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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이름만으로도 가슴 뛰는 말이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초원 사이로 곧게 난 길을 따라가면 야자수 아래 이국적인 풍광이 천 년 전과 다름없이 펼쳐질 것 같다. 사막의 낙타 역시 황량한 사막과 바람을 피해서 앉았다가 다시 이리 휘청 저리 휘청 앞뒤로 일어서며 걸음을 재촉했을 테고,
실크로드는 기원전 2-3세기 경 중국의 장안(서안)과 이탈리아 로마로 이어지던 교역길이다. 중국에서 유럽으로 가져가는 주요 교역품이 비단이었기 때문에 “실크로드‘ 혹은 ’비단길‘이라 부른다.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교역은 문명, 예술, 종교 등 동서양을 넘나들었다. 서주시대부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 시안을 비롯해 실크로드의 주요 도시들은 번성했지만 당나라 이후 국가의 분열에 의해 그 존재는 무의미해졌다. 그후 20세기에 접어들어 둔황의 막고굴에서 수많은 경전, 역서등이 쏟아져 나오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실크로드는 모두 3개의 코스로 나눠볼 수 있는데 텐산 북로, 텐산 남로, 서역 남로등 텐산 산맥의 북쪽으로 통하는 텐산 북로는 둔황, 하미, 투루판, 우루무치, 이닝, 카자흐스탄을 지나 터키에서 로마로 간다. 서역 남로는 타클라마칸사막의 남쪽을 지나는 길이다.
2007년 8월 4일 저녁. 어떤 여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오전 1시 우루무치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우리 일행은 자상하신 유니버설 이사장님과 역사에 관심이 깊은 광주지역 고등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타 지역에서 오신 분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우리가 여행할 곳은 서역남로인데 북로에 비해 관광객이 적은 곳이다. 눈에 띄는 화려함은 없지만 오래된 문화와 풍습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신비감과 선인들의 발자취가 느껴지는 곳이기에 더욱더 마음이 끌렸다. 착하디착한 조선족 2세 신 철용씨가 우리를 맞이했다. 첫 날 우리는 그렇게 우루무치의 홍복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하사커의 초원-남산목장
남산목장은 우루무치에서 약 75km 떨어 진 티엔산 줄기의 산과 산 사이에 계곡을 끼고 있는 하사켜 족의 유목지이다. ’하사커‘의 본래 뜻은 ’피난자‘ 혹은 ’이탈자‘로 하사커 족은 15세기에 형성되어 18세기말 러시아에 합병된다. 아편전쟁 이후 러시아가 여러 가지 불평등 조약으로 중국의 많은 땅을 차지하면서 하사커 족은 중국과 러시아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푸른 하늘과 녹색 카펫을 깔아 놓은 것 같은 초원, 그리고 흰 구름 같은 수많은 양떼들이 반겼다. 눈에 보이는 광활한 언덕이 모두 풀밭으로 이곳은 해발 2,252m에 위치하고 있어서 멀리 천산산맥의 연봉이 보이며 가슴이 탁 트이는 경치가 펼쳐져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예전에는 기마병을 훈련시키는 곳이었으며 흉노족의 후예들이 살기도 했는데 제대로 교육을 받거나 학습의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예의범절은 고사하고 소지품 관리에 특히 신경을 쓰라는 가이드의 당부가 있었다.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을 따라 폭포까지 걸어가 보았다. 쾌적한 자연과는 달리 땅은 질퍽거려 걷기가 불편했지만 시리도록 푸른 하늘 아래 용맹했던 하사커 족의 함성이 울려 퍼지는 듯하다.
청포도의 도시투루판
우루무치 고속도로를 달리며 투루판으로 향했다. 이런 오지에도 이토록 훌륭하게 잘 닦인 길을 보니 앞으로 중국 경제발전 속도가 어떠할지 느껴졌다. 이 고속도로의 길이는 우루무치에서 상해까지 장장 5,000km이다.
