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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강공 은봉 안방준 신도비 [1]
- 과연 누가 지었을까? -
글 사진 | 효암 안재홍
죽산안씨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이 죽은 뒤,
살아서 행한 족적을 적는 행장(行狀)은 유계(兪棨, 1607-1664)가 지었다.
그리고 윤선거(尹宣擧, 1610-1669)는 묘지(墓誌)을 지었고,
후손들이 묘지명(墓誌銘)을 만들어 무덤 옆에 깊이 묻었으니,
이는 후대의 변조나 위조를 막으려함이었다.
세월이 2백30여년이 지나서 조선 말, 안방준 후손들이
송시열의 9세손이 되는 송병선(宋秉璿 1826~1905)을 찾아가,
신도비(神道碑)를 세우려고 하니 비명(碑銘)을 지어달라고 했고,
송병선은 거절하지 못하고 비문을 지었다.
안방준(安邦俊)의 시호 문강(文康)은 1821(辛巳)년 내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송병선이 지은 비문에는 ‘순조 계유(癸酉)’라고 되어 있다.
'계유(癸酉)년'은 1813년(순조13년)이다.
어떻게 된 일인가.
안방준이 시호를 받은 뒤인 1884년 이후에
송병선(宋秉璿 1826~1905)은 '신도비명 병서'를 지었을 것이다.
왜정이 끝나고, 1945년에 광복이 되고, 대한민국 1956년,
안방준 후손들은 또 다시 '문강공 은봉 안방준 신도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비문은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지었다고 한다.
송시열은 앞의 신도비명을 지은 송병선의 9대조가 된다.
비문을 지었다면 안방준이 죽은 뒤고 송시열이 죽기 전인 1680년쯤이었겠다.
비문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안방준 죽은지 300여년이 지나서
장문(長文)의 신도비문을 커다란 돌덩이에 새겨 무덤에 세웠다 !
과연 이 비문을 우암 송시열이 지었겠는가 ?
oh,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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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강공 은봉 안선생 신도비
文康公隱峰安先生神道碑
전남 화순 금석문 / 남면 / 신도비
[번역문] 번역자 모름
국조(國朝)의 문학은 삼고(三古:하, 은 주)의 도를 숭상하였으나, 절의(節義)와 도학은 사람마다 달라 차등이 있었다. 이를 겸비하고 치우치지 않은 이는 얼마되지 않았다. 하늘이 사문(斯文)을 도와 우산(牛山) 안선생(安先生)을 종생(鍾生)하였으니 거의 절의와 도학이 완비하다 하겠다.
선생의 휘는 방준(邦俊)이고 자는 사언(士彦)이며 죽산인(竹山人)이다. 죽산 안씨는 승국(勝國:고려를 말함) 때부터 강직하기로 이름이 났다. 고려 말의 죽성군(竹城君) 원형(元衡)과 쌍청당(雙淸堂) 면(勉)은 선생의 10대조와 9대조인데, 그후부터 사대부(士大夫)가 끊이지 않았고 문학과 은행검을 숭상하여 왔다.
증조는 학유(學諭) 휘 수륜(秀崙)이고 조부는 목사(牧使) 휘 축(○)인데 중.명조(中明朝:중종조와 명종조)에 당후(堂後:승정원의 별칭).미원(薇院:사간원의 별칭). 오대(烏臺:사헌부의 별칭)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과 한가로이 노닐며 스스로 만족함으로써 당시에 호남삼고(湖南三高)라 일컬었다. 호는 둔암(鈍庵)이다. 둔암공의 장자 휘 중관(重寬)은 첨추(僉樞)를 지냈는데 성실하고 순진하여 천진(天眞)을 잃지 않았고, 계자(季子) 휘 중돈(重敦)은 재주와 학식을 갖추어 사마시(司馬試:생원과 진사시험)에 다 합격하고 성균관의 제술시(製述試)에 세 차례 장원하였으며 동당직부시(東堂直赴試)를 보아 급제하였는데 방방(放榜)하기 전에 죽었다. 선생은 첨추공의 차자(次子)로서 사마공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양모 남원 양씨(南原梁氏)는 군수 윤순(允純)의 딸이고, 생모 진원 박씨(珍原朴氏)는 이경(而儆)의 딸인데 모두 부덕(婦德)을 갖추었다.
