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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왕국 탐라를 찾아서
근래에 와서 차연(differance)이란 말에 관심을 갖게되었다.이 신조어는 알제리 태생인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최초 사용했고 철학자 들뢰즈(G. Deleuz 1925~1995)에 의해 사고의 기초형태를 비판적으로 해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 동일한 것의 현전은 시간적인 지연도 포함한 다른 것과의 차이에 의해 생겨나는 차연의 효과에 불과하다 “ 라고 했을 때 차연이란 똑같이 관음( 들리거, 이해되는)되는 것이 실제로는 차이를 품고있다는 아이러니라는 것이다.흔히 “ 불평등 자체가 사회가 유지되는 필수조건” 이라고 한 철학자 중에 가장 많이 인용하는 철학자가 국가론을 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BC427-347)이다.
감성이나 다양성의 상실인 고정관념으로 갈등, 충돌, 반목, 그리고 적대시하는 상황을 풀어줄 수 있는 인식의 변화로 다양한 해석과 이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어이다.
한반도의 역사는 약 12,000년경부터 형성되었다고 한다.
사전을 찾아보니 구석기시대는 약 70만 년경부터, 신석기시대는
약 8,000만 년경부터 , 청동기시대는 약 6,000만 년경인데
한반도에서는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융성했던 약2,000년으로
반도의 초기 철기시대는 BC400년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참고 ; BC108년 고조선 멸망, 신라건국(57년),고구려 건국(37년)
백제 건국(18년) ]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시대 즉, 문자기록이 남겨지지 않아
당시의 생활도구나 건축물의 흔적을 통해 인지 가능한 시대를
선사시대라 한다.
그래서 유적지를 살펴보기 전에 구석기에서 초기 철기시대에 이르는
각 시대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시작하자
구석기시대의 특징은 초기 동굴생활에서 시작 중기에는 평지에
막집을 지어서 살았다고 하며, 전기에 큰 석기(뗀석기)를 사용했고
중기로 가면서 이것들을 용도별로 구분하여 사용했다고 함.
신석기시대의 특징은 씨족바탕 부족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특별한 지배층이 없는 평등사회로 족장이 신정일치로 사회를 관리하여
에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이 생겨남.
전기에 민무늬, 덧무늬, 눌러찍기 문토기를 쓰기 시작하여 중기, 빗살무늬
토기를 , 후기에는 뇌문토기, 채색토기를 빗기 시작했으며 원형의 모가
둥근 방형의 움집을 사용했으며 그 안에 화덕, 저장구덩이를 만듬 .
청동기시대의 특징은 BC2 세기 ~ BC4 세기 무렵까지 지속됐고,
여전히 석기문화가 지배적이였다고 함
1기 요녕식 동검 (BC700 ~ BC600 ), 2기 세형동검(BC 4세기 ~
3세기 초엽), 3,4기 (BC2세기 중엽 ~AD1세기 말 무렵)로 구분되며
널무덤(토광묘)에서는 철기물과 함께 조개 칼도끼, 반달 돌칼, 간돌 화살촉
떳띠 토기, 흑색항아리. 구멍무늬토기, 화분토기가 출도된다.
한반도와 요동지방의 철기문화 보급은 BC400년경으로 보고 있다.
최근 한국사를 참조하면, “BC4 세기 이후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에서
철기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하여 3세기경 고조선은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고조선 유민들이 한반도 남부까지 철기문화를
보급했다. 따라 철제 농기기구와 무기가 제작되어 농업 생산력이 높아
졌고 전쟁규모가 확대됐다. 이때에 와서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그리고 삼한 등 국가가 출현한다.“
초기 철기시대에는 중국대륙과 교류가 활발하지 않았던 것 같다.
유물로는 중국에서 썻던 철기화폐 와 한국형 세형동검 정도가
출토됐다. 특징적인 것으로는 철기 사용으로
농업 생산력의 증가와 함께 전쟁이 빈번해졌다는 것이다.
탐라역사에는 특별히 빙하기를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됨.
지구의 마지막 빙하기를 약 BC 1만년 경으로 보고 있다.
지구의 온난화로 , 극지방의 빙하가 녹고 하여 지구 바닷물 순환이
멈추는 사건인 빙하기가 출현한다.