또한 중국 제일의 풍력 발전소의 위력도 볼만했다. 이곳은 ’달반성‘ 이라는 지역으로 신강성에서 바람이 가장 많아 나무의 전신주들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굽은 모습이 특이했다. 네델란드의 합작으로 건설된 600kw 용량의 풍자모양 풍력발전소가 700여개나 된다고 한다.
티엔산 산맥과 타클라마칸 사이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 투루판은 인구 약 25만명 정도의 작은 도시이다. 여름에는 40도를 넘는 날이 한 달동안 계속 돼 ’‘화주(火州)라고 불릴 정도로 몹시 더워 ’불가마 사우나‘와 견줄만하다. 이렇게 더운 이유는 주위에 해발 4,000m 이상의 천산산맥과 길고 지루한 고비사막으로 둘러싸인 중국에서 가장 낮은 분지이기 때문이다. 도로는 포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자동차가 지날 때마다 뿌옇고 메마른 흙먼지가 날린다. 교통수단인 나귀를 몰고 흙먼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지나가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곳은 중국 최대의 포도 주산지이다. 포도 길의 길이는 8km 폭이 2km 이어져 하늘이 가려질 정도로 넝쿨이 뒤덮여 있다. 포도는 검푸른 색깔이 아닌 속이 훤히 비치는 연한 연둣빛, 노란빛으로 이른 봄, 나뭇가지에 움튼 여리디 여린 새싹의 색깔과 비슷하다. 투루판의 포도는 당도가 높고 사막 기후여서 병충해가 거의 없다. 한 송이를 툭 따서 물에 헹구어 통째로 들고 껍질까지 씹어 먹는 맛이 일품이다. 여기 포도나무의 수령이 150년에서 400년 정도 되고 종류는 200종이 넘는다. 투루판이 포도의 도시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다. 육지로는 세계에서. 이스라엘의 사해에 이어서 두 번째로 낮은 곳에 위치한 곳이니 여름철의 더위는 살인적이다. 거기다 증발량은 많은데 강수량은 일 년에 겨우 16mm정도,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된다. 하지만 지하를 누비는 엄청난 물길 덕분에 이 사막 한가운데서 인간이 생존할 수 있었고, 포도가 자랄 수 있었으며, 사방에 굉장한 작물 재배지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른바 오아시스 농업이다. 그것은 바로 수 천 년에 걸쳐서 피땀 흘려 땅 속에 만들어 둔 인공수로, 즉 지하수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투루판의 생명수 칸얼칭
인간이 살아가는데 물과 공기와 먹을거리만큼 소중한 것이 또 있을까. 사막지대를 주로 돌아 다니다 보니 덕분에 물의 소중함을 많이 깨닫게 되었다. 멀리 천산에는 만년설이 있고, 빙하가 녹은 물이 작은 강과 호수를 이루기도 하지만 산지를 지나 사막에 이르면 곧 바로 증발되거나 땅속으로 스민다. 그래서 그들은 천산의 빙하수를 마을로 끌어오는 방법을 고안해 낸 것이다. 지하수로가 그것이다. 그들은 일단 수직으로 우물을 파고 지하에서 그 우물을 잇는 방식으로 산 중턱의 호수에서 물을 끌어 댄 것이다. 대략 2천 여 년 전부터 파온 지하수로는 깊이가 지상에서 2-30m부터 산 쪽으로는 1-200m까지 내려 간다고 한다. 변변한 장비도 없이 거의 맨손으로 만들어 낸 대 역사가 감동을 준다.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 이란(카나르)에서 시작한 이 수로는 아프카니스탄에선 ’카레즈‘ 시리아와 북아프리카에선 ’호가라‘ 라 칭하며 이란이 제일 많고 2위가 아프칸, 3위가 투루판이다.