만력(萬曆: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계유년(선조6년, 서기 1573년) 11월 20일 병신(丙申)에 선생을 낳으셨는데, 분만할 무렵에 꿈에 신인(神人)이 세 번에 걸쳐 그 조짐을 물었으므로 삼문(三問)이라 이름 하였다. 모습이 기위(奇偉)하였고 눈빛이 광채가 나서 어두운 밤에도 별빛과 등불처럼 반짝였다. 4~5세 때부터 이미 글을 짓고 천품이 맑고 영특하여 성인(成人)처럼 원대한 기국(器局)이 있었다. 11세 때 죽천(竹川:박광전의 호) 난계(蘭溪:박종정의 호) 양현(兩賢) 문하에 글 뜻을 탐구하여 날로 진보하였다. 시를 지어 뜻을 말하여 사문(斯文)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겠다는 선생의 비점(批點)이 있었고, 전(傳)을 지어 임금에게 알려져 충절을 장려한다는 칭찬을 받았다. 16세 때에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학문에 힘써 성리(性理)에 몰두하고 성정(誠正:성의<誠意>.정심(正心>)에 마음을 기울였다. 약관(弱冠)에 우계(牛溪) 성선생(成先生)의 문하에 집지(執贄)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사심을 이기고 바로잡아 다스리되, 반드시 효제(孝悌).충신(忠信).겸손(謙遜).졸눌(拙訥)로 바탕을 삼았으며, 또 주문(朱門:주자의 학법(學法)을 서재에 새겨두고 그대로 지켰다. 임진년(선조 25년 서기 1592)에 죽천 박공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때 나이는 20세였다. 군중(軍中)의 품의할 일로 공산(公山)으로 체찰사(體察使) 정상공철(鄭相公澈)을 찾아갔을 때 기무(機務)를 논란함이 모두 타당하므로 송강(松江)이 크게 탄복하였다. 정유년(선조30년 서기 1597)에 노친(老親)을 모시고 피난길에 나섰다가 뜻밖에 도중에 적진을 만나 일행 수십 인의 적과 접전하여 적장을 활로 쏘아 죽이자 나머지 적들이 패주(敗走)하니, 일행이 덕분에 무사하였다. 무술년(선조 31년 서기 1598)에 우계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1년간 의복(義服)을 입었다. 정인홍(鄭仁弘)의 모함이 있는 뒤에는 인사(人事)를 끊고 오직 은둔하기로 뜻을 가졌다. 신축년(선조34년 서기 1601)에 모친상을 당하고 상기(喪期)를 마친 이듬해 갑진년(선조37년 서기 1604)에 이어 첨추공의 상을 당하였다. 복제(服制)와 절문(節文:예문)을 한결같이 「가례(家禮)」대로 따랐다. 신해년(광해군 3년 서기 1611)에 낙산(駱山) 옛터로 돌아왔는데 함께 교유한 이들은 다 덕망이 있는 선배들이었다. 이때 사설(邪說)이 득세하여 세상이 어지러웠는데 적신(賊臣) 이첨(爾瞻)이 선생의 행의(行誼:품행과 도의)를 듣고 기어이 친교를 맺고자 하여, 스승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남대(南臺:학덕이 뛰어나 과거를 거치지 않고 사헌부대관으로 천거된 자)의 길을 열어주겠다는 설로 한찬남(韓纘男)을 통하여 두 번이나 찾아갔으나 모두 피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마침내 남쪽으로 돌아갈 뜻을 정하니, 식자(識者)들은 그 뜻을 높이 사 월사(月沙) 이공정구(李公廷龜)와 창랑(滄浪) 성공문준(成公文濬)등 여러 사람이 작별할 때 시를 주어 그 뜻을 말하였다. 갑인년(광해군 6년 서기 1614)에 우산(牛山)에 거처를 택하니 이는 그곳의 산수가 청광(淸曠)하고 세상과 조금 떨어져 있음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덕성(德性)을 함양하는 것으로 스스로 즐기고, 도를 지키기를 더욱 절실히 하였다. 계해년(인조1년 서기1623)에 인조(仁祖)가 반정했을 때 대사마(大司馬) 김류(金○)에게 글을 보내 시무(時務)를 논하면서, 당론(黨論)을 버리고 인재를 수용하며 공(公)을 앞세우고 사(私)를 뒤로 하며 뜻하지 않는 재난에 대한 대비를 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김류가 받아들였으나 이를 쓰지 못하였다. 