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편 역시 다윗의 시이고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입니다. 공동체의 노래라는 말이죠. 장르는 탄식시와 지혜시? 이 시는 어리석은 자에 대해서 말하면서 시작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서에 많이 등장합니다. 다윗은 여기서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라고 번역 된말은 히브리어로 ‘나발’입니다. 히브리어 어리석음을 표현하는 다른 말도 있는데, 나발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나발은 어떤 지적인 능력이 떨어진다는 뜻이아닙니다. 도덕적으로 부족한 것, 하는 짓이 미련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없다고 마음에 말하고 부패하고 행실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 모두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합니다.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리석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고 도덕적인 타락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자의 전형이 바로 사무엘상25장에 나옵니다. 바로 나발이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다고 합니다. 이름도 나발입니다. 사무엘상 25장에 한 가지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나발은 목축업을 크게 하는부자였습니다. 다윗과 그의 동료들이 나발의 양떼 치는 자들을 지켜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발의 양들이 털 깎은 날이 되었다 함을 듣고, 다윗과 함께 있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기를 다윗이 청합니다. 다윗은 자기 부하 열명을 보내며 아주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이렇게 다윗의 청을 거부한 것을 통해서 나발이 어리석은 사람임을 두 측면에서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나발이 하나님의 율법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가난한자와 나그네를 돌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하나님이 세운 왕을 우습게 여깁니다. 나발은 분명히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다윗이 쫓기고 먹을 것도 구걸하러 다니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세운 자를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결국 나발은 하나님께서 나중에 치셔서 죽게 됩니다. 그 이름과 같이 행동한 사람이지요. 나발은 실로 나발한 사람이었습니다.
2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사람들을 살펴보십니다. 그들 가운데 지각이 있어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십니다. 앞에서 말한 어리석은 자와 반대되는 사람이죠. 그런 사람이 있는지 살펴 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다 치우쳤다는 말은 다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벗어나 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다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자들 중에서 다시 돌아와 지혜 자의 길을 걷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찾는 다윗, 시인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어리석은 자들에게고통을 당하는 자들입니다. 이 시를 부를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평가는 노아에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겠다고 하셨던상황과 유사합니다. 그 때에도 의인 노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노아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참으로 다 치우쳐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살았습니다. 창세기 6장12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땅에 사람들이 다 부패하고 모든 혈육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노아와 함께한 가족들 외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이어지는 4절에서 6절은 어리석은 자들이 실제 생활에 있어서 어떻게 다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다 부패하고 치우쳐 살아가는지 보여줍니다. 시인은 먼저 수사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고합니다. 이것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쩜 그렇게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 한가! 이런 뜻입니다. “여기서 무지하다”는 것은 무식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리석다는 나발과 의미가 같습니다. 무지하다고 사용된 말은 히브리어 동사“야다”에 부정어를 붙였습니다.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 “야다”는 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이고 관계적으로 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지식적인 면에서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백성을 밥 먹듯이 먹는다고 합니다. 먹는다는 말은 파괴시키고 억압하고 괴롭힌다는 말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시인과 같은 의인들을 괴롭힙니다. 자연스럽게, 일상적으로 괴롭힙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부르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것이, 하나님께서 약한 자들, 하나님을 찾는 자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억압하고 괴롭힙니다. 그 저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울 수 없다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잘못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지합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을 굽어 보신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못합니다. 그들의 그릇된 확신은 그릇된 행동으로 이끕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싫어합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은 의인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악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줄로 생각하고 행동했는데, 나중에 그 댓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가난한 자, 곧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고 가난한 자들의 계획,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려는 계획을 여러 형태로 막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의 피난처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구절에서 이런 상황 속에서 시인은 결코 낙담하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베푸실 구원의 소망을 바라봅니다. 이 구원은 인간의 부패성에서오는 위험으로부터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이 시온에서부터 온다고 합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지요. 그곳으로부터 구원이 이르게된다는 말입니다. 그곳은 예배가 있는 곳이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적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배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날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들로부터 억압당하고 당신의 백성을 건져 주셔서 하나님께서 피난처가 되어주시는 그 날이 올 것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오늘 시편에서 어리석은 자와, 의인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대조가 되면서 나옵니다. 1편에서 의인과 악인이 대조되는 것과 유사합니다. 사람은 결국은 두부류로 나뉘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며 그 마음과 생각과 행동에서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나님의 백성이지요.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나발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니 율법을 지킬 필요도 하나님께서 세운 자도 무서워하지않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 하나님의 백성을 쉽게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의인들의 계획을 무너뜨립니다. 노아 시대에도 그랬고, 다윗 시대로 그랬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을 무시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법을 무시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해야 해야한다는 것을 무시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무시합니다. 그것을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을 시대에 뒤쳐진 자들이라 조롱하고 멸시합니다. 대놓고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지 않지만, 스포츠 클럽에서 주일에 교회에 가야하기 주일에 열리는 시합에 나가기 어렵다고 하면 한 번 씨익 웃습니다. 주일에 꼬박꼬박 예배에 나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분명하게 말씀하시길 하나님께서 의인들 중에 계실 것임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고, 의인들의 피난처가 되실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외부에서 오는 어려움 뿐 아니라 우리 안에 나발과 같은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와 같이 하나님이 없는 것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난 번에 말씀 드렸던 것 같이 실천적 무신론과 같은 측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지금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이 또한 어리석은 자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인생을 굽어 살피시면 하나님을 아는 지각이 있는 자들이 있는지 살피십니다. 바라기는 우리 하나님께서 인생을 살피실 때 우리 아인트호벤 사랑의 교회에서 지각이 있어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많이 찾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를 쓰는 시인이 하나님이 계심의 증거이듯이 우리가 주일을 지키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감으로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는 증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셔서 역사하시는 분임을, 그분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우리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