중기 빙하기인 7억5천만 년전의 스타디안 빙하기에는 적도까지
눈보라가 쳤던 흔적이 화석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이는 주기적인 것으로 약 10만년 주기의 지구의 공전궤도 변화,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 약 19,000 ~ 23,000년 주기로 찾아오는
지축의 세차운동의 영향이라고 한다.
제주도(탐라도)는 약 120만 년전 화산 활동으로 생성되었고,
8개의 유인도와 54개의 무인도 , 면적은 1,845.9 평방 킬로미터
위치는 동경 126도08분 ~ 125도 58분 북위 33도 06분
북위 34도 00분에 위치한다.
7~8만년전 구석기시대의 유적지로 애월읍 어음리 70번지인 제주
중 산간지역에 위치한 빌레못동굴( 사적지342호)이 있다.
총 길이 11,749m인 현무암 용암동굴로 1977년 황곰 뼈 화석, 순록이빨
화석, 붉은 사슴뼈 등과 타제석기가 발견되어 유적지로 등록됨.
1975년에 발굴된 천지연 생수궤 유적지(향기물1호), 서귀포시 서귀동
795-2, 에서는 후기 구석기 유적으로 확인되는 유물이 다량 나왔다.
유물로 좀돌날 몸돌, 돌날 몸돌 등 뗀석기 100여점이 발굴됐는데
이는 낙반석을 이용한 독특한 구석기 석기 제작법으로 만든 것으로
최근 (2010년) 광여기형광법으로 측정한 결과 약 2만3천년전 것이라고,
독특한 것은 이러한 제작법은 한반도의 다른 동굴유적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천지연 칠십리 입구 우측 도로 천지연 방향 100m 지점이라고 했는데
이곳은 우리도 어릴적에 지나다니던 곳으로 샘물이 절벽 밑에서 흘러나
오던 곳이다. 더해서 서귀항을 한라산을 뒤로 하고 보면 새섬, 문섬, 그리고 왼쪽에 섶섬,오른 쪽에 범섬이 보인다.
뒤쪽 천지연 폭포에서 강물이 흘러나오면 굽이굽이 돌아 항구에서
바닷물과 만나는 곳 배 정박지 전면 새섬과 오른쪽 황무지 쪽으로는
수심이 매우 낮아 섬으로 걸어 들어 가는 완만한 만이 있는 데, 한 때는
고래 기름 공장이 있었던 곳 ,어릴적에 고래 뼈가 많이 보였던 곳 위로
황무지 쪽에는 큰 전복 등 폐총화석 덩어리 바위가 무척 많았다.
이것들도 어떻게 처리 되었는지 조사해 볼 일이다.
여기에서 세가지 의문점이 제기 된다.
첫째 , 탐라의 구석기 역사가 한반도 역사 보다 더 앞 선다는 것,
둘째 , 제주도가 중국 대륙과 연결된 시점( 최후 빙하기 )에 대륙에서
일차 도래인이 있었다는 것, 즉 빌레못 동굴의 유적물은 한반도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서식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코끼리도 아닌데 동굴을 찾아가 죽을 리도 만무하고.
셋째 , 설문대 할망신화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을라신화가 외부로부터 여자를 받아들여 씨족을 번성시킨 반면
이 신화에서는 거인이며 창조자인 마고할멈이 창세를 했으며,
신화의 주요 요소인 능력 있는 신에 대한 이야기이고
실재로 신의 존재를 믿고 종교적인 제례의 흔적이 보인다는 것,
탐라를 지켜주던 여신인데 굶어서 스스로 물에 빠져 죽는
탐라의 옛 사회 형편을 보여주는 슬픈 전설이기 때문이다.
즉 ,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변화는 과정에서 본토 탐라인의 운명을
보여주는 상징성이 매우 강한 전설이다.
