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칼빈의 기독교강요 특강(15)-칭의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부산 한우리교회 구모영장로
3.11 믿음에 의한 칭의 : 그 명칭과 문제에 대한 정의
1. 칭의와 중생 : 용어를 정의함(3.11.1-4)
(1) 칭의의 교리, 그 위치와 의미(3.11.1) 율법 하에서 저주를 받은 인간을 위하여 구원을 회복하는 수단이 단 하나 남아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다만 이러한 믿음 자체가 무엇이며, 믿음이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결과에 대해서는 이미 상세히 설명하였는데(2.12.1; 3.3 등등), 이를 “이중의 은혜”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첫째로 믿음은 무죄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우리가 하늘의 심판자 대신 은혜로우신 아버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둘째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성화됨으로써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신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상의 두 가지 하나님의 은혜, 곧 선물 중 칼빈은 둘째의 중생부분을 먼저 설명한 후 이제 칭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통상 일반적인 논의순서로 본다면 칭의가 먼저 언급되고 그 후에 중생과 그리스도인의 삶(선행)을 언급하는 것이 옳겠지만, 칼빈은 “믿음은 결코 선행을 결하지 않고 있다”는 점, 그리고 “성도들의 선행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에 순서를 바꾸어 언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다만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 칭의와 관련하여 선행의 문제, 즉 구원을 위한 우리의 선행이 요건이라고 보는 가톨릭의 논의에 대한 반박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그래서 칼빈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어떤 것이지, 그리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을 우선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구원을 세울 토대는 물론 하나님께 대한 경건을 수립할 기초도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토의를 진행함에 있어 “종교 생활의 요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더 많은 주의를 기우릴 것이라 한다.
(2) 칭의의 개념(3.11.2) 칭의와 관련하여 우선 의롭다함을 표현함에 있어,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과 믿음에 의해서 또는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표현이 있음을 생각하자. 죄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벌이 있지만, 하나님의 판단으로 의롭다함을 인정받은 사람에게는 모든 죄인이 넘어진다고 할지라도 그만은 심판대 앞에서 굳게 설 수 있다.
그래서 칼빈은 칭의를 간단히 설명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라 하였으며, 또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轉嫁)하는 것이라 말하였다.
(3) 성경에 있는 용법(3.11.3) 누가복음에서는 일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했으며(눈 7:29), 그리스도께서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의롭다함을) 얻느니라”라고 하셨다(눅 7:35). 또한 바울이 성경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이방인들을 의롭다 하실 것을 미리 알았다고 말할 때(갈 3:8), 이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에 의해서 의를 전가(轉嫁)하신다는 뜻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지 않은가? 또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는 불경건한 자를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다고 말할 때(롬 3:26), 그것은 불경건하여 당연히 정죄를 받을 사람들이 믿음의 덕택으로 그 정죄에서 풀려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욱 명백한 것은 “누가 능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34)라는 말씀으로, 이것을 바꿔 말하면 “하나님이 사면해주신 사람들을 누가 정죄하겠는가”라는 뜻이 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을 분명히 죄의 사면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의롭다함은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롭다함은 우리의 행위의 결과로 인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그것은 믿음에 의해서 받는 것이다.
(4) 칭의는 곧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용납이며 죄의 용서이다(3.11.4)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그의 은혜 가운데 기꺼이 받아들이시며,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기로 하셨고(고후 5:18-20),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칭의는 “용납”, “용서”, “죄의 전가” 및 “화해됨”이라는 말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화해됨”을 말함으로써(고후 5:18-19), “화해됨”은 곧 “의로 인정됨”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며, 그 이전에 용납과 용서가 전제되는 것이다.
2. 오시안더(Osiander)의 “본질적 의”라는 생각을 논박함(3.11.5-12)
(1)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사상(3.11.5) 칼빈은, 오시안더가 “본질적 의”라는 이상한 괴물을 도입해서, 거저 주시는 의를 폐지하는 것은 아니나 이 의를 깊은 안개 속에 묻어버렸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뚜렷이 체험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논박한다. 오시안더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라고 말 한 것은 동의할 수 있지만, 여기서 나아가 그리스도의 본질과 우리의 본질이 혼합된다는 말은 동의할 수 없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적 죽음에 의해서 받는 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와 본질적으로 결합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2) 오시안더는 죄의 용서와 중생을 혼동한다(3.11.6) 오시안더는 “의”라는 명사와 “의롭다함”이라는 동사의 뜻을 두 방향으로 연장한다. 그래서 첫째는,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은 갑 없이 받는 용서에 의해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감동시키는 거룩함과 의로움이라고 한다. 둘째는, 그는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의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죄를 속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푸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이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이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3) 칭의를 위한 믿음의 의의(3.11.7) 오시안더에 의하면 믿음 자체에는 의롭다 할 힘이 없고 그 힘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데서 온다고 한다. 그러나 칼빈에 따르면 믿음은 일종의 그릇으로, 빈 영혼 즉 입을 벌린 영혼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義)를 받기 전에 믿음으로 그를 받아들인다고 가르치는 것은, 의롭다 하는 권한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빼앗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믿음은 의를 받기 위한 그릇에 불과하며, 무지한 자들이 믿음과 그리스도를 혼동하지만, 그리스도는 이 위대한 은혜의 중요한 근거인 동시에 그 원천자이자 분배자시다.
(4)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의해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오시안더의 주장(3.11.8) 오시안더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므로 그의 신성에 의하여 우리의 의가 되셨으며, 그의 인성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의가 되신 것은 그가 “종의 형체를 가진” 때이며(빌 2:7),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은 스스로 아버지에게 복종하셨기 때문이다(빌 2:8).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하시는 것은 그의 신성에 의해서 하시는 것이 아니고 명령을 받은 직무를 따라서 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의 권능으로 이루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5) 칭의는 중보자가 하시는 일(3.11.9) 오시안더는 하나님의 “본질적 의”라는 우월한 가치 때문에 인간성을 초월한 인성을 배제한 신성에 돌리려고 하지만, 성경은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롬 5:19), 또한 그리스도가 속죄의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의 육신에서 의가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반박한다.
(6)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어떤 성격을 가졌는가?(3.11.10)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실 때까지 우리는 비할 데 없는 선을 가질 수 없다면서,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을 중요시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유자가 되심으로써 그가 받은 선물을 우리도 나눠가지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밖에 계신 그리스도를 멀리서 바라봄으로써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옷 입으며 그의 몸에 접붙여지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자기와 하나로 만드시고 그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킨 것이다.
(7)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생각은 구원의 확실성을 소멸시킨다(3.11.11) 오시안더는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을 법적인 용어로 가르치는 사람들을 비웃는다. 우리는 실지로 의로워야 한다는 것이 그가 비웃는 이유이다. 또한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무엇보다도 멸시한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되는데, 여기서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으로써 의롭다 하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오시안더는 악한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며, 그의 본성에 배치되는 짓이 된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칼빈은 칭의의 은혜와 중생은 서로 다른 일이지만 동시에 분리되지 않는다고 본다. 의인에게도 죄의 흔적이 항상 남아 있다는 것은 경험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그들의 칭의와 생활의 변화는(롬 6:4)매우 다를 것이다. 후자의 생활의 변화는 평생을 통하여 점진적일 것이다. 그러나 칭의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위하여 완전하고 충분하며 유일한 의를 가졌기 때문에, 궁극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점진적이기는 할지라도 승리할 것임을 확신케 하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8) 오시안더를 논박함(3.11.12) 하나님은 의롭지 않은 자를 의롭다고 할 수 있는가? 오시안더는 부정한다. 그리고 오시안더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의로 주신 것은 그의 인성이 아니라, 신성에 의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인성에서 의롭다 하는 직무를 제거해 버린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우리를 위한 의와 생명이 있다는 것을 무시하게 된다.
그러나 칼빈은 칭의는 오로지 법정적으로 전가된 의에만 기초하며, 그리스도와의 근원적인 연합과 성령의 역사를 통한 오로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다.
3. 선행이 의롭다함을 위하여 유효하다고 하는 스콜라 사상을 논박함(3.11.13-20)
(1) 믿음에 의한 의와 행위에 의한 의(3.11.13) 많은 사람들이 의는 믿음과 행위로 이루어진다고 보지만, 칼빈에 의하면 이들 양자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을 세우면 다른 한 쪽은 반드시 넘어지게 된다고 본다. 칼빈은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난 의라”(빌 3:9),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이로니라”(롬 3:27)는 바울 사도의 기록을 근거로 제시한다.