갑자년(인조2년 서기1624) 정월에 조정의 의논이 초창기에는 사표(師表)를 특별히 선임해야 한다 하고 맨 먼저 선생을 천거하여 교관(敎官)으로 삼았으나 선생은 병으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고, 8월에 다시 사포서(司圃署) 별제(別提)를 제수하였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을축년(인조3년 서기1625)에 추탄(楸灘) 오상공윤겸(吳相公允謙)이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말로(未路:벼슬길을 말함)에 너나없이 분주함이 풍습이 되었는데, 미련없이 떠난 이는 오직 안모(安某) 한 사람일 뿐이다'하니, 인조가 '이 사람은 내가 이미 들어 알고 있다. 경들이 우선 불러 서용하라'하여 이 해에 다시 사포서 별제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8월에 오수찰방(獒樹察訪)에 제수되니 선생은 '여러 번 은소(恩召)를 받고 한 번도 숙배(肅拜)하지 않아 예로 보아 미안하다'하고 병든 몸으로 역참(驛站)에 부임한지 10여 일 만에 도로 우산(牛山)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는 한 번도 도성(都城)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이 당시 한공교(韓公嶠)가 선생의 고풍(高風)을 사모하여 말하기를 '노형이 우산을 저버리지 않아 운연(雲烟)을 보내 이문(移文)을 새겼다는 조소[운연(雲烟)을...조소:남제(南齊)의 공치규(孔稚珪)가 지은 북산이문(北山移文)에 "종산(鍾山)의 영령(英靈)과 초당(草堂)의 신명(神明)이 역로(驛路)에 운연을 보내 이문(移文)을 산정(山庭)에 새겼다...."에서 나온 것으로, 당시 은사(隱士)로 자처하던 주옹(周○)이 벼슬길에 나간 것을 조소하는 뜻임. 여기서는 선생이 세상에 나가지 않은 것을 이름.]가 없으니 기산(箕山).영수(潁水)[기산(箕山) 영수(潁水):중국 상고(上古)의 은자(隱者) 허유(許由)가 은거하던 곳, 선생이 은거하던 우산(牛山)에 비유한 것임.]가 함께 빛난다'하였다. 정묘년(인조5년 서기1627) 봄에 오랑캐 금(金)나라 군대가 침범했을 때 선생은 의병을 일으켜 전지(戰地)로 향하였는데 사계(沙溪) 김선생(金先生)도 역시 호소사(號召使)로서 먼저 선생을 조정에 아뢰어 의병장으로 삼았다. 당시에 완평(完平) 이상공원익(李相公元翼)이 완산분조(完山分朝)에서 영무군사(領撫軍司)로 있으면서, 선생에게 계책을 물어왔다. 선생이 하나하나 지적하여 설명하니 완평이 탄복하여 말하기를 '바로 지금 사정에 알맞는 계책이다. 반드시 조정에 아뢰어 등용하게 하겠다'하고 이조참의(吏曹參議) 이성구(李聖求)에게 붓을 들어 기록하게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적이 물러가자 행조(行朝)가 의병을 해산하도록 명하니 선생이 우산으로 돌아왔다. 우리 선친(先親)께서 이 무렵에 비로소 선생을 알게 되어 우의가 매우 두터웠는데, 자주 덕의(德義)의 훌륭함과 의논의 정대(正大)함을 일컬었으므로, 나는 비로소 대인군자(大人君子)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택당(澤堂) 이공식(李公植)도 선생의 절의에 감복하여 실로 모시고 배우고픈 염원이 있었으며 항상 천하의 인걸이라고 일컬었다. 신미년(인조9년 서기1631)에 백강(白江) 이상공경여(李相公敬輿)가 전라도 관찰사로 왔을 때 사림의 공론으로 선생의 의행(義行)을 조정에 자세히 아뢰어 제원찰방(濟源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또 윤팔송황(尹八松煌)과 조포저익(趙浦渚翼)이 선생은 기절(氣節)이 높고 강하여 직간(直諫)으로 조정의 잘못을 시정할 수 있다고 천거하였다. 그 당시 관학(館學) 유생들이 율곡. 우계 두 선생을 문묘(文廟)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는데, 정의를 해치는 일단의 무리가 또한 투소(投疏)하여 두 선생을 모함하고 비방하였다. 병자년(인조14년 서기1636)에 선생은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변무(辨誣)하였는데 사실의 내력을 자세히 열거하여 빠짐없이 분석하고 명백하게 밝히니 세상 사람은 이를 백대의 공안(公案)이라 하였다. 