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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수필로 떠나는 여행
-이명진 에세이 《물숨의 약속》
이명진 작가의 에세이《물숨의 약속》을 읽었다.
나는 작품집을 만나면 서문을 제일 먼저 펼쳐 든다. 이렇게 읽어 주세요 하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물숨의 약속》서문을 펼쳐 들고 시선이 멈춘 곳이 있다. 다음 문장이다. 나는 이런 마음으로 작품을 썼으니, 염두에 두고 읽어 주세요 하는 문장이다.
그동안 수필은 자아 발견 내지는 자기 고백이란 정의 때문에 단순하고 잡다한 체험을 다루는 글쓰기 양식으로 알려져 왔다. 나는 그러한 정의에서 벗어나 삶 속에서 발견한 '그 무엇'을 쓰고 싶었다.
《물숨의 약속/2023년》서문 중에서
첫 문장은 수필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고 다음 문장은 그런 수필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와 쓰고자 하는 주제를 언급했다. 나는 이명진의《물숨의 약속》을 작가의 집필 의도를 따라 읽고 소개해 보려 한다. 먼저 기존 수필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살펴보고 이어 그 수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찾아볼 것이다. 그리고 작가가 말하려는 메시지를 정리해 볼 것이다.
‘그동안 수필’
《물숨의 약속》서문을 읽다가 나는 작가가 말하는 ‘그동안 수필’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서문에서 사용한 ‘그동안 수필’은 작가 자신의 지난 수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듯하고 수필 문단에서 발표되온 다른 작가들의 특정 작품들을 지칭하는 듯하다. 나는 본격적인 독서를 시작하기 전에 작가가 말하는 ‘그동안 수필’을 살펴보기로 했다. 자료들을 뒤적이다 작가의 학위 논문을 발견했다. 논문은 작가의 수필에 관한 생각을 가장 정확하게 살필 수 있는 자료 중 하나일 것이다. 논문 중에서 작가는 수필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었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수필이란 자기 고백적인 문학이며, 내용과 형식에 특별히 까다로운 제한이 없이 다양한 장르를 흡수 병합시키는 개방성과 잡종성을 지니고, …<중략>… 다시 말해 수필은 장르로서 구비해야 할 규약을 갖춤으로써 성립한 것이 아니라, ‘수필이라 불리는 글들’에 다시 말해 수필은 장르로서 구비해야 할 규약을 갖춤으로써 성립한 것이 아니라, ‘수필이라 불리는 글들’에 덧붙여진 술어를 통해 드러나 온 장르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법정 수필 연구/2009년>중에서
2009년 발표 논문이니까 14-5년 전 자료이기는 한데 《물숨의 약속》서문의 수필관과 맥을 같이 한다. 작가가 학위 논문에서 밝힌 수필의 유일한 경계는 자기 고백이다. 이 경계만으로는 수필을 명확히 정의하거나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작가는 한발 더 나아가 ‘수필이라 불리는 글들’이라는 표현을 조심스럽게 사용한다. 수필이라는 쟝르를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고 다만 존재하기는 한다는 뜻일 것이다.
작가의 말하는 ‘그동안 수필’을 논문과 서문을 통해 추측해 보면 형식과 내용에 제한이 없는 자기 고백적이고 관조적인 글이다.
아마도 ‘그동안 수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자기 고백, 자기 관조에서 벗어난다는 뜻일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고정된 시선을 돌려 타자에 대한 수필을 써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듯하다.
서문 중에서 수필과 자기 자신의 경계를 넘어 향할 곳을 다음과 같이 밝혀 두기도 했다.
나는 그러한 정의에서 벗어나 삶 속에서 발견한 '그 무엇'을 쓰고 싶었다.
…<중략>…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섬이란 공간에서 농축된 체험을 통해 드러나는 재발견이며, 리얼리티 속 남들이 몰랐던 신비하고 내밀한 소리일 수도 있다. 또한 타락한 사회를 타락하지 않은 심성으로 이끌어 가는 내 수필 속 주인공들이 꾸며놓은 서사일 수도 있다.
