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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항목명 | 공휴일궤 |
한자항목명 | 功虧一簣 |
유형 | 개념 |
출전 | 『서경(書經)』 「여오(旅獒)」 |
<요약>
어떠한 일을 성취함에 있어 중단없이 노력해야 함을 나타내는 말.
<설명문>
『서경(書經)』 「여오(旅獒)」의 “아홉 길의 산을 만드는 데 한 삼태기로 공이 무너진다.(爲山九仞, 功虧一簣)”라는 기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곧 아홉 길이나 되는 산을 만드는 일도 한 삼태기의 흙을 쌓아올리는 일부터 시작되고, 그 산의 완성을 위해서는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까지 채워야만 한다는 것이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서도 “그것은 마치 산을 만드는 것과 같다. 비록 한 삼태기의 흙 때문에 이루지 못했더라도 그만둔 것은 내가 그만둔 것이다.”라고 하여 이 말을 학문을 하는 태도와 관련하여 비유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무슨 일이든지 중도에서 포기하는 것은 이전에 들인 공을 방기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특히 학문을 함에 있어서 자강불식(自强不息)하는 태도로 노력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한편 『맹자(孟子)』 「진심상(盡心上)」에서도 “어떤 일을 하는 것은 우물을 파는 일로 비유할 수 있다. 우물을 아홉 길이나 파들어가다가 샘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그만두었다면 그것은 우물을 버린 것과 같다.”고 하여 보다 구체적인 사례로 중도에 포기해버리는 것의 폐해를 밝히고 있다. 공휴일궤라는 말에 담긴 이러한 교훈은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군자는 강건(剛建)한 하늘의 도를 본받아 자강불식한다.”라는 말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유학에서는 학문의 부단성과 관련하여 중시되고 있다.
<참조항목>
자강불식
과욕(寡欲)
한글항목명 | 과욕 |
한자항목명 | 寡欲 |
유형 | 개념 |
출전 | 『맹자(孟子)』「진심하(盡心下)」 |
<요약>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절제하여 의리(義理)를 실현하기 위해 제시된 맹자(孟子)의 도덕수양의 방법.
<설명문>
『맹자(孟子)』「진심 하(盡心下)」에서 맹자는 “본심(本心)을 기르는 데에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寡欲]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 사람됨이 욕심이 적다면 비록 본심을 보존하지 못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적을 것이고, 그 사람됨이 욕심이 많다면 비록 본심을 보존하고 있는 바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적을 것이다. (養心莫善於寡慾. 其爲人也寡欲, 雖有不存焉者, 寡矣. 其爲人也多欲, 雖有存矣者, 寡矣. )”라고 하여 양심(養心)에 있어 과욕의 중요성을 역설하였으며, 본성과 물욕(物欲)이 반비례하는 관계에 있음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맹자의 과욕론은 인간에게 욕망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을 승인하고 욕심에 대한 완전 부정[無欲]보다는 그 욕심에 대한 올바른 절제(節制)를 강조한 점에서 이와 유사한 학설, 특히 도가(道家)나 불가(佛家)의 학설과 구별된다.
성선론(性善論)의 입장에 섰던 맹자에게 있어 악은 감각이 외물에 접촉함으로써 발생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본성의 확충과 감각적 욕망의 절제가 인격의 도덕적 완성의 요체가 되는데, 이것이 과욕론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욕심의 과다(過多)는 곧바로 본성의 소멸을 의미한다. 그러나 맹자는 또한 “가히 욕구할 만한 것이 선이다.(可欲之 謂善)”(『孟子』 「盡心下」)라고 하여 인간의 본성에 기초한 순수의욕(純綷意欲)을 선(善)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과욕의 대상은 물질적 욕망으로 한정된다.
맹자의 이러한 견해는 송대(宋代) 성리학(性理學)에 와서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멸한다.(存天理滅人欲)”라는 사상으로 심화되며, 여기에 더욱이 성리학의 도덕적 엄격주의가 작용하여 맹자의 과욕론은 무욕(無欲)에의 주장으로 보다 철저화된다. 주돈이(周敦頤)는 “양심은 욕심을 적게 하고 본성을 보존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욕심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養心亭說」)고 하였고, 주희(朱熹)도 “맹자가 과욕을 말한 것은 욕심을 점차 적게 하여 욕심이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러야 함을 말한 것이다.”(『朱子語類』 卷61)라 하여 과욕의 의미가 욕심을 절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욕(無欲)에까지 도달하는 것에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유가에 있어서의 무욕은 욕망에 대해 완전한 부정은 아니다.
그것은 주로 명철보신(明哲保身)이나 양생(養生)의 방법과 관련된 노자(老子)의 과욕론이나 불교의 멸욕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그러한 차이는 각각의 인성론적(人性論的) 토대가 다른 데에서 파생한다. 곧 유가의 과욕론은 선한 본성을 실현하려는 것으로 유가에서는 그 실현의 추진력으로서 인간의 적극적 욕구의 개념을 인정하며, 이 점에서 불교나 도가의 학설과는 상이한 것이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에 있어서의 욕망에 대한 철저한 경계는 욕망의 부정이라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었기 때문에 청대(淸代)의 대진(戴震)은 이러한 경향에 반발하여 기철학(氣哲學)의 입장에서 정욕(情欲)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기도 하였다.