칸얼칭은 물길만 2000여 갈래나 되고, 총길이 5000km나 되는 아주 길고도 정교한 4단계의 우물인 수정-암거-명거-저수지(노폐)구조로 되어 있다. 수정은 지면에서 수직으로 파내려간 우물이고, 암거는 수정과 수정을 연결하는 지하수로, 티엔산 산맥의 눈 녹은 물을 얕은데서 부터 파 올라가기 때문에 발원지의 수정의 깊이는 70m에 달하는 것도 있으며, 낮은 수정은 10m정도이다. 또 이 연결 통로인 암거는 발원지에서 종점까지 완만한 곡선을 유지해야 물이 원활하게 흐르기 때문에 단면도를 보면 직각삼각형 모양으로 경사가 진다. 칸얼칭 위의 지상은 마치 키 작은 굴뚝들이 줄을 지어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는 모습이다. 수정은 공기와 햇빛을 통하게 해 주고 토사에 의해 물길이 막힐 경우 수리하는 사람이 드나드는 통로요, 도르래를 이용, 흙을 퍼 올리는 역할도 겸한다. 그래서 칸얼칭은 지하에 있어, 황사 오염이 없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서 얼지 않으며, 더운 날씨에도 물이 증발하지 않는다. 이곳 투루판 박물관에는 파내는 과정, 높이를 맞추는 법, 파낸 흙을 밖에서 처리하는 법등을 인형을 이용, 알기 쉽게 설명하여 전시해 놓기도 하였다.
칸얼칭은 기후 조건이 매우 건조한 지역에서 인간이 자연과의 투쟁과정, 고대인들의 지혜가 가장 잘 반영된 걸작이라 할 수 있다. 투루판이 오아시스 도시, 찬란한 불교문화와 이슬람 문화를 꽃 피울 수 있었던 것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포도 산지가 된 것도 다 이 칸얼칭이 있었기 때문이다. 칸얼칭은 투루판의 생명수요 젓줄이며 생명줄이다.
쟈오허(交河) 고성의 메마른 물길
투루판 시의 서쪽 약 10km쯤 떨어진 이 옛 도시는 야르나이즈 계곡에 있다. 남북 길이가 1650m이고 동서 폭은 최대 330m이며 총 면적은 42만 km이다. 오랜 옛날 두 갈래로 나뉘었던 하천이 큰 홍수로 다시 합류하면서 그 사이에 섬과 같은 지형이 생겼는데 ’쟈오허‘라는 이름도 두 갈래 물이 만났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쟈오허는 고대 서역의 36국중 차사천국의 도읍지로 부락간의 존쟁을 피해 야르나이즈강 가운데 있는 버들잎 모양의 녹지대의 섬에 땅을 파서 지하도시를 만들고 5천명이 생활했던토성이다. 비가 오지 않고 건조했기에 흙으로 건설한 도시가 지금까지 남을 수 있었다. 이런 자연 조건 덕분에 옛날에는 외부에서 공격하기 힘들고 내부에서는 방어하기 쉬운 천연의 요새가 되었을 것이다. 섬으로 들어가는 성문은 동, 남. 서. 방향. 남문으로 올라가면 작업 방, 행정기구, 사원, 불탑, 상점, 서민가옥, 어린이 묘지 등의 흔적이 있고, 내부구조는 상당히 짜임새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태양의 애무를 받아 한껏 달궈진 땅, 섭씨 43도의 땡볕에 걷는 것이 무리였지만 중심에 서서 시위를 둘러보니 사방이 확 트여 더운 가슴을 서늘하게 식혀준다. 천혜의 요새였던 이곳도 화려했던 옛 모습은 역사 속에 묻히고 지금은 바람에 지친 몸을 식히며 누워있다. 세월의 무상함을 더욱 일깨우는 것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양쪽 강물이 다 말라 버렸다는 사실. 기록에는 양쪽 폭이 100m, 깊이가 30m나 되는 거대한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허연 속살을 드러낸 체 세월의 덧없음을 목말라 한다. 14세기말 몽골에 의해 멸망한 쟈오허 고성은 실크로드의 한 거점으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며 현재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하늘은 맑고 푸르기만 하다. 멀리 가물거리는 산맥도 조용히 숨을 내쉬며 말이 없다. 내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도 부드럽기만 하다. 눈 들어 무심히 떠가는 흰 구름을 향해 목 놓아 불러보고 싶은 이름들이 있었다.
