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서문헌
갈봉유고(葛峯遺稿) /김득연(金得硏)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학자 김득연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학자 김득연(金得硏)의 시문집. 2권 1책. 목판본. 1792년(정조 16) 그의 후손인 인탁(寅鐸)·홍구(鴻九) 등이 편집, 간행한 ≪용산세고 龍山世稿≫의 권3·4에 수록되어 있다. 권두에 이광정(李光庭)의 서문과 권말에 유장원(柳長源)의 발문이 있다.
권3에 시 567수, 권4에 서(書) 1편, 잡저 1편, 기 2편, 서(序) 2편, 발 2편, 제문 8편, 부록으로 만사 8편, 제문·행장·묘갈명·갈명후지(碣銘後誌)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잡저인 〈청량산유록 淸凉山遊錄〉은 임진왜란 때 전국 선비 8명이 조목(趙穆)을 방문하여 경서를 토론한 뒤 소수서원(紹修書院)을 거쳐 도산(陶山)의 이황(李滉) 유적을 두루 돌아보고 청량산으로 들어가 유람한 사실을 기록한 글로서, 당시 사찰의 퇴락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필사본의 별집에는 국문학사상 주목할 만한 한글로 쓴 장편가사인 〈지수정가 止水亭歌〉·〈산중잡곡 山中雜曲〉·〈영회잡곡 咏懷雜曲〉 등 63수의 시조가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지수정가〉는 그의 〈지수정기 止水亭記〉를 작품화한 것으로서 고향인 와룡산 일대의 산수와 그 속에 묻혀 사는 선비의 낙이망우(樂而忘憂 : 즐기며 근심을 잊음.)하는 생활의 정취가 담겨 있다.
또한 〈산중잡곡〉 등의 시조는 상당한 수준작으로 평가되며, 작가의 우리 말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해가 반영되었다. 그의 시는 담백하고 평이하게 자연과 안동 지방의 풍경과 사물을 노래하여 은둔한 선비의 격조를 더해 주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참고문헌>>龍山世稿
갈산집(葛山集) /권종락(權宗洛)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권종락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권종락(權宗洛)의 시문집. 4권 1책. 목판본. 19세기말경에 그의 증손인 의일(宜一)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권두에 1839년에 유도헌(柳道獻)의 서문이 있으며, 권말에는 이만유(李晩由)와 상대(相大)의 발문이 있다.
권1에는 시 89수, 권2에는 서(書)·기·지(識)·상량문·상언(上言) 각 1편, 축문 4편, 제문 3편, 녹(錄) 3편, 권3·4는 부록으로 행장·묘갈명·만사·제문과 사우왕복서(師友往復書) 및 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시는 평이하고 질박한 시어와 소박한 짜임새, 절제된 수식 등이 조화를 이룬 점에서는 뛰어나나, 주제면에서는 선현들을 본받고자 하는 진부함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갈산팔경방역옹소상팔경조격 葛山八景倣櫟翁瀟湘八景調格〉 같은 작품은 호방한 기상과 표일한 시품이 돋보이는 뛰어난 작품이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갈수헌문집(渴睡軒文集) /김위(金㙔)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김위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김위(金㙔)의 시문집. 4권 2책. 목판본. 1830년경 6대 손인 회진(晦鎭)이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으며, 권말에 회진의 발문이 있다.
권1·2에 시·만사 215수, 소 1편, 서(書) 9편, 권3에 잡저 1편, 기 1편, 발 2편, 상량문 2편, 애사 1편, 제문 10편, 묘지명 10편, 묘갈명 4편, 행장 2편, 권4는 부록으로 가장 2편, 묘지명·묘갈명 각 1편, 만사 39수, 고유문 1편, 발 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대개 고적을 탐방하면서 느낀 감회를 읊은 것이 많다. 〈동경회고시 東京懷古詩〉는 신라의 옛 서울 경주를 둘러보고 역사를 회고하며 영고성쇠가 덧없음을 한탄한 내용이다.