믿음은 우리의 자랑을 없애버린다. 행위의 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동안은 자랑할 이유가 우리에게 남아있다는 점에서, 행위에 의한 의는 결코 믿음에 의한 의와 관련시킬 수 없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는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은혜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믿음과 행위의 두 근원에서 나와 합쳐지는 의 - 이런 의를 생각해내는 사람들의 몽상과 작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2) 중생한 사람의 행위도 칭의를 얻지 못한다(3.11.14) 칼빈은 궤변자들이 행위가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선물이며 중생의 결실이라면, 사람은 이런 행위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함에 대하여, 율법의 의는 율법이 명하는 것을 준행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라면, 믿음의 의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믿는 것이다(롬 10:5, 9). 그리스도의 은혜인 성화와 의는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행위로의 중생은 결코 의가 될 수 없는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 칼빈은 아브라함의 생활은 영적이었고 거의 천사와 같은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기에 충분한 행위의 공로가 그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신 것이라 성격은 증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3) 은혜와 선행에 대한 로마 교회의 교리(3.11.15) 스콜라철학자들, 교황주의자들은 하나님에게서 공로에 대한 보상을 기다리는 양심의 확신이 믿음이라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의를 전가해주시는 일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성화를 추구하는 것을 도와주시는 성령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은혜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우리의 어떠한 공로도 개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의 경륜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은혜를 성화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펠라기우스주의로 전락한 것이다. 그리고 칼빈에 따르면 펠라기우스와 극한 대립을 하였던 어거스틴도 그 표현방법에 있어서는 은혜를 성화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가르침은 매우 훌륭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만은 동의할 수 없다고 한다.
(4)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데 대한 성경의 판단(3.11.16) 성경은 믿음에 의한 의에 대하여 우리 자신의 행위를 보지 말고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완전성만을 보라고 한다. 칼빈은 그래서 참으로 칭의의 순서는, 우선 하나님께서는 그의 순결하고 값없이 베푸시는 인애하심으로써 죄인을 포용하시며, 그 다음에 사람이 하나님의 인애를 느끼게 하셔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절망을 느끼던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에서 구원 전체의 근거를 얻도록 하신다고 말한다.
(5) 믿음의 의와 율법의 의에 대한 바울의 견해(3.11.17)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과 복음을 비교하여,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롬 10:5) 말한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롬 10:6)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으로 믿으면”(롬 10:9) 구원을 얻는다고 선언한다.
따라서 바울의 이 말 속에는 율법은 행위의 의를 돌리고, 복음은 행위의 도움을 받지 않고 거저 의를 준다고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음의 약속은 값없이 주는 것,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하는 것이지만, 율법의 약속은 행위를 조건으로 삼는 것이다-이것이 그 차이점인데, 보통사람뿐 아니라 가장 완전한 사람이라도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 없다.
(6) 칭의는 행위에 대한 보수가 아니고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3.11.18)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 3:11-12; 합 2:4). 바울은 율법과 믿음은 다르다고 말한다. 믿음의 의를 얻기 위하여 별도의 행위의 공로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과 율법이 다른 점은 의를 행위에 연결시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만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행위의 도움이나 의를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따라 빈손으로 의를 받게 되는 것이다.
(7) “믿음만으로”(3.11.19) 궤변가들은 다양한 트집을 잡지만, 칼빈은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롬 3:28)는 것 이외에 다른 그 무엇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고 본다. 사람들은 “만”(only)이란 말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이 말을 첨가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거저 주시는 의가 아니면 믿음에서 오는 의라고 할 수 없다고(롬 4:2) 주장하는데, 이 말에 대하여 그들은 어떻게 변명할 수 있을까? 그 외에도 칼빈은 롬 1:17, 3:21, 3:24, 3:28을 통해서 이를 분명히 하면서, 이에 반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롬 3:20)이므로 의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고 분명히 말한다(그외 참고로 롬 4:15, 롬 4:4-5, 롬 3:27, 갈 3:21-22).
(8) “율법의 행위”(3.11.20)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의가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이 부분을 강조하는 무리들에 대하여, 칼빈은 무지한 자들이 트집을 잡는 것이라 말한다. 특히 이들 중에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만이(갈 5:6) 의롭게 한다는 사도의 고백을 따라,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므로 의는 사랑(caritas)에 의존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이 의를 얻게 하는 믿음의 힘이 사랑을 행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 참으로 믿음이 의를 얻게 하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도록 인도하기 때문이고 그 외의 방법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롬 4:4)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가 입은 믿음의 의는 당연히 은혜를 베풀어야 할 경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의를 부여하는 곳에서만 인정된다.
4. 다만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죄가 용서된다(2.11.21-23)
(1) 칭의와 화해와 죄의 용서(3.11.21) 믿음의 의는 하나님과의 화해이며, 이 화해는 곧 죄의 용서이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를 다시 받게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원수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그 오점을 씻길 때이므로, 이런 점에서 “의”는 한 마디로 “죄의 용서”라고 부를 수 있다.
(2) 칭의와 죄의 용서 사이에 있는 긴밀한 관계를 성경에 의하여 증명함(3.11.2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여기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바울사도는 의와 화해를 서로 구별하지 않으며, 죄의 용서와 의를 연결하여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근거로 얻는 의는 값없이 주시는 것이라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의 의는 완전히 덕성에 있지 않고 죄의 용서에 있다”고 했으며, 베르나르드(Bernard)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의다. 그러나 사람의 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스도는 죄의 사면에 있어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 그러므로 그의 자비로 용서를 받는 자들만이 의롭다”고 말한 데서도 죄의 용서와 의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다.
(3) 우리 자신이 의로운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것이다(3.11.23) 사도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고 했는데,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의 의는 우리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우리가 의를 소유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기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사람이 자신만으로서는 의롭지 않으나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전가되며 전달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과 같다.
육신의 연약은 행위를 방해하나 믿음의 광채는 죄의 용서를 얻게 하며 행위의 과오를 덮는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구원을 얻으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취로 좋은 냄새를 풍기며, 우리의 악을 그의 완전성으로 덮고 묻어버려야 한다.
3.12 우리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칭의의 교훈을 깊이 확신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를 우러러보며 생각해야 한다.
1. 하나님의 존엄성과 완전성에 비추어 칭의를 논함(3.12.1-3)
(1)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아무도 의롭지 않다(3.12.1) 칭의를 말할 때는 인간 법정의 공의가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 법정의 공의를 전제로 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완전해서 모든 부분이 완전무결한 것, 아무 부패나 오명이 없는 것이 아니면, 아무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고한 선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능력과 기사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 앞에서, 너무나 불완전하고 미련한 우리 인생이 어찌 담대히 설 수 있겠는가?
성경은 인생에 대하여,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러 죽을 자이겠느냐 조석 사이에 멸한 바 되며”(욥 4:17-20),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욥 15:115-16)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비쳐 보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공포와 고민만이 넘쳐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저주 받기에 충분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칼빈은 모든 사람이 하늘 재판관 앞에서 자기의 죄책을 인정하며, 용서를 받고자 기꺼이 엎드려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칭의 논의 전체는 어리석고 무력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
(2) 사람 앞의 의와 하나님 앞의 의(3.12.2) 우리가 태양을 볼 때 그 태양의 엄청난 광채로 말미암아 시력이 마비되는 것을 경험한다. 이처럼 정작 우리가 무엇을 판단하고 식별할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고 자부하지만, 태양빛조차도 비길 데 없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앞에서는 한없이 보잘 것 없고 무력한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성령의 조명을 따라 인간의 본성을 바로 직시하게 되면,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욥 9:2-3)라고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행위로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다.
(3) 진정한 의의 증인 어거스틴과 베르나르드(3.12.3) 어거스틴(Augustinus)은 “경건한 사람은 모두 이 썩을 육신의 짐을 지고 현세의 생명의 연약함 중에서 신음하면서 한 가지 의망을 품고 있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시며,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셨다는 것만이 그 희망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베르나르드(Bernard)는 “구주의 상처를 제외한다면 약한 자가 안전하고 든든하게 쉴 곳이 어디 있는가?” “구주의 힘이 강할수록 더욱 안심하고 거기서 산다.”…“나는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노래할 것인가?” “오, 주여, 저는 당신의 의만을 기억하겠나이다.”라고 했다.