미인의 도시 쿠처
투루판에서 쿠처까지 가기 위해서 1시간 30분가량 걸려 역으로 이동했다. 황량하고 끝이 보이지 않은 들판엔 몸을 날려 버릴 듯 바람이 세차게 불었지만 하늘은 맑기만 하다. 멀리 보이는 산맥은 바람에 웅크리고 엎드린 걸까. 오후 9시 5분 즈음 해가 진다. 그 맑던 하늘이 온통 붉은 천으로 뒤덮힌 듯 물들어 간다. 무채색 들판과 주홍 빛깔의 하늘이 강하게 대비된다. 지금 이 장엄함 속에 내가 살아 있음이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노을을 등지고 사진을 찍었다. 바람은 거셌지만 우리의 가슴 또한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투루판에서 쿠처까진 열차로 2시간, 1인 요금은 한국 돈으로 3만원, 열차는 4인 1실로 2층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 샘과 난 ’랑”(이슬람식 빵)을 사서 챙기고, 이사장님은 포도와 한국에서 여기까지 고추를 챙겨 오셨다. 이샘은 사장님의 자상한 배려에 폭풍 칭찬이다. 우린 2층, 머리 위쪽 다락 선반에 여행 백을 넣고 침대 옆 그물 선반엔 세면도구를 넣었다. 앉아서는 자유롭지만 서지는 못할 공간이다. 아래층 창가엔 탁자용 식탁이 하나, 문 밖에도 창밖 풍경을 볼 수 있게 작은 의자 하나가 달랑 놓여 있다. 열차는 가끔 목쉰 소리를 토하며 달리다가 우리를 요람처럼 흔들며 달래주기도 한다. 차창 밖은 온통 해바라기 천지다. 우리는 탄성을 지르기도 하고, 수없이 재잘거리며 미지의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다. 어둠을 향해 달리는 열차, 조용하고 편안하다. 정지된 듯 고요함 속에 꿈의 나라로 서서히 빠져들었다.
쿠처현은서역 36국 중 제일 강대했던 구이조 왕국의 수도였다.사마천의 기록에 의하면 안서도읍 6국 중 두 번째로 큰 나라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낱 초라한 작은 농업 마을이다. 이곳은 많은 민족의 피가 서로 섞여 빨려들 듯 아름다운 눈을 가진 미인이 많은 곳이다. 텅빈것 같은 체리핑크빛 아파트, 도로 양옆으로 늘어선 눈에 익은 자귀나무와 포풀러 나무가 멀리서 달려온 우리를 맞이한다.
커질천불동으로 가는 길 도중엔 옛날 바다가 호수로 변하여 대협곡을 이룬 ‘아단지모’라 이름 붙여진 곳이 있다. 산처럼 높은 봉우리들이 수없이 많이 서 있고, 풍화의 흔적들로 기이한 모양들을 보여 줬는데, 미래의 우주 세계를 담은 SF촬영장 같은 곳이었다. 계곡 벽면에 부조처럼 이루어진 ‘포탈라 궁전’은 심혈을 기우려 그린 정교한 작품처럼 보인다. 인간의 솜씨가 자연을 넘어서지 못함을 보여주는 한 사례였다. 협곡 사이를 흘렀던 ‘염수골’을 지났다. 바닷물이 육지로 밀려 들어와 이룬 계곡으로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해 간담이 서늘했다. 이 위험천만한 계곡 밑에 폭 1m의 강물이 흘렀는데, 지금은 말라서 하얀 소금만이 햇볕에 반짝거린다. 이 염수골은 ‘서유기’에서 삼장법사 일행이많은 위험을 견디며 서역으로 향하는 박진감 넘치는 대목으로 그려져 있다.