이 때 호적(胡賊)이 크게 밀어닥쳐 비답을 내리지 못하고 주상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몽진하였다. 선생은 또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함)하기 위해 행군하여 장성(長城)을 지나면서 수령 유시영(柳時榮)에게 '만약 강화도(江都)의 임무를 그럴만한 사람에게 맡기지 못하면 반드시 지킬 수 없을 것이다'하고 목이메어 눈물을 흘렸는데 나중에 과연 그 말과 같이 되었다. 여산(礪山)에 이르러 남한산성이 풀렸음을 듣고 돌아왔다. 연신(筵臣)이 선생의 덕행을 천거하여 특별히 참상관(參上官)으로 올려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를 제수하니 선생은 '큰 난리를 겪고난 뒤에 이와 같은 은명(恩命)이 있으니 한 번 사은함이 도리이다'하고 길을 떠났으나 도중에서 갑자기 병이 발생하여 돌아왔다. 마침내 소를 올려 화친의 잘못을 깊이 배척하고 화를 초래하게 된 원인을 철저히 논하여 말하기를 '중국의 무거운 은의(恩義)를 들어 「춘추(春秋)」의 존주(尊周) 의리를 밝혀야 할 것인데도 오늘날 의리를 버리며 은혜를 잊고 병력을 도와 배반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계신 선왕(先王)을 뵐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신하와 백성들에게 윗사람을 사랑하고 어른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권고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몸소 남한산성에서 치욕을 겪으시고도 지금까지 하나도 대처할 방안을 세우지 않으셨으니 수백년 간 큰 어려움을 겪고 이룩해 온 왕업(王業)을 가만히 앉아 망쳐놓으시렵니까? 신은 항상 이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무너지고 쓸개가 찢어지는 듯하며 성난 머리털이 솟구쳐 눈물을 뿌리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적을 방어할 방법은 오직 상벌(賞罰)을 밝게 하고 기강을 세우는 데 있음에도, 나라의 중책을 지고 일을 그르친 신하와 머뭇거리며 보고만 있던 장수들은 여전히 목숨을 보전하여 의기가 태연하고, 벌을 받은 사람은 오직 지위 낮은 장교 몇 명일 뿐이며, 뚜렷이 절의를 세우고 죽은 김상용(金尙容) 같은 자는 아직도 포상의 은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상벌하심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기강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전하의 신하 중에 오직 김상헌(金尙憲) . 정온(鄭蘊). 유백증(兪伯曾) 등 몇 사람은 그 강상(綱常)을 붙잡아 세운 의지와 강개하고 직절(直切)한 말이 다른 용렬한 신하들과 비교될 바가 아닙니다. 국가가 지금까지 유지된 것은 모두 이들 몇 사람의 힘인데도 헐뜯는 자들은 상헌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렸다고 하여 마음내키는 대로 공격하고 조금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한낱 실오라기같은 나라의 운명이 장차 이들의 손에서 무너지게 되었으니 오늘날 국사는 그야말로 위태롭습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신의 말을 받아들여 상벌을 밝히고 기강을 세워 나라를 다시 일으켜 회복할 근본으로 삼으신다면 비록 지금 당장에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을 공략하여 적의 소굴을 소탕하지는 못할지라도 아마도 대의를 온 세상에 밝히고 길이 후세에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상소가 들어갔으나 끝내 유중(留中:보류하고 처리하지 않음)되었다. 원평군(原平君) 원두표(元斗杓)는 말하기를 '비록 한때에 시행되지는 못하였으나 만고의 강상(綱常)을 붙잡아 세울 만하니 세도(世道)에 어찌 작은 보탬이라 할 것인가? 