소의 〈사지평소 辭持平疏〉는 지평의 벼슬을 사직하며 올린 상소문으로, 간신들이 권세를 부려 나라의 정치가 흔들리고 있음을 간한 것이다.
서(書)는 대개 안부편지인데, 그 중 〈답조지평경안서 答趙持平景顔書〉는 주서를 천거함에 있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내용으로 당시 인선제도(人選制度)의 일단을 알 수 있다. 경상북도 안동 간재종가(艮齋宗家)에 소장되어 있다.
갈암집(葛庵集) /이현일(李玄逸)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이현일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이현일(李玄逸)의 시문집. 40권 21책(본집 29권 15책, 부록 5권 3책, 별집 6권 3책). 목판본.
이 문집은 원래 숙종 연간에 아들 재(栽)가 편집하고, 재를 비롯하여 문인 권두경(權斗經)·이광정(李光庭) 등 6인이 초교·재교·대교(對校)·교(校) 등 네차례의 교정을 거쳐 정고본(定稿本)을 완료하였으며 부록 5권 3책도 재가 아울러 편찬하여 간행을 시도했으나, 당시 이현일이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죄적(罪籍)에 올라 있어 간행되지 못하였다.
그 뒤 1811년(순조 11) 별집 6권 3책을 추가하여 21책으로 간행했는데, 역시 정부의 금지로 문집은 회수되고 책판은 소각 당했으며, 간행에 참여한 자손 6인이 유배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이후 철종·고종 연간에 이현일의 신원·추탈 과정에서 간행을 시도하여 1908년 이현일의 신원과 아울러 중간되었다.
1973년에 21책본에 속집 4권 2책, ≪계축추보 癸丑追補≫ 1책, ≪성유록 聖諭錄≫ 1책, ≪금양급문록 錦陽及門錄≫ 1책 등을 추가하여 모두 7종 47권을 상·하 2책으로 영인, 출간했고, 1987년에는 1973년의 영인본에 ≪존주록 尊周錄≫·≪기갑신계록 己甲辛癸錄≫·≪변정록 辨整錄≫ 등을 추가하여 총 50권을 2책으로 영인, 출간하였다.
이 책의 본집은 권1에 시 205수, 권2∼5는 상소문으로 모두 51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5에는 그밖에 차(箚) 5편, 헌의(獻議) 4편, 계사(啓辭) 3편, 권6·7은 경연강의, 권8∼17은 서(書)로 모두 305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18·19는 잡저 6편, 권20은 서(序) 9편, 기 5편, 권21은 발 15편, 축문 21편, 권22는 제문 21편, 잠 2편, 명 2편, 찬(贊) 1편, 권23은 비명 6편, 묘표 3편, 권24는 묘갈명 15편, 권25는 묘지명 17편, 권26∼28은 행장으로 모두 15편이 수록되어 있고, 권29에는 시장(諡狀) 4편이 수록되어 있다.
별집은 권1에 사(辭) 1편, 시 57수, 권2에 소 75편, 권3은 서 28편, 증언(贈言) 1편, 잡저 2편, 서(序) 6편, 발 13편, 상량문 2편, 권4는 제문 3편, 묘표 9편, 묘갈명 6편, 권5는 묘갈명 8편, 묘지명 2편, 행장 5편, 권6은 행장 7편, 시장 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록은 권1에 연보, 권2에 행장, 권3에 묘지명과 유사, 권4에 선부군가전(先府君家傳), 권5에 제문·만장·인산서원봉안문(仁山書院奉安文) 및 상향축문(常享祝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속집은 권1에 시 24수, 서(書) 48편, 권2에 서(書) 63편, 권3은 서 19편 외에 잡저·기·상량문이 각 1편, 축문 2편, 제문 7편, 신도비명 1편, 묘갈명 5편, 권4는 부록으로, 이현일에 대한 제문 23편, 만장 53편이 수록되어 있다.
