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선교회와 미 감리회 얼 크랜스턴 감독
조선에서의 선교활동은 계속 좋은 결과를 낳았다. 조선선교회 역시 그 선교 열매들을 보고하는 자리여서 매우 의미있는 회의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1898년 8월 25일 경성에서 크랜스턴 감독의 주관하에 제14회 조선선교회가 개최되었다. 제14회 선교회가 닫힌 후 이듬해 1899년과 1900년 감리교 교세는 더욱 증가했다. 이에 제물포구역은 제물포, 강화도, 황해도, 남양지역을 포함하여야 할 정도로 조선에서의 감리교 전도 열매는 풍성하게 맺혀지고 있었다. 제15회 조선선교회가 1899년 5월 12일에, 제16회는 1900년 5월 14일에 각각 경성에서 개최하여 성장하는 감리교회를 보고하며 기뻐했다. 그 결과 제16회 조선선교회에서 평양구역을 남, 북구역으로 분할하였다. 이처럼 감리교 선교 영역은 조선 땅 곳곳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때 3년 연속 조선선교회는 크랜스턴 감독의 주재 하에 개최되었다. 동일감독이 3년 연속 조선에 온다는 것은 미감리교회는 조선 선교구역을 거리 때문에 등한시할 수 없는 선교의 보고(寶庫)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증거다.
얼 크랜스턴(Earl Cranston, Jr) 감독은 1840년 6월 24일에 오하이오주 아테네(Athens)에서 얼(Earl)과 제인 크랜스턴(Jane Cranston)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세기 중반 그 시대에 남자들 평균 키보다 잘 균형 잡히고 건강한 신체를 지녔다. 그의 조상 가운데는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iams), 존과 사무엘 크랜스턴(John and Samuel Cranston)이 있다. 이 둘은 로드 아일랜드(Rhode Island) 식민 지배자였다. 얼 크랜스턴스 2세(Jr)는 오하이오주 잭슨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861년에 오하이오대학교에서 명예학사(A.B. degree)가 되었고 1865년에 동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당시 오하이오 대학교 총장은 솔로몬 하워드 목사(The Rev. Solomon Howard, D.D., LL.D.)였다. 크랜스턴은 베타, 세타, 파이 동호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크랜스턴은 대학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윌리암 테일러(William Taylor) 목사가 고향 아테네에서 부흥회를 개최했을 때 학교 친구들과 이 집회에 참석하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얼 크랜스턴스 2세(Jr)는 평생 3번의 결혼을 했다. 모두 상처(喪妻)로 인한 재혼이었다. 1861년 베한(Martha A. Behan)과 결혼했는데 11년 후 1872년 그녀가 별세했다. 얼 주니어는 로라 마틴(Laura A. Martin)과 재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그의 두 번째 아내도 얼과 31년을 해로하고 1903년 2월 3일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얼 크랜스턴 나이 63세였다. 얼 크랜스턴은 세 번째로 파커(Lucie M. Parker)와 혼인하고 남은 생을 살았다. 그는 세 명의 부인에게서 7남매(Earl M., Grace, James B., Dora, Ethel, Laura Alden, Ruth)를 낳았으며 그중에 막내 룻(Ruth)은 유명한 작가이며 강연자가 되었다.
크랜스턴은 남북전쟁(1861년~1865년)이 발발하자 결혼 직후 사병으로 미 연합군에 입대했다. 그 후 부사관으로 승진하고 또 장교가 되어 중위와 대위로 복무하고 1864년에 전역했다. 전역 후 그는 사업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다가 크랜스턴은 하나님의 소명을 깨닫고 1867년에 미감리회 오하이오연회에 허입하고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의 포츠머스(1867~1869년)와 콜럼비아(1869~1870년)에서 목회했다. 1870년에 미네소타연회로 옮기고 위노나(1870~1871년)에서 목회하고 다시 1871년에 일리노이스연회로 옮겨 잭슨빌에서 1874년까지 목회를 계속했다. 이어서 그는 1874년에 인디애나연회로 또 옮기고 에반스빌에 파송받았으며 1874년에는 다시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연회로 옮겨 1878년까지 신시내티에 파송받아 목회했다. 그런데 크랜스턴은 1878년에 콜로라도 덴버로 다시 파송을 받아 목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변화였다. 덴버에서 목회하는 동안 크랜스턴은 덴버대학교 설립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사회 총무와 재무위원장으로 일했고 교수로도 활동했다.