타클라마칸의 숨겨진 보물, 커즈얼 천불동
중국엔 4개의 석굴(둔황, 용문, 원강, 커즈얼)이 있는데 쿠처에서 베에징을 잇는 고베로의 서쪽으로 30분 정도 가면 ‘슈게트 계곡’이 나오고 오른 쪽으로 ‘무짜르트’강이 흐른다. 왼쪽 ‘밍우타크산’ 두 개의 절벽 위에 벌집처럼 생긴 부드러운 황토색 동굴이 커즈얼이다. 천불동이란 불상이나 벽화가 그려져 석굴이 밀집된 지역을 일컫는 말로 많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부른다.
이 석굴은 4부분(곡서구, 곡동구, 곡내구, 후산구“로 나뉘며 석굴 정문에서부터 67km에 달한다. 236개의 굴 중. 72개를 개방했으며 아직 미발굴 굴이 남아 있다. 4세기엔 처우처 왕국이 있었고, 승려 일만명이 거주했었으며 동서 문화 교류과정을 잘 나타내고 있어 가치가 높다.”커즈얼‘이란 ’붉다‘란 뜻으로 민둥산이 햇빛을 받으면 휘엔산처럼 붉게 타오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 ’파란석굴‘로도 불리는데 벽화의 그림이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파란색 물감을 사용했기 때문. 이 원료는 ’라피스라 줄리‘ 즉 ’청금석‘이다. 실크로드를 통해 ’아프카니스탄‘에서 수입한 것으로 이 파란색 고급 안료는 산화작용에도 변하지 않아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석굴 앞엔 1994년에 세운 ’쿠마라 지마‘의 고뇌하는 청동 조각상이 오가는 이들을 맞고 있다. 쿠마라는 버머로 된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 불교의 보급에 힘쓴 이로 ’반야심경, 법화경, 금강경등. 313권이 현존한다. 이 불경을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 일본에서도 주요 경전이 되었다. ‘색즉시공, 공즉시공,도 그가 사용한 말이다. 굴 니부는 벽면과 천정에 부처의 본생, 본행, 교화, 공양을 주제로 다룬 벽화가 서역기법으로 채색되어 있다. 벽화가 있는 동굴은 75개, 조선족 ’한낙현‘에 의해 발견 조사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 굴 내불엔 그의 빛바랜 사진과 그의 말을 새겨놓은 글만 남아 있었지만, 우리의 피붙이를 이역만리에서 대하니 무척 반갑고 자랑스러웠다. 또 이곳은 파미르의 주인 ’고구려의 고선지 장군의 활동 무대였다. 그는 유년 시절을 3만 안서군의 주둔지인 쿠처에서 보냈으며, 20세에 아버지와 비슷한 유격장군에 발탁 되었다. 그는 11년 사이 안서절도사로 다섯 차례나 대군을 이끌고 세계 전쟁사에서 보기 드문 서역원정을 단행해 파미르 고원 동쪽 지역의 항당세력을 제거하고 당의 경영권을 확보, 오늘날 중국 서부 변경이 확정되는 역사적 기틀을 마련한 장본인이다. 유유히 흐르는 티엔산 강물은 알고 있으리라, 고선지 장군의 힘찬 말발굽 소리를, 한낙현의 열정을, 우리 역사상 최초로 쿠처에 발 도장을 찍은 ‘혜초’스님의 발자국을, 새삼 그들의 땀방울이 자랑스럽고 위대한 고구려인의 얼과 슬기가 나의 혈관에도 흐르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죽음의 사막 타클라마칸을 지나
‘타클라마칸‘이란 스키타이어로 ’돌아 올 수 없는‘ 이란 뜻이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유동 사막이다. 쿠처에서 민평까지 가려면 꼭 이 사막을 건너야 한다. 하지만 이 죽음의 모래 바다는 나에게는 소꿉놀이를 하고 싶은 노란모래 언덕을 구르고 굴렀던 어린 시절 놀이터처럼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 사막의 횡단 도로의 길이는 52km. 버스로 13시간, 북의 티엔산 산맥과 남쪽의 쿤룬 산맥을 잇는 대역사의 결과물이다. 1995년에 완공하여 2천년 동안 고립됨을 풀고 희망의 도로로 발 돋음 하였다. 