한반도에서 구석기시대를 끝내고 신석기시대로 접어드는 BC8,000년전
신석기 시대 유적지인 고산리유적지(사적412호), 한경면 고산리 3628번지,
에서는 최근 유물이 무더기로 발굴(초기는 1994년도)되고 있다,
신석기시대 초기 정주 취락지로 원형 움집터 28동, 수혈유구 303기,
야외화덕 10기, 구상유구 2기, 그리고 융기문 토기, 무문양 토기 등,
그리고 성형석기인 화살축, 찌르기, 밀개, 망치돌, 갈돌이 출토되는데
고산리식 토기는 BC5000 ~ BC 3000년 경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음. 청동기시대의 유적지로는 북촌리 유적지(BC2000 ~BC1000년),
해안에서 600m 지점으로 조개무덤에 적갈색 토기와 공렬토기 파편과
주거지 밑 바닥이 보임, 대정읍 상모리 산이수동 71번지 일대에 있는
상모리유적지(BC6~4세기)는 바위그늘 유적지(고두기 언덕)로 1만여평에
폐총과 공렬토기류, 돌도끼,숫돌 야외 화로터 등이 산포되어 있다
초기 철기시대 유적지인 삼양동 유적지(사적416호)에서는 BC2세기~
AD2세기의 무덤유적과 적갈색 토기, 구멍무늬 토기, 흑갈색 토기 출토,
서간도 유적지( 강정동 산1번지 섬) 인 경우는 탐라 고지도(1709년)에
부도(썩은 섬)라고 나왔다, 강정포구 앞바다(너븐물)에 있는 이 섬은
일명 물개섬라고도 하는 섬2 여10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달에 10차례
80m 바닷길이 열려 하루 두 차례 건너 갈 수 있는 섬으로
BC2200 ~2000년 추정 적갈색 토기편 10점, 과 탐라국 초기 철기 모습이
이 보이는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함.
그리고 시원한 물과 해변으로 유명한 애월읍 곽지리 곽지패총(기념물41호)
에서는 초기 철기시대(BC300~0년)에 해당하는 구멍무늬 토기 문화 층이
확인 되었는데 이곳 1만여평 유적지에는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
조선에 이르는 각 시대 문화층이 잘 나와 있어 탐라 상고문화 변천과정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우리는 제주도에는 선주민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증거들이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나타난 이상 이 선주민 집단을 통틀어 선주호인 집단으로 부르
기로 하자
앞에서 우리는 마지막 빙하기를 언급했는 데, BC11,000년~BC10,000년
구석기 후기에서 신석기 여명기에 중국 동부해안과 한반도 서해안의
기후와 지형연구 결과를 보면 황해바다가 표고 20 ~30m 정도의 평원지대
로 빙하기 최 전성기인 1만8천년 경의 서해안 해수면은 현재와 비교해
약 150m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빙기가 오고 탐라( 고대 중국에서는 남방의 소수민족을 담이족이라고
칭했는데 담주, 담현, 담이군 등,, 耽羅(탐라)는 儋羅(담라)가 변한 것으로
모라, 탐모라ㅡ 탐부라, 섭라, 성주 등으로 불림)도가 고립된 후 대체로
BC6세기~BC4세기 경에 상모리식토기 ~삼양동식 ~ 곽지리식 토기를
이용하는 제2차 도래인 무문토기 집단이 남해안 지방에서 탐라도에 온다.
탐라국의 중기시대인 삼국시대 후기와 통일신라시대 이전의 시대를
탐라국의 전기시대로 구분해 보면 제주도식 고인돌이 출현하고 곽지리식
토기가 대량 생산되고 제주도 전역에 확산된 시기인 BC2 세기 경을
탐라국이 성립된 시기로 보자,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들이 권력을 넘어서 집합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대규모의 관리기능과 경제적 부에 내재하는 불평등으로부터 이익을 유지하고
축출해 내는 강력한 권력이 결합한 실채가 기본적으로 국가를 형성하는
정치체재 내지는 정치집단의 성격이라면 일정한 양식의 토기가 어떠한 방식으
로든 섬 전 지역으로 대량 생산 소비라는 과정과 연결되는 것이다.
1928년 제주항 축항공사 때 인근 동굴에서 후한조 때(BC118년 주조된 )
의 오수전, 화천, 화표 와 마한계토기가 출토되어 산지천유적지(건입동)로
명몀되었는 데, 이 지역은 산포조어 영주10경으로 병문천, 한천과 더불어
제주시 3대천이었다. 1960년대까지는 제주시민의 식수원으로 이용되다가
1966년 복개됐으며 최근에 시민공원으로 조성되고 있다.