하였다.갑신년(인조22년 서기1644)에 형조좌랑(刑曹佐郞). 종묘서령(宗廟署令)과 익위사익위(翊衛司翊衛)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며, 병술년(인조24년 서기1646)에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진달하였는 바 강개 직절하여 조금도 기외하지 않았는데 결국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기축년(효종즉위년 서기1649)에 효종이 마음을 가다듬어 나라를 잘 다스려보고자 할 때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제수하였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포저(浦渚) 조상국(趙相國)이 어전에서 선생의 학식을 진달하면서 아뢰기를 '이 사람은 고령인데다 병이 많아 비록 현직을 수행하지는 못할 것이나 서울로 불러와 온 나라 사람들의 사표(師表)로 삼으소서'하니 효종은 '내가 들어서 안지 오래이다. 다만 너무 고령이어서 상경하지 못할까 염려된다'하고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제수하니 상소하여 사양하고 아울러 공도(公道)를 넓힐 것을 진달하였다. 효종은 소지(召旨)를 또 본도 방백(方伯)에게 내리고 이어 전유(傳諭)하여 일으켜 보내라는 교지를 내리는 등 돌보는 뜻이 융중하였는데, 사직소를 재차 올리니 효종은 진달한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마지못해 사직의 청을 허락하였다. 신묘년(효종2년 서기1651)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제수되자 상소하여 사양하니 효종은 새봄에 일기가 따뜻해지거든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재차 늙고 병들어 나가기 어려운 형편을 밝히고, 아울러 역적이 이미 토벌되었으니 별다른 우려는 없으나 인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실로 급무(急務)라고 말하니 효종은 '그대의 진달한 말은 참으로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지극한 정성의 발로이니 신(紳:허리에 매는 큰 띠)에 써두고 체념(體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가 노병(老病)으로 인하여 올라오지 못하니 참으로 한탄스럽지만, 이제 짐짓 허락하노라'하였다. 임진년(효종3년 서기1652)에 본도의 어사 민정중(閔鼎重)이 조정에 돌아가 선생이 대질(大○:80세를 말함)에 이르렀음을 아뢰니, 효종은 '보통 사람이라도 모두 은례(恩例)가 있으니 이 사람에게 특별한 은전이 없어서는 안된다'하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비단과 은을 하사하고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제수하게 하자, 상소하여 간곡한 정을 진달하니 효종은 마지 못해 그 청을 허락하여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또 「삼강행실(三綱行實)」과 「고문백선(古文百選」등의 책을 하사하였다. 갑오년(효종5년 서기1654) 11월 13일 기해(己亥)에 세상을 떠나니 82세였다.
돌아가기 하루 전에도 정신과 행동이 지난날과 다름이 없고, 인사(人事)를 응대하여 피곤한 기색이 보이지 않아, 문생(門生) 몇 사람이 촛불을 밝히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튿날 날이 밝자 세수한 다음 새 옷으로 갈아입고 베개에 기대어 누워 그대로 세상을 마쳤다. 이는 본디 타고난 정신이 화락하고 단아하였기 때문에 의당 그러할 것이긴 하지만 이 또한 덕을 함양하고 도를 쌓은 공부가 독실하고 강건하여 혈기(血氣)와 함께 승화하지 않은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부음(訃音)이 들리자 효종은 놀라고 슬퍼하며 특별히 치부(致賻)하였다.