1880년 크랜스턴은 콜로라도연회 남지방회 감리사로 임명을 받고 1884년까지 그 직무를 잘 감당했다. 그가 담당한 지역은 총 7만 평방마일(18만㎢)이다. 이는 매해 1만8천㎞를 다녀야 할 정도의 거리다. 크랜스턴은 1884년 미감리회 총회 회원이 되었는데 이때 그는 총회에서 신시내티에 본사를 둔 웨스턴 출판사(the Western Book Concern)의 대리점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이 출판사는 시카고, 세인트루이스, 태평양 연안에도 사무실이 있었다. 크랜스턴은 1896년까지 신시내티의 아본데일(Avondale)에서 거주하며 이 직책을 수행했다.
1896년은 크랜스턴에게는 특별한 해였다. 알레그헤니 대학(Allegheny College)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아이오와주 코넬대학에서도 동급의 명예학위를 받았다. 그의 모교 오하이오대학교에서 그에게 법학박사(LL.D.) 학위를 수여했다. 무엇보다 크랜스턴에게 1896년은 미감리회 총회에서 감독에 선출되었기 때문에 그의 일생에 잊을 수 없는 해였다. 그는 고향 아이오와주 아테네 출신으로 세 번째 감독이었다. 그는 워싱턴(Washington, D.C.)에 거주하면서 감리교 전체를 폭넓게 둘러보며 성실하게 감독의 직무를 수행했다. 그중에 크랜스턴은 조선에 3년 연속으로 방문하여 조선선교회를 주재했다. 제14회 조선선교회는 1898년 8월 25일에, 제15회 조선선교회는 1899년 5월 12일에, 제16회 조선선교회는 1900년 5년 14일에 모두 경성에서 개최하였고 크랜스턴 감독이 의장으로 회무를 주관했다. 그리고 1907년 6월 18일부터 6월 25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3회 조선선교연회도 해리스 감독과 공동 의장으로 연회를 이끌었다.
또한 크랜스턴은 여러 고등교육기관의 이사로 활동했다. 오하이오대학교(1896), 퓨젯사운드대학교(The University of Puget Sound, 1897~04), 윌리아미트대학교(Willamette University, 1897~1904), 구처대학(Goucher College, 1905~1916) 그리고 모르간대학(Morgan College, 1912~1916) 등이다. 1911년에 크랜스턴 감독은 토론토 제4회 감리교 에큐메니칼회 회원으로 참석했다. 또한 그는 사회단체의 활동도 관여했다. 주로 남북전쟁 참전자로 군사 분야 단체들이다. 북군 육해군 군인회(남북전쟁참전자), 미국 재향군인회 군사위원회원이었고 비밀공제조합원(The Mason)으로 활동했다. 크랜스턴은 향년 92세의 일기로 1932년 8월 18일에 오하이오주 뉴리치몬드(New Richmond)에서 별세하여 버지니아주 알링턴(Arlington)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15년에 크랜스턴은 그의 저서 《벽허물기 (Breaking Down the Walls)》라는 책을 감리교출판부에서 출간하기도 했다.
크랜스턴 감독이 조선선교회를 담당하던 기간 조선에서는 괄목할만한 부흥성장을 이루었다. 1897년 조이스 감독의 담당하던 때 서울구역회가 지방회로 발전한 이후 늘어나는 교회로 인해 담당할 교역자 부족 현상이 발생하게 되어 미 감리회는 신학회를 설립하여 한국인 교역자들을 배출하였다. 그 결과 한국인 교역자 수가 증가됨으로써 각 지방에 교역자들을 원활하게 파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과 협조하기 위하여 지방 중심 도시에는 선교사를 주재시켜 선교부를 설치했다. 이 선교부는 세 가지 사업을 주로 담당했다.
첫째는 시골 마을마다 교회를 설립하는 일이다.
둘째는 선교부마다 초등 교육기관을 세워 보통학교 과정을 수업시킨 후 상급학교에 진학시키는 일이다. 초등교육기관을 졸업한 학생들은 서울 배재, 이화, 배화, 송도한영(송도고등학교), 대전 호수돈, 원산 루씨, 평양 광성, 정의, 영변 숭덕, 공주 영명 등의 고등학교에 진학시켰다. 그중에서 유능한 청년은 신학교에 진학시켜 교회 지도자로 양성하였다.
셋째는 간이(簡易) 진료소를 설립하여 병자를 치료해 주는 일이다. 가벼운 질병은 여기서 치료하지만 중환자는 서울 세브란스, 개성의 남성병원, 평양의 기독병원, 원산 구세병원, 해주 구세병원을 이용하게 했다. 이런 취지 하에 미감리회는 제물포, 평양, 영변, 해주, 공주, 수원에 선교부를 설치했다. 미감리회 조선에서의 선교는 날마다 발전하고 있었다.
얼 크랜스턴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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