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1 주일설교
질문 많은 쌍둥이
(요 20:24~29)
학생 가운데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1)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바로 핵심을 이해하는 학생
2) 설명이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냥 덮어두는 학생
3) 이해될 때까지 묻고 보충 설명을 듣고 이해하는 학생
이 가운데 1번이 가장 좋겠죠. 그러나 바로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2번보다는 3번이 나을 것입니다. 질문하지 않는 2번은 용기가 없거나,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있습니다. 하지만 3번 덕분에 2번도 보충 설명을 듣고 이해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몇 번 유형인가요?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저는 1번이 아니면 3번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저에게 성경을 물어오면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해될 때까지 설명을 해 드립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가운데서도 저같이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쌍둥이입니다. 24절에 보면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Θωμᾶς ὁ λεγόμενος Δίδυμος)가 등장합니다. 여기는 디두모는 헬라어이고 도마는 아람어입니다. 뜻은 둘 다 쌍둥이입니다. 이는 마치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요 1:42)와 같은 경우입니다. 게바는 아람어, 베드로는 헬라어입니다.
25절에서 도마가 한 말 때문에 사람들은 ‘의심 많은 도마’라고 부릅니다. 찬송가 135장 가사에 “의심 많은 도마에게 확신주시고”라는 부분 때문에 도마는 의심쟁이로 굳어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도마를 의심쟁이가 아니라 질문쟁이로 부르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질문 많은 쌍둥이”로 정했습니다.
쌍둥이 도마는 고마운 존재입니다. 도마는 이해가 늦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존재입니다. 또 도마의 질문 덕분에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도마를 추척하면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도마가 등장하는 사건은 요한복음 11장입니다. 예수님이 베레아에 계실 때 베다니에서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틀 더 계시다가 사흘째에 유대로 가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며칠 전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는데 지금 가시면 위험하다고 말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지금 나사로가 죽었으니 가서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때 도마는 돌출 발언을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유대로 가면 위험하다고 말리는 상황에서 도마는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
이처럼 주님을 따르는 데 목숨을 내놓은 도마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의협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도마는 예수님께 헌신하지 않고 뺀질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충성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도마가 이것저것 질문하는 것을 안 믿으려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믿으려는 것입니다. 목숨걸고 충성하려면 확실히 믿어야 하고, 확실히 믿으려면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또 자기가 확실해야 다른 사람도 설득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해수욕장에 놀러 가서 해변에 발만 잠그는 사람도 있고 물에 풍덩 뛰어들어 재미있게 노는 사람도 있습니다. 재미있게 노는 한 사람은 그 팀 전체를 재미있게 만들어 줍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언저리에서 발만 잠그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믿으면 헌신하면서도 재미가 있습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도 신앙생활이 행복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도마같은 헌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지만 헌신하려면 확신이 필요하고 확신하려면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경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읽고 이해가 안 되면 저에게 물어보시고 잘 안 믿어지지 않으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도마가 등장하는 사건은 요한복음 14장입니다. 요한복음 13~17장은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하시던 다락방에서 하신 고별설교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다락방 강론’이라고도 부릅니다. 마태복음 5~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부르듯이 요한복음 13~17장을 다락방 강론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예수님이 빵과 포도즙을 주신 후에, 잠시 후에 제자들을 떠날 터인데 너희들을 올 수 없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베드로가 묻자 지금은 따라오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따라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알송달송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어리도 가는지는 모르지만 그 길은 너희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에는 너희가 ‘아느니라’라고 번역해놓았지만 원문에서는 완료형으로 되어 있어 이미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 여러분이 이런 말을 들으면 무슨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내가 어디로 가는지 너희가 모르지만, 그 길은 너희가 이미 알고 있느니라.”라고요? 이럴 때 가만히 있으면 2등은 할 수 있지만 도마는 몰라도 가만히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도마는 바로 물었습니다. “선생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우리가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그 위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위대한 말씀은 도마의 질문 때문에 주신 대답입니다. 도마는 이 위대한 말을 다 이해했을까요? 제 생각에는 나중에,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님이 오신 후에야 이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도마는 더는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도마는 자기가 이해될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무모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럴 때는 더 질문하기보다는 곰곰이 생각하고 이해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여러분이 질문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질문하기 전에 고민을 좀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유익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생각을 많이 하고 고민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최유종 간사가 혼자 고민하고 책을 찾아보다가 해결되지 않으면 가끔 저를 찾아옵니다. 그런 때는 상당히 수준 있는 질문을 합니다. 수준 있는 질문에 답을 주고 나면 상당히 뿌듯합니다. “역시 내 아들이야.”