을미년(효종6년 서기1655) 2월 병신(丙申)에 보성(寶城) 죽방(竹坊) 자좌(子坐:남향)에 장사하였다. 숙종 갑신년(숙종30년 서기1704)에 동복현(同福縣) 갈학산(渴鶴山) 병좌(丙坐:북향)에 다시 옮겼다. 병신년(효종7년 서기1656)에 도내 사림이 의논하여 능주(綾州)의 도산(道山), 보성의 대계(大溪), 동복(同福)의 도원(道源)에 서원(書院)을 세워 향사하였다. 무술년(효종9년 서기1658)에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이 선생의 도학과 사림이 서원을 건립하여 제향하게 된 사유를 아뢰고 '조정에서도 마땅히 증직하여 포상해야 할 것입니다'하니 주상이 "해조에 명하여 이조참판을 증직하라"하였다.
선생은 천성이 청수 정직하고 흉중(胸中)이 맑고 깨끗하여 사람들이 추월빙호(秋月氷壺)라 하였다. 뜻을 세워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스스로 충효의 절개를 힘쓰고 의리의 분별을 분명히 하였으며, 성정격치(誠正格致:성의<誠意>.정심.격물<格物>.치지)의 공부를 쌓아 일상생활의 모든 일에 엄숙하였으며, 사기(辭氣:언어)가 안정되고 신청(神聽:정신)은 단정하며 지행(知行)이 일치하고 표리가 간격이 없으므로 대중지정(大中至正)의 법도에 드높이 섰다.「대학(大學)」에 대하여 특히 공부를 깊이 하였으니 되풀이해가며 연구하여 그 취지를 궁리하였다. 이어 뜻을 풀이하여 한 권의 책을 저술하였는데 체용(體用)이 갖추어지고 조리가 정연하였다. 근래 선비들이 논한 이기선후(理氣先後)와 사단칠정(四端七情) 등 설에 있어서는 같고 다름과 맞고 틀림을 모두 율곡의 설로 절충하였는데 분석이 정밀하여 미묘하고 숨겨진 이치를 드러내고 파헤친 공력이 많이 있었으므로 우계 선생이 매우 탄복하여 정중히 대하고, 또 구방심(求放心) 세 글자를 항상 마음에 두어 실행하도록 하였으므로, 도(道)를 남방(南方)에서 구현하라는 부탁[宋의 楊時가 벼슬을 그만두고 程顥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그가 歸鄕할 때 顥가 전송하면서 「之道南矣」라 했던 故事(出典:宗史, 楊時傳.]을 마침내 이어 받음이니, 심의(深衣)와 심경(心經)의 전수가 이 사람에게 있음이로다. 고금(古今)의 전례(典禮)를 고증하였는데 사계선생(沙溪先生)이 그 정밀하고 해박함을 인정하였다. 추(鄒:「맹자」).노(魯:「논어(論語>」).염(濂:주돈이.낙(洛:정호(程顥>.정이)의 글에 있어서도 깊이 사색하지 않음이 없었다. 항상 독행(篤行:독실히 행함) 한 가지를 사람들에게 권고하여, '대체로 선비가 글을 읽고 학문을 강론하는 것은 그 덕을 쌓자는 의도인데 지금 학자들은 평생을 바쳐 학문을 강론하고 만 권의 글을 다 읽어도 하루도 몸소 행함이 없으며 한 글자도 가슴에 새겨두는 일이 없으니 이는 마치 아침 내내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서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것과 같다'하였다.