오수전으로 대표되는 한제국의 천화들이 산지항에서 출토되었디는 것은
당시 중국인들이 주호(초기 탐라국)의 존재를 인식했음을 말해주고 있고
더 나아가서 중국대륙에서 발해만, 마한의 연안을 내려와서 남해안, 대마도
와 일본열도에 이르는 교역로 상에 산지항이 위치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시기 초기 국가출현을 보여주는 강력한 권력집단의 존재했음을 보여
주는 유적지가 용담동유적지다, 용담동 2629-2번지 일대 10,279㎡ ,
BC200 ~BC100경의 적갈색 곽지리식 토기와 한천을 따라 대형 지석묘
군이 발견 되었는데 철기부장 적색묘역 목곽묘이다.
초기 탐라국가인 주호의 존재는 서진학자 진수(233-297)가 쓴 3세기경
삼국지 위지 동이전東夷傳에 동이라는 집단으로 나온다.
동위전의 주호에 관한 기록을 보면
“ 三國志魏志韓傳馬韓條 “ 又有州胡 , 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其人差短人,
言語不與韓同, ⊠髮頭, 如鮮卑, 但衣韋, 好養牛及猪, 基衣有上無下 ,
略如裸勢, 乘船往來, 市買中韓 “
AD400년경에 범엽(398-445)이 편찬한 후한서에도 주호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하는 데 이기록은 둘다 직접 본것이 아니라 그렇다 하드라고 전해
들은 것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마한족의 미개상태를 과장한 것이고 키가 작고
머리를 밀었다고 한 묘사는 탐라국의 포로집단을 의미한다고 볼수도 있다.
이제, 사료에 보이는 탐라국의 國名에 대한 기록을 들여다 보자
. 신라 고승 안홍(진평왕 37년인 615년에 수나라 유학)의 편찬한
'동도성립기' 에 신라 27대 선덕여왕의 황용사 9층탑 연기설화에 나온다
1층. 왜국 2층. 중화 3층. 오월 4층 .탁라(乇 羅) 5층. ..
. 삼국지 위서 권100, 열전, 제88,고구려
진주는 섭라(涉羅)에서 나는 데 ... 섭라는 백제에 병합되었다.
. 송대 구양수, 송기가 편찬한 중국 기전체의 사서인 신당서( 당건국618년
~ 멸망907년)까지 史實 기록으로
'신당서. 권108. 열전33. 설인궤.' " 현경 5년(660)..인궤 인솔 신라
백제 탁라(乇羅) 외 4국 존장월회..."
'신당서. 권220. 열전. 145. 동이 류괴 모라 '
용삭(661-663)초에 담라(儋羅)가 있는 데 그 왕 유리도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 북송의 왕부(922-982)가 송태조 건륭2년(961)에 완간한 당회요 권100
탐라국편에.
' 탐라는 신라의 무주 바다위에 있다. 섬에는 산이 있고, 주위는 모두
바다로 접해있다. 북쪽 백제에서 배를 타고 5일을 갈만한 거리에, 그나라
완의 선은 유리 이름은 도라이다.'
중기 탐라국( 삼국과 통일신라까지)의 남아있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 AD 476년 백제 문주왕2년에 탐라사신(국왕) 고후, 고청, 고계가
조공을 받치자. 은솔 의 직위를 부여했다.
좌평, 달솔에 이은 3번째 고위직으로 상징성이 큼
-. AD 498년 탐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음에 분개하여 동성왕 20년에
탐라를 정벌코져 무진주까지 내려갔다. 조공바침
-. AD 610년 백제 무왕10년에 탐라가 준마를 바치다 이것을 당나라
황실에 바치지 당왕이 ‘과하마’라 이름 지었다.