2.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적인 자기비판은 선행이 있노라는 생각을 일체 버리게 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게 만든다(3.12.4-8)
(1) 하나님의 엄숙한 심판을 생각하면 모든 자기 기반이 없어진다(3.12.4) 밤에 찬란한 별들이 태양 앞에서 빛을 잃는다면, 사람의 가장 희귀한 순진성일지라도 하나님의 순결과 비교할 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지금 밖에 보이는 선행만을 존중하며 자랑하지만, 하나님의 순결성 앞에서는 그런 것이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한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순결한 의지뿐이다.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속이며 자기에게 아첨하는 그 위선도 같은 운명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같이 진지하게 진정한 의미의 의의 규준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행위를 그 자체의 가치대로 판단한다면, 모두 쓰레기와 오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보통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순전히 불의이며 정직이라고 보는 것은 부패이며, 영광으로 여기는 것은 치욕이다.
(2) 모든 자기 찬양을 버리라(3.12.5) 하나님의 완전성을 생각해 본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와서, 자기에 대한 아첨이나 맹목적인 사랑을 일체 버리고, 자기를 검토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사람은 자기가 쓰고 있는 의의 가면 때문에 우쭐해 하지만, 주께서는 마음속에 숨어 있는 불결을 저울에다 다신다. 그러므로 자기 검토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심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불러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욥 25:4, 6)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자신의 처지를 망각함으로 인하여 구속의 은혜를 모르는 인생은 가장 불쌍한 존재이다. 그런데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선 교만한 마음을 철저히 꺾지 않는다면, 속고 있는 것이다. 여기 유명한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약 4:6; 잠 3:34).
(3) 하나님 앞에서는 무엇이 겸손인가?(3.12.6) 칼빈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하게 되는 방법은 “철저하게 가난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자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라고 반문하면서, “자기가 아직 무엇을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을 겸손이라 부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 겸손이 필요한가? 그리고 그 태도 또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칼빈은 이 문제에 대하여 첫째로, 우리는 모든 자랑을 버리고 완전히 겸손하게 되지 않으면 우리 앞에는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닫힐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둘째로, 이 겸손은 어떤 점잖은 행동으로 우리의 권리의 털끝만한 부분을 주에게 양보하는 것과도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4) 그리스도는 의인을 부르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신다(3.12.7) 우리의 지존하신 주께서는 말씀으로 하는 설명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비유로 올바른 겸손의 모습을 그려 보이신다. 즉, 주께서는 세리와 바리새인의 태도를 비교하면서,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고 하심으로써(눅 18:13), 세리를 통한 겸손의 모범을 실물교육으로 보여 주셨다.
바리새인과 같이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사람은, 그가 하나님 앞을 떠날 때에 하나님을 불쾌하게 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마 9:13). 그렇기 때문에 세리와 같이 자신의 처지를 알아 완전히 겸손한 자리로 나아갈 때에,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마 11:28)라는 은혜를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5)하나님 앞에서의 교만과 자기만족은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막는다(3.12.8)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면, 우리는 모든 교만과 자기만족을 버려야 한다. 자기의 의를 미련하게 믿을 때, 하나님 앞에 추천할 만한 공로가 있노라고 생각할 때에, 우리는 교만하게 되고 자기만족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불신하는 생각이 깊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충분히 믿을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마음이 우선 우리 안에서 타도되지 않으면, 주를 향하여 충분히 비약할 수 없을 것이며, 우리 자신 안에서 이미 절망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한 위로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완전히 뽑아버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만 믿고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을 준비가 된다. 자기를 비우는 사람은 -즉 없는 의를 비우는 것이 아니라, 허무한 가짜 의를 비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의 열매를 분배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만족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것이다.
3.13 거저 주시는 칭의에 관하여 유의할 두 가지 사항
1. 칭의는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이 되고, 계시는 그의 공의에 도움이 된다(3.13.1)
(1) 칭의와 관련하여 두 가지 일에 유의해야 하는데, 그것은 먼저 주의 영광에 손실이나 지장이 없게 해야 하며, 그 다음으로 우리의 양심이 주의 심판대 앞에서 평화로운 안식과 고요한 평온을 느끼게 해야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시는 것이라 증거한다(롬 3:25). 그리고 나아가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6)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를 변호할 구실이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소간 손상시킬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고 하였다.
(2)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 렘 9:24). 이 말씀은 우리가 주만을 자랑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며(고전 1:30-31),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반역하며 하나님의 영광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2.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다(3.13.2)
(1) 우리는 자신에 대한 자랑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을 자랑할 수 없다. 바꿔 말하면 누구든지 자기를 자랑하면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보편적 원칙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의로운 행위와 힘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여호와께서 온 것임을 확인하고, 이 사실을 단순히 고백정도가 아니라 맹세를 해야 한다고 칼빈은 지적한다.
(2) 의에 대한 모든 논의에서 우리는, 의에 대한 찬양을 전적으로 주의 소유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베드로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고 하였는데, 그의 의도는 분명히 신자들의 귀에 하나님께 대한 찬양만이 들려, 육에 붙은 모든 자만을 압도하며 침묵시키게 하려는 것이다.
(3) 사람이 의의 한 부스러기라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때에 그는 불가피하게 모득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의의 영광을 그만큼 줄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자기 의를 보아서는 양심에 평안을 얻지 못한다(3.13.3)
(1)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의의 선물이 아니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무한한 추악 속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가장 완전한 사람이라도 자기의 양심 속으로 깊이 내려가서 자기가 한 일을 검토한다면, 그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자기와 하나님 사이의 일이 모두 잘된 듯이 달콤한 안도감을 즐길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고민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인가? 행위대로 판단한다면 그는 정죄를 받아야 할 근거를 자기 속에 느낄 것이다.
(2) 그러나 성실하게 자기를 검토하는 신자들에게는, 위선에 사로잡혀 자화자찬하며 제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과는 다른 근심과 고민을 한다. 즉,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면 무거운 빚이 아직도 자기를 누르고 있으며, 자기 앞에 제시된 조건과는 거리가 먼 것을 깨닫고 절망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근심과 고민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흔들리거나, 변하거나, 상하로 동요하거나, 주저하거나, 불안해하거나, 망설이거나, 절망하거나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변함없고 완전한 확신으로 마음을 강하게 하며, 쉴 곳과 설 곳이 있다는 것이다(고전 2:5; 고후 13:4).
4. 자기의 의에 유의하는 것도 약속을 무용하게 만든다(3.13.4)
(1) 우리의 공로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의 자비하심이 구원을 이루게 하는 원천이다. 따라서 약속은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확고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거저 부르시며 의롭다하신 것이므로, 신앙은 원래 눈을 감고 귀를 곤두세우고 하나님의 약속만을 들으려고 애쓰며, 사람의 가치나 공로를 전연 생각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2) 신자들은 죄의 용서를 받을 때까지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시면서 수행하신 속죄 행위가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었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떨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의 심한 고통에서만 우리의 평화를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사 9:6), “우리의 화평”(엡 2:14)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통해서만 우리의 양심의 모든 동요를 진정시킬 수 있다.
5.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믿어야만 양심이 평안하며 기도에 기쁨이 있다(3.13.5)
(1)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롬 5:1)고 확신하지 않으면 양심의 고요한 기쁨을 유지할 수 없다. 동시에 이 확신의 근거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다(롬 5:5).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됨을 확신하게 될 때, 우리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 39)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에 이르게 된다.
(2) 칼빈에 따르면, 칭의에 관해서 믿음은 수동적인 것에 불과하다.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일에 무엇을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받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3.14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
1. 자연 상태의 인간은 죄로 죽었으며 구속될 필요가 있다(3.14.1-6)
(1) 칭의와 관련하여 인간은 네 종류로 나누인다(3.14.1) 칼빈은 칭의 문제를 분명하게 논의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네 종류의 인간 유형으로 분류하고, 그에 따른 일생동안 어떠한 의를 가지는가를 검토하고 있다.
즉, 그는 사람은 (1) 하나님을 전연 모르고 우상 숭배에 파묻혀 있거나, (2) 성례전에 참가하게 되었으나, 불결한 생활을 계속하여 입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행동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거나, (3) 그 사악한 마음을 헛된 외식에 감추는 위선자이거나, (4)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하여 진정한 성화에 관심을 가지는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첫째 경우에 있어서, 사람을 그 천품에 따라 판단한다면, 머리로부터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선한 것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렘 19:9; 창 8:21; 시 94:11; 롬 3:18); 갈 5:19-21).
(2) 불신자들의 덕행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3.14.2) 불신자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현저한 재능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래서 칼빈에 따르면, 사회에서 유덕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많이 주시는데, 이것은 그런 덕의 겉모습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진정한 의를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해서 비록 외면적이며 가장한 의일지라도, 그에 대한 현세적인 보상은 반드시 주신다는 것이다.
