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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으로 가라, 두려워하지 말고
여호수아 1:1~9
I. 예수님의 비전이 나의 비전이 되어
지금 이 시간에는 “약속의 땅으로 가라, 두려워하지 말고” 미래가 매우 불투명하고 또 미래가 불안하게 느껴진다 해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 땅 역시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는 땅이니 그 약속의 땅으로 우리가 함께 믿음으로 전진하자, 나아가자! 그런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형통하리라”는 이 말씀이 7절 8절에 걸쳐 두 번 나옵니다.
교회에서 오해되고 잘못 사용된 단어 가운데 하나가 “형통”이란 단어입니다.
세상 적으로 “형통”이란 말은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잘 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게 형통인 줄 알았습니다. 특히 지난 세기 산업화의 경제발전과정에서 교회엔 번영신학, 축복신앙, 위복신앙이 만연되고 있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서 형통이란 쉽게 물질을 얻는 풍요, 세상적인 성공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형통, 원문 히브리어 사칼(sakal)은 하나님의 계획이 나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꿈이 내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때 그것을 형통이라 합니다. 영어 가장 오래된 번역 가운데 하나인 King James Bible(성경)에서는 형통이란 good success 선한 성공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형통은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꿈,하나님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루터 킹 목사님의 I have a dream 나는 꿈이 있다라는 설교말씀이 있습니다.
어린 제게도 I have a dream 꿈이 있었습니다. 저의 꿈이 무엇인가를 찾는데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엄마가 일 나가시면 학교에서 돌아온 저는 부엌에서 밥을 지어 놓고 텃밭에서 고추 따다가 된장 위에 얹어놓고 엄마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열명도 안 되는 시골교회 주일학교 학생이 되어서 예배당이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우리 엄마 고생시키지 않도록 하나님 성공하게 해 주세요. 이게 제가 꿈을 꾸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청소년 시절엔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매일 새벽예배가 있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Boys, be ambitious (제군들이여 꿈을 가지십시오) 시골아이들을 모아 놓고 큰 꿈을 꾸라고 늘 설교 하셨습니다.
‘나도 큰 꿈을 꿔야지, 세상 적으로 큰 인물이 되어야지’꿈을 꾸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원을 따라 신학생이 되었습니다.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어느 부흥회에 참석해서 안수하는 목사님으로부터 “너는 한국교회에 여호수아가 되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지만 한국교회를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꼭 인도해 된다. 저는 그렇게 늘 믿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good success 거룩한 성공이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목사가 되어 나는 좋은 교회에 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교회라고 말씀하실 때 그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내가 꾸는 큰 꿈이 도대체 무엇일까? 크신 주님의 꿈을 내가 이루어 드려야지. 그게 바로 나의 비전이었습니다.
꼭 30년 전 저는 섬기던 교회를 사임하고 덜컹거리는 시골길 난지도 길을 따라서 꿈꾸던 교회를 찾아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 하다가 몇 가지 소중한 단어들을 가슴에 새기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심장 속에 있는 교회, 신약성경에 있는 바로 그 교회, 1세기를 뒤집었던 그 교회, 마지막 때 성령이 보고 싶어 하시는 그 교회, 주님이 재림하셔서 교회 문을 열어볼 때에 아 이거야. 내가 보고 싶었던 교회가 여기 있었네.
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꿈을 몇 마디로 정리했습니다. 「비전선언문」이라고 합니
다. 교회를 주님의 심장 속에 있는 교회로 세워서 교회를 통하여 한국교회를 섬기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우리가 섬긴다.
이게 바로 주님의 비전을 이루어 드리는 큰 꿈이라고 정리하게 된 것입니다.
형통하리라는 말씀이 무슨 뜻이 없습니까? 주님의 꿈, 주님의 비전, 주님의 계획을 우리가 이루어 드리는 겁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과 함께 제가 이루어 드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형통이요 그게 제 꿈이 되었던 것입니다.