과유불급(過猶不及)
한글항목명 | 과유불급 |
한자항목명 | 過猶不及 |
유형 | 개념 |
출전 | 『논어(論語)』「선진(先進)」 |
<요약>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뜻으로 중용(中庸)의 도를 잃어버린 상태를 가리킴.
<설명문>
이것은 『논어(論語)』「선진(先進)」의 “지나친 것은 모자라는 것과 같다.(過猶不及)”라고 공자(孔子)가 한 말에서 유래한다. 과(過)나 불급(不及)은 중(中)을 얻지 못하여 발생한 것이라는 판단 하에 『논어(論語)』「자로(子路)」에서는 광자(狂者)‧견자(狷者)를 그 예(例)로 들었다.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한글항목명 | 과즉물탄개 |
한자항목명 | 過則勿憚改 |
유형 | 개념 |
출전 | 『논어(論語)』「학이(學而)」 |
<요약>
자신을 수양(修養)함에 있어 행동의 오류를 시정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
<설명문>
『논어(論語)』「학이(學而)」에 나오는 말로 “잘못이 있으면 즉시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는 뜻이다. 도덕(道德) 실천에 있어서의 오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오히려 인간은 실천을 통해 오류를 발견하고 인식함으로써 진리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데, 이 말은 그러한 과정의 중요성을 나타내 준다. 그에 따라 정이(程頤)는 무의식적인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고의적인 악(惡)이 날로 발전한다고 전제하여 잘못의 시정은 빠를수록 좋다고 하였다. 또한 유작(游酢)은 잘못을 고치는 데 인색하면 덕(德)에 들어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현자(賢者)에게 보인(補仁)받을 수도 없다고 하여 이와같은 태도를 주충신(主忠信)과 연결시키기도 하였다.
과화존신(過化存神)
한글항목명 | 과화존신 |
한자항목명 | 過化存神 |
유형 | 개념 |
출전 | 『맹자(孟子)』 「진심상(盡心上)」 |
<요약>
군자(君子)의 덕화(德化)가 성대함을 표현한 말.
<설명문>
『맹자(孟子)』 「진심상(盡心上)」의 “무릇 군자가 지나는 곳은 (그 백성들이) 감화되고, 머무르는 곳은 신성해져, 위아래로 천지와 더불어 흐르니, 어찌 조금 돕는 것이라 하겠는가? (夫君子, 所過者化, 所存者神, 上下與天地同流, 豈曰小補之哉. )”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이 말은 왕도(王道)와 패도(霸道) 정치를 구별하고, 군주가 왕도 정치를 폈을 때 군자가 그에 참여하여 백성에 미치는 공효가 천지(天地)의 화육(化育)‧운행과 비견될 정도로 성대함을 표현한 것이다. ‘과화’의 예는 순(舜)임금이 역산(歷山)에서 농사지을 때 농부가 밭두둑을 그에게 사양하였고, 황하 가에서 질그릇을 구울 때는 그 지방 그릇의 모양이 반듯했던 것에서 볼 수 있다. 또 ‘존신’의 예는 공자가 백성들에게 생업(生業)을 주어 자립케 하고, 교화 인도하여 바른 길을 가게 하고, 편안하게 하여 먼 곳에 있는 사람은 오게 한 일 등에서 볼 수 있다. 정이(程頤)는 존신의 ‘존(存)’을 심(心)에 존주(存主)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존신’은 재기(在己 : 本), ‘과화’는 급물(及物 : 末)로 나누기도 하였다.
관괘(觀卦)
한글항목명 | 관괘 |
한자항목명 | 觀卦 |
유형 | 개념 |
<요약>
『주역(周易)』의 20번째 괘.
<설명문>
내괘(內卦)는 곤(坤 : 地)이고 외괘(外卦)는 손(巽 : 風)이기 때문에 풍지관(風地觀)이라고 하며, 바람이 땅위로 불어가듯이 세상을 주람(周覽)하는 것을 상징한다. 육효(六爻)의 배열로 보더라도 위의 이양(二陽)과 아래의 사음(四陰)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이 괘를 관괘라고 한다. ‘관’은 서로 바라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괘에서는 현상 속에 내재해 있는 이치를 관조하여 그것에 알맞게 행동할 수 있는 도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괘사(卦辭)는 “손을 씻어도 제수(祭需)를 올리지는 않는다. 성실함이 있어 사람들의 추앙을 받을 것이다.(盥而不薦 有孚 顒若)”이다. 이 괘는 제사의 절차를 시작하여 제수를 올리기 직전의 순간처럼 내적인 신실함이 충만한 때에 해당하고, 주효(主爻)인 구오(九五)가 강건중정(剛健中正)한 덕으로써 제사에 임하기 때문에 천하 만민의 심복(心服)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관국지광(觀國之光)
한글항목명 | 관국지광 |
한자항목명 | 觀國之光 |
유형 | 개념 |
출전 | 『주역(周易)』 「관괘(觀卦)」 육사(六四) 효사(爻辭) |
<요약>
성군(聖君)의 덕화(德化)가 행해져 나라의 문화‧문물이 성대함을 표현하는 말.