(3) 진정한 믿음이 없으면 진정한 덕도 없다(3.14.3) 어거스틴(Augustinus)는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 종교에서 멀어진 사람은, 그 덕망이 아무리 높을지라도 그 마음이 오염되어 하나님의 선한 일을 더럽히기 때문에, 상보다도 벌을 받을 것이 마땅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의와 극기와 우정과 절제와 용기와 지혜로 인간 사회를 유지하지만 하나님의 이 선한 사업을 심히 망칠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이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선행에 대한 진지한 열성보다도 단순한 야심이나 이기심이나 그 밖의 악한 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지혜가 명하는 목표를 향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이 하는 일을 보기 좋은 것 같지만, 그 패악한 의도로 보아서 죄일 뿐이며 진정한 의는 그들에게 없었다.
(4) 그리스도가 없으면 진정한 거룩도 없다(3.14.4) 하나님의 아들을 떠나서는 생명이 없기 때문에(요일 5:12),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또는 무엇을 하든지 간에, 평생 멸망으로 또 영원한 죽음의 심판으로 급히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떠나서는 성화도 없으므로,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은 사람이 생각하거나 계획하거나 실행하는 것이 모두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어거스틴도 “우리의 종교는 의와 불의를 행위의 법에 의하지 않고 믿음의 법에 의해서 구별한다. 믿음이 없으면 선행 같은 것도 죄로 변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5)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의는 은혜에서 오며, 아무리 선한 행위일지라도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3.14.5)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은혜를 베풀만한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것은 전연 찾으실 수 없지만 우선 너그러우심으로 값없이 사람에게 오신다고, 성경은 도처에서 가르친다(요 5:25; 고후 5:17; 엡 2:4-5; 롬 4:17; 욥 41:11).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순전히 부끄러운 빈곤과 허무 이외에 어떤 것을 가지고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언급한다(롬 11:35).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행위에 의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엡 2:8-9), 하나님의 자비만으로 중생하여 영원한 생명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에게 털끝만한 의도 없다고 말한다(딤후 1:9; 딛 3:4-5, 7). 바울이 이처럼 말한 것은, 만일 우리의 행위가 우리를 의롭다 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거짓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6) 사람은 자기의 의를 위해서 아무것도 공헌할 수 없다(3.14.6) 아퀴나스(Thomas Aquinas)나 스코투스(Duns Scotus)의 글에 따르면, 아무도 그리스도께로부터 완전한 구속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구속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행위에서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칼빈은 그런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가기까지는 암흑과 죽음의 상속자이며 하나님의 원수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불결을 깨끗이 씻는 일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 일을 하시기까지는 실현되지 않는다(고전 6:11). 따라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르는 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 어떤 행위의 공로가 개입할 수 없는 것이다.
2. 위선자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은 정죄를 받는다(3.14.7-8)
(1) 의는 심령의 문제이다(3.14.7) 칼빈은 이 문제에 대하여, 이미 앞에서 제시한 (2) 성례전에 참가하게 되었으나, 불결한 생활을 계속하여 입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행동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거나, (3) 그 사악한 마음을 헛된 외식에 감추는 위선자로 분류되는 둘째와 셋째 종류의 인간 분류가 포함된다고 본다. 이 두 종류의 인간들이 아직 하나님의 영에 의해 중생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 불결한 양심이 증명하며, 또한 중생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따라서 그들은 아직 하나님과 화목케 되지 않았으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모든 불신자들은, 특히 모든 위선자들은 자기 마음속에 불결한 것이 가득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착한 듯한 행동을 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멸시하지 않으리라는 어리석은 확신을 품고 있다. 그러나 주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이런 허영을 명쾌하게 반박하신다(학 2:11-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율법의 어느 한 가지 의무를 행하면 그것은 자기의 의로 인정되리라 의심치 않지만, 주께서는 우선 심령이 깨끗하게 되지 않으면 이 행위에서 성결을 얻을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2) 사람과 행위(3.14.8) 율법을 지키는 시초는 하나님의 이름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는 가르친다(사 1:13-16). 그런데 이 시초가 배제되는 것은 모두 무익할 뿐만 아니라, 싫고 가증한 오물이 된다. 이제 위선자들이 가서 마음속에 악을 깊이 감춘 다음에,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는가 시험해 보라. 그들은 하나님을 더욱 노엽게 할 것이다.
참으로 성결하게 되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빛을 드러낼 행위를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의가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죄로 인정된다. 아무도 행위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고, 우선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때에만 그의 행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을 순결하게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하는 행위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신다. 다만 사람의 심령의 순결은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3. 중생한 사람들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3.14.9-11)
(1) 또 진정한 신자들도 자기 힘으로는 아무런 선한 일을 하지 못한다(3.14.9) 칼빈이 앞에서 분류한 네 번째 사람은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하여 진정한 성화에 관심을 가지는 자”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에 의해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며, 죄를 거저 사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한다. 동시에 하나님의 이 은혜는 큰 자비와 연결되는데, 이 자비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시며, 그 힘으로 우리의 정욕을 날로 더욱 더 죽이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 길을 걸으며, 자기를 잊고 교만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지만, 우리의 불완전한 자취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 겸손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성경은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전 7:20; 왕상 8:46).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라고 할 만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평생 한 일 가운데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을 선택하게 하라. 그에게도 어딘가 육의 부패한 냄새가 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성자로 일컫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행위 그 자체만으로 판단한다면, 공정한 보상으로서 치욕을 받아야 할 것뿐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2) 자신의 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율법의 엄격성을 오해하였다(3.14.10) 사람이 육신을 쓰고 사는 동안에는 완전할 수 없다. 야고보도 “누구든지…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한 것처럼(약 2:10), 율법을 완전히 지켜 자신의 행위를 의롭게 할 인생은 아무도 없다. 만일 우리 자신의 가치에 따라 우리를 판단한다면, 무엇을 계획하며 무엇을 실행하든 간에, 또 아무리 많이 노력하며 수고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죽음과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칼빈은 많은 사람들의 미련한 신념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죄의 용서를 한 번 우리의 의로 인정하신 것은, 우리가 과거 생활에 대한 용서를 받은 후에는 의를 율법에서 찾으라는 뜻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만이 가능케 하는 것이다.
(3) 신자들의 의는 언제든지 믿음에 의한 의다(3.14.11) 칼빈은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강력히 주장한다. 첫째로, 경건한 사람의 행위일지라도 하나님의 엄격한 판단에 따라 검토할 때는 결코 정죄를 면할 수 없다. 둘째로, 그런 행위가 있다고(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가정할지라도, 그것은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행위자 자신이 죄 짐을 지고 있어서, 그 행위도 곧 약화되고 오염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의가 인정된 것은 그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된 것임을 바울이 가르친다(롬 4:3; 엡 2:9). 그런데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중생한 사람의 의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한번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은 선행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며 선행의 공로에 의해서 받아들여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값없이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는 소식을 하루 이틀만 전하는 것이 아니며, 이 전도 사명은 교회 안에서 항구적인 것이라고 바울이 증거한 바와 같이(고후 5:18-19),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이시며,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영원히 효력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우리의 선행의 공로가 우리의 의를 이룰 자리를 내어 줄 여지는 없는 것이다.
4. 믿음에 의한 의에 대한 스콜라 학파의 항의와 성자들의 잉여공로설(剩餘功勞說)을 검토, 반박함(3.14.12-21)
(1) 반대자들의 핑계(3.14.12) 스콜라 학자들은, 사람이 그의 선행으로 의를 얻기에 충분한 고유가치가 없지만 “받아들이는 은혜”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고 하거나(Duns Scotus), 또는 행위에 의한 의가 항상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행위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일평생 죄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나, 그가 범한 불법은 잉여업적에 의하여 보상된다고 말한다(Thomas Aquinas).
(2) 잉여공로를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의 가혹함과 죄의 중대성을 오해하였다(3.14.13) 우리의 행위는 그 자체로는 확실히 우리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고 기뻐하실 만한 것으로 만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잉여업적”이 충분한 배상을 제공한다고 하는 그들의 상습적인 모호한 말은 건전한 생각이 못된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그 무엇으로도 보속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3) 우리의 의무를 완수하더라도 우리에게 영광이 되지 못하며, 또 완수할 수도 없다(3.14.14) 잉여업적을 자랑하는 것, 이것은, 명령받은 일을 모두 행한 후에도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고 부르며,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 17:10)는 교훈과 어떻게 부합할 수 있는가?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비록 나는 필요한 의무들의 일부를 이행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의무들보다 더 많이 행하도록 노력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항변은, 근거가 없다.
