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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과 가유악의 후손
소주가씨(蘇州賈氏) 시 조; 가유약 (賈維鑰) 집성촌; 충남 서산군 태안읍 가씨(賈氏)는 중국(中國) 무위(武威:지금의 감숙성 감량도)에 연원(淵源)을 두고, 명(明)나라 신종(神宗) 때 추밀원사(樞密院使),병부 상서(兵部尙書), 태자 소부(太子少傅),문연각 태학사(文淵閣太學士: 북경의 궁중안에 있던 장서의 전각에 소속된 관직)등을 지낸 가유약(賈維鑰: 자는 무편, 호는 지백당)을 시조(始組)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가유약( 賈維鑰:은 중국(中國) 소주(蘇州)사람으로서,1592년(선조25)임진왜란 때 신종(神宗)의명을 받들어 계요안찰사(薊療按察使)로 원병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와서 안주(安州)등지의 싸움에 공(功)을 세우고 돌아갔다가,
중시조 가유약(賈維鑰)은 명(明)나라 신종(神宗)때 서기1592년(선조26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황명병부랑중겸감찰사(皇明兵部郞中兼監察使)로 명군을 이끌고 조선에 파병 안주, 남원, 동래 등지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1595년에 귀국하였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아들인 유격장군(遊擊將軍) 가상(賈祥) 손자인 병부종사관(兵部從事官) 가침(賈琛)과 함께 다시 파병되었다. 가상(賈祥)은 소사평(素沙平)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동래에 이르러 적에게 전사하고 아들을 구하려던 가유약도 부산전투에서 전사, 1598년(선조32년) 부자가 애통하게도 순국(殉國)하였다.
손자 가침(賈琛)은 경남 울산 서생진 도독동에 조부와 부의 장례를 모시고 머물다가 이후 아들 가성(賈晟) 형제들과 충과 효의 예를 다하기 위해 귀국을 하지 않고 고국과 가까운 태안반도로 왔으며 이 곳에서 귀화 정착 하였으니 3대(代)의 출정(出征)이야말로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그 유래가 없는 충효의 전형이었다. 후세에 조정에서 이충일효(二忠一孝)의 공을 인정하여 1851년(철종2년)에 사우(詞宇)와 정문(旌門)이 하사되어 충남 태안군 남면 적돌길 415번지에 숭의사(崇義祠)를 건립 매년 음력 10월 14일 대제를 봉행하고 있으며, 그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하여 1988년 8월 30일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제300호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아들 상(祥)과 손자 침(琛)을 데리고 다시 조선에 들어와 남원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으며,
1600년(선조 33)부산싸움에서 용전하다가 아들 상(祥)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의 손자 침(琛:병부 종사관)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경남 울산 서생진 도독동(慶南蔚山西生鎭都督洞)에 무덤을 만들고, 전쟁이 끝난 후에 안동권씨(安東權氏) 순(純)의 딸과 혼인하여 울산에 살면서 우리나라에 가씨(賈氏)의 뿌리를 내렸다.
1647년(인조24)침(琛)이 죽자 슬하에 아들 성(晟),호(昊),병(昺),수(遂) 4형제가 충남 서산(忠南瑞山)으로 자리를 옮겨 가문(家門)이 크게 번창하였으며, 시조(始組)유약(維鑰)의 14세 손 행건(行健)은 조선 헌종(憲宗)때 수군 병마첨절제사(水軍兵馬僉節制使)를 지냈으며, 천성이 어질어 도덕군자(道德君子)라는 칭송을 받았다.
----역대주요인물(歷代主要人物)----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동래(東萊)에서 공훈(功勳)을 세웠다.
가 침(賈琛) 자(字)는 원보(元寶), 조선(朝鮮) 때 아버지 상(祥)과 함께 동래(東萊)에서 싸웠다.
가유약(維鑰)과 아버지 상(祥)의 3대(代) 충효사당(忠孝祠堂)과 정문(旌門)이 왕명(王命)에 의해 서산군(瑞山君) 남면(南面)에 세워졌다.
