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충장의선무공신 가선대부 삼도수군통제사식성군 증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 이공묘지명 병서 공(公)의 휘(諱)는 운룡(雲龍)이고 자(字) 경현(景見)이며 신라 원신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으로 고려초애 문하시중 우칭(禹偁)이 부마로서 재령군(載寧君)에 봉군됨으로서 본관(本貫)을 재령(載寧)으로 삼았으며 후세에 청도(淸道)에 세거해 왔다, 대대로 벼슬길에 올라 있었는데 증조부 영원(英元)은 제용첨정(濟用僉正)이요, 조부는 부령부사(富寧府使) 우(友)이고, 아버지(考)는 남해현령(南海縣令) 몽상(夢祥) 으로 삼세가 모두 무과(武科)로 나아갔다. 어머니(妣)는 밀양변씨(密陽卞氏)인데 가정(嘉靖) 임술(壬戌=1562)년 9월 12일에 공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재주가 남달랐으며 7-8세에 이미 의젓하여 어른 스러웠다. 일찍 아버지를 잃었을때는 상례(喪禮)대로 지켜 슬퍼했고 커서는 숙사(塾師=스승)를 잘 따라 힘써 공부하여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만력을유년(萬曆 乙酉年, 1685년)에는 붓을 던지고 무과(武科)에 나아가 급제하였으며 정해년(丁亥年, 1587)에는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니 이는 그때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공이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있을 때인데 변방의 대적 관문이 소인(疏忍)함을 우려하여 년소무관으로서 문무(文武)를 겸비한 사람이면 변장(邊將) 여하를 가리지 않고 뽑아 후일에 대임을 감내(堪耐)할수 있도록하고자 나라에 전계(詮啓)하고서 먼저 변장을 시험보아 특별히 임용함에 녹유(祿由)함이었다. 즉 公이 이에 뽑힌 것이다. 기축년(己丑年, 1589년)정월에 옥포만호(玉浦萬戶)가 되자 군졸을 무애(撫愛)하고 병기를 수선하여 그 명성이 자자하였을 뿐아니라 과만(瓜滿)이 된 군민을 감사와 수사에게 품(禀)하여 쉬게 하였다. 임진왜란 초에 부산의 모든 성(城)이 계속 몰락 당하는지라 수사 원균(元均)이 그의 진(陣)을 버리고 도망하려 하였다. 公은 강개(慷慨)하여 항의하여 말하기를 ‘공께서는 나라에서 맡긴 중대한 임무와 두터운 은혜를 입고 있으니 마땅히 하늘에 맹서(盟誓)하고서 힘을 다하고 죽음으로 지켜서 물러가서는 아니 될 뿐아니라 이곳은 호남의 안전을 보장하는 곳이니 이곳을 지키지 않으면 호남이 없고서야 어지 나라가 지탱(支撐)되리오 원하옵건대 공은 중인(衆人)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심력을 다하여 관할지(管轄地)를 지키옵소서 힘을 다하고도 지키지 못하여 죽는다 하면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호남 수군은 아직 완벽하니 公께서는 격문(激文) 한 장만 띄우시면 호남에서 반드시 구원해 올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양수군(兩水軍)이 힘을 합해서 거제(巨濟)에서 막아치면 적은 감히 년내량(見乃梁을 넘보지 못할 것이데 어찌 이일을 서두르지 않으시렵니가? 