-. AD 660년 사비성 함락 백제 멸망
이 당시 주호의 인구는 총 5개부족에 약 8000명
-. AD661년 탐라왕 유리도라가 8월에 당에 사신파견
탐라왕과 사신이 당에 들어가 태산에서 베풀어진
제천의례에 참석함( 외교적인 면에서 타국과 동등한 대우)
-. AD662년 탐라국주(신진세력) 도동음율이 2월에 신라 투항
문무왕2년에 신라에 복속시키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 “ 탐라국주인 좌평 도동음률이
항복했다. 탐라는 무덕년(618~626)간 이래 백제에 신속되었기에
좌평의 이름을 삼았는데 이제 우리의 속국이 되었다.“
-. AD 663년 8월 왜, 탐라, 다물연합군(병선400척)과 나당연합군
(7만명,병선170척)이 백천강(현 금강)과 주류성 전투
663년 풍이 이끄는 다물군의 주류성을 함락한 유인궤가
665년 신라. 백제, 탐라, 왜의 추장을 인솔하여 당에 귀국하여
당의 제천의례에 참여시킴.
-. AD 669년 일본에서 오곡종자 도입
-. AD 679년 신라 문무대왕 삼국통일 후 탐라경략
문무대왕19년(679년) 사신을 보내 탐라를 위무했다.
-. AD 801년 애장왕 2년 탐라사신이 조공을 보내왔다.
중기 탐라가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체제 하에 반듯한 국가로 거듭나지
못한 이유가 무었이였을까
중개무역으로 철의 왕국을 이루웠으나 연맹왕국의 한계를 넘치못하고
사라져간 가야국의 멸망 원인은 각부족장의 단합 실패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
용담동 해안가의 언덕 정상 부근 동한드기 벌판( 해안 300m 지점)에서
철재품, 병 항아리, 각종 유리구술 등이 출토 되었는 데 특이 한 것은
제사유적지라는 것이다.
장경병, 사각편 병, 병 항아리는 통일신라 도기류와 비슷한 제사에 쓰는
도기라는 것이다.
이는 지배층의 항해의 안전을 비는 행사를 개최했다는 것이고 , 산지천에서
출토된 중국의 화폐는 탐라가 중국, 한반도, 동남아, 일본 등과 동등한 교역
및 외교관계를 유지한 독립국가 였다고 하면 무리일까.
선진문명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된 상태에서 나름데로 회색토기를
수입해서 쓸 정도로 곡물을 수입하여 농경에도 힘을 써 사회적 안정을
도모했으나 백제, 신라 등에게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쳐야했고, 실력자
에게는 무기와 직위를 내려 권위를 세워주었으나 , 사회적 경제적 역량을
박탈함으로 고대국가를 건설할만한 기회를 약탈했다고 할까 , 백제 멸망 후
5개 부족으로 나뉘어져 있음은 부족간 쟁투가 심했을 것이고, 나중에는
친당파( 유리도라 왕)와 신진 친신라파( 도등음률 왕)로 나뉘기까지 함.
말기 탐라시기 ( 고려 ~ 조선 초기 )
-. AD 918년 고려 건국<!--[endif]-->
-. AD 931년 태조 경순왕 초청으로 경주 방문
-. AD 935년 10월 신라병합
-. AD 936년 이천강 전투 신검 항복 후삼국 통일
-. AD 936년 태조19년 탐라국주 고자견이 태자 고말로를 입조시킴
자치권 인전받음. 고자견을 성주로 양구미를 왕자로 인정함
-. AD 938년 태조21년 통일후 2년차에 탐라국주 고말로 알현옴
성주왕자로 책봉되 속국이 됨(이원진의' 탐라지' . 탐라조).
-. AD 983년 (성종2년) 최승로의 건으로 12목 설치하여 지방 호적세력
을 통제하고 중앙정부 통제력 강화
-. AD 1002년 (목종5년) 5월 탐라산 4곳에 구멍이 열려 5일 동안
용암이 흘러나옴.
1002년 (목종10년) 산이 바다에서 솟아났다. 7주야 지나 안개가
걷히고 산이 열렸느데 주위가 40여리, 더바섬(가파도) 생김
-. AD 1079년 (문종33년) 탐라 구당사 윤응균 진주 2개(야명주)바침
-. AD 1105년 (숙종10년) 탐라군 복속
-. AD 1153년 (의종7년) 탐라에 지방관 파견
-. AD 1273년 (원종14년) 여원 합동군 삼별초 섬멸
-. AD 1273년 원 다시 탐라라 명하고 탐라초토사 설치(고인조를 총관
으로 삼고, 문신을 동지총관 삼음) 1275년 다루하치 총관부 설치
' 말 소 낙타 나귀 양 등을 싣고 와 수산평에 놓아 길렀다. '
1300년 탐라총관부 설치 ~ ( 1367년 원 망할때까지)
-. AD 1276년(충렬왕2년) 제주 수산평 고산평야 목장설치
몽고말160필 몽고군 1400~1700명 상주
원나라 임유간, 아실미리 탐라주민 진주 100개 뺏어감
-. AD 1294 충렬왕20년 고려왕 원조정에가 황제 알현 탐라 복귀요구
-. AD 1295년 원나라 승상 완택의 도움으로 탐라 고려 예속(돌려줌).