문제의 답을 얻고 나서 최유종 간사도 속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역시 우리 아버지는 명쾌하셔.”
세 번째로 도마가 등장한 장면이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날 저녁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세 가지 당부를 하셨습니다. 그 세 가지 당부가 무엇이었나요? 유튜브에서 지난주 설교를 다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무슨 사연인지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자 도마는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손가락을 예수님의 못 자국에 넣어 봐야 믿을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이 장면만 보면 도마는 의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어떤 이는 도마가 십자가를 본 충격이 너무 커서 낙담과 좌절에 빠져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충격이 컸고 낙담했겠지요.
하지만 저는 도마의 마음을 좀 이해해 보고 싶습니다. 도마는 안 믿고 싶은 것이 아니라 확실히 믿고 싶은 것입니다. 얼마 전에 예수님이 위험한 유대로 가시겠다고 할 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던 사람이 도마입니다.
예수님은 며칠 전에 내가 가는 장소는 너희가 모르지만 내가 가는 길은 너희가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하시고 다음 날에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예수님이 부활하여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만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만나서 믿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생애 내내 그분에게 충성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목숨을 걸려면 말만 듣고는 안 됩니다. 그분을 만나서 확인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확인 작업을 거치셨나요?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근거 위에 서 있나요? 저는 확인을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려면 좀 길어요. 그것만 따로 한번 설교를 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물으면 설명해 드릴게요.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신비체험은 아닙니다. 신비체험은 믿을만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도마의 마음을 이해하시는 예수님은 다음주에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26절에 8일을 지났다는 말은 사실은 7일 후입니다. 동양인들은 이렇게 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에 죽고 일요일에 부활하셨으니까 삼 일째 날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흘 후에 부활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다음주에 도마를 만나주셨습니다. 27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확인을 시켜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9절에서 보고 믿은 사람보다 보지 않고 믿은 사람이 더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
도마의 의심 사건은 우리에게 확신을 준 사건입니다. 도마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이 환영(幻影)을 본 것이 아님이 증명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다시는 예수님을 볼 수 없지만, 도마 덕분에 보지 않은 우리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음이란 보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의로 여겨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15장을 근거로 하신 말씀입니다.
아들이 없던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입양하려다가 실패한 후 종 엘리에셀을 입양하려고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그 말씀을 드렸더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친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상황적으로 불가능하였으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보지 않고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복된 믿음입니다.
네 번째로 도마가 등장한 곳은 사도행전 1장입니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성령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따라 그 다락방에 제자들이 모였는데 도마가 함께 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을 때 도마도 성령을 받아 주님의 길로 갔습니다.
“그 길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묻던 도마가 이제는 그 길을 알았습니다. 그 길은 제자의 길입니다. 그 길은 희생의 길입니다. 그 길은 박해의 길입니다. 그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반신반의로 신앙생활을 하지 마세요. 궁금하면 도마처럼 질문하세요.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세요. 그리고 그 길을 모르는 자가 되지 말고 그 길을 아는 자가 되십시오.
우리 함께 그 길로 갑시다. 그 길이 좁은 길이고 희생의 길이고 십자가의 길일지라도 그 길이 생명의 길임을 확신하고 그 길로 갑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곧 길이요, 예수님이 곧 진리요, 예수님이 곧 생명이며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갈 수 있음을 전하는 제자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