가 림(賈琳) 자는 변문(釆文),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하였다. 가권민(賈勸民) 자는 한평(漢平),조선(朝鮮) 때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다. 가방열(賈邦烈) 조선조(朝鮮朝)에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이르렀다. 가태경(賈泰慶) 호(號)는 어은(漁隱), 조선 때 통훈대부(通訓大夫),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가세철(賈世喆) 호(號)는 죽와(竹窩), 조선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이르렀다. 가행건(賈行健) 호(號)는 석호(石湖), 조선 때 절제사(節制使)를 지냈다. 가중영(賈中永) 호(號)는 정와(定窩), 조선조(朝鮮朝)에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문헌에 따르면 가유약은 임진왜란이 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계요안찰사薊療按察使(계주, 요동)로 왕의 명을 받아 이여송李如松, 마귀麻貴 등과 함께 원병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
그는 안주安州 등지에서 왜군과 싸워 공을 세우고 선조 29년까지 4년간 종군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유격장군인 아들 가상賈祥과 병부종사관兵部從事官인 손자 가침賈琛을 데리고 다시 조선에 들어왔다. 조부손祖父孫 3대가 조선에 출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가유약은 소사素沙, 남원南原 전투에서 큰 전공을 거두고,
1600년 부산 포구에서 아들 가상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손자 가침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고 울산 서생진 도독동에 무덤을 만들었다.전쟁이 끝나서 명나라 원병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도독 마귀가 가침에게 함께 귀국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조부와 부친의 묘를 두고 어찌 이곳을 떠나겠느냐" 하며 조선에 귀화하여 조상의 무덤이 있는 울산에 자리잡아 안동부사 권순權純의 딸과 혼인하여 네 아들을 두었다.
1647년(인조 25) 가침賈琛이 죽자 슬하의 아들 가성賈晟, 가호賈昊, 가병賈昺, 가수賈遂 4형제는 고국인 중국으로 돌아가고자 뱃길이 가까운 태안반도 안흥만에 도착했다. 그때 중국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난세이므로 결국 귀환을 포기하고 태안반도에 정착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가상히 여겨 선조 3세에게 2충1효의 불천지사우不遷之祠宇와 정문旌門을 하사했다. 충남 태안군 도내리에는 가침의 장남 가성의 묘가 있다. 1851년(철종 2)에는 시조 가유약과 아들 가상, 손자 가침 3대의 충효를 기리는 사당 숭의사崇義祠와 정문이 충남 태안군 남면 가씨 마을에 내려졌다. 후손 중에 유약의 14세손 행건行建이 헌종 때 충청도 안흥安興 양진梁鎭의 수군병마절제사를 지냈는데 천성이 어질어 ‘도덕군자’라는 칭송이 높았다.그의 아들 일영日永도 철종 때 울진현령 등을 지내며 벼슬이 높았고, 선정을 베풀어 그가 울진을 떠나올 때 군민들이 암벽을 갈아 그의 공적을 새겼다고 하는 ‘마애비磨崖碑’가 지금도 전한다. 일영日永의 아우인 중영中永은 철종 때 충량과忠良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고종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14세손 익건翊健은 1866년(고종 3)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했을 때 의병을 일으켰다.그 외 한말과 일제 침략기에 선조의 뜻을 이어 나라에 충성한 인물로는 의영義永과 병준秉俊의 부자父子가 유명했다. 후덕하고 자선심이 많기로 이름났던 이들 부자는 사재를 털어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등 사회사업에 공헌했으며, 호서 일대의 한학자로 학명을 떨쳤던 형로衡魯는 항일투쟁에 헌신하여 일경으로부터 주목받는 대상이 되었다.신.구 학문과 사학史學에 정통했던 병준秉峻은 서산에 농림중학교를 설립하여 영재교육을 통한 광복운동과 농사개량 및 산업발전에 이바지한 공이 지대하여 면민面民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으며, 시조의 18세손 재연在衍은 인천상고 재학 시 은행원 신분으로 항일투쟁에 앞장섰다가 옥고로 순국했다.민족계몽 운동 중 일본 헌병의 목을 베려 했던 정로晶魯(시조의 17세손)와 사재를 털어 임시정부를 지원했던 재창在昌도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가문을 중흥시켰으며, 정로廷魯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 예산· 서산· 공주의 군수를 지냈다. 그 후 가씨는 서산을 중심으로 한 충남 일대에서 충효의 전통을 이어 오면서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다. 그중에서도 태안군이 중심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충청도 지역에 극심한 생활고가 덮치자 배를 타고 인천으로 올라가 살아서 그곳에도 집성촌을 이루었다.한편 가유약의 동래 이전부터 충남 태안군 일대에 세거하여 살던 태안 가씨가 있었다. 전라도 용담현龍潭縣의 토성土姓으로도 가賈씨가 기록되어 있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서 태안을 본관으로 하는 태안 가씨는 70명으로 조사되고 있다. 소주 가씨가 태안군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태안 가씨 상당수가 소주 가씨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의 성씨 | 가賈씨
문헌에 의하면 시조 유약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서기 1593년(선조26)에 신종의 명으로 원병을 이끌고 이여송 등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와 안주 등지에서 왜군과 싸워 큰 공을 세우고 돌아갔다. 그 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유격장군인 아들 상과 병부종사관인 손자 침을 데리고 다시 조선에 들어와 소사에서 아들 상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혼자 남게 된 손자 침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경남 울산 서생진 도독동 양지 바른 곳에 무덤을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고 명나라 원군이 모두 돌아갈 때 함께 귀국할 것을 권유했으ㅜ나, 손자 침은 “조부와 부친의 묘를 두고 어찌 이곳을 떠나겠느냐” 하며 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하여 조산의 무덤이 있는 울산에 정착하여 안동부사 권 순의 딸과 혼인하여 네 아들을 두고 세계를 이으니 비로소 우리나라에 가 씨 성이 창씨 되었다.
