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접하는 <잡아함경>은 상좌부인 셜일체유부[유부]에서 수집정리한 <경>이다.
유부는 일체실유를 주장하는 상좌부임을 잊지 않고 있다면..
그들이 정리한 <잡아함경> 안에 일체 실유를 증거할 수 있는 <경>이 당연히 있지 않겠는가?..
그것도 적지 않게.. 오히려 법실유가 아닌 법심연생을 시설한 경이 훨씬 적다.
12처를 실유로 설한 경을 보기로 하자.
273. 수성유경(手聲喩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이 때 어떤 비구가 홀로 고요히 사색하고 있었다.
'어떤 것을 나라고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는 선정에서 깨어나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그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혼자서 어느 고요한 곳에서 '어떤 것을 나라고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이제 너를 위해 두 가지 법에 대해 설명하리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어떤 것이 그 두 가지인가?
안과 색이 둘이요, 이와 성·비와 향·설과 미·신과 촉·의와 법이 둘이니, 이것을 두 가지 법이라고 하느니라.
비구야, 만일 어떤 이가 '사문 구담(瞿曇)이 말하는 두 가지 법은 둘이 아니다. 내가 이제 그것을 버리고 다시 두 가지 법을 세우리라' 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말만 있을 뿐이다. 여러 차례 질문하고 나면 알지 못하고 그 의혹만 더할 것이니,
그것은 대경(對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안(眼)과 색(色)을 인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긴다.
비구야, 그 안(眼)이라는 살덩어리이고, 그것은 안[內]이며, 그것은 인연(因緣)이고, 그것은 단단한 것이며, 그것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안(眼)이라는 살덩어리 안의 지계(地界)라고 한다.
비구야, 안(眼)이라는 살덩어리에서 안이요 인연이며, 촉촉한 것이요 윤택한 것이며, 이것은 느끼는 것이다. 이것을 안(眼)이라는 살덩어리 안의 수계(水界)라고 한다.
비구야, 그 안(眼)이라는 살덩이에서 안이요 인연이며, 밝은 것이요 따뜻한 것이며, 이것은 느끼는 것이니, 이것을 안(眼)이라는 살덩어리 안의 화계(火界)라고 한다.
비구야, 안(眼)이라는 살덩어리에서 안이요 인연이며, 가볍게 요동하는 것이고 이것은 느끼는 것이니, 이것을 안(眼)이라는 살덩어리 안의 풍계(風界)라고 하느니라.
비구야, 비유하면 두 손이 합해서 서로 마주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이 안과 색을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 이 세 가지가 화합한 것이 촉(觸, 3사화합)이니, 촉이 함께 하면 느낌[受]·생각[想]·의도[思]가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법은 내가 아니요, 영원한 것이 아니니, 이것은 무상한 나요, 영원하지 않고 안온하지 않으며 변하고 바뀌는 나이니라. 왜냐 하면 비구야, 그것은 이른바 나고 늙고 죽고 사라지며 태어남을 받게 하는 법이기 때문이니라.
2법6쌍의 12처는 심연생이라고 강조했는데..
<273경>에서 12처는 실유라고 분명히 설명하고 계신다.
12처를 실유로 보아도 무방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12처를 실유로 본다면 그것은 시중에서 알고 있는 것과 똑같다.
그런데 남방 불교에서는 색념처 수행에서 안에 대해 <273경>에 나오는 그대로 관찰하도록 가르친다. 즉 안(眼)의 지.수.화.풍 4대 요소를 눈에서 관찰한다는 것이다.
그리 관찰하고 나면 '안(眼)이 심연생'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노우!
자신의 경험으로 실유인 것을 확인했는데 어찌 실유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상좌부에서 12처는 실유임을 의심하지 못하는 이유.. 자신의 실제경험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2연기법의 유전문 시작은 무명이다. 무명이 있으면 일체는 실유임을 의심할 수 없게 된다.
상좌부에서 색념처 수행을 통해 안.이.비.설.신 이 4대로 만들어진 것임을 관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무명에서 생긴 3사화합촉을 관찰할 뿐이기 때문이다.
하여 실유를 주장하는 것인데 그럼에도 아공이라 하는 것은..
일체는 무상하고 일체에는 '나 라하고 할 것이 없다고 관찰하기 때문이다.
즉 일체와 나를 분리해 일체는 실유이지만 그것의 주인인 [나]는 없다는 것.
따라서 설일체유부에서는
3세양중인과설은 당연한 것이나 과거, 현재, 미래 통털어 [나] 라고 할 것은 없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실유를 부정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안성마춤인 진리가 되지만..
12연기법 환멸문을 바르게 아는 이들은 어떻게 설득할 수 있는지?..
환멸문에 나오는 6입처멸은 무명을 멸하면 즉시 따라서 멸하는 것으로 생주이멸의 멸이 아니다.
환멸문은 실유를 인정하면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진리다.
환멸문에는 무명 멸이 나온다. 3세양중인과설이라면
무명은 과거지사인데 어떻게 현재에 있으면서 과거지사를 멸할 수 있을까?..
그리고 노사멸이 나온다. 3세양중인과설이라면
죽음[사]은 미래인데.. 어떻게 현재에 머물며 미래를 멸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