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릉(莊陵)>
유배지 청령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조선왕조의 가장 비극적인 임금 단종, 그의 유적지 둘이 가까이 있다. 오래 전에 왔을 때는 이처럼 다듬어지지 않았던 거 같은데, 이제 유네스코 문화유산답게 정리되어 애닯은 마음이 조금 위로를 받는다. 엄흥표 정려각에서는 눈물이 핑 돈다. .
1. 방문지 대강
명칭 : 장릉
위치 :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입장료 : 없음
방문일 : 2024.8.19.
2. 장릉 둘러보기
1) 소개
조선 6대 단종(재위 1452∼1455)의 무덤이다.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충신들이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밝혀져 영월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단종이 죽자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호장 엄흥도가 장사를 지냈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무덤에 대한 의견이 나오게 되어, 선조 때에 이르러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을 세우게 되었다. 숙종 7년(1681)에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하였고, 숙종 24년(1698)에 복위시켜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다.
무덤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다. 능의 양식은 간단하고 작은 후릉의 양식을 따랐으므로 석물은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다. 명릉이래 만들어진 사각지붕형의 등인 장명등은 장릉에서 첫선을 보이게 된다. 특히 장릉은 무덤 제도에 의해 정해진것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배식단사를 설치하였다. 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이곳 뿐이며,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한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영월 장릉은 2009년에 조선왕릉 40기가 능원공간의 조형형식의 변화와 산릉제례가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오고있는 것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세계유산 등재 시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국가유산포털 전재)
2) 사족
2-1.
장릉은 세 군데이지만, 장릉(莊陵)은 이곳 하나다. 개성에 있는 정종의 후릉과 함께 왕릉 관리소에서 관리하지 않는 릉으로 장릉은 영월군에서 관리한다. 엉흥도가 암장한 초빈은 그대로 왕릉이 되었다.
엄흥도는 사후에 공조판서에 오른다. 영월에 가면 영월 엄씨들을 유난히 많이 만난다. 점심을 먹고 들른 커피숍 사장님도 영월 엄씨, 그의 후손이라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고교 때 단종제 마스게임을 매년 준비했다면서 어릴 때의 특별한 기억은 단종 관련 기억이 많단다.
남도에 가면 유배 간 선비들이 그곳 백성들과 얽혀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본다. 정약용은 물론이고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 추사체를 개발한 김정희 등등은 유배지에서의 삶이 인생의 주요대목이었지만, 한 개인의 인생을 넘어 지역민과의 화학적인 교류가 우리 지역문화의 커다란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유배 선비들의 삶도 그러했을진대 왕의 유배와 죽음이 주는 충격이 한적한 시골 영월에 주는 충격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엄흥도는 본인의 삶도 바꾸었지만 그 후손의 삶도 바꾸었다. 송시열의 진정으로 이후 공조판서 후손으로서 등용이 가능해졌다니 말이다. 영월 엄씨의 삶만이 아니라 영월 사람들의 삶도 바꾸었다.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경기도 바깥의 지역에 왕릉을 보여한 고장이 되어 단종의 기억을 항상 안고 살고 있으니 말이다.
2-2.
세종은 3자로서 왕위에 오른 분이다. 얼마나 위대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는 성군이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의 혜안이 아니었으면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태종의 최대 업적은 아마도 3자인 세종을 후계자로 삼은 것일지도 모른다. 거기다 외척까지 다 쳐서 세종이 거침없이 자기 뜻을 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처럼 장자가 아닌 자신이 왕이 되어 그처럼 찬란한 업적을 남겼으면서, 백성에게는 장자냐 차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애민하는 유능한 왕이 필요하다는 것을 평생 몸으로 알려주신 분이 자신의 후계자 지목에서는 혜안을 발휘하지 못한 거 아닐까.
역사는 가정이 없다지만, 만일 세종이 병약한 문종을 대신하여 처음부터 세조를 낙점했더라면 이런 비극도 일어나지 않고, 세조 또한 조카를 죽인 비정한 삼촌이라는 원죄를 안지 않고 보다 편하게 선정을 펴지 않았을까. 문종과 단종의 존재를 너무 약화시키는 가정일까.
장릉지구 정문
단종역사관과 재실
단종역사관
역사관에서 상영하는 조선왕릉 관련 영상 중 동구릉의 태조 건원릉.