이말에 원균이 벌컥 화내어 말하기를 호남수군을 그대가 청원케 할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말에 公 답하여 가로대 죽을 일인들 어찌 명령을 사피(辭避)하리오만 일찍 李 舜臣과는 같은 임지에 있었을 따름이나 율포권관(栗浦權管) 이영남(李英男)은 서로 심기가 통하는 터이므로 그를 보낼만 합니다.하니 즉시 글월을 英男편으로 발송하였다. 원균은 그렇게 보내 놓고도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겁내어 뱃머리를 남해로 돌렸다. 公은 영등포만호(永登浦萬戶) 우치적(禹致績)과 더불어 거제에 들어가서 주수(主守) 김준민(金俊民)을 만나서 3인이 토적(討賊)할 것을 하늘에 맹세하고 바다로 내려가서 견내량에 이르러 호남 원군의 수사(水師)을 기다렸다. 그 익일(翌日)에 원균은 도망하는 길에서 원군을 만나 호사(湖師)와 함께 송밀포(松密浦)에 도착했으며 옥포양(玉浦洋)에서 적을 만나 분격(奮擊적이 감히 지탱할수 없어 배를 버리고 육지로 피하는 지라 적선 四五十척(隻)을 모두 불 살으고 그들의 기장(器仗)을 모두 거두었다. 또 영등포양에서 싸워서 十餘隻을 불 살으고 쳐부수니 이 해전(海戰)이 五월 七일 이었다. 그날 저녁에 대가(大駕=왕의 행차)가 西狩해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一軍이 울음을 터트리며 흩어져 가게 되었는데 원균은 또 다시 달아 나려 하는지라 公은 충의로서 그를 책(責)하고 극력(極力)으로 그를 만류하였다. 그리고는 남은 군졸을 창합하여 사천(泗川)과 고성(固城) 사이를 왕래하니 수륙에 적의 그림자가 끊어지고 감히 서해로 향할 엄두도 못했다. 원균은 노량(鷺梁)에 주둔하면서 호남수군의 거취에 따라 진퇴의 계책으로 삼으려다가 얼마 아니가서 호사(湖師)가 다시 오게되자 이에 합세하였고 곤양(昆 陽) 앞바다에 가서는 나머지 적을 만나 격파하고 사천양(泗川洋)에 이르렀다. 적선은 장막(帳幕)을 많이 쳐놓았는데 그 장막이 현란하게 펄럭였다. 公은 몸소 먼저 쳐들어 가면서 독전(督戰)하여 적의 우두머리를 생포하고 그의 말도 빼앗았다. 또 당포양(唐浦洋)에 이르렀을 때는 적은 층루(層樓)가 우뚝솟아 있는 대선(大船)이 있고 선상에는 루가 잇어 붉은 무늬 비단을 둘러 쌓았는데 이를 본 우리 군사는 겁내어 나아가지 못하는지라 公이 노를 빨리 저어 다가 서면서 화포(火砲)로 정중시키고 적선에 뛰어드니 적의 두목이 언덕으로 기어 올라 달아났다. 公은 또한 배위에서 포를 연발하여 적 3명을 죽였다. 다음 날에는 호남우수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같이 모이니 병세(兵勢)는 자못 떨치었다.6월 초5일 삼사(三師)가 진해양(鎭海洋)에 이르르니 적의 뱌는 곳곳에 모여 있었는데 그중 세척은 우뚝 솟으 층루가 있고 그 위에는 기와를 덮었으며 작은 배들이 빽빽이 둘러싸 호위하고 있었으며 푸른색으로 단장하고 기치(旗幟)와 돛대가 번쩍 번쩍 빛나서 극히 휘황(輝惶)한지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이 아찔하게 하였다. 公은 우치적과 더불어 군졸을 독려하여 모든 배가 같이 나아 가서 하루 종일 힘껏 싸우니 적은 기세가 꺾이어 달아 나고자 하는지라 우리 군사는 지자포(地字砲)로서 그 층루으 배 세척을 맞혀서 다 부쉬니 적의 무리는 창황(倉惶)하여 물에 빠져 죽는 자가 심히 많았다. 날이 어두워지니 우리 배들도 모두 물러 가고자 하는지라 公은 급히 우치적을 불러 말하기를 여러 배들은 비록 물러 갈지라도 우리들은 저 적(敵)을 버리고 갈수 없다. 