폭이 10m의 아스팔트 도로의 양편에는 격자형 태로 갈대를 엮어 도로를 따라 설치했는데, 바람에 의한 모래의 이동을 막고 도로의 유실을 막기 위해서다. 또 이 사막의 지하 100m엔 물, 석유, 석탄이 깊이가 다르게 묻혀 있고, 그 석유 매장량은 쿠웨이트 매장량의 절반 위를 웃돈다니, 아 !부럽고 화가 치민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입구에 다다르자 타리무 강변의 휴앙림이 한 눈에 들어 왔다. 도저히 생물이라곤 살 수 없을 것 같은 사막 한 가운데에 숲이 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울 수밖에, 사라져 가는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휴양림 공원‘을 조성했단다. 휴양림은 서역 버드나무로 사막의 특성상 더디 자란다.’살아서 천년, 고목으로 천년, 썩지않아 천년, 이렇게 3천년을 산다고 하니, 그 강인한 생명력을 칭송하는 말이리라, 실크로드 여행에서는 시간을 맞추어 식사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고, 예정했던 시간보다 목적지에 늦게 도착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음식이 눈에 띄면 바로 들어 가 먹고, 굶주림의 고행을 예방하려면 항상, 물, 과일을 상비약처럼 지니고 다녀야 한다.
사막에 핀 꽃, 부부방
이제 타클라마칸 심장을 향 해 전진한다. 도로의 양옆으로 모래 언덕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사막은 태양의 열기를 받아 은빛으로 빛난다. 온통 모래와 하늘만이 존재 하는 곳.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면 시간마저 정지한듯 싶지만, 발밑에선 모래가 빠르게 움직인다. 발가락 사이를 부드럽게 빠져 나가는 모래들. 한 편에서는 ‘카리부란’ 이란 회오리 바람이 불고, 사람도 날려 죽음까지도 이르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바람, 마치 우리의 인생 같다고나 할까?
우리가 가는 이 국도엔 2-3km 간격으로 우물을 중심으로 작은 집이 한 채씩 있는데 이게 ‘부부방’이다. 붉은 기와, 남색 벽, 창문가엔 흰 색으로 라인이 둘러졌다. 사막의 모래 바람은 도로를 뒤덮기 일쑤다. 이 때문에 젊은 신혼부부를 모집하여 일정기간 기거하게 하면서 도로 위의 모래를 쓸고, 수목을 관리하게 한단다. 그 부부방이 140여개나 되는데 황량한 사막을 옥토로 일궈가는 자색 작업복 차림의 그들의 노력이 아름답기만 하다.
신장자치구에선 사막에서 잘 자라는 나무 4종류를 고속도로 주변에 심었다. 휴양목, 키3-4m에 뿌리 5개의 붉은 대나무, 바람을 잡는다는 사사, 야생 대추인 사과토이다. 울타리를 두르듯 넉 줄로 나무를 심은 다음에 ,나무 밑둥 밑에는 직경 1.5m의 검은 비닐관이 우물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관을 통해 일정시간에 물이 뿌려진다. 우리는 점심으로 양고기와 채소, 소스를 끼얹은 ‘빠띠엔’ 이란 국수를 먹었다. 먹을 곳은 사막에서 이 곳 한 곳 뿐이라지만 주방이 청결하지 못 해 먹지 못했다.
사막의 끝 민평
한 번 들어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빠져나와 민평에 도착하자, 사막을 무사히 종단했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쉬었다. 민평은 타클라마칸 가장자리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사막의 모래가 계속 밀려 들어와 마을이 계속 작아지고 있지만, 매년 자동차 경주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저녁 8시에 도착하여 지나온 시간을 셈하여 보니, 장장 15시간 동안 사막을 횡단했다.