(4) 우리와 우리의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므로 잉여업적은 있을 수 없다(3.14.15) 잉여업적은 무가치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적도 없으며 시인하시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공로를 하나님 앞에서 제출하다면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5) 행위를 믿거나 행위를 자랑하지 말라(3.14.16) 칼빈은 행위의 의를 믿거나, 행위를 자랑하는 이 두 가지의 해독을 모리 속에서 뽑아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결백에서 향기를 얻어 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악취를 풍긴다고 가르침으로써, 항상 우리에게 자신을 신뢰하지 말라고 권한다. 하나님의 긍휼로 용서를 받지 않으면 우리의 행위는 그의 진노를 일으킬 뿐이다.
(6) 행위는 결코 거룩의 원인이 될 수 없다(3.14.17) 철학자들이 사물을 형상하는 데 네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하지만, 그 어떤 원인 하나도 우리의 구원을 실현하는 데 원인이 될 수 없다. 성경은 도처에서, 우리가 영생을 얻는 동력인(動力因)은 하늘 아버지의 자비와 거저 주시는 사랑이라 선언하며, 질료인(質料因)은 그리스도시다. 그는 순종으로 우리를 위해서 의를 얻으셨다. 형상인(形相因)은 믿음이며, 목적인(目的因)은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며 하나님의 인애를 찬양하는 것이라 증거한다(요 3:16; 롬 3:23-25; 엡 1:3-14).
(7) 그러나 선행을 보면 믿음이 강화될 수 있다(3.14.18) 그리스도인은 행위의 공로가 구원에 대한 보조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된다. 그러나 칼빈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표징(表徵)에 의해서 이 믿음을 강화할 수 있다는 점은 긍정한다.
(8) 행위는 소명의 결과이다(3.14.19) 그러므로 성도들이 양심의 결백을 느껴 믿음을 강화하며 기뻐할 때에, 그들은 소명의 결과를 보고 자신들이 주의 자녀로서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길이는 우리의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내포한다. 따라서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며,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날 수 없다.
(9) 행위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신자들의 확신의 기초가 될 수 없다(3.14.20) 신자들은 자신의 행위를 의지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행위의 공로로 돌릴 수 없음을 알았다. 그들의 행위는 오직 하나님의 선을 인식시키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자기들이 선택된 것을 알게 하는 부르심의 표징으로 여길 뿐이다. 또한 그들이 행위를 믿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얻은 의를 조금이라도 멸시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그것은 행위에 대한 확신은 값없이 받은 의를 의존하며, 이 의가 없으면 그 확신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10) 간혹 선행을 하나님의 은혜의 이유로 말하는 의미(3.14.21)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동력인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며, 질료인은 아들이신 하나님의 순종이며, 형상인은 성령의 조명인 믿음이며, 목적인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원인은 주께서 행위를 종속적인 원인으로 삼으시는 것을 막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신자들이 선행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선행이 구원의 원인 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원인을 찾아야 할 때에는, 행위에서 피난처를 구하라고 명령하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바라보게 하신다.
3.15 행위의 공로에 대한 자랑은 의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구원의 확신을 파기한다.
1. 의롭다함을 얻으려면 인간의 공로가 필요하다는 교리는 성경뿐만 아니라, 어거스틴과 베르나르드도 반대한다(3.15.1-4)
(1) 잘못된 물음과 참된 물음(3.15.1) 의가 행위에 의해서 지탱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붕괴되지 않을 수 없으며 의는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에,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따라서 오로지 믿음에 국한된다. 행위의 의는 율법을 완전무결하게 준수해야만 성립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칭의와 행위의 칭의를 문제로 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 다소 공로가 있다는 듯한 구절들을 인용한다.
(2) “공로”란 말은 성경에 없으며, 위험한 말이다(3.15.2) 하나님의 심판에 대립하는 개념으로서 사람의 행위에 “공로”라는 말을 처음으로 적용한 사람은 진지한 믿음에 해독을 주었다. “공로”라는 개념은 심히 강한 자존심을 표시하는 말이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가리며, 사람에게 패악한 자만심을 불어넣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거스틴(Augustinus)는 “아담으로 인해서 없어진 인간의 공로는 여기서 잠잠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배하게 하라.”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선한 것은 모두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 그는 자기에게 있는 칭찬할만한 것도 자기의 공로에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에서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하였으며, 크리소스톰(Chrysostom)도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를 불러주신 후에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빚을 갚는 데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들은 은혜와 인자하심과 위대한 관용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한 베르나르드(Bernard)는 “무엇 때문에 교회는 공로에 관심을 두는가? 하나님의 목적이야말로 자랑할 더욱 견고하고 확실한 이유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다. 약속하신 것을 실행하실 것이다(딤후 2:13). 그러므로 ‘무슨 공로로 우리가 은혜를 바랄 수 있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 특히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는 말씀이(겔 36:22, 32) 있기 때문이다. 공로로써는 불충분하다고 알기만 하면 그것은 충분한 공로가 된다.”라고 말했다.
(3) 선행의 가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온다(3.15.3) 우리의 모든 행위는 불결한 것이 가득함으로 하나님의 주시하심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선행을 주시고, 그것을 “우리의 것”이라고 부르시며, 그것을 받아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상까지 주시겠다고 증거하신다. 우리로서는 이렇게 위대한 약속에 감격해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않도록(갈 6:9; 살후 3:13) 용기를 내며, 하나님의 큰 친절을 충심으로 감사하게 받아들일 의무가 있다.
행위에 참으로 칭찬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이다. 당연히 우리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조금도 없다. 이 점을 진심으로 성실하게 인정한다면, 공로를 믿는 생각이 일체 사라질 뿐만 아니라, 공로라는 개념까지도 없어질 것이다.
(4) 반증에 대한 대답함(3.15.4) 궤변가들은 “하나님께 대한 공로”가 성경에 있다고 지적한다. 즉, 그들은 “행위의 공로에 따라 각 사람을 위하여 자비가 자리를 마련하리라”(집회서 16:14),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라는 말씀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집회서는 외경일 뿐만 아니라 그 권위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인용한 집회서의 원문을 정확히 번역하면 “그는 모든 자비로운 행위에 자리를 주시리라. 각 사람은 그 행위에 따라 얻으리라”라는 내용이다. 따라서 “공로”라는 말은 여기서 사용되고 있지 않으며, 히브리서는 더더욱 이 말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있는 한도 이상으로 행위를 중요시하지 않으면 충분하다. 우리의 선행은 도저히 하나님의 노여움을 진정시키거나, 우리에 대한 자비를 일으킬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를 검토하실 때에, 그 최고의 법에 의하시지 않고 자비로 판단하시기 때문에, 마치 완전히 순결한 것같이 용납해주신다. 또 그렇기 때문에 비록 가치가 없는 행위지만, 이 세상뿐만 아니라 내세에서도 무한한 은혜를 보상으로 주신다.
2. 사람의 공로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대치하는 데 반대함(3.15.5-8)
(1)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기초이며,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시다(3.15.5) 기독교의 교리를 형성하려는 사람은 고린도 신자들 사이에 닦아 놓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안에서만 가능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떤 터인가? 그는 우리의 구원의 시초였고 완성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인가? 그는 길을 열어주셨을 뿐이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해야 하는 것인가?
칼빈은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의를 가진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든든하게 터로 삼은 사람이라 말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보내지신 것은 우리가 의를 얻는 것을 돕기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의가되시기 위함이며”(고전 1:30), “창세전에” 영원 전부터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지 않고 “그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엡 1:4-5)는 말 속에서 이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칼빈에 따르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 그의 것이 모두 우리의 것이며, 그의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가졌으므로, 우리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골 1:14-20; 롬 8:17; 갈 4:5-7; 롬 5:9-10; 요 10:28; 롬 11:19; 마 28:18). 따라서 우리가 주 안에서 성전이 되기를 원한다면(엡 2:21),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서서 건축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2) 로마 교회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힘과 영광을 소멸한다(3.15.6)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터”위에 세워져야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우리의 공로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전제가 결코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각종의 “도덕적”인 선행을 발견해서 그것을 행하면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기도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다.
스코투스(Duns Scotus)는 그리스도는 그의 공로로 우리를 위하여 최초의 은혜를 주셨는데, 그 은혜는 우리가 공로를 세울 기회를 주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제공된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우리가 현재 할 일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유익은 각 개인이 자력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 주신 것뿐이라고 가르친다.