하고는 철색(鐵索)으로서 적의 배를 묶으고 끌어내어 화포(火砲)로서 불 살으니 적은 물을 퍼서 구(救)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울부짓는 소리는 배에 가득차고 그 소리는 밤새껏 그치지 아니하였다. 물에 빠져 죽은 자가 과반수나 되고 적의 물질과 식품을 얻은 것이 은자(銀子)와 병기(兵器)를 합하여 헤아릴수 없었다. 이 싸움에서 公은 네 번 적창에 맞았으나 모두 갑옷 위였으므로 상처는 없었다. 7월 초10일에는 적선 100여척이 견내량(見乃梁)을 넘보는데 병세가 심(甚)히 팽창하여 있었기에 우리 병사들이 바라보고 모두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公은 이순신과 상의하여 건성으로 싸우면서 짐짓 후퇴하여 외양(外洋)으로 끌어 내기로하고서 公이 말하기를 ‘사생안위(死生安危)는 이 한 거사(擧事)에 있습니다.’하니 순신(舜臣) 가로대 감히 죽음을 아끼리오 그러나 적의 세력이 심히 강성하니 기회를 보아 진퇴(進退)하고자 하였다. 이에 公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한번 죽음을 결심하였기로 먼저 적을 처들어 가겠으니 공은 계속하여 후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는 배를 돌려서 화포를 쏘니 적선에 맞아 선봉이 꺾이기 시작하였다. 이에 호남수군이 승기에 편승하여 비록 죽을지언정 싸우게 되니 포성은 하늘을 진동시키고 연기와 불길은 바다를 덮었다. 적을 죽인 수가 수만명이나 되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만(万)을 헤아렸다. 따라서 바닷물이 붉게 되었다. 이 싸움의 6일간이 가장 격열했으며 또 안골포(安骨浦)에서 누선 30여척을 깨트리니 이로부터 적은 모두 육지로 올라 도망쳐 가고 다시는 내양(內洋)에 내려오지 못하였다. 거제이북은 다소 안정(安靖)되고 호남 호서로 다니는 길은 아무 일 없었으니 公 의 힘이 많았다. 이 때에 원균은 싸울때마다 公을 앞세우고 싸움에 이기게 되면 자신은 적의 물질과 수급(首級)을 거두어 자기의 공(功)인양 나라에 장계를 올렸다. 남해현령 기효근(奇孝謹)은 싸움이 벌어지면 배를 이끌고 먼저 도망가기 때문에 公이 군법으로 다스려 줄 것을 원균에게 청하였는데 오히려 원균은 기효근을 두둔하였다. 때문에 그후로는 公은 기효근에 대하여는 개의(介意)하지 않았다. 8월에 가덕양(加德洋)에 진을 쳤는데 적은 부산에서 낙동강을 오가면서 우리 군사가 강성한 것을 보고는 모두 배를 버리고 성을 의거( 依據)할뿐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드디어 부산양(釜山洋)에 진출하게 되니 적은 모두 상륙하고 바다에 내려오지 않으며 투지(闘志)가 없어졌다. 9월에는 창선도(昌善島)로 군사가 돌아가서 전선(戰船)을 정비하고 혹은 신조하였는데 이해가 다 가도록 적은 소리 기척도 없었다. 계사(癸巳=1593년) 3월에 公은 격심한 병을 앓았는데 삼사(三師)의 모든 장수들이 날마다 문병했고 양도 군인이 민망스러워 하며 울지 않은 이가 없엇으니 그가 사졸에게서 얻은 인심이 이와 같았다. 4월에는 웅천현감(熊川縣監)이 되었고 을미(乙未=1595년) 9월에 체상(體相=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공이 열진(列陣)을 순찰하면서 통제사 李舜臣에게 공을 대신할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그 공로든지 인품이든지 오직 公만이 내후임을 맡길수 있다고 하므로 체상은 즉시 불러 보고 위유(慰諭)하였다. 