〈계축추보〉에는 서(書) 1편 외에 이현일의 신도비명(神道碑銘) 1편, 제문 2편, 만사 16편이 수록되었다.
시는 교우·문인·자제들과의 수창(酬唱: 서로 시를 주고받는 행위)이 가장 많고, 고적(古蹟)·기행·영회(詠懷) 등이 그 다음으로 많다. 그 중에는 영사시(詠史詩)나 도학에 관한 시가 많으며, 만년에 홍원(洪原)·종성·광양 등 유배지에서의 소작은 유배문학연구의 자료이기도 하다.
〈영화왕 詠花王〉은 9세 때의 소작으로 경인구(警人句)이고, 〈영창전매 詠窓前梅〉는 10세 때 소작으로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포위소식을 듣고 격분해서 지은 시이다. 또한 〈독징비록유감 讀懲毖錄有感〉은 1649년(인조 27) 23세 때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을 읽고는, 청에 대한 복수설치(復讐雪恥)와 요동회복의 뜻을 나타낸 시이다.
〈병중서회 病中書懷〉는 78세 때 지은 절필시(絶筆詩)로, “평생에 한 일이 무엇이더뇨, 하늘에 부끄럽지 않으려 했네(平生何所事 要不愧皇天).”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이현일의 수양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이런 시들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의 다른 저서로는 소와 그에 준하는 차·헌의 등이 138편이나 있는데, 정치·경제·국방·외교·예제(禮制) 등 정책 전반에 걸친 건의이다. 〈의논대왕대비복제소 擬論大王大妃服制疏〉는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에 관한 송시열(宋時烈)의 예설(禮說)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영남 사림을 대표해서 지은 것이다.
〈사면지평겸진오조소 辭免持平兼陳五條疏〉는 군왕에게 왕도정치의 원리를 제시한 것으로, ① 정학을 밝혀 큰 근본을 세울 것, ② 기강을 떨쳐서 풍속을 권장할 것, ③ 공도를 넓혀서 왕법을 바로잡을 것, ④ 충간을 받아들여 막히고 가린 것을 제거할 것, ⑤ 민정을 살펴서 실질적 혜택을 실행할 것 등 5조목이다.
〈사공조참의잉진소회소 辭工曹參議仍陳所懷疏〉·〈인재이언사소 因災異言事疏〉는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출을 반대하고, 예우를 다할 것을 건의한 소로 그의 공정·강직함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그런데 〈인재이언사소〉에 “폐비 민씨가 후비의 법도를 따르지 아니하여 스스로 하늘(남편인 임금)에 끊어졌다(廢妃閔氏不循壼儀自絶于天).”, “방위를 베풀어서 금호(禁護)를 삼가해야 한다(爲設防衛謹其糾禁).”는 등의 구절이 갑술옥사 이후 문제를 일으켜 민비를 모해하려는 뜻이 담겨있다는 죄목으로 7년의 유배살이와 그 뒤 2백여 년 동안 복관·환수 등 4, 5차의 정치적 수난을 겪게 된다.
〈진군덕시무육조소 進君德時務六條疏〉는 진덕(進德)·입지(立志)·통변(通變)·택임(擇任)·육재(育材)·석시(惜時) 등 시무의 6사(事)를 제시한 것이다. 한편, 권5에는 이조판서직을 사양하는 소를 전후 10차례나 올린 것이 실려 있는데, 이를 통해 붕당시대에 벼슬길의 어려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경연강의 經筵講義〉는 이현일이 경연에서 경사(經史)와 치도(治道)를 강론한 내용을 모아, 기록한 것으로 당시 경연운영의 실상과 이현일의 학문·정치관을 살필 수 있다.
이 문집 속에 특히 서(書)가 많이 있다. 150인 가량의 사우(師友)·문인·자손들과 주고받은 총 360편이 있고, 시사(時事)·경학·성리학·예학(禮學)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룬다.
