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교회는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1500년 이전의 성직생활을 대표하는 단어는 뇌물수수, 성직매매, 재물강요였다. 교회의 타락은 아비뇽 교황기에 절정에 달했다.(1) 부자들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사제들에게 돈을 떼어주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조직은 부가 흘러 들어가는 곳이다. 막대한 돈이 돈을 다룰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갔다. 성직자는 막대한 금은보석을 거둬들이는 최상의 직업이었다.
헌금은 지옥을 면하게 하는 보험이었다. 주교와 추기경들은 십일조와 면죄부 판매를 통해 막대한 재산을 모았고, 귀족들은 아주 어린 자녀들에게 성직(聖職)을 사주어 20세의 대주교도 있었다. 교황이 1342~43년 사이에 부여한 관면(dispensation)(2) 624개 중 484개가 성직자의 자녀들에게 돌아갔다. 16세기 한동안 영국에서 기소된 성범죄의 4분의 1을 성직자가 차지했다. 이는 성직자 인구비율의 10배가 넘는 수치였다. “아들이 나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면 성직자를 시켜라!”라는 말도 있었다.(3)
교회는 서유럽에서 가장 돈이 많은 곳이었다. 어마어마한 부동산을 소유했고 교회가 대출을 전담하여 은행역할을 했다. 종잣돈을 대주거나 흉년이 들면 식량을 나눠주었다. 헌정된 많은 부동산이 교회로 갔다. 14세기 초 영국 토지의 절반이 수도원에 속했고, 필립 2세때 스페인 토지의 절반 이상이 수도원의 소유였다. 중국에 병합되기 이전의 신정국가 티베트는 경작지의 3분의 2가 사원의 소유였다(번스타인).
교황청은 십자군 원정의 분담금, 교회의 재산, 십일조 헌금, 교황에게 별도로 바치는 헌금수입 등으로 수백년 동안 호사를 누렸다.(4) 그것도 모자라 15세기부터는 바티칸의 위임을 받은 수도사들이 곳곳을 돌아다니며 돈을 받고 죄많은 시민들에게 면죄부를 쥐어주었다. 면죄부는 지옥을 피하게 하는 보험증서였다.(5) 7세기 이후 고해성사는 돈으로 대체되었다(귀르틀러).
도미니크회의 수도사 테첼(Johann Tetzel, 1465?~1519)은 면죄부 판매사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부패한 교황청의 물욕을 채우기 위해 뻔뻔스러운 짓을 서슴지 않았다. “돈이 상자속에 딸랑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돈낸 사람의 영혼은 하늘나라로 올라갑니다.” 그가 민중을 기만했던 말이다. 민중들은 “상자속에서 돈이 쩔렁거릴 때 영혼은 지옥불에서 껑충껑충 뛰고 있다”고 비웃었다(뮐러②).
우매한 민중은 비텐베르크대학의 루터 교수에게 그 증서가 신학적으로 효력이 있는지 물었다. 다음날 95개 항목의 대자보가 벽에 나붙었다.(6) 1517년 10월 31일이다. 신교도들은 이 날을 종교개혁일로 기념한다. 95개항의 테제는 테첼, 푸거,(7) 황제, 교황을 분노하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루터의 대자보는 모든 도시를 소용돌이로 몰아갔고 전제국(全帝國)을 뒤흔들었다.(8)
종교개혁은 이후 2세기 동안 유럽 전역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개신교끼리 종교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 와중에 충돌의 당사자들이 힘을 소진하여 약화되었다.(9) 1776~83년의 미국 독립과 1789~1799년의 프랑스 혁명을 겪으면서 교회는 대중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다. 특히 프랑스 혁명의 최대 피해자는 가톨릭 교회였다. 모든 교회재산은 국유화되었고 모든 수도원과 종교단체는 해산되었다. 특히 서유럽의 경우 6․8사태(10) 이후 교회가 크게 위축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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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vignon: 1303년 로마의 폭도들이 교황을 죽였고 후임자도 살해당했다. 1305년 보르도의 대주교가 교황(클레멘스 5세)이 되었는데 정세불안을 이유로 로마로 가지 않고 그의 고향 아비뇽으로 갔다. 1376년까지 70년간 7명의 교황이 아비뇽에 머물며 사치를 즐겼다. 흑사병(1347~49) 이후의 14세기 후반은 광적인 소비․사치․방탕의 시대였다. 페트라르카는 교황의 말이 금옷을 입고 금(金)을 먹으며, 만약 신이 사치를 중단시키지 않으면 말이 금신을 신게 될 것이라고 규탄했다. 그 금은 흑사병으로 죽은 부자들이 교회에 유산으로 남긴 것이다.