을미(乙未=1595년) 4월에는 통정대부로 승진되고 병신(丙申=1596년) 정월에 동래현령(東萊縣令) 우도수륙사(右道水陸使)로 계류(啓留)되고 곧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임명되어 포이포(包伊浦)로 부임하였으며 6월에 서생포(西生浦)의 적이 철거하니 진을 염포(塩浦)로 옮긴후 부적()한 인민 500여戶를 적중에서 끌어내어 전선(戰船)을 만드는데 사역하였다. 정유(丁酉=1597년) 5월에 淸正이 서생포(西生浦)로 미친개처럼 또다시 처들어 왔다. 公 이 곧 사람을 시켜 심문(訊問)한 자리에서 통역자가 말하기를 듣건대 한 명장(名將)이 우해(右海)로부터 왔다더니 이분이 그 명장인가 하였다는데 淸正이 비웃었다 이 무렵 갑자기 원사(權慄都元帥)가 포이포로 군영을 옮겼으며 그해 7월에 한산(閑山)에서 패적(敗績)하였으므로 公의 군은 고립되고 약화(弱化)하였으므로 원수가 배를 버리고 육전에 참전할 것을 명(命)하였다. 공은 권응수(權應銖)와 함께 영천(永川) 창암(倉巖) 들에서 싸워 적을 부셨으니 안강(安康)이북의 땅은 淸正의 화(禍)를 면하게 하였다. 12월에 양경리(楊經理) 등이 淸正을 울산에서 누르고 公은 연일(延日)로부터 배와 군사를 정비하여 대왕암(大王巖)으로 진격하였다. 천병(天兵)이 물러가고 公 또한 물러나 동쪽 바다에 주둔하였다. 무술(戊戌=1598년) 가을에 당장(唐將)이 다시 동경(경주)에 도착하고 公은 라선(邏船)으로 서 적을 4명 잡았는대 그들의 입을 통하여 秀吉이 이미 죽은 것을 알았다. 11월에 적이 모두 철거하는데 公은 부산 바다에까지 추격하여 적선의 후미을 받아치니 날마다 수십을 헤아렸다. 드디어 수영(水營) 구성(舊城)에 들어가 피로한 병사들을 쉬게하였다. 기해(己亥=1599년)에 영사(營舍)를 중수하고 흩어져 도망갔던 백성을 모아 쓰다듬고 또 둔전을 설치하니 군량도 제법 넉넉해졌다. 경자(庚子=1600년) 8월에 풍변(風變)으로 바다의 조짐을 미리 알고 公은 속한 진(鎭)에 명령하여 전선(戰船)을 모두 육지로 끌어 올렸더니 얼마 아니가서 여러 포구의 배가 부숴졌으나 公이 관할하는 배만은 모두 안전하였다. 9월에 당장(唐將)은 병력을 철수하어 돌아갔고 公은 부산양(釜山洋)으로 옮기고 오래된 성(城)을 쌓았으며 겨울에 들어 휘하(麾下) 장수의 무고(誣告)를 입어 체직되었다. 신축(辛丑=1601년)에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체찰사로 영남을 순찰하는데 公이 바닷길에 익숙하므로 막장(幕將)을 인도하였으며 사무를 잘 처리하므로 써 동행하여서 해상을 두루 살폈는데 바다 구석 구석과 영루(營壘) 및 해적이 왕래하는 요충과 우리 군사들이 막고 끊는 세(勢)를 낱낱이 익숙히 아는지라 公을 일컬어 해문(海門)의 주인이 될만한 그릇이라 하고는