예학에 관해서는 권두경·황수일(黃壽一)·정만양(鄭萬陽), 조카 이만(李槾) 등과의 왕복이 두드러지는데, 이의 답서는 예서(禮書)의 백미인 이유원(李猷遠)의 ≪안릉세전 安陵世典≫, 유장원(柳長源)의 ≪상변통고 常變通攷≫의 편저에 근간이 되고 있으며, 또한 이현일의 예학적 위치를 말해주고 있다.
성리설은 정시한(丁時翰)·이동완(李棟完)·신익황(申益幌), 아우 숭일(嵩逸) 등과의 서신 왕복을 통해 더욱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특히, 신익황과의 성리설에 관한 토론은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사이의 사칠논변(四七論辨)에 비길 정도로 면밀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잡저는 서(書)와 함께 이현일의 학문, 특히 성리학적 입장을 천명하는 대표적인 논리이다.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은 그의 나이 62세(1688)에 저술된 것이다.
그 내용은 이이가 성혼에게 답하는 〈사칠논변서〉에서 19조목을 뽑아내어 비판한 것인데, 그는 이이가 이황의 〈이기호발설 理氣互發說〉을 비판하는 태도에 격분했고, 이이의 이론이 기호지방에 성행하는 것을 우려하여 이를 재비판하려는 것이 그의 저술동기였다.
그는 이이가 주장하는 〈기발이승일도설 氣發理乘一途說〉과 〈이무발설 理無發說〉·〈칠정포사단설 七情包四端說〉 등을 반박하고,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지지하는 한편, 〈이유동정설 理有動靜說〉·〈이기이물설 理氣二物說〉을 주장하였는데, 그의 학설은 다시 아들 재, 이상정(李象靖)·유치명(柳致明)으로 이어져 주리설의 흐름을 확고히 형성하였다.
〈수주관규록 愁州管窺錄〉은 69세 때 유배지인 종성에서 논술한 것이다. 장현광(張顯光)·조호익(曺好益)·유성룡·조식(曺植) 등 선배학자 6인의 성리설에 의심스러운 곳을 지적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하였고, 신안 진씨(新安陳氏)·경재 호씨(敬齋胡氏) 등 중국의 학자 6인에 대해서도 주자의 입장과의 차이를 분석하여 비판하였는데, 이는 매우 진취적인 학문 자세로 평가된다.
서(序)의 〈어제주수도설발휘서 御製舟水圖說發揮序〉는 소에도 들어 있는데 숙종의 〈어제주수도설〉을 부연설명하면서, 열학(悅學)·친현(親賢)·납간(納諫) 등 5조목을 들고 그 실천원리를 성(誠)으로 밝혀 도학적 정치원리를 제시하였다.
〈둔암유공수록서 遁庵柳公隨錄序〉는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에 쓴 서문으로 저자가 실학파의 경제론과 접촉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유형원의 호가 둔암이었음도 알 수 있다.
별집의 〈정설 政說〉은 백성들의 고통상을 보고 치도(治道)의 8사(事)를 논술한 것으로, ① 저축을 늘릴 것, ② 경계를 바르게 할 것, ③ 군제를 정할 것 등 3조목만 남았는데, 그가 경세론에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록에 수록된 〈유사 遺事〉와 〈취정록 就正錄〉은 행장·묘갈명 등과 함께 이현일의 전기자료이다. 특히 〈취정록〉은 문인 신익황이 저술한 문학기(聞學記)로서 당초 이이의 성리설을 수용하던 신익황이 이현일과의 6년간에 걸친 논변 끝에 승복하여 문인이 된 사실을 적은 것이다.
영인본에 추가된 여러 저서들의 내용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성유록≫은 이현일의 상소·계(啓)·차자에 대한 숙종의 비답·전지(傳旨)·전유(傳諭) 등을 모은 것으로 1710년(숙종 36) 아들 재의 발문이 있고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존주록≫은 이현일의 저술과 논의 중에서 복수설치와 존중화(尊中華)·양이적(攘夷狄) 등에 관한 문구를 모은 것으로 시 23편, 문 18편이 수록되었다. 1711년 권두경의 발문이 있다.