씨족 사 개요
시조 유약의 손자 침과 안동부사 권 순의 딸 사이에서 낳은 아들 성, 호, 병, 수, 4형제는 충남 서산으로 자리를 옮겨 가 씨의 터전을 이루고, 서기 1851년(철종2)에 시조 유약 아들 상, 손자 침, 삼대에 충효를 기리는 사당과 정문이 서산의 가 씨 가문에 내려졌다. 이를 계기로 충청도 일대에 충효의 전통을 이은 가 씨 가문이 날로 번창하였으며, 헌종 때 충청도 안흥, 양진의 수군병마절제사를 지낸 14손 행전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행건의 이들 일영도 철종 때 현령(지금의 군수)등의 높은 벼슬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어 그가 떠날 때 군민들이 슬퍼하며 암벽을 갈아 그의 공적을 새겼다는 마애비가 경북 울진에 지금도 전해져 오고 있다. 일영의 아우인 중영은 철종 때 충량과에 장원급제하여 가선대부(조선 때 종2품)에 올랐으며, 14세손 익건은 1866년(고종3)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했을 때 의병을 일으킨 분으로 유명하다.
의영과 병준 부자는 후덕하고 자선심이 많은 분으로 사재를 털어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등 사회사업에 지대한 공을 세웠으며, 형로는 항일 투쟁에 헌신하여 일경의 주목의 대상이었던 호서 지방의 한학자로 유명했다. 신, 구, 학문과 사학에 정통했던 병준은 서산에 농림중학교를 설립하여 영재교육을 통한 광복운동은 물론이고 영농개선 등 산업발전에 많은 공을 세웠으므로 면민이 송덕비를 세울 정도였으며,18세손 재연은 인천 상업고등학교 학생의 신분으로 항일 투쟁을 시작하여 종래에는 옥고로 순국하였다.
17세손인 정로는 일본 헌병의 목을 베려했던 충절을 기려 예산, 서산, 공주군의 군수를 지내고, 전통인 충절과 효행을 더욱 꽃피우고 있다. 1985년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남한에 1,783가구와 7,888명의 소주 가 씨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지금 현재는 더 많은 가구와 명이 더 있을 것으로 추산한다. 소주 가 씨(蘇州賈氏)
고종 14년 12월 11일, 명나라 병부 낭중 가유약의 후손 중영 등에게 복천을 시행할 것을 청하는 삼군부의 계를 전교하였다.