왕릉을 보면서 진한 감동을 느끼는 경우는 단종의 장릉과 바로 이 태조의 릉이다. 평소 고향 함흥에 묻히고 싶어했던 태조, 그의 유언으로 고향 함흥의 억새가 심어져 있다.
설파 조동일 선생님은 도꾸가와 이에야쓰의 화려한 묘 동조궁과 억새가 심어진 태조의 소박한 릉을 대비하여 논한 바 있다.
박충원 낙촌비각
중종 11년 노산군의 묘를 찾으라는 어명으로 찾아 치제하였으나 이후 방치되었다.이후 영월군수들이 죽어가는 사고가 발생하곤 했는데, 중종 36년에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의 현몽으로 치제한 후 그런 일이 사라졌다. 어울하게 죽은 사람이 현몽하여 원한을 푸는 아랑전설 유형이 단종설화와 결부되어 이곳에서도 전승되는 것이다. 그의 충절을 기리는 이 비각은 1973년에 세워졌다.
장릉 오르는 길
정령송. 오른쪽 비석 뒤로 높이 솟은 소나무다.
역광으로 제대로 된 사진을 건지지 못하였다. 30년전쯤 방문했을 때는 석물도 완비되지 못하고, 곡장, 도래솔 등이 왕릉으로서의 위용을 모두 갖추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완만하게 경사진 비탈에 길다란 모양으로 누워계시던 기억인데 이렇게 왕릉의 위용을 제대로 갖춘 것이 보기 좋다.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장릉이 드디어 세계에 조선왕릉으로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
정령송. 정순왕후의 사릉 곁의 나무를 옮겨 심어 죽어서나마 서로 가까이 있는 기운을 느끼도록 배려했다. 현대인의 이런 배려도 눈물겹다.
정순왕후의 릉은 사릉. 단종을 사모하는 릉이란 뜻으로 이름붙였다. 18살에 유배가는 단종과 생이별을 하고 82세까지 혼자 한많은 삶을 살다 죽어 남양주에 묻혔다.
두 릉을 합치자는 논의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장릉 아래 정자각 등 제실.
장판옥. 장릉에만 있는 사당이다. 정조15년(1791)에 건립한 사당으로 단종을 위해 목숨을 잃은 268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배식단. 268위의 충신을 위한 제단이다. 매년 이들의 영령을 추모하는 제향을 드린다. 정조가 제의 축문을 지었다니, 역시 정조구나 싶다.
홍살문. 정자각과 1자형이 되지 못하고 ㄱ자로 꺾여 있다. 처음부터 왕릉으로 조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도와 어도.
단종비각, 수복실, 장판옥
정자각 등 제의를 위한 건물들이 왕릉 아래 있다
맨앞이 단종비각이다.
정자각, 단종비각, 수복실, 홍살문의 순이다. 정려각 뒤쪽 언덕위에 장릉이 있다.
장판옥
엄흥도 정려각. 영조 2년 1726년 건립
정려각만 보고 아니 왕릉에 웬 효자 열녀의 정려각? 이상하게 여겼는데 엄흥도의 정려각이라니 이해가 되었다. 실각해서 죽음을 앞 둔 왕을 돌본 백성 엄흥도, 그의 인간애와 충절이 조선왕조의 품격을 말해준다. 세조의 후손인 후대 임금들도 단종을 복권시키고 관련된 충신들을 모두 복권시켰다. 이 또한 조선의 격조를 말해준다.
이런 격조를 이어오는 국민의 수준이 한류의 동력일 것이다. 그런 국민이 이어오는 공동체의 정신과 신명이 바로 한류의 동인이다. 인간의 신명을 깨우고, 인간의 상호존중을 일깨우는 한류, 조선왕조에서 쉽게 확인된다. 일본에 패망했다고 조선을 쉽게 비난하는 사람들은 정작 조선의 힘은 보지 못한다.
우리 안에는 수많은 엄흥도가 있다. 나라가 잘못되면 분연히 일어서고, 알아주지 않아도 어디서나 명분에 맞는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엄흥도가 지금도 나라를 지키고 있다.
이상 엄흥도 정려각
재실. 제사를 준비하는 건물이다. .능참봉과 수호군의 거주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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