≪기갑신계록≫은 일명 ≪백의편 白衣編≫으로 1689년에 이현일이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여 올린 소에서부터 갑술옥사, 그 뒤 1721∼1723년까지 이현일의 신원에 관한 사실을 모은 것들이다. ≪변정록≫은 역시 신원에 관한 자료로서 당쟁관계 자료이다.
≪금양급문록≫은 이현일의 문인록인데 총 360여 명이 수록되었다. 금양은 지금의 안동시 임하면 금소(琴韶)인데, 이현일이 유배지에서 돌아와 강학하던 곳이다.
이 문집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한 시대 한 학파를 대표하는 학자의 문집으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나 그의 학문이나 사상, 그리고 경세학·예학·경학(經學) 및 정치적 위치 등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실정이고, 오직 성리학에 대해서만 ≪조선유학사≫·≪한국철학사≫ 등에 소개되었으며 몇 편의 논문이 있을 뿐이다. 장서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東儒學案(河謙鎭)
<<참고문헌>>朝鮮儒學史(玄相允, 民衆書館, 1960)
<<참고문헌>>韓國儒學史草稿(李丙燾)
<<참고문헌>>한국유학사(裵宗鎬, 延世大學校出版部, 1974)
<<참고문헌>>韓國儒敎史(成樂熏, 同和出版公社, 1979)
<<참고문헌>>葛庵 李玄逸의 四七論(琴章泰, 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1980)
갈음문집(葛陰文集) /이항배(李恒培)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이항배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이항배(李恒培)의 시문집. 4권 1책. 석인본. 1985년 후손 재춘(宰春)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종선(李種宣)의 서문과 권말에 재춘의 발문이 있다.
권1∼3에 시·만사 336수, 애사 1편, 상량문 4편, 제문 2편, 권4는 부록으로 만사 155편, 제문 1편, 묘갈명 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아담하면서 청고하여 탈속의 정을 느끼게 한다. 〈추석잡영삼수 秋夕雜詠三首〉는 추석을 맞아 친구를 잃은 슬픔과 인간세상의 허무함을 읊은 것이다.
〈자연정중수상량문 自然亭重修上樑文〉은 오래되어 잊혀져가는 조상의 학덕을 정자를 중수하여 다시 빛나게 한다는 뜻을 밝히고, 연혁과 중수경위를 적은 글이다. 또한 〈남간서당이건상량문 南間書堂移建上樑文〉과 〈성산서당이건상량문 誠山書堂移建上樑文〉은 모두 서당을 중수, 이건하면서 학문의 중요성을 밝힌 내용이다.
이 밖에 큰형의 행적과 학업을 추모한 〈제백씨문 祭伯氏文〉, 여러 친지들의 죽음을 추모한 제문 등이 있다. 경상북도 안동과 이덕홍(李德弘)의 종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갈천집(葛川集(임훈))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임훈의 시문집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임훈(林薰)의 시문집. 4권 2책. 목판본. 1665년(현종 6) 그의 증손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권두에 송시열(宋時烈)의 서문이 있다.
권1에 시 38수, 부(賦) 3편, 권2에 소(疏) 6편, 묘갈명 3편, 행장 3편, 서(序) 3편, 서(書) 3편, 권3에 조(詔) 1편, 제문 1편, 기(記) 8편, 묘갈명 1편, 권4는 부록으로 행장·묘갈명·제문·만사(挽詞)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저서 가운데 부의 〈와 蝸〉는 달팽이를 우의(寓意)하여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나타낸 글로서, 달팽이가 비록 하찮은 미물에 불과하지만 천지의 기운을 받아 태어나기는 사람과 다를 바 없으며, 적의 침공도 쉽게 막을 수 있고, 무엇을 애타게 구하려는 괴로움도 없으니 차라리 처신하기 쉬울 것이라는 풍자적 내용을 담고 있다.