좌수사(左水使)로 나라에 품계하니 公은 사양하여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나 두 번째가서 이를 받아 들이었다. 임인(壬寅=1602년)에 부산성을 수선하고 군영과 성위의 문루(門樓)을 고쳐 만드니 정채가 일변하였다. 9월에 모부인이 위독하다 하므로 급히 청도로 돌아가서 살핀 일로서 통제사 유형(柳珩)이 그 진을 버린 것이라 탄핵하고 11월에 서생포(西生浦)로 유배보냈다가 곧 출옥하니 모부인의 부고가 이르렀는지라천리 밖에서 분곡(奔哭)하니 배소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유(柳)통제사의 심한 조치라 하였으니 면통(寃痛)해 하였다. 계묘(癸卯=1603년) 2월에 선비(돌아가신 어머니=先妣)를 법귀산(法貴山)에 장사 지냈다. 앞서 이일로막하 장사 금여려(金汝礪) 등이 글을 올려 사헌부에 송원(訟願)하엿으나 이를 위에서 올리지 않았다. 이해 8월에 사면되어 돌아오고 겨울에 선고(先考)의 장지로 옮겨 합폄(合窆)하엿다 을사(乙巳=1605년) 정월에 탈상하고 2월에 조정의 명령으로 책훈으로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지고 도총부부총관 겸비변사당상 좌포도대장 화기도감제조(都捴府副捴管兼備邊司堂上左捕盜大將火器都監提調)로 임명되었다. 이때에 남북이 안정되지 않았기에 나라안은 할 일이 많았다. 공이 비변사에 있으면서 직접 보지 않고도 멀리서 적정(賊情)을 헤아리고 방략(方略)을 펴서 나라에 비익(裨益)됨이 많았다. 9월에는 통제사(統制使)로 임명되었으며 군영에서 3년을 재임하였으며 정미(丁未=1607년) 6월에 다시 모함을 입어 파면되었다. 10월에 북쪽의 난이 심히 악화되니 비변사에서 천거해서 함경남병사(咸鏡南兵使)가 되었는데 이때의 북쪽의 군무(軍務)는 결함이 많았고 전란에 대비함이 탕진(蕩盡)되었다. 公은 번거롭고 까다로운 것을 모두 간편하고 쉬운 것으로 바꾸었다. 군졸중에 전마(戰馬)를 가진 자는 번(番)을 줄이고 담력(膽力)이 있는 자를 모아서 별대(別隊)를 편성하니 영군(營軍)의 기마자(騎馬者)는 처음에믐 천명도 안되었으나 곧 사천명의 정예로 이루어 졌으며 보졸도 또한 오백이 넘었다. 갑산성(甲山城)은 허물어진지가 오래 되었기에 공이 뚫고 마른 도량을 파내 성위에 평평한 길을 내는 등 다시 수축(修築)하므로서 새로워졌다. 또 북청(北靑)의 동남문루(東南門樓)는 다시 창건되어 군성(軍聲)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 옛날에 병들고 시들어진 모습을 다시 복구한 정도가 아니었다. 기유(己酉=1609년) 겨울에 과만(瓜滿)이 되어 즉시 충청수사의 명을 받았으나 또 무고로서 잡히게 되었다. 경술(庚戌=1610년) 5월에 종기(腫氣=癰癤)를 앓게 되고 7월 2일 별세하시니 향년이 겨우 49이다. 자헌대부 병조판서겸 지의금부사(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증직(贈職) 되었으며 그해 10월 14일에 법귀산(法貴山) 모(某)향지원에 장사 지내니 선영(先塋)아래 이었다. 公은 비록 집은 대대로 무과(武科)이었으나 일찍부터 유학(儒學)을 좋아 하였고 태어난 모습은 화화롭고 순후(醇厚)하며 정성이 진실하며 겸둔(謙遯)하고 자리를 남에게 양보하였으니 일찍 여러 장사(將師)와 더불어 공(功)을 다툰다거나 또 잘하는 것을 다투지 않았으며 은연(隱然)하여 큰 재목의 기풍이 있었다. 또 그가 변(變)에 직면했을 때 신채(神采)는 빼어나 굳세고 위급할 때를 맞으면 계책을 결행함에 분연(奮然)하여 그 일신을 돌보지 않아서 맡은 일을 거리낌 없이 해 내었다. 양사(兩帥=元均과 李舜臣)를 의좋게 하며 굳센 적진중을 출입하면서 싸움마다 이기니 양사가 다 같이 중히 여겼었다. 