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17) 혜종 3
*임금의 암살기도, 혜종을 구한 최지몽
달마저 숨을 멈춘 깊은 밤이었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자객이 혜종의 처소에 이르러 주위를 살피다가 방안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자객이 혜종의 잠자리 앞에서 칼을 움켜쥐려 할 때였습니다. 깊이 잠이 든 줄만 알았던 혜종이 솟구쳐 몸을 일으키더니 단단한 주먹으로 자객의 인중을 강타하였습니다. “헉” 숨이 끊어지듯 자객은 단발마의 소리를 지르며 나가 고꾸라졌습니다. 내시들에게 끌려가는 자객을 보면서 혜종은 한동안 상심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은 체 서있었습니다.
혜종은 어릴 때부터 태조를 따라 전쟁터를 따라다니면서 야지에서 잔뼈가 굵은 터인지라 기골이 장대하고 체격이 건장하여 스스로 자객을 물리 칠 수는 있었지만, 떠받쳐 주는 배경이 든든하지 못하여 늘 정적들에게 위협을 당하며 살다 보니 때때로 이런 임금의 자리에 환멸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자객을 문초하면 그 배후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기실 혜종은 모든 사실을 묻어둔 채 잊기로 합니다.
강력한 배후를 등에 업은 왕자 요나 소일 수도 있고, 자신의 장인이자 외할아버지 뻘이 되는 왕규일 수도 있는 정황에 오로지 참담한 심경뿐이었습니다. 너무도 참담하여 자객을 누가 보냈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고, 또 알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한편, 자객이 혜종에게 불시에 공격을 받아 사로 잡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왕규는 앉으나 서나 불안에 떨고 있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주동 세력을 밝혀냈다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임금이 자객사건을 그대로 묻어 두기로 했음을 알고 왕규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혜종을 시해하고 자신의 손자를 왕위에 올리려는 계획을 계속 추진하게 됩니다.
만백성의 아버지라는 지존의 자리에 올라 겉보기에는 화려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나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는 정적들의 칼이 눈앞에 어리는듯하여 혜종은 시종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최지몽이 찾아옵니다. 그는 태조 왕건이 아직 왕이 되기도 전에 태조 왕건이 꾼 꿈을 지존의 자리에 올라 삼한을 통일할 것이라고 해몽하여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945년 혜종은 갈수록 상심이 커져 병이 든 상태이었는데, 그의 처소인 신덕전으로 찾아온 최지몽이 당장 거처를 옮기라고 조언을 합니다.
“여기가 편안하여 병든 몸을 좀 쉬려는데 처소를 옮기라니 도대체 어디로 가란 말이오?”
“신이 지난 밤 심사가 하도 불길하여 점을 쳐 보았나이다. 황송하오나 전하의 신변에 변이 생길 불길한 징조이옵니다.”
자신을 둘러싼 주변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았는 혜종은 두말 않고 처소를 옮겼습니다. 그날 밤, 일단의 무리가 혜종의 처소 벽을 뚫고 들어와서 침상을 덮쳤습니다. 그러나 헛수고---. 이미 혜종은 처소를 다른 곳으로 옮긴 뒤였으니 말입니다.
무리를 이끌고 온 자는 다름 아닌 왕규였습니다. 그는 두 번째 시해 계획마저 수포로 돌아가자,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을 하였습니다.
“정녕 하늘의 뜻이란 말인가”
훗날 왕규가 최지몽을 찾아가 칼을 들이대며 왜 임금의 처소를 옮겼냐고 위협하였다하니 그때 그가 얼마나 낙담을 하였는지를 알 수기 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삼한 통일의 의기를 불어넣어주고, 아들에게는 목숨을 건질 조언을 해 주었으니 최지몽이야 말로 2대에 걸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충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고려왕조실록(18) 혜종 4
*임금은 날개를 잃고 왕자들은 권력을 탈취하다.
당시 혜종의 권력 기반은 오로지 박술희와 왕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왕규가 혜종을 시해하려 했음이 밝혀지면서 박술희와 왕규는 서로 적으로 변하고 맙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껴 날마다 처소를 옮겨 다니다시피 했던 혜종과 마찬가지로 박술희도 아군에서 적군으로 변한 왕규와, 호시탐탐 지존의 자리를 엿보고 있는 왕자 요와 소, 이들 때문에 박술희도 항상 100여명의 호위무사들을 대동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안전에 치명적인 악재로 작용하리라는 것을 본인은 정작 몰랐던 것입니다. 이제나 저제나 기회를 엿보던 왕자 요가 박술희에게 반역의 뜻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덮어씌운 것입니다. 지엄한 궁궐 내에서조차 100여명의 호위무사들을 데리고 다니니 그런 의심을 받는 것도 당연 하였겠지요.
그리하여 박술희는 강화도 갑곶으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정적 중에 한명이 제거되자 왕자 요는 때를 놓치지 않고 서경에 진을 치고 있던 왕식렴의 군사를 개경으로 불러들임에 따라 고려의 정국은 고스란히 왕자 요의 손아귀에 들어 온 샘이 되고 말았습니다.
왕자 요는 사람을 보내 박술희를 죽여 버리고, 왕규 역시 반란모의 혐의를 씌워 귀양을 보냈다가 자객을 시켜 귀양지에서 죽여 버립니다.
한편 혜종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혜종이 병을 얻은 것은 왕권 쟁탈의 소용돌이 속에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주위에서 조여 오는 압박에 정신적으로 늘 강박감을 가지고 살아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혜종은 거듭되는 왕규와 두 왕자들의 위협 속에서 성격까지 변하여 나중에는 작은 일에도 화를 벌컥벌컥 내고, 의심이 많아지고, 공평한 처사를 하지 못하는 편향되고 외골수적인 성격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용포를 걸치고도 이렇듯 불안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로 병이 깊어져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다고 하지만,박술희와 왕규를 죽여 버렸듯이 혜종도 왕자 요가 시해하였는지도 모릅니다. 혜종의 죽음에 대한 병명이나 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지지기반이 취약하여 재위기간 내내 의지와 상반되는 처신을 하면서 신변의 위협으로 항상 불안 불안하면서 살아야 했던 혜종의 시대는 막이 내리고 충주를 기반으로 막강한 세력을 배경으로 호시탐탐 왕위를 노려왔던 혜종의 배다른 두 왕자 요와 소가 연달아 등극을 하게 되니 그 들이 고려의 3번째 임금인 정종과 4번째 임금인 광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