소의 〈언양진폐소 彦陽陳弊疏〉는 그가 언양현감으로 있을 때, 고을의 어려운 실정을 보고하여 이의 해결을 촉구한 것이다. 그는 흉년이 계속 들어 고향을 떠나는 사람이 늘어나고 농사를 짓지 않아 논밭이 황폐화되는 실정에도 세금을 이전처럼 거두어들이니 백성들의 고통이 더욱 가중되고 있음을 진언하고 있다.
〈경오소대초 庚午召對草〉는 1570년(선조 3) 왕명으로 임금을 만나, 정사에 관한 의견을 올리기 위하여 미리 작성한 글이다. 중국 한나라 문제(文帝), 당나라 태종(太宗), 송나라 인종(仁宗)을 예로 들어 군학(君學)과 시무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권3의 〈의송사악비정충기조 擬宋賜岳飛精忠旗詔〉는 중국 송나라 충신 악비(岳飛)를 찬양하는 내용의 의조(擬詔)이다. 기에는 덕유산 기행문인 〈등덕유산향적봉기 登德裕山香積峯記〉가 관심을 끈다.
이 밖에 정여창(鄭汝昌)의 사당을 건립한 경위를 소개한 〈일두선생사당기 一蠹先生祠堂記〉 등이 있다. 규장각도서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갈천집(葛川集(김희주))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김희주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김희주(金熙周)의 시문집. 10권 5책. 목판본. 서문과 발문이 없으므로 편집과 간행에 대한 것은 알 수 없다.
내용은 권1·2에 사(辭) 1편, 시 96수, 만사(輓詞) 22수, 권3에 소차(疏箚) 9편, 권4에 경연강의(經筵講義) 1편, 서(書) 19편, 권5에 서(書) 15편, 잡저 6편, 권6에 잡저 1편, 서(序) 6편, 기(記) 7편, 권7에 발 8편, 명 3편, 상량문 4편, 축문 7편, 상향축문(常享祝文) 2편, 제문 15편, 권8에는 묘갈명 6편, 묘지명 2편, 행장 5편, 권9에 유사 2편, 전(傳) 3편, 권10은 부록으로 행장 1편, 신도비명(神道碑銘) 1편, 제문 10편, 만사 1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시 가운데 도잠(陶潛)의 〈귀거래사 歸去來辭〉에 화답한 〈화귀거래사〉는 글재주와 정감이 유감 없이 발휘된 글이다. 서(書)에는 주로 학우와 친지들에게 안부를 묻고 학문을 토론한 것이 많으며, 이황·이상정(李象靖)의 학문을 칭찬하는 대목이 종종 눈에 띈다.
소 중에 〈논혜경궁복제소 論惠慶宮服制疏〉는 당시 말썽이 많던 예설(禮說)에 관한 소신을 밝힌 것이다. 이 글에서 그는 기해예변(己亥禮辨)과 더불어 일가견을 가지고 당당하게 논지를 폄으로써, 혜경궁의 상례에 있어 여러 가지 소홀한 처사를 지적하였다.
그 주안점은 혜경궁이 14년 동안이나 왕권을 대행하였기 때문에 소군(小君)이므로 다른 왕자들과 동일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서추잉진육폐소 辭西樞仍陳六弊疏〉에서는 당시에 만성화 된 정치를 개선하기 위한 당면과제로 여섯 가지의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하였다. 그 방법으로 궁성학(躬聖學)·입기강(立紀綱)·광인재(廣人才)·휼민은(恤民隱)·정사추(正士趨)·숭도술(崇道術) 등 6조목을 제시하였다.