(3) 로마 교회의 신학은 어거스틴이나 성경을 이해하지 못한다(3.15.7)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형식적인 신앙’(fides informata)은 사랑의 행위가 없는 신앙이며, ‘내실적 신앙’(fides formata)은 사랑을 행하는 신앙이라 하였는데, 이러한 영향 하에서 소르본느(Sorbonne) 학파는 ‘내실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고백은 하지만, 뒤에 이것을 설명할 때 선행은 의롭다 하는 능력을 믿음으로써 얻어진다고 하는 근거로 내세운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선행은 자유의지의 능력으로 온다고 주장한다. 그들도 첫째 원인이 은혜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유의지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자유의지에 의하여 모든 공로가 성립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아퀴나스는 “첫째 원인이 이차적인 원인들에 미치는 영향이 곧 하나님의 도움이다.…하나님은 우리의 의지의 활동을 깨뜨리지 않으신다. 참으로 그 활동들의 원인이 되신다”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그들 소르본느 학파들은 선행을 가르치고 또 가르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행위를 친절하게 고려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양심을 가르친다.
그러나 칼빈은 공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롬바르드(Lombard)를 경계하면서도, 그가 “우리 자신의 공로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결코 자랑하지 말라”는 말에는 동의를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공로를 말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교훈으로, 분명하게 신자들의 마음에 기쁨과 위로를 준다고 칼빈은 말한다.
(4) 바른 교리를 기초한 충고와 위로(3.15.8) 우리는 유일한 기초에서 손가락 넓이만큼이라도 어긋나서는 안 된다. 토대를 일단 놓으면 현명한 공사 감독은 그 위에 똑바로 건물을 짓는다. 자기를 부인한 사람은 악의 모든 뿌리를 끊어버렸고, 다시는 자기의 것을 구하지 않는다. 십자가를 진 사람은 모든 인내와 온유를 실행할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보이신 모범에는 인애와 온유뿐만 아니라, 경건과 거룩에 관한 모든 의무도 포함되어 있다.
칼빈은 이처럼 우리에게는 인애와 온유, 경건과 거룩을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그 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위안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고후 4:8-10),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 8:38-39)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그의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모두 “거듭나며”(벧전 1:3),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고후 5:17) 죄의 나라에서 의의 나라로 옮겨진다고 말하는 것을 주의하길 바란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증언으로 그들의 부르심을 굳게 하며(벧후 1:10), 나무와 같이 그들의 열매에 의해서 판단을 받는다는(마 7:20, 12:33, 눅 6:44) 것에 유의할 것을 강조한다.
3.16 이 교리를 겨냥한 교황주의자들의 거짓된 중상에 대한 반박
1. 칭의의 교리는 선행을 배제하는가(3.16.1)
(1) 이신칭의 교리가 사람의 선행을 폐기하는 것으로 비난하는 자들이 있지만, 사람은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행위의 공로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점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선행을 배제하거나 무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믿음과 선행이 굳게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칼빈은 여전히 칭의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임을 분명히 한다.
(2) 그러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인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면 동시에 거룩함도 붙잡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 1:30). 의와 거룩함,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참여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 참여한다는 것은 의에 못지않게 거룩함을 포함한다. 따라서 의와 거룩함은 구별할 수 있지만, 분리시킬 수는 없다.
2. 칭의의 교리는 선행에 대한 열성을 억누르는가(3.16.2)
(1) 교황주의자들은 우리가 공로에 대한 관심을 빼앗을 때에,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선을 행하려는 생각을 버리게 한다고 비난한다. 반면에 그들은 보상으로부터 공로를 추론한다. 즉, 그들은 보상을 받으리라는 소망을 보여주지 않으면, 사람은 바른 생활을 하려고 주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잘못 되었다. 하나님은 노동을 파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드리는 경배와 값없이 하는 사랑을 받고자 하신다. 그리고 보상을 받을 희망이 완전히 끊어진 때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용납하신다.
(2) 따라서 사람을 정녕 자극해야 된다면, 우리가 구속과 부르심을 받은 목적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한 자극을 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이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으면 배은망덕이 될 것이며(요일 4:10, 19),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죽은 행실을 떠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때문이다(히 9:14).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작정(살전 5:9)과 그 거룩한 부르심(딤후 1:9)을 따라 거룩한 생활로 나아가도록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의 모범으로 보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신다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벧전 2:21; 요 13:15, 15:10).
3.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자비가 행동의 동기가 된다 : 행위는 종속적이다(3.16.3)
(1) 교항주의자들이 하는 보상과 공로와 달리, 모든 사도의 글에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모든 선한 일을 가르쳐주는 충고와 격려와 책망의 말이 가득하다(딤후 3:16-17). 그러면서도 그들은 결코 공로를 말한적이 없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자비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의 의를 입지 않고서는 우리가 생명을 얻을 소망이 전연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그의 서신 전체에 걸쳐 논한 다음에, 구체적인 권고를 하는 대목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권고한다(롬 12:1).
(2) 그래서 칼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교리를 첫 자리에 주지 않는다면, 공로를 지지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출발점은 그의 자비를 신뢰하는 데 있을 뿐 아니라, 교황주의자들과 달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공로가 아닌 죄의 용서를 근거로 한 것임을 말한다.
4. 칭의의 교리는 죄인을 선동한다(3.16.4)
(1) 우리가 죄를 값없이 용서받는 것이 의라고 주장할 때에 사람들은 죄를 짓도록 선동을 받는다고 말하지만, 이는 중상 중에서도 제일 무가치한 것이다. 우리는 죄의 용서가 너무도 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으로 값을 치룰 수 없고, 따라서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밖에 받을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에게는 값없이 오는 것이지만, 그리스도 편에서는 값없이 주시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가장 거룩한 피를 흘리셔서 많은 값을 치르고 사신 것이다.
(2) 교황주의자들은 무가치한 보속으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진정시킬 수 있는 체 하지만, 그 죄책은 너무나 무거워서 이런 가벼운 쓰레기로 대속할 수 없으며, 또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너무나 중대한 범과여서 이런 무가치한 보속으로는 사면을 받을 없다. 우리의 죄를 사하는 사면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피만이 가능케 한다. 우리의 의는 너무나 귀한 것이어서 어떤 행위에 의한 보상도 충분히 대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비에서 피난처를 얻을 수밖에 없다.
3.17 율법과 복음의 약속과의 조화
1. 율법과 관련된 행위 : 고넬료의 예(3.17.1-5)
(1) 스콜라 논법을 서술하고 논박함(3.17.1) 이신칭의에 대하여 스콜라 또는 교황주의자들은 선행에 반대한다면서 비판한다. 그러나 행위에서 칭의를 분리하는 것은 선행을 하지 말라든가, 선행이 선하지 않다고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행에 의지하며 그것을 자랑하며 그것으로부터 구원이 온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확신과 우리의 자랑과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닻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우리의 그리스도시며, 우리도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천국의 후사들이 되어, 우리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한 복락을 바라볼 수 있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신칭의에 대하여, 주께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하신 율법의 약속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그 약속이 완전히 폐지되기를 원하는가 또는 완전히 유효하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그들은 율법에서는 복과 저주(신 11:26), 그리고 생명과 사망이 우리 앞에 제시되었다는 모세가 증거를 근거로, 이 복이 무용, 무익하게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칭의가 믿음에만 의한 것이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율법을 통해서는 전인류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으며, 이 저주와 진노에서 해방되려면 율법의 권능을 떠나서, 이를테면 율법에 대한 노예 상태에서 풀려 영적인 자유를 얻을 필요가 있다. 이 자유는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붙잡을 때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율법이 한 일은 우리의 양심을 찌르고 괴롭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2) 우리는 행위로 율법의 약속을 실현시킬 수 없다(3.17.2) 율법의 약속에는 율법을 지킨다는 조건이 붙어 있고, 율법을 지켜야만 약속도 성취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조건은 결코 지킬 수 없다. 그래서 주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 의의 일부를 우리의 행위에 맡기고 남은 부분을 자신의 사랑으로 보충하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성취된 그리스도의 의로서 그리스도만을 지정하신다.
율법에는 -만일 행위의 공로를 얻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자비가 제시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자비는 결코 율법의 공로에 의해서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3) 율법의 약속들은 복음을 통해서 실현된다(3.17.3) 율법의 약속이 행위의 공로와 관련되는 동안에는 아무 유익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나, 복음의 약속으로 대치될 때에 이 약속은 죄를 값없이 용서한다고 선포함으로써 우리를 하나님께 용납될 만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까지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게 만든다. 이것은 바로 은혜이다.
그렇다면 은혜를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종들의 행위를 보시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을 포용하시며, 행위와 관계없이 다만 믿음의 중재에 의해서 그들을 자기와 화해시키신다는 것이다. 둘째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의 가치를 고려하시지 않고 다만 그의 아버지 같은 너그러우심과 선하심으로 우리의 행위를 영광의 자리에 끌어올리시며 다소의 가치를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셋째이유는, 이 행위들은 모두 부패한 것이어서 덕이라기보다 죄라고 인정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불완전한 점을 보시지 않고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는 것이다.
