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농사 / 곽주현
저녁 식사 시간이다. 다섯 살 손자가 배고픈 머슴 밥 먹듯 퍼 넣는다. 천천히 먹으라 일러도 소용이 없다. 요즈음 더위가 좀 꺾이자 놀이터에서 몇 시간씩 뛰어 논다. 그렇게 정신없이 몇 숟가락 먹더니 갑자기 “할아버지, 선생님이 내일부터 가을이 시작된다고 했어. 하늘도 높아진다고 그랬어.”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팔월 말일이다.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곧장 승용차를 몰아 농장으로 갔다. 9월이 오면 맨 먼저 시작해야 할 가을 농사가 있다. 배추와 무를 심는 일이다. 지난주에 참깨를 베어내고, 관리기로 갈고 퇴비를 뿌려 미리 준비해 놓았다. 먼저 모종과 씨앗을 구해야 한다. 농장에서 멀지 않는 육묘장에서 노란 배추와 항암 배추 모종 각각 한 판, 농협에서 무씨 한 봉지를 샀다. 배추는 모종이 가능하지만 무는 뿌리채소라 씨를 뿌려 길러야 한다. 10년 전만 해도 배추 모종도 직접 길러 마련했지만, 요즈음은 그런 농가는 없다.
먼저 배추 모종을 이식했다. 200개를 옮겨 심는데 손이 더디다. 노는 것도 일하는 것도 혼자 하면 지루하고 능률이 안 오른다. 늘 아내와 함께하는데 주중이라 손주들 때문에 오지 못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노란 배추 한 판(모종 100개)를 심고 뒤돌아보니 모종들이 시들시들하다. 아차 했다. 물이 부족해서 그러는 거다. 모종판을 반드시 물에 잠깐 담갔다가 심어야 한다는 전문 농사꾼의 조언을 깜박 잊었다. 그 친구는 공부는 영 소질이 없더니만 농사에는 박사가 되었다. 부랴부랴 물뿌리개로 물을 주었다. 항암 배추는 친구가 가르쳐 준 대로 물을 흠쩍 적셔서 심었더니 쨍쨍한 햇빛에도 생생하다. 농사 경력이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일이 몸에 익지 못하고 있다.
얼추 배추 모종을 다 옮겨 심고 무씨를 뿌렸다. 점뿌림해야 해서 역시 심는 게 더디다. 한 봉지에 약 2,000개의 씨앗이 들어있다. 한 번에 두세 개씩 심어 비닐 구멍의 800개 정도를 채웠다. 쪼그리고 앉아서 서너 시간을 심고 나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일어서는데 허리가 아파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겨우 바르게 섰다. 해가 다르게 농사일에 힘에 부친다. 이럴 때 꼭 튕겨 나오는 소리가 있다. ‘에잇, 뭐 하려고 사서 이 고생을 하지?, 내년에는 그만해야지.’하고. 농사일은 모두 힘들지만, 특히 씨앗을 뿌리기까지의 과정이 더 벅차다. 그런데 이렇게 땀 흘리고, 허리 아프고, 목마르고 지쳐서 괭이자루를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이겨 내지 못하면 농작물을 가꿀 수 없다. 지인들은 내가 농사짓는다고 하면 “아이고, 그 힘든 일을 왜 하냐?”며 혀를 찬다. 그러나 작물이 싹 트고 자라는 모양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배추 같은 잎채소는 성장 속도가 빨라 며칠 지나 다시 보게 되면 몰라 보게 쑥쑥 자라있어 바라보는 기쁨이 크다. 열흘이 지난 그 모종이 벌써 어른 손바닥만 하다. 그 밖에도 갓, 비트, 상추, 봄동, 케일, 시금치 등 씨를 골고루 뿌렸다. 이렇게 여러 가지 가을 채소를 가꾸어 놓으면 내년 봄까지 싱싱한 채소를 늘 밥상에 올릴 수 있다.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었다고 저절로 자라는 건 아니다. 물, 거름을 적정 시기에 맞추어 공급해 주고 벌레가 생기면 가능한 한 손으로 잡아 주고 농약 치는 것을 멀리하려고 노력한다. 특히 배추는 물과 질소 비료를 좋아해서 충분히 공급해 주어야 속이 꽉 찬다. 때때로 잡초를 뽑아 주는 것은 기본이다. 이렇게 애쓰게 기르지만 정작 내가 필요한 김장 배추의 양은 이십 포기면 충분하다. 열 포기는 김치를 담고 열 포기는 저장해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요리해 먹는다. 그러나 기르는 즐거움과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는 재미로 해마다 이백 포기를 심어 왔다. 이제껏 십 년 넘게 길렀지만 한 포기도 돈과 바꾼 적이 없다. 고생한 보상은 키우면서 자라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받았다. 그래서 내년 이맘때가 되면 다시 가을 농사를 시작할 것이다. 그때도 손자 녀석이 가을이 되었음을 알려 줬으면 좋겠다.
첫댓글 곽주현 선생님 고생하셨어요. 저도 여름동안 고추 농사하는라 땀 좀 흘렸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작물이 쑥쑥 자라는 게 이뻐 고생을 사서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마음 충분히 공감합니다.
며칠 수고하면 몇 달 동안 즐거움을 얻을수 있는게 작물인가 봅니다. 저도 추석에 파와 배추 모종 반판씩 심었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맞는가 봅니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을 때 얼마나 대견스럽고 예쁘던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겁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와! 저는 농사는 엄두도 못 내겠어요. 우리 장인어르신도 농작물 키우시면서 엄청 즐거워 하시더라고요. 저도 배우고 싶네요.
격려해 주셔서 모두 고맙습니다. 작물을 기른 다는 것은 그들과 호흡을 같이 하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우리집도 지난 주에 배추 심고, 무 씨를 뿌렸답니다.
저는 파를 조금 심고요.
이번 주에 싹이 났는지 가 봐야 하는데 게으름 부리다 못 갔구요.
갓, 비트, 상추, 봄동, 케일, 시금치를 지금 뿌리는 거군요.
농사 선생님의 글 읽고 많이 배웁니다.
이백 포기 심어, 십일조만 챙기고 십의 구를 나누시네요. 땀흘려 정성 들여 지은 농작물을 나눠 주시는 선생님께 사랑의 실천을 배웁니다.
선생님께서 나눠 주신 해바라기 씨앗, 봉숭아와 다알리아꽃 모종으로 우러 화단이 풍성했슴니다.
저도 요즘은 식물키우기에 푹 빠졌답니다. 저는 쌀뜨물을 2 ~ 3일 발효시켜 시큼한 냄새가 날 때 주는데 잎들이 벌떡 일어선 듯 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