또한 〈경연강의〉에서도 왕도정치를 주장하여 맹자의 사상을 실천해야 한다고 논술하고 있다. 그 밖에도 〈금강산유록 金剛山遊錄〉과 시 전체에 흐르는 정감적 표현 등에는 정치가로서보다 문인으로서의 섬세한 관찰력이 잘 나타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감로재유고(感露齋遺稿) /조광국(曺光國)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조광국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학자 조광국(曺光國)의 시문집. 3권 1책. 석인본. 1939년 그의 7대 손 윤현(允鉉)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윤현의 소지(小識)가 있다. 권1에 시 38수, 권2에 서(書) 4편, 제문 4편, 유사 1편, 권3은 부록으로 만사·제문·행장·묘갈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주로 친분이 있던 사람들과 화답한 것이거나 차운(次韻)한 것들로서, 평이한 시어로 생활주변의 소재를 읊은 서경(敍景)·영물(詠物)이 많다. 시의 후반부는 친지들에 대한 만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서(書)는 주로 이광정(李光靖)·정중기(鄭重器)·윤봉오(尹鳳五) 등에게 보낸 서한으로, 대개 행장·찬술 등의 글을 부탁하거나 안부를 물은 것들이다. 제문은 정중기 등에 대한 것들이며, 〈선고병애처사부군유사 先考屛厓處士府君遺事〉는 아버지 선장이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 학덕이 높았음을 기록한 것이다.
부록에는 윤봉오가 그의 학행을 당시 경상도관찰사였던 심성희(沈聖希)에게 알리는 〈읍재천보방백장 邑宰薦報方伯狀〉이 실리어 있다. 후손인 조용근(曺龍根)이 소장하고 있다.
감모재집(感慕齋集) /노광두(盧光斗)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 노광두의 시문집
조선 후기의 문신 노광두(盧光斗)의 시문집. 2권 1책. 목활자본. 그의 아들 기수(箕壽)의 편집을 거쳐, 1922년 증손인 근영(近泳)과 종한(鍾漢) 등이 간행하였다. 권말에 족손(族孫)인 보현(普鉉)과 근영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36수, 소(疏) 4편, 서(序) 10편, 기(記) 6편, 발(跋) 3편, 상량문 2편, 제문 7편, 행장 3편, 묘갈명 4편, 봉안문 1편, 권2는 부록으로 연보, 사제문(賜祭文)·행장·묘갈명 각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소 중 〈사지평소 辭持平疏〉는 1821년(순조 21)에 올린 사직소로, 당시 환곡(還穀)의 폐단이 매우 심함을 특히 함양과 안의의 현황을 들어 지적하고 그 시정책을 제시하였다.
〈사호조참판소 辭戶曹參判疏〉에서는 임금의 도리와 백성의 구제에 대한 방책을 언급하고 아울러 언로(言路)를 넓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영모단기 永慕壇記〉는 임진왜란 때 이운(李蕓)과 함께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진주에서 전사한 참봉 안흥종(安興琮)과, 정유재란 때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들어가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봉사(奉事) 안헌(安憲) 부자의 장렬한 전공을 기리기 위하여 만든 영모단의 기문(記文)이다.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부산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감산시집(甘山詩集) /이황중(李黃中)의 시집
조선 후기의 학자 이황중의 시집
조선 후기의 학자 이황중(李黃中)의 시집. 5권 2책. 필사본. 권말에는 1917년 설원(雪苑)·정원(正源)이 초록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권1∼5에 시 424수가 수록되어 있다. 시는 명승지를 여행하며 그 경치를 노래한 것이 많다.
시의가 맑고 깨끗해서 자연의 아름다운 정경이 잘 표현되어 있으며, 권의 첫머리마다 써 놓은 금강산의 아름다운 묘사는 직접 선경을 더듬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한강춘망 漢江春望〉·〈한강범주 漢江泛舟〉·〈금강관기 錦江觀妓〉 등은 강을 배경으로 노래한 것이고, 〈박연폭포〉·〈백운동〉·〈만월대〉·〈탄금대〉·〈해운정 海雲亭〉 등은 명승고적을 탐방하면서 회고의 감상을 읊은 것이다.
그 밖에 〈과육신묘〉·〈선죽교〉 등은 충신의 자취를 더듬으면서 오늘의 실정을 개탄하는 내용이다. 국립중앙도서관과 동국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