원균이 처음에는 公맡이 계책을 들었기로 군사(軍事)를 망치지 않았으나 나중에 公이 좌수사로 옮기니 원균은 드디어 패하니 이를 논하는 자(者)는 그전에 패하지 않았음이 더욱 公의 힘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생각하건대 公 은 공로를 들지 않으며 권세를 가진 상사(上司)들에게 아부하지 않고 홀로 서서 일했으며 따라서 참소와 무함(誣陷)에 시달렀으나 그러나 공훈을 록(錄)함에 이르러 차츰 벼슬이 높아졌음에도 도리어 기효근(奇孝謹) 등과 같은 논공행상이 되었으니 개탄(慨歎)하는 바이다 그렇기는 하나 임진에서 정유란(亂)까지를 겪는 동안 능히 명장으로 공명(功名)을 떨쳤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公에 비길만한 명성을 가진 이가 없었으며 거의 그런 장사(將師)를 많이 얻을수 없었은즉 公의 충성스러움과 돈후함과 겸손함과 자리를 양보한 업보가 이러할수 있으랴? 公은 이춘남(李春男)의 딸에게 장가 들었으니 이는 광릉(廣陵=廣州)의 이름난 집안이었다. 아들 엄(儼)은 학문을 일찍 한성(漢城)의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며 광주김씨(光州金氏) 예빈시 참봉 덕망(德望)의 딸과 혼인하였고 장녀는 박위(朴瑋)와 혼인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어리다. 엄이 기양(起陽)에게 말하기를 公을 가장 잘 알고 있으므로 公의 묘지명(墓誌銘)을 적어 달라고 하여었다. 公의 덕(德)이나 훈(勳)을 기양(起陽)이 감히 들낼수 있는바 못되어 그 막중함을 느껴서 거듭 사피(辭避)했으나 부탁을 거두지 않으므로 삼가 그 대강을 적어서 명(銘)으로 한다. 명(銘)하여 왈 표암(瓢巖) 신(神=표암공 李謁平)이 신라 좌명공신으로 시조(始祖)이시고 중간에 재령(載寧)으로 옮겨 식읍(食邑)으로 누리셨다. 상서공과 상장군이 다시 이름을 떨치시어 대대로 쌓은 덕(德) 영걸(英傑)을 나으셨네 四대 무공(武功) 열렬함이 공(公)에 와서 발현되어 드디어 이 바다에 오랑캐(海孽=왜적)로 가득하니 왜란을 그렇게 막으셨다 갑옷을 버리고 도망가기를 경쟁하니 적세는 파죽세인데 公은 한척 전함(戰艦) 몰아 나라에 몸 바치기로 하셨다. 주장(主將)이 도망가려 하니 의(義)로서 격앙(激昻)되어 급한 전갈 달려 보내 (좌수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부름에 모인 군사 눈물로 지휘하니 장식(裝飾)도 화려한 적의 루선(樓船) 돌격하여 쳐부수었다. 바다를 덮은 왜적들의 적선(賊船)을 불태워서 궤멸시키고 견내량 서쪽바다 길을 뚫었다. 호남 호서 온전케 하고 수군의 본업을 다시 회복하여 적의 길을 가로 막아 지켰으니 그 전공 누가 이루었던가 원균과 이순신의 전공도 公에게서 나왔으니 능연각(凌煙閣)에 남긴 영정(影幀) 영웅의 열에 맞추셨네 오산(鰲山)의 삼걸(三傑)은 다만 문채(文彩)일 뿐 누가 간성(干城)으로 나라에 힘 되겠는가? 공훈(功勳)과 명성(名聲)이 아직 그치지도 않았는데 숙병(宿病)이 갑자기 목숨을 앗아가니 덕은 있으나 수명이 짧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겠는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오산(鰲山)의 삼걸(三傑) 이란 청도의 대표적인 인물로 영헌 김지대(英憲 金之岱, 1190∼1266, 청도김씨 시조),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1464∼1498), 선탄(禪坦) 스님(14세기 초 詩僧)을 말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