-. AD 1295년(충렬왕24년) 탐라를 제주로 명칭 변경 시작
조임을 도지초사, 최서를 목사로, 지남익을 판관으로 탐라현에 파견
고종(1214~1259) 때부터 제주란 말 사용(동국여지승람)
-. AD 1300년 충렬왕26년 동도현, 서도현을 둠, 원 황태후 황실말 방목
( 탐라 성주 고수좌, 왕자 문공제 였음)
-. AD 1357년(공민왕6년) 7월에 제주 성주 말 상납
-. AD 1367년(공민왕16년) 정미년 원나라 망하고 명태조 즉위하자 다시
고려 귀속.
-. AD 1372년 공민왕22년 원나라 목자 석가을비, 초고도보개 반란 일으킴.
1374년 통도사 최영을 보내 토벌 평정 김중광을 만호 겸 목사로파견
고려는 474년간 지속된 왕정으로 신라와의 우호정책으로 조선과는 달리
역사와 전통 그리고 국가권위를 이어받아 불교를 국가대업의 이념으로
신라의 불교문화를 계승 발전시켰으며 후기에는 3은(목은, 포은, 야은)을
배출시킬 정도로 성리학을 수용하여 유학도 발달됨.
당의 제도를 수용하여 2성6부, 송의제도인 중추원, 삼사를 두고 자체제도
를 개발 운용하여 과학기술의 진전( 금속활자, 인쇄술, 천문 등)하였고
사회적으로는 각계각층 마다 제한적이나마 신분상승의 기능성이 열려있으
나 장기 무신정권의 집권으로 왕정은 불안했다.
원나라말 기황후 때에는 영구 병합론까지 거론되었으나 어쪄튼 부마국이라는
쌍무적 계약관계로 존속 된다.
반면 탐라국은 어떠했을까?
삼별초의 탐라 상륙과 함께 최후 격전지(항파두리 성)가 되고 대몽행쟁에
백성은 협조( 탐라 수뇌부는 조정에 협조) 함. 중앙정부의 차별과 무관심과
1273년 탐라에 다루하치총관부가 설치되고 몽고 정예군까지 주둔한 상태로
20년간 버려졌다 할 정도로 선진된 문화와 기술 , 유.불교가 전례되지 못했고 ,
1294년 탐라목을 원에서 돌려받은 후에도 실질적 원의 직할지로 100여년간
원의 식민지 수탈과 고려의 2중적 차별지배 하에서 5부족을 통일시키고
왕정국가로 재정비 되기에는 지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탐라왕국 제왕세기 고을라편( 양을라 족보도 있음)을 적어 본다.
탐라국(BC57년 ~AD1402년)은 을라왕이 세운 고대 왕국이다
[부족국가 시대]는 을라왕이 건왕해서 삼계왕 ~ 영왕(BC105~BC58)까지 12대
[고대국가 시대]는 후왕(BC58~BC7) ~ 자견왕(AD933~AD938)까지 31대
[성주.왕자시대]는 고말로 ~ 고봉례까지 17대간 지속됨
대외관계를 보이는 사건
지운왕(483~508): 8월 백제 동성왕 탐라정벌차 무진 진출. 구구려에 진주보냄
다명왕(533~558): 10월 백제가 신라 반격 위해 출병 요구
담왕(453~483): 신라에 보내는 조공선 가야포에서 가락군에 약탈 당함
체삼왕(583~608): 수의 전함 1척 태풍으로 탐라표착. 백제 경유 돌려 보냄
익왕(243~293): 일본 사신 '갈라고' 탐라에 옴
처량왕(658~683): 667년7월 일본에 사신보냄. 왜와 함께 백제다물군 돕기로.