민평 야시장엔 주로 먹을거리를 파는데 양고기 꼬치구이와 시원한 맥주는 사막을 관통해 온 이방인들의 심신을 달래 주었다. 크고 작은 바비큐용 철통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고, 그 안에는 숯불이 어둠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활활 타오른다. 지글지글 익고 있는 양고기는 멀리서도 군침을 돌게 한다. 저녁시간 이웃들과 함께 어우러져 서로의 정을 나누는 그들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 고향집의 이웃들을 추억 해 본다.
저녁 디저트로 ‘하미과’와 사과를 사서 호텔로 돌아 와 일행들과 나눠 먹었다. 이곳에서 여행자 호텔은 딱 하나 뿐, 관리를 대접하기도 하고, 호텔로도 이용한단다. 저녁을 미친 다음 몇몇이 모여 당나귀 택시(6인승)를 타고 시내 답사에 나섰다. 길게 늘어선 흙담과 단층집 지붕, 다닥다닥 붙은 흙벽돌집엔 수염을 기른 어르신들과 두건을 두른 여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네모지게 흙벽돌로 벽을 치고,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짠 집들은 꼭 닭장이나 야외 소외양간 같지만 더운 날씨엔 적격이라나, 불빛도 없는 마을 전체가 뿌옇고 누런 모래에 뒤덮혀 있어서 마치안개의 도시에 들어서 있는 착각이 들었다.
낮엔 두 근의 모래를 먹고, 고립의 땅 허티엔.
(마이리커 아와티 고성, 왕호도나무, 포도의 길, 백오강)
아침, 비닐봉지에 도시락을 넣고 민평을 출발 허티엔으로 향했다. 봉지엔 랑빵, 오이, 토마토, 찐달걀 하나가 전부였지만, 사막지대의 그들의 정성에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허티엔은 타클라마칸 사막과 쿤룬사막, 카라쿨룬 산맥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사막 횡단 도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외부와 철저히 고립되었다. 가장 남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순진하고 러시아계, 아랍계, 흑인, 위구르계가 섞여 산다. 주민은 주로 위구르계이지만 중국어를 못하고, 남존여비 사상이 강한 곳이다. 7세가 되면 코란을 배우러 가는데 일종의 성인식이다. 여기선 코란을 배우지 않으면 장가를 가지 못한다. 허티엔 민요 가사엔 이런 구절이 있단다. “우리는 낮에 두 근의 모래를 먹고, 밤에는 모래를 덮고 잔다.”이곳에 와서야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옛날부터 이 지역은 동서 무역의 주요 관문이었기 때문에 서로 자신의 세력권에 두려고 치열하게 싸웠다. 허티엔의 사람들은 항상 전쟁과 사막의 모래바람 같은 위험에 직면해야 했을 것이다. 남자들은 ‘빠마무뚜파’라고 하는 모자를 쓰는데 사각형 모양으로 아래에는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멋을 내는 여자들은 두건 위에 앙증맞은 꽃 모자를 쓰는데 마치 예쁜 밥그릇을 엎어 놓은 듯하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모래 때문에 모자는 그들에게 필수품이다. ‘모자에 수놓는 방법을 모르는 여자는 시집을 못 가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여자들은 솜씨가 뛰어나다.
밤하늘을 이고 무수히 많은 별들이 쏟아지는 밤, 그 별들이 토해 내는 빛에 취해 러와푸에 맞추어 부르는 ’무카무‘ 노래는 인생의 고달픔을 신에게 호소하는 듯하다. 높아졌다 낮아지고, 거칠었다가 부드러워지기를 반복하며 가슴 속 깊은 곳에 숨겨둔 사무친 한을 노래한다. 거친 모래 산과 메마른 땅, 고립을 강요하는 사막과 가난, 그리고 고독이 몸부림치고 저항해 온 삶의 흔적이 ’러와푸‘의 가락과 함께 이 밤을 취하게 만단다,(러와푸 웨이우월족의 민속 악기는 현악기로 줄은 3,5,7,8,9등 다양 하지만 보통은 5줄을 사용하고 민요는 ’무카무‘ 서사적 구술형식으로 대부분 고향을 그리는 내용이다.)
