 뒷문 대밭으로 도망쳐 3개월 동안 정처없이 걸어 전북 무주 설천의 산막터에 도착해서 얼마동안 있다가 다시 김천 대덕 옹기굴을 거쳐 이곳 증산면 장전리의 마구실 동남쪽 서무터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그 무렵 증산면 마당 평전의 띠밭에는 역시 피난 온 심씨 일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리하여 병인박해가 끝난 후 1882년 말부터 당시 강원도 부흥골에 있으면서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던 로베르 김보록 신부가 이곳 마구실 공소에 와서 성사 집행을 했다.
이 공소는 1895년 가실 본당이 설립됨에 따라 가실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으며, 1901년 김천 본당이 설립됨으로 김천 본당 관할이 되었다. 1910년 한일 합방 이후 신자들이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이주해 갔으며, 1945년 8.15 해방 후에도 지례 등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간 신자 가정이 많았다.
한편 안씨 문중에는 전주교구에 안병채의 두 아들이 사제가 되었고 딸은 수녀원에 입회하였다고 한다.
현재 공소에서는 매주 주일 오전 7시 30분에 공소 예절을 하고 있으며, 월 1회 지례 본당 주임신부가 공소에 와서 공소 미사를 집전한다고 한다.
서무터공소는 오토캠핑장에서 차로 약 10분 거리에 있다.
*인용문헌 : '대구대교구 옛 공소의 어제와 오늘'
공소로 들어가는 길... 여기서 부터 1.3Km를 가면 공소가 있다!
공소 마당의 성모상
공소 전경
공소 내부
공소 제대
고해소 겸 제의방
공소로 들어가는 길 건너편에서 바라본 장전리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