II. 약속의 땅 앞에서 위축되지 말라
제게만 꿈이 있고 약속의 땅이 있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분 한분에게도 꿈을 주시고 약속의 땅을 보여주십니다. 모든 성도는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얻어야 할 땅이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내 영역 어디에선가 나를 통하여 주님이 이루시고자하는 그 사역이 있더라. 세상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형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그 꿈을 세상 한가운데서 펼쳐가는 것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당신이 이 세상에 좀 더 오래 살아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신이 이 세상에서 좀 더 잘 살아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었을 때에 여러분이 어떤 대답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게 바로 여러분의 비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전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 그게 내 인생의 형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장수 집안, 아브라함을 불러냈습니다. 너를 약속의 땅으로 보낼 거야. 너를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어서 가나안 땅으로 보낼 거야. 그게 아브라함의 비전입니다.
그 꿈이 족장들, 그의 아들 이삭과 후손 야곱, 요셉에게로 흘러갑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430년 애굽 종살이에서 불러내 드디어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겁니다. 40년동안 광야생활 이제 막바지, 저 강을 건너면 약속에 땅이 펼쳐집니다. 바로 이 소중한 시간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갑니다. 모세가 죽어요.
이 위기 앞에서 이스라엘은 꿈을 포기했을까요? 여기에 소중한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꿈을 꿀 때에 우리가 약속의 땅으로 한걸음 한걸음 가게 될 때에 그 꿈이 클수록 그 꿈이 고상할 수록 진실할수록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고난과 재난, 문제에 부딪힐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가나안 땅에서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하여 애굽으로 들어갈 때에 누구를 쓰십니까? 요셉이라는 어린아이를 씁니다. 500년 세월이 흘러같습니다. 노예생활 430년 광야생활 40년 500년이란 세월이 흘러 어린아이 요셉이 나왔던 그 가나안 땅으로 60만 장정 200만 대군이 들어가는 겁니다. 요단강을 가르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데 누구를 씁니까? 여호수아를 씁니다.
여호수아는 요셉 지파의 자손입니다. 에브라임지파 요셉의 아들 지파입니다. 에브라임지파 여호수아를 통하여 요셉이 나왔던 그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처음 이름은 호세아입니다. 내가 잘 되어야지. 내가 구원 받아야지. 내가 약한 세상에서 해방 받아야지. 자기 꿈이었습니다. 구원, 해방이란 뜻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가나안 땅을 구경합니다. 이때 호세아란 이름이 여호수아로 바뀌게 된 겁니다.
민수기 13장 8절에서는 호세아인데 16절에서 여호수아, 야훼 구원으로 바뀌어지게 된 것입니다. 호세아가 개인적으로 가졌던 그 꿈이 이제는 형통으로 바뀌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으로, 하나님의 비전으로, 하나님의 계획으로 성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야훼는 구원이시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불렀을 때에 여호수아가 용기백배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다. 신난다. 그랬을까요? 그러지 못했다는 거지요. 오금이 저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는 겁니다.
요즘은 공익근무요원이라고 하는데 옛날에는 방위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요즘은 지역주민센터라고 하는데 그 당시에는 동사무소라고 불렀습니다.
한 방위병 청년이 동사무소에 처음 근무를 하게 된 것입니다.
훈련 마치고 군기가 바짝 들었습니다. 처음 부임했던 동사무소 직원이 되어서 부들부들 떨고 있습니다. 첫 민원인이 앞에 왔습니다.
“사망신고하러 왔습니다.” 그랬더니 벌벌 떨면서 “본인이십니까” 그러더랍니다. 민원인이 가관입니다. “본인이 와야 합니까” 그러더랍니다.
싱거운 소리 잘하는 우리 장로님에게 들은 얘기입니다만 교훈이 있습니다.
언제나 처음 맡은 일, 해보지 않은 일은 두려움이 있는 것이지요.
서툴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들고 마냥 기뻐한 것이 아니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용기로 격려로 말씀으로 일으키는 내용입니다.