일찍이 오륜시(五倫詩) 한 편을 지어 스스로 조심하고 후생에게 훈계를 전하였으니 선생의 식견과 지취를 여기서 알 수 있다. 도리를 훤히 꿰뚫어 의심한 것이 없었으나 도를 안다고 자처한 적이 없고 항상 부족한 사람처럼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절의는 학문 가운데 일인데 지금 사람들은 구분하여 별개의 일로 여기니 개탄할 일이다. 대체로 성인이 도를 닦고 가르침을 세우는 것은 삼강오륜일 따름인데 이른바 절의는 이를 붙잡아 세우는 것이다. 후세에 의리가 밝지 못하여 마침내 도학과 절의를 둘로 나누었으니 나는 절의를 버리고 도학을 하는 일은 보지 못했다'하였다. 그러므로 저술한 모든 찬록(纂錄)이 다 충효를 말하고 윤기를 밝히고 사우(師友)를 존경하고 사정(邪正)을 분별하고 도학을 높이고 억울함을 밝히고 절의를 장려하는 등의 글이다. 그 뜻은 대개 절의가 학문 가운데 일임을 밝힌 것으로, 사실을 고증하고 말을 살피는 것에만 그친 것은 아니다. 세상에서 절의로만 선생을 평가하는 자는 선생을 깊이 알지 못한다고 하겠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아직 어렸을 때 박부인(朴夫人)이 염질(染疾)로 사망하자 빈염(殯殮)한 뒤에 첨추공이 가족을 데리고 인근 마을로 옯겼는 바, 이는 여기에 전염될까 우려해서였는데, 선생이 밤을 틈타 남모르게 빈소에 찾아가 마음껏 슬퍼하기를 빈염(殯殮)할 때와 다름없이 하였다. 첨추공은 생명에 지장이 있을까 염려하여 몸소 가서 엄중히 꾸중하고 데리고 왔다. 성년에 이르자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여 그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는데, 깊은 사랑과 화기에 찬 얼굴은 애써 힘쓰지 아니하고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인 듯하였다. 그리하여 그 정성에 대한 감응을 두터이 받았으며, 부모의 상을 당하여 예를 다하고 매우 애통해 하되 고달파 하지 않았으며, 6년을 거상하면서 애도함을 하루같이 하였다. 친척과 벗에게는 화목하고 사랑하며 의리를 중히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매우 여유가 있었다.
평생에 포은( 圃隱:정몽주의 호).중봉(重峯:의 호) 두 선생을 존모(尊慕)하여 세상에 뛰어난 진유(眞儒)라 하고 그 호를 합쳐 은봉(隱峯)이라 당호(堂號)를 붙이고 경모(景慕)하였다. 중봉의 언행을 수집하여 「항의신편(抗義新編)」을 만들고, 아울러 선생의 여덟가지 유적을 그림으로 그려 게양(揭揚)하였다. 또 다른 사람에게 팔려 넘어간 유택(遺宅)을 사들여 본손(本孫)에게 돌려주고 후일에 비를 세울 곳을 마련하였으니, 그 세상에 보기 드문 상감(相感)과 탁월한 식견, 높은 의리는 보통 사람들보다 월등하였다. 세리(勢利)와 분화(紛華)에 있어서는 오물을 보듯이 하고, 사람을 대하고 교제할 때는 한결같이 너그러움과 화평으로써 하고, 관청 사람과 말할 때는 반드시 공정과 성실로 하고, 후생과 말할 때는 반드시 효제에 따라 하였다.
남의 선(善)을 보면 자신이 지닌 것처럼 기뻐하고 남의 일을 들으면 교화시킬 것을 생각하였다. 참으로 대악부도(大惡不道)한 자가 아니면 반드시 의리고 깨우쳐서 허물을 고치게 하였다. 휴휴(休休:너그러운 모양)한 큰 도량과 둔둔(○○:지성스러운 모습)한 깊은 인(仁)은 모든 것을 너그럽게 포용하여 남과 다툼이 없었으나, 진퇴출처(進退出處)와 사수취여(辭受取與)에 있어서는 반드시 의리로 헤아려 조금도 가차가 없고, 분명히 각기 사리에 맞게 하니 사람들이 이의가 없었다.
스승을 존경하고 도를 감싸며 음란을 배격하고 사설(邪說)을 물리침에 있어서는 의연히 신명을 바쳤고, 성공과 실패, 영예와 치욕에는 초연하여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뜻이 없었다.
평생에 사필(史筆)이 준엄하여 「춘추(春秋)」의 뜻이 있기 때문에 그 글을 보는 자도 또한 숙연히 태도를 바꾸었으니, 비록 세속을 초탈하여 임천(林泉)에 노닐어 작록(爵祿)이 마음에 있지 않았으나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성스럽고 간절하였다. 강상(綱常)을 붙잡아 세우고 세도(世道)를 만회할 생각은 하루도 가슴 속을 떠나지 않아,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논할 때 사기(辭氣)가 격렬하고 광명 정직하였으니 참으로 충의(忠義)로운 말이 있다. 문장은 전아(典雅)하여 논리가 막힘이 없으며 기교를 부리지 않고 붓 가는 대로 써내려가 거침이 없었다.
