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경남일보 江右儒脈) 134. 청사 이세태 1699년 갈암 이현일이 진주 청원리에 머물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1689년 갈암은 당시 폐비가 되어 사저에 나가있는 인현왕후를 별궁에 거처케 하여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썼는데, 이것이 5년 후인 1694년에 와서 인현왕후를 해치고자 한 것이라고 꼬투리가 잡혀 이해 함경도 종성으로 위리안치 되었다가, 1697년에 감형되어 호남의 광양현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5년 후인 1699년 조정에서는 향리로 돌아가라는 명이 있어 섬진강 나루를 건너 진주의 악양동으로 들어갔으나, 곧 조정에서 대간들이 임금에게 명을 거둘 것을 청하였다는 말을 듣고 그대로 머물렀다. 이때 사간들은 1년 동안이나 임금에게 끈질기게 청을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마침내 갈암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갈암은 악양 쌍계사 등지에서 머물다 1699년 9월 17일 진주 청원리(淸源里)로 들어온 것이다. 갈암이 청원리로 들어온 것은 이 마을에 일가 친족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갈암이 청원리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인근의 학생들이 학문을 배우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청사(淸榭) 이세태(李世泰). 청사는 갈암이 청원리로 오기 1년 전인 1698년에 광양으로 찾아가 이미 학문을 익혀 청원리에 머물 때는 그의 학문적 성취도가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의 호 ‘청사’는 ‘맑은 집’이라는 뜻이니 평생 청빈하게 삶을 추구한 선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사는 1663년 진주 청원리(현재 진주시 지수면 청원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재령(載寧)으로 선교랑(宣敎郞) 정규(禎奎)의 아들이며, 행정(杏亭) 이중광(李重光)의 증손이다. 그의 기질이 남에게 뒤지기 싫어하고 또 남에게 얽매이기를 꺼려했으며 바른 도리를 따르지 않는 버릇이 있었으나, 증조부인 행정이 항상 곁에서 성현들의 삶을 본보기로 들어 타이르고 가르쳤다. 나이가 15세쯤 되었을 때는 어렸을 때 나쁜 버릇이 모두 없어졌으니 이는 스스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는 노력과 어른들의 가르침을 귀담아 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36세 때는 광양으로 갈암을 찾아가 곁에서 모시면서 질문하고 토론하기를 하루도 쉬지 않았다. 그의 묘비에 “공은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고 굳세며 정직하고 흐트러지지 않았다. 일찍이 갈암 선생을 호남 광양에서 뵈옵고 곁에서 모시면서 중용 대학을 강론하고 혹은 심경 근사록 등을 질의 토론하기도 했다.”며 “또 권창설 이동애 등 이름 있는 이들과 사귀어 학문과 심성을 갈고 닦는데 보탬이 되게 하였고 인륜을 더욱 돈독히 하여 어버이 섬기기와 형을 따르는데 효도와 공경하는 마음을 다하였다. 언제나 성리학에 관한 책을 가까이 읽었으며 밖으로부터 전해오는 잡된 이야기는 듣지 않았다”라고 기록돼 있다. 청사의 인물됨을 잘 드러낸 글이다. 청사의 벗 권창설은 동문수학한 권두경(權斗經)을 말하는데, 시·서·화에 능통하고 문장이 뛰어난 선비로 우리나라 산천의 형세, 도리(道理)의 원근, 인물의 출처, 시대의 변혁, 군신(君臣)의 현부(賢否), 정사(政事)의 득실(得失), 유학의 장단점 등에 특히 뛰어났다. 갈암이 청원에 1년을 머물다 고향인 금양(錦陽)으로 돌아가자 청사는 전수받은 학문 요체인 ‘존심이경(存心以敬)’ ‘찰의이정(察意以精)’ ‘제사이의(制事以義)’ ‘변취이명(辨趣以明)’ 등 4조목을 벽에 걸어 놓고 ‘존소문첩(尊所聞帖)’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즉, 공경한 마음을 가지며, 세밀하게 뜻을 살피며, 의로써 일을 통제하며, 밝게 뜻을 분별한다는 내용으로 청사의 생활신조라고 할 수 있다. 또 음주는 뜻을 잃게 하고 시는 성정을 방탕하게 하기 쉽다고 생각하여 이를 평생 경계하며 유유자적하게 살다가 1713년 청사정사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1세였다. 한말의 영남 학자 척암 김도화는 “공은 순수하고 성실한 자태와 부지런하고 게으름 없이 공부를 했다. 어려서는 어진 조상의 가정에서 예절을 익히고 또 도덕가의 문하에서 향기롭게 다듬었다. 평생 스승과 벗들과 강론한 성리학설과 왕복한 서한이 모두 없어졌으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하면서 청사에 대한 기록이 거의 인멸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진주시 사봉면 초문리에 있는 청사정사를 찾았다. 청사가 기거하며 강학을 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정사에 오르니 “진양의 초문동에 옛날에 청사정사가 있었으니 즉 청사선생 이공이 강학 하시던 곳이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도 300여년이 되었으니 사옥도 또한 폐허가 되어 잡초만 우거져서 처량하니 길손이 그것을 가리키며 한숨 짓더라”라는 내용의 중건기가 눈에 띈다. 정사가 허물어져 최근에 새로 중수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청사공 9세손인 성환(性煥)씨는 “청사 선조는 한마디로 강직한 분입니다. 문헌이 없어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갈암의 학문을 충실히 따른 분입니다. 선조가 강학하던 곳이 황폐해져 1991년 다시 중건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현재 정사는 1991년 중건했다고 한다. 초문리에 있는 청사의 묘비에는 ‘處士’라고 새겨져 있다. 비록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평생 맑 살고자 한 선비임을 가장 잘 알려주는 단어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남명 선생도 처사라고 불려지길 간절히 바랐던 것을 생각하며 초문리를 떠나 돌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