《물숨의 약속/2023년》서문 중에서
작가는 자기 고백과 자기 관조를 넘어 ‘내가 살고 있는 섬’을 말하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서사를 드러내겠다는 것이다. 작가는 현재 제주에 살고 있으니, 제주와 제주 사람을 작품에서 들어내겠다는 뜻일 것이다.
이제 나는 작품집에서 내가 발견한 작가가 말한 ‘그동안 수필’의 수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와 작가가 말하려는 '그 무엇'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그동안 수필’ 에서 벗어나기①
사회적 타자와 사회적 주체
서문을 지나 그다음으로 읽은 작품이 표제작 <물숨의 약속>이다. 일부를 옮겨 보았다.
“두통약 ‘뇌선’ 좀 사다줍써”
“진료소에서 받아온 약 다 드셨어요”
늘 그녀는 두통약을 넉넉하게 지니고 있길 원했다 테왁과 망사리가 해녀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이듯 언제부터인지 머리 아플 때 먹는 약은 필수품이 되었다
…<중략>…
할망의 일상은 어려서부터 제주 바당에서 어머니 일을 도우며 시작되었다 물질 나간 어머니 대신 동생을 업고 바닷가를 서성거리며
…<중략>…
저승에서 돈 벌어 이승에서 쓰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중략>…
“그런데 해녀들은 왜 산소통 없이 바다에 들어갔어요”
질문을 하는 순간 할망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거 오래된 약속이주. 바당도 살고 우리도 살고”
잠수부와 스쿠버다이버들이 활개치는 AI시대에 오로지 오리발과 물안경과 테왁에만 의지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수확이 저조할 듯싶은 작업 방식은 해산물의 씨를 말리지 않기 위해 예부터 묵언으로 이어온 약속이었다.
<물숨의 약속> 중에서
<물숨의 약속> 의 주인공은 해녀 할망이다. 작가 자신이 아니라 타자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있다. 작가가 언급한 할망은 제주 해녀 중 한 사람인 것은 분명하지만 작가의 묘사와 재현의 제주 해녀 대부분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오랜 물질 후유증으로 편두통을 달고 살고 어려서부터 물질을 시작했다. 또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고 말한다. 제주 해녀 할망들이 자신들의 삶을 표현한 말읻. 누구 한 개인의 인생에 대한 회한이 아니다. 작품의 끝 무렵에서 무산소통 잠수에 관해 묻는 질문에 할망은 ‘그거 오래된 약속이주. 바당도 살고 우리도 살고’라고 답한다. 여기서 우리는 해녀 할망 전체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할망의 메시지는 개인이 전하는 메시지라고 너무 큰 목소리다. 해녀 할망들의 신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숨의 약속>의 할망은 개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한 개인이라고만 할 수 없다. 우리는 제주 바다와 오랜 시간을 보낸 해녀라는 직업인을 만난 것이다. <물숨의 약속>을 통해 독자들은 제주 해녀들의 일상과 생각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작품 속 해녀 할망은 개인이면서 해녀 전체라 할 수 있다. 독자 입장에서 해녀는 사회적 타자다. 개별적 타자라고만 할 수는 없다.
작품 속에서 타자들로 시선을 돌린 것이 <물숨의 약속>이 처음은 아니다. 비교적 초기작인 <찍새전> <대명항> 등에서도 타자를 대상으로 한 서사를 보여 주었다. <찍새전>에서 단속반을 피해 호객 행위를 하는 “깡순이”라는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낑순이는 가계를 책임지는 어머니다. 작가는 <찍새전>에서 '장한 어머니 상'의 반열에 오른 깡순이를 위법자라고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라고 말하며 작품을 마무리한다.
<물숨의 약속>이 <찍새전>과 다른 점은 사회적 메시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찍새전>에서 깡순이는 우직하게 희생하며 돈을 벌어 가정을 돌보는 한 여인이다. 반면에 <물숨의 약속>의 할망의 서사는 단순한 개인의 서사가 아니다.