(4)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이중으로 용납을 받는다(3.17.4)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이중으로 용납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성경의 구절들을 서로 부합하도록 해석할 수 없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고넬료에게 말한 천사의 말을 왜곡해서, 천사가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늘에 상달되었다고 한 말을(행 10:31), 사람이 선행에 대한 열심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하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받아들이시는 유일한 이유는, 고넬료의 기도와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그대로 버려두면 완전히 멸망할 것을 아시고 그의 멸망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를 해방하려고 자비를 베푸시는 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째서 이 용납이 사람의 의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가를 그리고 사람은 이 위대한 은혜를 받을 가치가 전연 없는 가련한 죄인이지만, 그런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순수한 증거가 곧 이 용납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5)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중생한 자의 선행을 기뻐하시는가(3.17.5) 중생이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 말하는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시기 때문에 그들을 기뻐하시며 사랑하신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경건한 자들도 죽을 육에 싸여 있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죄인이며 그들의 선행은 아직도 불완전하며 육의 죄악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인에 대해서나 그 행위에 대해서 그대로는 받으실 수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포용하실 수 있다.
2. 칭의의 행위에 연결시키는 구절들을 검토함(3.17.6-15)
(1) 옛 언약에 있는 은혜의 약속과 율법에 있는 약속은 다르다(3.17.6) 칼빈은 은혜의 약속과 달리 율법의 약속이라는 또 한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후자는 엄밀히 말해서 율법의 시행과 직결된 것으로, 이 약속의 이름을 무엇이라 부르든지 명령을 지키는 사람을 위해서 그에 대한 보상이 준비되어 있다고 선포한다.
따라서 교황주의자 내지는 스콜라 학파는 이러한 성경구절에 기초하여 공로와 보상을 말하고 있으나, 칼빈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선대하신다는 말씀에 대하여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켜야 할 항구적인 의무를 지적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문을 성도들에게 열어주고, 하나님 나라에서 그들이 설 영원한 자리를 마련하는 제 일 원인은 자비하신 주께서 그들을 양자로 삼으셨고, 계속 보호하시기 때문이라 대답한다. 그리고 그 방법을 묻는다면 다윗의 시에(시 15:2) 묘사된 중생(重生)과 그 결과를 보아야 한다.
(2) 성경은 율법의 행위에 의한 “의”를 말하지 않는가(3.17.7) 성경은 여러 곳에서 명령을 지키거나 계약에 따른 의무이행을 바르게 하거나 또는 타인의 잘못에 대하여 정당한 응징에 대하여 의롭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신 6:25, 24:13; 시 106:30-31). 따라서 칼빈 역시 율법에 완전한 의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율법은 의만을 명령하므로, 율법의 입장에서 보면 율법에 있는 계명들은 그 하나하나 의로운 행위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율법 전체를 지키지 않으면 그 의에 도달하지 못하며, 율법을 범할 때마다 그 의를 깨트리게 된다.
칼빈이 율법의 약속에 의한 율법의 의를 포기하고 복음의 약속에 따른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말하게 된 것은, 율법의 의 그 자체에 결함이 있고 불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육이 연약하여 우리에게서는 율법의 의를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은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공로로 인한 보상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용서, 용납에 기초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의 은혜 이외에 달리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3)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는 이중의 가치가 있다(3.17.8)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롬 4:3; 갈 3:6).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데, 이는 그들의 행위가 율법으로나 양심으로나 다 치우쳐 어리석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행위에 의한 의에서 제외된다고 담대하게 결론을 내린다(롬 5장).
칼빈은 행위 자체에 어떤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과, 믿음을 따라 의가 확립된 후에 행위에 어떤 가치를 주느냐 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로 본다. 즉, 행위를 그 자체의 가치에 따라서 평가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하지 못하며, 사람은 자기의 어떤 행위를 믿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으므로, 행위의 도움이 일체 제거된 채로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죄를 용서받은 후에 따르는 선행은 그 자체의 가치에 의하지 않고 모든 결함은 그리스도의 완전성으로 덮이고, 모든 오점은 그리스도의 순결로 깨끗이 되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문제되지 않는다. 이것을 성경은 신자들이 행하는 선행은 의롭다고 간주된다. 바꿔 말하면, 의로 인정된다고 말한다(롬 4:22).
그래서 칼빈은 칭의를 “그리스도와 교제를 하게 된 죄인은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되어 죄의 용서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의 의같이 입고 하늘의 심판대 앞에 자신 있게 서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4) 이신칭의는 행위에 의한 의의 기초가 된다(3.17.9) 율법의 모든 계명을 완전히 준수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저주를 받는다고 율법이 크게 선포하고 있는 바와 같이(신 27:26), 한 두 가지의 거룩한 행위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다. 따라서 이신칭의가 행위에 의한 의의 시초이며 기초이며 원인이며 증명해주는 것이며 본체이다. 이 점에 대하여 교황주의자 또는 스콜라학파도 부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행도 의로 간주되므로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칼빈은 이신칭의가 전적으로 유지되지 않으면 행위의 불결이 폭로될 것이라면서, 사람이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으므로 그 자신이 의로울 뿐만 아니라, 그의 행위까지도 자체의 가치 이상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조금도 불합리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5) 죄가 용서된 후에야 행위가 용납된다(3.17.10) 교황주의자 또는 스콜라학파와 달리 우리의 행위로 죄를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죄가 용서된 후에야 행위가 용납된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을 때에 그리스도의 무죄로 우리의 불의가 덮여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의롭게 되는 것과 같이, 우리의 행위도 모든 허물이 그리스도의 순결로 묻혀 버리며 우리에게 책임이 돌려지지 않기 때문에, 의롭고 또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당연히 믿음으로만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까지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은 성경에서 격찬하는 모든 복도, 사람이 죄를 용서받고 복을 받기까지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사람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죄의 용서를 받음으로써 복을 받은 후에는 다른 복들도 자리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로 얻는 복은 최고의 또 가장 중요한 복일 뿐 아니라, 유일한 복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6) 야고보는 바울을 반대하는가(3.17.11) 야고보는 아브라함까지도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 아니냐”고 하며(약 2:21), 우리도 모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한다(약 2:24). 그렇다면 야고보의 이 말은 바울과 모순되는 말인가? 칼빈에 따르면, 야고보 사도 당시 신자가 마땅히 행할 일을 전연 소홀히 하면서도 거짓으로 믿는다고 자랑함으로써 그 불신앙을 노골적으로 폭로하는 사람이 많았다.
야고보는 여기서 이런 사람들의 어리석은 확신을 조롱한다. 그러므로 그의 의도는 진정한 믿음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이 경박한 사람들이 내용 없는 믿음의 모양만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며, 방탕한 생활에 자신들을 내맡기고도 태연한 그 어리석음을 폭로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의 비판자들의 견해와 달리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함으로써(약 2:14), 그 역시 이러한 믿음은 사람을 결코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밝혔다고 본다. 따라서 이신칭의를 비판하는 자들이 야고보의 말을 근거로 내세우지만, 이는 그들이 야고보 사도의 “믿음”에 대한 잘못된 오해에서 빚어진 것이라 칼빈은 비판한다.
(7) “의롭다함”이란 말을 야고보는 바울과는 다른 뜻으로 쓴다(3.17.12) 칼빈은 비판자들이 야고보의 “믿음”에 대한 오해도 있었지만, 나아가 “의롭다함”에 대한 오해도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즉,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이 의로 여기셨다”는 성경의 말씀(약 2:23)에서, “진정한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 사람들은 순종과 선행으로 그 의를 증명한다. 공상적이고 속이 빈 믿음의 가면만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요약하면, 그는 신자들을 향해서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의 열매가 있는 의를 요구한다. 그리고 바울이 우리가 행위의 도움이 없이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이 야고보는 선행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야고보는 믿음을 가진 체하며 믿음을 구실로 삼아서 선행을 경멸하는 자들의 사악한 확신을 분쇄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따라서 칼빈은 교황주의자 또는 스콜라학파의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야고보의 말을 왜곡하든지간에, 야고보의 말은 두 가지 개념을 표현할 뿐이라 한다. 즉 내용이 없는 겉으로만 믿는 체하는 것은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며, 신자는 이런 외형으로 만족하지 않고 선행으로써 자기의 의를 공표한다는 것이다.