-. AD 1394년 조선 건국
-. AD 1402년 태종2년 성주 고봉례에게 좌도지관, 왕자 문충세에게
우도지관직 부여
-. AD 1404년 태종4년 성주. 왕자 봉직 폐지 귀족 없앰
-. AD 1416년 태종16년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 설치
-. AD 1437년 세종19년 제주 방위 위해 3성9진 10수전소 25봉수대 설치
-. AD 1445년 세종27년 6월19일 좌도.우도지관 직 폐지
의정부 병조 군현 목사 경재소 설치
-. AD 1526년 중종21년 목사 이수동 삼성혈(모흥혈) 담을 쌓고 춘추에
삼성혈 제례 시작
-. AD 1686년 목종12년 목사 유한명 삼을라묘 건립
-. AD 1629년 인조 7년 8월13일 제주인에게 본토 출국 금지령 내림
순조 23년(1823년) 2월 24일 까지 지속됨
-. AD 1653년 네델란드 하멜 가파도에 표류
-. AD 1702년 목사 이형상 '남한박물' 제주목: 2면 53리 7,319호, 정의현:
1읍22리 1,436호 , 대정현:1읍12리 797호 였다 기록.
-. AD 1754년 영조30년 목사 김몽규 돌하르방 창건하여 제주목 삼문
밖에 세움
-. AD 1770년 영조36년 애월면 장한철(1774~?) 한양 과거시험 차 승선
풍랑으로 유구국 표류 1771년 귀국 "표해록 "
제줏사람들에게 전설적인 인물, 영천 이목사(영와 이형상 목사)의 '남환박물'
에 보면 제주사람들이 부담한 온갖 공역과 공물을 보면
1년 안에 공마 4~5백 여필, 전복이 9천여첩, 오징어가 7천 여첩, 사슴가죽
5~6십 령, 노루가죽 50령, 가종약제 470여근, 말 가구가 680여 부 ,등 등
제주목의 9진보에 드는 모든 지공, 군졸 11,600여명이 쓰는 모든 비용부담,
호보제도(징병과 노역)를 두어 수탈하니 가족을 이루워 사는 것도 어려웠다.
탐라국왕 성주왕자 제도는 AD476년~ AD1005년 (고을라 족보 ?)간 존속(?)
된것 같다. 조선 때 제주목사 이원조(1792~1871, 응와전집)의 탐라지초본(
1842)에 ' 대정읍지 대정현 고적조 궁산 양쪽 하천 사이에 탐라왕 묘가 3기
있다.'라고 적혀 있다.
고근산 밑 서귀포 하원동 21번지에 탐자왕자 묘( 13~15세기로 추정)가 있다
그런데 일정 하 1910년도 에 도굴된 것을 2001년도에 복구하였으나 부장품에
대한 기록은 없다.
점필재 김종직(1431~1492) " 탁라가 " 14절 일부를 옮겨 본다.
星主己亡王子絶 성주는 이미 죽고 왕자도 끊어져
神人祠廟亦荒倞 신인의 사당 또한 황량하기만 하네
歲時父老猶追遠 세시엔 부로들이 아직도 옛일을 추모하여
簫鼓爭陳廣壤堂 광양당에서 퉁소와 북을 다투어 울리누나
-. AD 1876 년 강화조약 체결(한.일)
-. AD 1895년 고종32년 5월1일 제주부 제주군 재정군 전의군 개편(3군)
-. AD 1896년 건양 원년 9월 4일 전라남도 제주목 대정군 정의군 개편(1목2군)
-. AD 1898년 대한제국 건립
-. AD 1906년 광무10년 10월1일 제주목을 제주군으로 개편(3군)
-. AD 1914년 4월1일 4군을 제주군으로 통폐합 (1군 14면)
-. AD 1915년 5월1일 제주군을 제주도로 개편 (1도13면)
고산리 유적지
고산리 유물
곽지리 토기
곽지리 유적지
삼양동 유물
천지연 생수궤 유적지
서귀포 생수궤 유물
산지천 유적지
산지천 현재
설문두 할망
용담동 유물
용담동 유적지
상모리 유적
서간도(물개섬)
탐라왕 묘
탐라초기 토기 유물
1890년 산지포 건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