드러내는 메시지의 범주의 차이는 있지만 <찍새전>과 <물숨의 약속> 둘다 자기 자신 내부로 향하던 시선을 돌려 타자에게로 향함은 틀림없다. 급기야 <물숨의 약속>에 와서는 사회적 타자와 사회적 메시지를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작가가 말한 ‘그동안 수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물숨의 약속>과 <찍새전>에서 드러나는 타자의 서사는 우리가 흔히 만나는 서사와는 조금 다르다. 우리 자주 만나는 수필의 서사는 자세하고 그려내는 시간의 범주가 좁다. 작은 에피소드라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서문에서 말하는 ‘단순하고 잡다한 자기 고백’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물숨의 약속>과 <찍새전> 그리고 <가파도에 핀 사랑 그림자>등에 나타나는 작가는 농축된 서사를 작중 인물의 일생을 짐작하게 한다. <물숨의 약속>에서는 해녀의 일생을, <가파도에 핀 사랑 그림자>에서는 평생에 걸친 사랑 이야기를 소개한다. 농축된 에피소드와 긴 시간을 포함하는 서사는 독자들이 작중 인물이 이런 삶을 살았구나 하고 상상하게 한다.
모르긴 해도 작가는 주위의 타자들을 소개하기 위해 그들을 여러 번 만나 살피고 그들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하고 가까이 다가가야 가능한 글쓰기 방법이다. ‘그동안 수필’에서 벗어나려는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수필’ 에서 벗어나기 ②
-공간과 공간의 형상화
<가파도에 핀 사랑 그림자>를 소개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가파도에서 만난 사랑 이야기다.
가파도에 한겨울 맵찬 바람이 휘몰아쳤다. 바다에서부터 불어오던 바람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파도도 출렁이게 만들었다. 젊은 시절 그녀의 가슴에 몰아친 회오리는 마라도에서 가파도까지 커다란 구멍을 뚫어놓았다.
…<중략>…
그녀의 나이 열세 살. 수줍음도 부끄러움도 청보리 사이에서 숨바꼭질하던 철없는 때였다. 우연한 기회에 육지 남자와 펜팔을 하게 되었다.
…<중략>…
딸 둘과 아들을 낳고 살 무렵 육지에서 편지가 왔다. 예전에 마음으로 그리워만 하던 청년이었다. 그도 결혼해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살고 있었다.
…<중략>…
펜팔 사연들은 바람을 타보지도 못하고 꼭꼭 서랍장에 누워 있다. 무심한 시간은 60년이 흘렀고, 그녀는 일흔을 넘긴 할머니가 되었다. 그래도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음성은 떨렸고, 목소리는 고왔다.
<가파도에 핀 사랑 그림자> 중에서
<가파도에 핀 사랑 그림자>에서 작가는 일흔셋의 할머니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할머니는 말한다. 벌써 육십 년이 흘렀네요. 작가는 할머니를 이렇게 그린다. 작은 입이 움직일 때마다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그리 특별한 문장이라 할 수 없다. 펼쳐 놓은 이야기 또한 전형적인 이루지 못한 사랑, 끝나지 않는 사랑이다. 그런데 이야기 여운이 오랫동안 남는 것은 가파도라는 공간 때문일 것이다. 가파도는 육지 사이에는 바다가 있고 그 바다는 넓다. 여자는 섬에 있고 남자는 육지에 있다. 편지는 그들의 마음을 전하는 작은 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파도라는 공간을 배제하면 흔하고 밋밋한 개인의 연애사가 될 듯하다.
작품 중 할머니의 삶은 가파도와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 할머니의 삶을 이야기 하는 것은 곧 가파도를 말하는 것이다. 할머니는 가파도라는 공간과 결합된 삶을 살아온 것이다. 인간은 누구도 공간과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없다. 인간은 지각하거나 사유하기 이전에 공간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공간과 사람을 함께 말하고 있다. 가파도라는 공간이 만들어 놓은 인생과 그들의 문화를 보여 주고 있다.
<가파도에 핀 사랑 그림자>에서 가파도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그런데 가파도라는 공간이 독서 후에도 오래 남는다. 이 작품의 독특한 매력이다. 할머니의 개인 서사지만 가파도라는 공간의 특성을 잘 그려냈다고 할 수 있다. 공간의 특성이나 타 공간과의 차별을 말하는 글들은 자주 만날 수 있다. 기후, 문화, 역사, 특산품 등을 소개하는 글들이 그러하다. <가파도에 핀 사랑 그림자>은 이런 글들과는 달리 가파도를 사랑 이야기로 그려냈다. 현진건의 <무영탑>과 영화 <탑건>도 그러하지 않은가. 이 작품들에서도 탑과 전투기는 작품 속에 그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영탑과 전투기를 기억하지 않는가. <가파도에 핀 사랑 그림자>도 그러하다. 가파도를 소재로 한 성공한 스토리텔링이다.