(8) 로마서 2:13(3.17.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롬 2:13). 바울의 이 말은, 칼빈의 반대자들처럼 율법을 햄함으로 의롭다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율법을 경멸하면서도 자기들만이 율법을 아노라고 주장하는 자들이었기에, 율법을 말로만 하지 말고 준수하도록 노력하라고 경고한 것이다.
율법을 정한 목적은 그 소리를 듣기만 하면 사람들이 의롭게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순종한다면, 그리고 그런 때에 한해서 사람이 의롭게 되게 하려는 것이지만, “무릇 율법 없이 범죄 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 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라는 (롬 2:12), 바울의 말처럼 결코 행위로는 의로울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은 반대논법으로 표현한 것이라 칼빈은 지적한다.
(9)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행위에 호소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3.17.14)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시 7:8),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시 17:1)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자들이 자신의 정진함과 성실함을 듣고 판단해 달라는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칼빈의 반대자들은 이 말들을 볼 때 행위로 인한 의로움을 인정한 것으로 그들의 견해를 내세움으로써 이신칭의를 공격하려고 하지만, 이 말의 의미를 칼빈은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경건한 사람들은 불경건한 사람들의 위선에 비교해서, 하나님을 증인과 심판자로 모시고 자기의 결백을 변호하지만, 하나님만을 상대로 할 때에는 이구동성으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시 130:3),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라고 주르짖는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불신하고 기꺼이 노래한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10) 신자들은 완전한가(3.17.15) “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잠 12:28),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겔 18:9, 21, 33:15)라는 말씀에서 볼 때, 행위의 의로움을 부정할 수는 없다.l 그러나 칼빈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이렇게 완전한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라고 말한다. 사실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이처럼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주께서 은혜의 언약으로 받아들이신 사람들에 대해서, 그 행위의 공과(功過)를 검토하시지 않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안아 주시기 때문이라 칼빈은 말한다.
스콜라학파의 사람들은(Duns Scotus, Ockham) 율법의 언약에 따라서 판단한다면 행위의 구원을 얻기에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받아 주심’(gratia acceptans)으로 인해서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가치로 승격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칼빈은 견해에 반대한다. 그 대신에 어거스틴(Augustinus)을 따라 신자는 모두 의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행해서 노력하며,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날, 흠이나 책망 받을 것이 없도록 해야 한다(골 1:22). 그러나 현세에서는 가장 훌륭한 계획도 진보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이 죄의 몸을 벗어버리고 주와 완전히 결합될 때뿐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어거스틴이 “우리가 성도들의 덕을 완전하다고 할 때에, 이 완전성에는 성실하고 겸손하게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도 포함된다”고 한 말을 상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3.18 보상에서 행위의 의를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1. 보상을 말하는 구절들은 행위를 구원의 원인이라고 하지 않는다(2.18.1-4)
(1) “행한 대로 갚는다”는 뜻은 무엇인가(3.18.1)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라고(마 16:27) 하는 말씀을 고찰함에 있어, 칼빈은 일의 순서를 전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즉,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행한 대로라는 의미는 행위에 대한 보상의 의미가 아니라 심판을 받아야 할 대상을 영생으로 초대하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신자들이 자신의 구원의 장본인이라든지, 구원은 그들의 행위에서 유래한다든지 하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그 반대로 신자들이 복음에 대한 지식과 성령의 조명으로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참여하게 되면, 그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2) 보상은 “기업”이다(3.18.2) “보상”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행위가 구원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브라함은 그의 행위 이전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고 그 약속을 믿음으로 그를 의로 여기신 것 아니겠는가.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보상은 그의 행위에 대한 구원의 상급이 아니라, 천국 백성이 되도록 그에게 양자의 영을 주시고 천국을 기업으로 소유할 수 있는 기업자가 되게 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다.
(3) 은혜로서의 보상(3.18.3) 행위가 있기 전에 값없이 주신 것을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서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은 우리를 속이는 것이거나 희롱하시는 것이 아니다. 포도원에 일하러 온 농부와 그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가장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같은 삯을 준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하자면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보수나 보상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것이 영원한 사망인 것같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받아들여져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며,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에,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
(4) 보상을 약속하시는 목적(3.18.4) 성경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높임을 받을 이유가 전연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성경의 목적은 오직 우리의 자랑을 억제하며, 우리를 낮추어 거꾸러뜨리며 완전히 부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힘을 얻고 위로를 받는 것은 어디에 근원하는 것일까? 그리스도께서 제자에게, 즉 모든 신자에게 초보로 가르치는 첫 단계는 분명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각각 자기의 소유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버리고 포기하라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십자가 훈련이다. 즉 신자들은 일평생 살아가는 동안에 어디를 돌아보아도 절망뿐임을 배우게 되지만,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비록 불행과 고난과 중상과 그 밖의 고통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에 대한 보상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행위에 대한 대가로서의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 아래 천국을 기업으로 그 영광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도록 끝까지 보장해 주시는 그 보상(성도의 견인)은 인정하고 있다.
2. 이신칭의 견해에 대한 반대론자들에 대답함(3.18.5-10)
(1) 보상의 근거는 용서이다(3.18.5) 성경은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라고 할 때(딤후 4:8), 어거스틴은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은혜를 베푸시지 않았다면 의로우신 재판장은 면류관을 상으로 주셨을까?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는 은혜가 앞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의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당연히 받을 자격이 없는 것들이 미리 부여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것들이 당연히 받을 상으로 주어질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칼빈은 이러한 어거스틴의 말에 덧붙여 “주의 자비가 우리의 행위에 있는 모든 불의를 덮어 주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는 우리의 행위에 의를 전가하실 수 있겠는가? 그의 무한하신 인자하심으로 우리의 행위에서 벌을 받아야 할 점을 일소해 버리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보상을 받을 만하다고 판정하실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영생을 은혜라고 부른 동시에 “Felix Culpa!"라고 말하였다.
(2) “하늘에 쌓는 보물”에 대하여(3.18.6) 칼빈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는 말에 대하여 이는 선행이 우리가 복된 영생에서 즐길 재물에 비교되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그리고 하늘이 고국이라면 우리의 재산을 여기에 두었다가 갑자기 옮겨지게 되어 손해를 보는 것보다 그리고 이전해 놓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다면 재산을 어떻게 이전할 수 있는가? 칼빈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고 한다. 다만 유의할 것은 이와 같은 선행이 우리를 의롭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다.
(3) 환난을 참으면 보상이 있는가(3.18.7)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 그의 고난을 통한 보상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인가? 칼빈은 고난을 공로로 이해하는 반대자들에 대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녀로 택하신 우리를 맏아들인 그리스도와 같이 만드시고자 하시기 때문에(롬 8:29), 그리스도께서 우선 고난을 당하신 후에 드디어 예정된 영광에 들어가신 것과 같이(눅 24:26),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행 14:22). 따라서 환난을 당할 때 참음으로 그 보상으로 구원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이기시고 영광에 이르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참고 인내함으로 결국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소망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4) 사랑에 대한 칭의(3.18.8)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은 말씀에 대하여 칼빈의 반대자들은 사랑을 배품이 구원을 위한 조건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바울의 말은 사랑이 믿음보다 더 크다는 의미는 아니라, 우리는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함으로써 서로 덕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칭의는 우리가 사랑을 배품으로 인한 공로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이 의롭게 한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에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당연한 보상으로 의를 얻어 우리에게 준다는 뜻이 아니다. 믿음은 한 도구에 불과하다. 이 도구를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값없이 얻는 것이다.
(5) 마태복음 19:17(3.18.9) 율법사가 구원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라고 대답하셨다(마 19:17). 칼빈의 반대세력인 소르본느 학파의 사람들은 이전의 교황주의자 또는 스콜라학파와 같이, 이 말씀이 바로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근거로 내세운다. 그러나 칼빈은 이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상대해야 할 사람이 바로 율법사였음을 간과한 데서 온 어리석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행위에서 구원을 찾는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하는데 우리는 그 계명에 의해서 완전한 의를 배울 수는 있으나 아무도 그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 따라서 구원을 얻는 길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호소하는 것 밖에 없다. 그래서 성경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라고 가르치고 있다(마 11:28-29).
(6) 의와 불의는 같은 척도로 서로 비교할 수 없다(3.18.10) 믿음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마음속에 인치며, 이것은 복음 선포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자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칼빈은 그의 반대자들은 불신앙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 지적하면서도 의와 불의를 잴 때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에 꼭 같은 척도를 적용하고 있어 그들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의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때에만 성취되는 것이지만, 불의는 율법 중 어느 하나를 어겨도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칼빈의 반대자들이 다양한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보상에서 행위의 의를 추론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 주권적인 은혜가 아니면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온전히 설 수 없으며, 또한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구원의 자리에 나아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