III. 두려워하지 마라!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수1:9)
이 말씀은 단지 여호수아에게만 주신 말씀은 아닙니다. 코로나19 팬더믹으로 내일을 바라볼 때에 온갖 상황이 어렵게만 꼬여갑니다. 자신감이 없습니다. 놀라 떨고 있는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젊은이들도 미래가 두렵답니다. 늙은 이들도 미래가 자신감이 없답니다. 모든 상황이 불확실합니다. 두렵기만 합니다. 우리 목사님 정도가 되면 아마 두려움없이 세상을 헤쳐 나갈 거야. 저도 하루에도 몇가지 문제에 부딪히고 제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온갖 어려움에 부딪히곤 합니다. 지금도 입 안밖이 다 부르터서 혀가 갈라지고 밖에도 입안이 다 헐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만큼 세상의 온갖 걱정거리들이 많이 있지요. 그러나 우리 눈에 위기만 보이겠습니까? 문제만 보이겠습니까? 기회의 땅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지 않습니까? 설레임이 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어느 선생님이 큰 도화지에 먹물 점을 하나 딱 찍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보여 주면서 “제군들이여 그대의 눈에 무엇이 보이는가”
모든 학생들이 “검은 점이 보인다”고 얘기했습니다.
선생님은 이 넓은 도화지에 조그만한 점 하나 그것만 그대들은 눈에 보인다는 말인가? 나머지 여백, 우리가 채울 수 있는, 우리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우리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많은 여백이 보이지 않았는가?
여러분 문제만 보입니까? 미래의 위기만 보입니까? 하나님의 약속, 은혜, 기회는 보이지 않습니까
언젠가 제가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라는 유명한 상담심리학자는 이 같은 불안을 명명하기를 ‘중간지대의 불안, 중간지대의 두려움’이란 용어를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심리학의 용어입니다. 두 그네를 타는 곡예사가 한 그대를 붙들고 있다가 다음 그네를 붙들기 위해서 그네를 놓고 공중에 떠 있는 짤막한 시간 그게 중간지대의 불안입니다. 중간지대의 두려움입니다.
우리가 밑에서 앉아서 보면 공중에 아무것도 잡지 않고 떠 있는 그 순간이 불안하게 여겨지지요. 그러나 전혀 불안하지 않습니다. 착시 현상, 착각 현상일 뿐입입니다. 지금 붙들고 있는 이 그네를 놓으면 다음 그네가 내게 다가오는 겁니다. 붙들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은혜로 살았다면 내일이라는 그래도 지금 내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약속의 땅으로 가자, 두려워하지 말고.
옛 루마니아 공산치하에서 나치에 항거하다가 14년동안 감옥생활했던 리차드 범브란트(Richard Wurmbrand)목사님이 계십니다. 얼마나 고난을 많이 당했던지 육체적인 고난만 따지면 예수님보다도 내가 고난을 적게 당하지 않은 것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모진 고난을 당할 때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볼 수가 없어서, 많은 공포에 시달리면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면 밑줄을 긋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다 읽은 다음에 두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의로운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 드리려 하는 사람들 가운데 언제나 그 앞에 위기는 있을 수 있다. 고난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고난의 길을, 올곧은 길을 걸어갈 때에 나 혼자 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두려워 하지 말라는 말이 365번 나오더랍니다. 1년 365일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지요.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았더니 자기자신은 가진 것이 없어요. 힘도 없고 능력도 없어요.
1절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모세를 표현한 단어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종 모세”입니다.
그 다음에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지도자가 여호수아가 되었으니 여호와의 종 여호수아 그래야 되는데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입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종이요, 자기 자신은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자기자신을 들여다보니 천하에 흙수저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지키지 않으면, 꼼짝달싹 할 수 없는 흙수저였다는 겁니다.
흙수저 여호수아! 모세가 이끌던 이 백성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다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이었을까요. 그러나 우리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내일의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될 때에, 4차산업혁명시대에 발을 들여놓게 될 때에, 두려움이라는 이 장벽을 극복하지 아니하면 절대로 미래를 기회의 땅으로 만들 수가 없는 겁니다. 내일은 약속의 땅으로 펼쳐질 수가 없는 겁니다. 이걸 사탄은 너무 잘 알고 있는 거예요. 우리를 실패하기 위해서 두려움에 영을 보내면 우리가 꼼짝하지 못하고 실패자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사탄은 한 두번 멍멍 짖고 꼬리를 내리는 동네 강아지가 아닙니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집니다. 네가 가야 할 세상이 이런 거야. 신문을 통하여 방송을 통하여 소문을 통하여 우리가 가야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잔뜩 보여줍니다.