이런 글쓰기는 자가가 말하는 ‘그동안 수필’과는 다른 모습이 분명하다. <가파도에 핀 사랑 그림자>에서 이명진 스타일의 공간과 사람이 어우러진 스토리텔링을 맛볼 수 있다.
‘그동안 수필’ 에서 벗어나기 ③
-공간과 역사적 주체
다음으로 <억새마음 소리로 울다>를 소개한다.
…<중략>…
대나무 숲을 지나 억새 사이에서 수십 명의 사람이 비명을 지른다. 그들은 맥없이 쓰러지며 울부짖는다. 끊어질 들리는 아우성은 바람 소리를 따라 숲으로 사라졌다.
…<중략>…
191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중산간 지대는 초토화되었고 주민들은 고난의 시절을 쥐어야 했다. 11월 중순께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중략>…
고향에 가기 싫은 이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억새가 부르르 몸을 떨며 울고 있을 터다. 주위를 빙 둘러본다.
…<중략>…
잃어버린 마을 하나가 내 심장에 박혀 제주의 또 다른 모습으로 저장되고 있었다.
<억새마음 소리로 울다> 중에서
<억새마음 소리로 울다>에는 제주의 아픈 역사가 있다. 이 작품에서는 제주의 잃어버린 마을에 대해 말한다. 잃어버린 마을이란 4.3 사건으로 마을이 초토화되고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을 말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더욱 마음 아픈 점은 작중 구체적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가의 많은 작품 속에는 현존하는 실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실존 인물의 구체적인 모습 대신 얼굴 없는 ‘고향에 가기 싫은 이들’이 언급된다. 잃어버린 마을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존재한다. 갈 수 없는 곳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가기 싫은 곳이 되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꺼리는 공간 말이다.
이명진 작가는 제주의 아픈 역사를 그의 글에서 내 심장에 박혔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의 아픔을 함께 기억하겠다는 뜻일 거다.
‘그동안 수필’에서 근대사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꺼렸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이유는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억새마음 소리로 울다>를 필자가 언급하는 이유는 작가가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방법 때문이다. 이 작품은 형식이 기행문에 가깝다. 문장 또한 그러하다. 흔히 역사적 사건을 다룰 때 사실이 앞서고 주장이 뒤따르는 글들을 자주 만나다. 이명진의 글은 다르다. 옳고 그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아파하고 주장하는 것이 함께 기억하려 한다. 때로는 주장하는 것보다 함께 하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
작가는 4.3 사건을 배경이 된 공간과 현존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통해 역사를 말하려 한다. 공간을 통해 역사를 느끼고 역사를 통해 자연으로 다가가는 방법이다. 작가는 근대사에 문학이 다가가는 방법 한 가지를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사건의 배경이 된 공간에 다가가고 기억 속의 흔적을 되짚어 문학적으로 그려내는 방법이다. 미래에 작가의 새로운 작품집을 만나게 되면 필자는 가장 먼저 역사를 다루는 방법을 살펴보고 싶다. 작가가 좀 더 발전된 방법을 제시하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 무엇’ ,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
작가는 서문에서 삶 속에서 발견한 '그 무엇'을 쓰고 싶다고 했는데 표면적으로는 제주 사람, 제주 문화, 제주의 자연 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한 가지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람’이다.
‘그 무엇’은 우리가 잃어버린 정의 원형일 수도 있고, 인간 본모습일 수도 있다. 언어 이전 혹은 문명 이전의 그것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잊고 사는 삶 속 모습도 환기시켜 새롭게 보여 주는 일일 수도 있다.
《물숨의 약속/2023년》서문 중에서
작가는 서문에서 궁극적으로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모습이라고 한다. 문명 속에 사는 우리가 잠시 잊고 살지도 모르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한다.