문집 10여 권이 본가에 소장되어 있고 혹 간행된 것도 있으니 「항의신편(抗義新編)」.「삼원기사(三寃記事)」.「호남의록(湖南義錄)」.「기묘유적(己卯遺蹟)」.「사우감계(師友監戒)」.「매환문답(買還問答)」등이다.「이대원전(李大源傳)」.「신묘록(辛卯錄)」.「창의록(倡義錄)」.「이기논변(理氣論辨)」.「예설고증(禮說考證)」.「대학연의(大學演義)」등은 모두 정밀하고 순수하여 완벽무결한 것으로 주석가(注釋家)가 미칠 수 없는 책들인데 세상에 전하지 않으니 애석한 일이다.
배위(配位) 경주정씨(慶州鄭氏)는 판관(判官) 승복(承復)의 딸이자 참의(參議) 효종(孝終)의 현손인데 타고난 성품이 정숙하고 부덕(婦德)을 잘 갖추었으며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5남을 두었는데 후지(厚之).신지(愼之).심지(審之).익지(益之).일지(逸之)이며, 세 여서(女壻)는 정창서(鄭昌瑞). 양일남(梁一南). 조정유(曺挺有)이다. 내외 손증(孫曾)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시열(時烈)은 한번 선생의 문하(門下)에 나아가, 대군자(大君子)를 뵐 수 있었다. 청풍탁절(淸風卓節)이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 명지달식(明知達識)이 물외(物外)에 초탈하여 스스로 현미(顯微:이와 상을 알았고, 기미를 보고 절조를 지켜, 근심없이 세상에 숨어 그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또한 강상(綱常)을 붙잡아 세우고 사문(斯文)을 도왔으며, 깊고 후하게 공부를 쌓아 고명하고 정밀한 경지에 이르러 백대의 후세에 충효의 도리가 사라지지 않고 옛사람의 정학(正學)이 있음을 알게 하였으니, 선생이 비록 당시에 도를 행하지는 못했으나 만세에 도를 전하였다고 하겠다. 이점이 바로 공자(孔子)가 요순(堯舜)보다 공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다음과 같이 명(銘) 한다.
하늘을 세우는 도는 음과 양이요, 땅을 세우는 도는 유와 강이요,
사람을 세우는 도는 인과 의라 하나니 오직 선생께서 여기에 가까우셔라.
의에는 충만한게 없고 인에는 효만한게 없어라.
큰 벼리 세우시고 온갖 조목 실행하셨으니 참으로 군자이시고 펴서 모아 이룸이네.
덕은 높고 배움은 넓었으며 도는 완전하고 행검은 곧았네.세번 일어나 근왕하고 한 번 상소로 강상 붙잡았네.
동해에 몸을 버리자고 하고 서산에 숨기를 원했으나
의리는 순국으로 빛냈으니 뜻이 어찌 세상을 잊음인가.
그 나아감과 물러남은 도와 함께 소장(消長)하니
강한 풀 거센 바람 앞에서 빼어나고 높은 산 야산 속에서 우뚝함일세.
흥망(興亡)과 선악(善惡)을 준엄하게 가려내어
태사의 필치로 뽑아쓴 사실들은 화곤처럼 포폄이 엄정하니
공을 헤아리고 덕을 논할 때 그 누가 선생 같으리.
이를 큰 비에 새기나니 천세 만세 영원하리라.
문정공(文正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찬(撰)
동해에....원했으나 :
지절(志節)이 고결하여 산림에 은거함을 말함. 전국시대 제(齊)나라 노중련(魯仲連)과 상(商)나라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고사(故事)임. 노중련은 위(魏)나라가 진(秦)나라를 황제로 모시자고 했을 때 "저 진 나라는 예의를 버리고 수공(首攻)을 앞세우는 나라다. 나는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차마 그 나라 백성은 될 수 없다"고 거절하였고, 백이 숙제는 주무왕(周武王)이 상나라를 정벌하고 나라를 세우자 주나라 곡식은 먹지 않겠다고 수양산(首陽山)에 은거하였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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