여러분 이 시간 약속의 땅을 얻고 싶으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령하세요. 두려움의 영아 떠나갈지어다. 두려움의 영에 사로잡히면 절대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인데 지금 모든 상황이 일어나고 펼쳐지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지구가 벌떡 일어나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는 걸로 여겨지는 겁니다. 공포증이지요. 공황장애가 바로 이런 겁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두려움의 영아 떠나갈지어다.
두려움의 영을 물리치지 않으면 코로나19 팬데믹시대 미래는 절대로 약속의 땅으로 펼쳐지지 않습니다.
IV. 밟는 땅을 네게 주리라!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뉴노멀은 두려움의 땅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미래를 보면 미래는 약속의 땅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 빼고 나면 세상은 모두 나의 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나님이 지켜 주시면 세상은 나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밥이 되느냐 아니면 내가 세상을 밥으로 먹어치우느냐. 두 길이 있을 뿐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두려움의 영에 사로잡히면 부정의 영에 사로잡히면 가는 곳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상처를 받아요. 상처받기 위해서 사는 것 같아요. 자기만 상처 받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받은 상처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상채기를 내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세상을 나가면 상처받을 시간이 없어요. 어차피 세상은 상처촌인데 뭐. 가시밭인데 뭐. 그게 에덴의 동쪽이라는 겁니다.
가시밭 길을 짓밟으며 살아갈 것인가? 가시에 찔려 살아갈 것인가
새벽에 질질 끌려가는 사람이 되지 말고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뉴 노멀 끌려가는 사람이 되지 말고 뉴노멀을 이끌어 가는 사람, 역사에 끌려 가는 사람이 아니라 역사를 이끌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 성경에 보면 너희들이 인생 살때 시험들거야. 시험에 들때마다 기도해야 된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아요. 시험들면 기도하라가 아니에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시험 들고 살아가는게 대수입니까? 자랑입니까? 시험 들어 쓰러지고 넘어진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하는 일이니까? 내가 믿음을 잃어버린 거지요. 하나님 놓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맥 놓고 잘못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교회도 가정도 기업도 젊은이도 늙은이도 이 위기시대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 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모든 땅을 내가 너희에게 주리라. 할렐루야!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수1:13)
4차산업혁명시대가 날개를 단 것 같아요. 빛의 속도로 지금 달려가고 있습니다. 두렵지요. 우리가 과학자입니까? 우리가 재벌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4차산업혁명시대를 내 것으로 만듭니까? 믿음을 가지면 되는 거예요.
시니어들은 과학 만능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약간 두려움이 있어요.
가만히 생각하니까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1차산업혁명, 2차,3차산업혁명, 4차산업혁명까지 내생애 가운데 모두 경험하는 거예요.
내 인생에 기회가 펼쳐지는데 제3의 물결이후에 지금은 제4의 물결을 지나서 제5의 물결이 출렁이고 있습니다. 인생을 한 번 사는데 물결이 5번이나 내 앞에 출렁이고 지나간다. 적신으로 와서 적신으로 돌아가는게 우리 인생이라면 도전해 보는 거지요.
디지털르네상스. 우리같은 시니어들은 디지털 세상이 두렵습니다. 손에 익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래는 디지털 IT 기술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미래를 통찰하는 통찰이 있는데 없느냐. 지혜가 있느냐 없느냐. 미래를 헤쳐나가는 야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제사장이 홍해에 발을 들여 놓자마자 요단강에 발을 들여다 놓자마자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제사장의 발이 육지에 올라서자마자 뒤에 강들이 다시 합쳐지게 된 것입니다. 고난의 시대를 전진해서 밀고 나가면 홍해가 갈라집니다. 요단강이 갈라집니다. 발바닥으로 도는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게 약속의 땅입니다.
교회는 지하실 예배당에 있을 때도 충분히 행복했어요.
그런데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꿈이 있어서 이 곳으로 보내셨다면 하나님이 주신,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예배한 땅이 있을 거야. 발바닥으로 밟는 땅을 주신다고 그러기에 빈 땅만 보면 밟고 다녔습니다.