“어머니는 예쁜 치매에 걸리셨어요.” 얼마 전 불혹을 훌쩍 넘긴 할망 딸은 하루에도 몇 번씩 할머니의 바늘귀를 꿰어주는 내게 푸념 아닌 넋두리를 쏟아냈다. 잠도 주무시지 않고 앞치마만 만들던 그녀에게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딸의 얼굴을 깜박깜박하는 일은 다반사가 되었다. 손주 손녀 얼굴도 이름도 잊어버렸다. 하지만 바다에 묻힌 남편 얼굴과 이름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벽에 걸린 아버지의 사진과 이야기 나누는 엄마를 발견하고 놀란 딸은 병원을 찾아갔다. 자식조차 '예쁜 치매'라고 말하던 할망의 증세는 바느질거리만 잡으면 꼼짝하지 않고 앉아 시간을 보냈다.
<제주 할망 손으로 깁다> 중에서
나에게 작가의 작품 중에서 인간의 본모습을 잘 보여 주는 골라보라면 나는 <제주 할망 손으로 깁다>를 고를 것이다. 작가는 이웃에 사는 할망은 치매에 걸려 기억을 조금씩 잃어간다. 기억을 잃어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본모습이 드러난다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기억은 살면서 만들어진 흔적이다. 본래의 것은 아니다. 기억이 지워지면서 드러나는 할망의 모습은 단정하고 아름답다. 할망의 남편은 바다에서 죽었고 사위도 그러하다. 하지만 딸이 말하는 것처럼 할머니는 치매마저 예쁘다. 작가는 인간의 본래 모습은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인간이 보여주는 아름다움과 단정함은 <물숨의 약속> <가파도에 핀 사랑 그림자> <제주 할망 손으로 깁다> 등에서 공통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필자는 그 아름다움이 타자를 지각된 사실 그대로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한다. <물숨의 약속>에서는 해녀 할망이 주인공이고, <가파도에 핀 사랑 그림자>에서도 할망이 주인공이다. <제주 할망 손으로 깁다>도 그러하다. <억새마음 소리로 울다>는 마을 주변이 풍경이 소재다. 작가에게 지각된 사실은 녹녹지 않게 살아온 섬사람들의 인생이다. 화려하거나 그리 즐거운 요소들이 보이지 않는다. 할망들의 지나온 삶은 고통이고 4.3 시건의 기억은 참혹하다. 하지만 작가가 지각한 사실은 좀 다르다. 해녀 할머니는 저승이라 불리는 바당에서 물질을 해서 생계를 꾸려온 당당한 노인이고 바당과 사람의 공생까지 말한다. 또 가파도의 할머니가 60년이나 간직한 편지를 애잔하게 곱게 지각한다. 할망의 치매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아마도 지각된 사실과 지각한 사실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작가의 의식 때문일 것이다. 세계를 아름답게 바라보려는 작가의 본성 때문인 듯하다.
작가가 삶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 무엇일지 나는 작가가 세계를 지각하는 방법에서 유추해 본다. 살면서 누구나 고통과 슬픔은 있다. 하지만 작가의 의식은 그 사람들을 연민과 다가감으로 이해하려 한다. 세상을 아름답게 단정하게 지각하려 한다.
작가가 발견하려는 ‘그 무엇’은 사람이 아름답게 사는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 아름다운 모습이 인간이 돌아가야 할 본모습이라고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이명진의 글 속에는 인간이 돌아가고픈 아름다운 세계가 숨겨져 있다. 이 명진이 삶 속에서 발견하려는 ‘그 무엇’은 결국 사람이다.
글을 닫으며
나는 작가의 《물숨의 약속》에서 ‘그동안 수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몇 가지를 발견했다. 내가 발견한 것은 작가가 시도한 것 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시도는 예술을 하는 모든 작가의 숙제다. 그 종착지는 자기만의 고유한 스타일일 것이다. 작가의 글을 따라 생각하고 느끼는 독서는 유쾌한 여행이었다. 또 작가가 발견하고 발견하려는 ‘그 무엇’에서 위로를 받았다. 작가가 제주를 지각하는 방법으로 내 삶도 바라보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이명진 작가의 글과 함께 떠나는 새로운 수필로 떠나는 다음 여행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