<설명문>
『주역(周易)』 「관괘(觀卦)」 육사(六四)의 효사(爻辭)로서 “나라의 광휘로움을 본다.”는 뜻이다. 이 말에서 풍물을 구경하기 위해 여행한다는 의미의 관광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그러나 효사에서의 원의(原義)는 여가 활동으로서의 여행이란 의미는 희박하다. 관괘 전체의 상(象)이 땅[地] 위에서 바람[風]이 유동(流動)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으므로 타국의 광휘(光輝)를 보기 위해 여러 나라를 순시한다는 뜻과 그것을 통한 그 나라의 토지, 풍속, 제도, 문물의 관찰과 견문의 확대 및 치국(治國)을 위한 국가 행정의 정비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치와의 관련성은 점차 탈각되고 여가 활동으로서의 여행의 의미만이 남아 통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관괘 전체의 의미 속에서 구오효(九五爻)는 어진 임금을 뜻하는 것이고 육사효는 구오효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으므로 그 임금의 도를 가장 잘 살필 수 있는 위치이다. 또한 임금 개인의 덕을 살핀다는 뜻에서 더 나아가 그 임금이 나라 전체에 행한 덕화(德化)를 관찰한다는 뜻인 “나라의 빛을 관찰한다.”는 표현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하된 자는 마땅히 그 임금의 조정(朝廷)에 나아가 벼슬하여야 한다는 것이고, 임금은 그 사람을 빈객(賓客)으로서 예우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주역』 속에서 나라의 빛을 본다는 뜻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올바른 정치의 구현을 위한 진퇴(進退)의 의미까지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관포지교(管鮑之交)
한글항목명 | 관포지교 |
한자항목명 | 管鮑之交 |
유형 | 개념 |
중국 시대 | 선진 시기/춘추전국시대 |
<요약>
우정(友情)이 돈독(敦篤)한 친구 사이를 이르는 말.
<설명문>
이것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제(齊)나라의 관이오(管夷吾 : 管仲)와 포숙아(鮑叔牙 : 鮑叔)의 우정이 남달리 두터웠던 데서 유래한 것으로, 후세 사람들이 좋은 친구 사이를 가리킬 때, 두 사람의 성(姓)을 따서 관포지교(管鮑之交)라고 일컫게 되었다. 『사기(史記)』「관안열전(管晏列傳)」에 의하면 관이오와 포숙아는 어려서부터 친구였다. 일찍이 두사람이 동업(同業)을 했을 때 관이오가 이익금을 많이 차지했지만 포숙아는 그의 가난함을 알기 때문에 탓하지 않았고, 관이오가 독립해서 하는 일마다 실패하자 주위에서 그의 무능함을 비웃었을 때 포숙아는 시운(時運)을 들어 그를 변호하였다.
또 전쟁터에서 관이오가 진격할 때는 뒤쳐지고, 후퇴할 때는 앞서 달아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겁장이라고 비난하자 포숙아는 그에게 노모(老母)가 있기 때문이라고 변명해주었다. 제나라에서 양공(襄公)의 난정(亂政)으로 내란(內亂)이 발생하여 군위계승(君位繼承) 문제가 일어나자 관이오는 공자(公子) 규(糾)를, 포숙아는 공자(公子) 소백(小白)을 각각 지지하였는데, 공자 규는 패하여 죽고 관이오는 노(魯)나라에서 포로가 되어 제나라로 호송되었다. 포숙아는 환공(桓公 : 小白)에게 관이오를 사면(赦免)하게 하고 자신의 몫이었던 재상(宰相) 자리를 관이오에게 양보하였다.
관이오는 환공을 도와 천하의 패자(霸者)가 되게 하여, 제후(諸侯)들을 모으고 주(周)왕실을 높이며 오랑캐를 물리쳐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았다. 관이오가 임종(臨終)할 때 환공이 포숙아를 후임 재상으로 쓰고자 했는데, 관이오는 포숙아가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해서 적당하지 않다고 하여 습붕(濕朋)을 추천해서 재상이 되게 하였으나 포숙아는 섭섭해하지 않고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관이오도 일찍이 “나를 낳은 자는 부모지만 나를 아는 자는 포숙아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관이오와 포숙아에 얽힌 고사는 후에 우정의 표본으로 여겨져 신의(信義)를 논하는 유자(儒者)들에 의해 높이 찬양되었다.
<참조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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