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딸} 읽기 ④:
무덤에도 가기 싫은 ‘그리운 얼굴’
朴埰同 (2015.03.13.21:26)
다음은 {목사의 딸} 72쪽에서 옮깁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와 오래 전에 이별한 사람 같으셨다. 네덜란드에서 돌아오신 후 어머니 산소에 한 번이라도 가보시기나 했는지 의심스러웠다. 적어도 요한 오빠와 내게는 한 번도 같이 가자고 한 적이 없으셨다. 그리고 어머니 기일에 맞춰 추도예배를 드리는 일도 없으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남편에게 철저히 잊힌 사람이셨다.
다음은 {목사의 딸} 55쪽~56쪽에서 옮깁니다.
그렇게 허무하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열세 명이 죽거나 부상 당한 큰 사고였는데, 하필 어머니가 돌아가시다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우리 가족 중 요한 오빠만 어머니의 임종을 지킨 셈이다.
“혜란아,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집에서 이 소식을 들은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침에 본 어머니 얼굴이 그리도 또렷한데, 난데없이 시신으로 돌아와 관 속에 누워계시다니···. 나는 그 사실을 믿을 수도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어딘가에 살아계실 것 같았다. 차라리 실종되셨다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 어머니 시신이 든 관이 집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조금씩 실감이 됐다. 큰오빠와 열일곱살 요한 오빠 열세살 나, 아홉살 은난이 세살 단열이 이렇게 다섯 남매가 어머니 관을 맞았는데, 어른들은 어머니 시신을 보여주시지 않았다. 우리가 너무 어리다는 까닭이었다. 나중에 어른들이 나누시는 이야기를 겨우 들을 수 있었는데, 어머니 얼굴은 평소 고운 얼굴 그대로였고, 트럭이 어머니 가슴 부분을 가로질러 갔다고 했다.
나는 그날 이후 밤마다 실종된 어머니를 찾아다니는 꿈을 꿨다. 어디선가 내 목소리와 닮았다는 어머니 따뜻한 음성이 “혜란아!” 하고 부를 것만 같았다.
다음은 제 경험에 비춰 본 추측입니다. 박윤선 목사님 심리를 추측해 본 것입니다.
네덜란드에서, 비보를 알리는 편지를 읽고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귀국해 집에 들어서자 나를 반겨야 할 아내는 정말 없었다. 마음으로 ‘내 아내 애련아, 내 아내 애련아, 주님을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내 아내 애련아, 너보다 내가 죽었으면 더 나았을 것을…!’(삼하 18:33 참조) 통곡했지만, 주님 품에 안겨 안식을 누리는 아내를 생각하면 마음에 위로가 됐다. 그래서 아내를 잊으려고 했다. 그러나 내 아내 애련이는 내게 잊힌 사람이 될 수가 없었다. 나는 실종된 아내를 찾아다니는 꿈을 꾸곤 했다. 어디선가 아내가 따뜻한 음성으로 “여보!” 하고 부를 것만 같았다.
제가 제 선친 무덤에 가 본 것은 열 손가락을 꼽을 정도입니다. 그 열 손가락도 거의 홀로 다녀왔습니다. 고향 목포에서 명절 연휴를 보내게 될 때면 성묘에 나서는 형제들과 다르게 성묘에 나서지 않는 제 모습을 보며 어머니께서는 “아버지를 잊은 셋째 아들”이라는 말씀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1987년 6월 11일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버지 출상을 보지 못했습니다. 장례를 다 치른 뒤에야 아버지 별세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죽음보다 더 깊은 그리움…. 아버지 출상을 못 본 까닭으로 지금도 아주 가끔 꾸는 꿈입니다만, 청년 시절 아버지가 그리워 아버지 무덤을 파헤치는 꿈을 꾸곤 했습니다. 무덤 속에서 아버지 팔을 베고 아버지 품에 안겨 자는 꿈도 꿨습니다. 참 포근한 잠이었습니다. 다음은 그 시절 선친(朴日炅)을 그리워하며 썼던 글 일부입니다. 1992년 가을에 쓴 글입니다.
목포에서 지는 해가 아닌 떠오르는 해를 본다.
日炅을 본다.
무덤에도 가기 싫은, ‘보고 싶은 얼굴’을!
꿈처럼 여겨지냐?
꿈이라도 꿔 봐야지.
나는 이런 꿈을 참 많이 꿔.
잠이 깨면, 가슴을 앓는 슬픔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