삼군부가 아뢰기를,“명 나라 병부 낭중(兵部郞中) 가유약(賈維鑰)의 후손 중영(中永) 등 여러 사람은 연전에 선천(宣薦)에서 삭제된 가운데에 들었는데, 물의가 이제까지 억울하다 하니, 모두 복천(復薦)을 시행하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고종 14년 정축(1877) 12월 11일(신묘) 맑음 三軍府啓曰, 皇明兵部郞中賈維鑰, 後孫中永等諸人, 年前入於宣薦削薦中, 物議至今稱屈, 竝復薦施行事, 分付, 何如? 傳曰, 允
太宗文皇帝實錄 卷之五 天聰三年 十一月 三日 1번째 기사 / ○甲申。諸將遵 上令各整兵。修治雲梯挨······
○甲申。諸將遵 上令各整兵。修治雲梯挨牌。侵晨。八旗兵列陣。攻遵化城。豎梯城下。正白旗小卒薩木哈圖、先登。遂克其城。大軍俱登。掩殺其守陴兵。四面皆潰。巡撫王元雅走入署、自經。其城中官兵人民拒命者。盡屠之。命以棺、殮元雅屍。收養原任監司馬思恭、郎中賈維鑰、 上以薩木哈圖先登。酌金巵勞之。因傳諭曰。我軍年來、皆怯於攻城。况此城較前所攻之城更堅。薩木哈圖奮勇先登。殊可嘉也。宜優錄之
2. 太宗文皇帝實錄 卷之六 天聰四年 正月 三十日 1번째 기사 / ○庚戌。以明原任遵化經巡王元雅家口賜陣······
○庚戌。以明原任遵化經巡王元雅家口賜陣獲總兵官麻登雲黑雲龍 先是攻克遵化時。獲明革職道員馬思恭收養之。尋擢為巡撫令管理附近歸順人民。其孫婿乃薊州中軍。於我軍趨燕京後。以尋妻子、來奔遵化。英俄爾岱察還其妻子。使之完聚。俱付思恭。思恭乃潛遣其孫婿、往薊州報云遵化城中。無滿洲精銳。止餘傷殘兵卒。且亦無多。於是薊州張姓總兵遂率兵來團遵化。至是令諸臣鞫訊。論思恭罪、當死。奏入。 上曰。既宥復殺非善事也。因命 革巡撫職為民。以郎中賈維鑰代署巡撫事
3. 太宗文皇帝實錄 卷之六 天聰四年 二月 四日 1번째 기사 / ○甲寅。 上召總兵官麻登雲、郎中賈維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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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吏科等科給事中葉繼羙等上疏認罪 上怒其抗違凟擾食祿忘 君受爵避難革葉繼羙王佐職為民奪劉道亨等俸一年并奪禮兵二部堂上官俸四月該司官蔡宗明賈維鑰亦革職為民其餘俱降雜職 上意欲推風力科臣一員往勘 徃勘:廣本勘下有倭事二字,是也。 而部科久不報 而部科久不報:廣本科下有臣字。 致觸 聖怒
5. 神宗顯皇帝實錄 卷二百九十七 萬曆二十四年 五月 十四日 2번째 기사 / ○吏部題降謫諸臣有專任其事者有教習駙馬······
○吏部題降謫諸臣有專任其事者有教習駙馬萬建崑賴克俊差往山海關張時顯并署員外郎張日新主事楊東野朱誥俱先期奉旨公差在外似難並降 上報蔡宗明賈維鑰等遵前旨行萬建崑 萬建崑:抱本崑作昆。 等及張時顯等姑免降止奪俸一年
6. 神宗顯皇帝實錄 卷三百 萬曆二十四年 八月 十九日 1번째 기사 / ○甲寅兵部覆兵科署科事刑科左給事中徐成······
○甲寅兵部覆兵科署科事刑科左給事中徐成楚題參白羊城守備張永齡廣東瓊崖參將周易皆以行賄營陞并及原任職方司郎中賈維鑰鑰舅 鑰舅:廣本抱本鑰作之。 張子忠受囑等情 上嚴旨切責張永齡周易著革任回衛聽勘張子忠法司一并究問所奏鑚剌干請全在該部執持秉公推用未可全諉薦舉塞責這次各堂上官姑且罰俸二箇月以後務要正己率属司官如有不法者當即參治毋得縱容姑息且近日武官陞轉頻數無益地方徒啟剝削營求之端以後還要久任責成庶得實用
7. 附錄 明熹宗七年都察院實錄 天啟四年 天啟四年 三月 十九日 2번째 기사 / 廵按直隸御史彭鯤化疏為薦舉地方人材薦礼······
廵按直隸御史彭鯤化疏為薦舉地方人材薦礼部右侍郎張卯紀御史陳王庭武德道白飬粹開原道韓原善僉事馬思恭郎中賈惟鑰知府徐九章同知□夢齊奉聖旨吏部知道
8. 附錄 史語所藏鈔本崇禎長編 崇禎三年 崇禎三年 正月 四日 1번째 기사 / 甲申 大清兵破永平先一日有伏文廟承塵上······
歲嘱汝內應令乃費我三日力乎鞭之三百於是郡人布政白養粹職方郎中賈維鑰戶部員外郎陳此心行人崔及第同知楊爾俊諸生宋應元及廢 將孟喬芳俱降明日 大清元帥至東嶽廟故縂兵麻登雲侍側勞孟喬芳等貂裘各一鼓吹而入授養粹廵撫維鑰永平兵備道副使以盧龍知縣張養初為永平知府兼縣事同知魏君謨為灤州知州命養粹等覈郡縣倉庫得銀二萬二千餘兩粟六千餘石荳三千石芻萬束以諸降人言之各兵焚掠於是城中各輸金帛獨諸生廖師周所上麄惡杖之籍其家養粹及第俱盛飾其女為獻爾俊以辮髮不中程坐誅遣使聘遷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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