(2) 관면(寬免)이란 가톨릭교회에서 특별한 경우에 신자들에게 교회법의 제재를 면제해주는 것이다.
(3) 12~13세기 이탈리아 교회의 세속화(성직매매, 화려한 교회건립 등)에 반발하여 ①청빈, ②겸손, ③소박을 기치로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가난속에서 평안, 사랑, 자유를 발견하고 적극적인 가치로 삼아 가난을 사제의 요건으로 삼았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우리들은 행복의 무아경속에서 살고 있다.” 초기의 불교공동체(거지공동체)도 이슬람의 수피즘도 그러했다.
(4) 향료상인 메디치家의 조반니 메디치가 1512년 교황 레오10세(1512∼21 재위)로 등극하여 온갖 사치를 부려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그 뒤를 이은 교황들은 모두 사치에 젖은 귀족들로 몸에 밴 사치와 방탕을 포기하지 않았다. 교황은 돈을 바치면 교회의 관직을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돈만 바치면 주교, 대주교, 추기경 자리도 얻을 수 있었다.
(5)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낳은 첫 히트상품은 성서가 아닌 면죄부였다. 돈만 내면 ‘죄를 씻는다’고 인쇄된 면죄부는 날개돋친 듯 팔렸다. 죄질에 따라 값도 달랐다. ‘평민의 간음죄 27리브르, 근친상간은 4리브르 추가, 부적절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면 87리브르 5수’라 적힌 아비뇽 교황청의 가격표가 남아 있다. 면죄부는 사람들이 마음 편히 죄를 짓도록 부추겼다(뮐러①).
(6) 서방교회들은 로마교황의 비호로 나라 땅 3분의 1을 소유할 만큼 부유하고 권력이 있었다. 교회는 타락했고 성직자의 부패는 극심했다. 이러한 부패에 맞서 왈도, 위클리프, 후스 등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루터가 ‘면죄부의 효능’을 부정하는 95개 조항을 내걸어 마침내 종교개혁의 횃불을 치켜들었고 칼뱅이 종교개혁에 따른 교리를 집대성했다.
(7) 레오 10세는 브란덴부르그의 알브레히트 대주교에게 독일제국의 반에 이르는 지역의 면죄부 판매권을 주었다. 이 판매권은 경영능력이 탁월하고 생산성이 높은 푸거가에서 대행했다. 1517년 당시 면죄부 가격은 1/4플로린(=3만7천원)이었고 면죄부의 사면효과는 8년이었다[플로린은 1252년 처음 주조한 피렌체의 금화(3.5g)로 유럽의 기준통화였다].
(8) 종교개혁은 터키가 도왔다.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1500~1558)는 프랑스와 전쟁중인 데다 터키가 헝가리, 오스트리아 등을 계속 침공하여 신교도들에게 눈 돌릴 겨를이 없었다. 독일 제후의 지지가 필요한 카를은 1555년 루터주의를 승인하고 말았다.
(9) 1457년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쓰러져가던 교회의 권위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인쇄술로 신교는 서적종교가 되었다. 의식 대신에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사제가 된 것이다.
(10) 1968년 5월 프랑스 전역의 대학생 시위와 노동자 파업으로 확산된 반체제․반문화 운동이다. 냉전과 월남전 등과 결부되어 미국, 독일, 체코, 스페인, 일본 등 세계의 젊은이들을 저항과 해방의 열망으로 들끓게 했다. 기존의 정치체제와 도덕관습에 대한 전면적인 반란이었다. 68혁명은 대학교육의 대중화, 성의 혁명을 통한 여권의 신장, 엘리트 문화의 대중화라는 성과를 얻었다. 개인과 사회의 해방이 병행되었다. 섹스, 마약, 동성애 등의 금기가 풀렸다. 새로운 가치․사고방식․삶의 방식을 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