일산병원 앞에 있는 빈 땅을 밟았는가 하면, 정발산 밑에 있는 학교부지를 밟고 그걸 달라고 철없이 기도했는가 하면, 송포동에 골프연습장 큰 땅이 있더라구요. 그 땅을 밟고 달라고 기도했는가 하면, 파주를 돌아다니면서 종친 땅을 달라고 기도했는가 하면, 눈에 보이는 빈 땅만 있으면 신발 벗고 발바닥으로 밝고 서서 땅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밟은 땅은 하나도 주지 않고 우리가 밟은 땅으로 삥 둘러쌓여 있는 이 땅을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믿음으로 밟으면 주님이 주시는 겁니다.
V. 능력의 말씀을 듣고.
모세를 “여호와의 종”이라 부른 본문이 여호수아를 모세의 수종자라고 부릅니다. 분명히 급이 달라요. 그런데 1절에서는 그렇게 급이 다른 인생이라고 설명해 놓고 2절 3절 4절 5절 6절 7절 8절 9절 자그마치 여덟 절에 걸쳐서 하나님이 직접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중재자가 없습니다.
모세를 대면하여 직접 말씀하시던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직접 말씀하시더라. 급이 다른데 똑같은 급으로 인정하시더라. 잘난 구석이 없는데, 우리에게 소명 있으면, 믿음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면 급이 다른 흙수저 우리를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기회를 주십니다. 일어서게 하십니다.
6절 강하고 담대하라.
7절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라.
9절 강하라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강하라. 담대하라는 이 말씀이 3절에 걸쳐 똑같이 나옵니다.
이것을 시어에서 수미쌍관법이라고 합니다.
시작하는 말씀과 뒤에 같은 말씀이 계속해서 연결되어 운율을 이루어 가는 겁니다. 히브리어는 최상급 비교급이 별로 발달되어 있지 않습니다. 수미쌍관법. 반복을 통하여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너무 두려워하니까, 위축되어 있으니까, 오금이 저려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강하라니까. 담대하라니까. 놀라지 말라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니까.
하나님의 이 격려의 말씀을 듣고 여호수아는 지도자로 일어나는 겁니다.
여러분 다독이는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넘어져 있던 나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내 곁에 누군가 힘내라고 어깨 한번 두드리는 그 손이 내게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그 손이 하나님의 손이라면 나를 다독이는 그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면 그 힘이 얼마나 큰 것일까요? 얼마나 놀라운 것일까요
내 주변 사람들에게 용기, 격려의 말씀을 듣는 것도 소중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게 우리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강하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담대하십시오. 놀라지 마세요. 미래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약속의 땅입니다.
여러분 곁에 누군가 쓰러져 있으면, 넘어져 피흘리고 있으면, 사탄의 사슬에 꽁꽁 묶여있으면, 실패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으면, 약속의 땅으로 한 발자국도 가지 못하고 쓰러져 있으면, 그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으켜 세우십시오.
행여나 넘어져 있는 당사자가 당신은 아닙니까? 아무것도 못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은 아닙니까? 당신 자신이 당신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십시오. 창원아 강하라. 창원아 담대하라. 전진해라. 여러분 곁에 있는 누군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으켜 세우십시오. 예배시간 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목장모임을 가질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음성이 들리면 하나님이 나를 쓰시겠구나. 미래는 약속의 땅이 되겠구나. 내게 주신 축복의 땅, 은혜의 땅이 되겠구나. 믿음이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은 9절까지입니다. 하나님의 격려의 말씀을 듣고 여호수아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9절 오늘 본문 다음에 어떤 말씀이 펼쳐질까요?
모든 성경에 9절 다음에 10절이 나옵니다. 그다음 11절 나옵니다. 오늘 본문 다음에 모세가 백성들에게 이제 권위를 가지고 명령합니다. 진중을 두루 다니며 백성들을 독려합니다. 일어나라. 요단강을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주신 땅을 찾으러 가자!
여러분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 포장되어 택배로 배달되어 오는 그것이 약속의 땅은 않습니다. 약속의 땅, 은혜의 땅, 기회의 땅은 소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그 땅을 믿음으로 찾으러 가는 겁니다. 말씀 붙들고 그 땅을 차지하러 가는 겁니다. 문을 두드리는 겁니다. 그럼 열리게끔 되어 있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열고 창고를 여는 열쇠는 기도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가라 두려워하지 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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