허티엔은 옥으로 유명한 도시이다. 옥은 광택이 온화하고, 투명하고, 음이 순수하며, 낭랑하고, 깨지더라도 굽지 아니하며, 인간의 고매함을 간직하였다 하여 수천 년 전 고대부터 중국 사람들에게 신뢰의 상징물로 귀하게 여겨 왔다. 허티엔 중심로 베이징로 양쪽에는 옥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해 그토록 중국이 자랑하는 옥을 실컷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다. 허티엔은 고대부터 동서야 문화의 교차지점으로써 번성했던 곳이지만 실크로드가 쇠퇴하는 15세기 이후에는 과거의 전통을 가장 많이 간직한 중세도시로 바뀌었다.
허티엔 강가에는 허리를 구부리고 옥과 돌을 가려내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5월이면 쿤룬산맥 높은 봉우리의 눈 녹은 물이 흘러 각각의 지류로 모여 하나의 강을 이루는데 이때 산에 묻혀있던 돌들도 함께 떠내려 온다. 이것이 바로 허티엔 강이다. 눈이 녹은 물이 강이 된다는 것도 믿기지 않지만, 무겁고 커다란 돌까지 떠내려 온다니 신비함 그 자체이다. 금은 가격이 정해져 있어도 옥은 가격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모래와 황무지뿐인 토지를 옥토로 바꾸고 자신들의 문화를 창조 발전시킨 웨이우월족의 불굴의 의지와 자족정신에 찬사를 보내면서 우리는 카스로 향했다.
카스의 아이티카르 청진 사원
(영길-칼시장, 향비묘, 아이티카칭천쓰-바자르)
옥이 모이는 곳이라는 뜻의 ’카스카르‘ 혹은 ’카스‘로 불리는 이 도시는 중국이라고 느끼기 힘든 곳이다. 원래 위구르족이 전체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했지만 현재는 한족 유입정책으로 그 비율이 반으로 뚝 떨어졌다. 그래도 우루무치 같은 다른 서역의 도시와는 너무나 다른 이극적인 풍경과 사람들 때문에,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요충도시로 면모를 느끼기 충분하다. 티엔산, 알타이산, 곤륜산이 둘러싸여 있는 작은 도시에 불과했던 이곳이 우루무치까지 이어지는 철도의 개통으로 지금은 정치, 경제, 교육, 교통의 중심지이자 공업도시로 급부상하였다.
카스는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나뉘는데 구시가지는 언덕의 능선을 따라 흙집들이 갯바위에 따개비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이며 골목길은 미로와 같다. 이곳의 특징은 따로 화장실이 없고 옥상으로 올라가면 전체가 화장실이다. 워낙 건조한 지역이라 대,소변이 금방 말라버리고, 바짝 말랐다 싶으면 삽으로 한 번에 떠서 버린다. 말라버린 인분은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아가니 일부러 치워야 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 최대의 이슬람 사원인 아이티카르 청진 사원은 신강 웨이우월 자치구의 보호 문화재로 금요일 정오엔 이슬람 교인 2만명이 모여 기도를 한다. 예배시간엔 이슬람 교인이 아니면 입장할 수 없다. 옛 카라얀 왕국의 수도였던 이곳의 사원 안에는 정원을 지나 계단위로 오르면 붉은 색의 양탄자가 깔려 있는데 이곳이 바로 예배소다. 반드시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 한다. 예배하는 앞을 가려서도, 떠들어서도,사진을 찍어서도 안 된다. 오직 알라신만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슬람 사람들에겐 돼지가 들어가는 단어나 마스코트도 안 되며, 옷을 입고, 랑을 먹을 때는 작게 잘라먹고 양떼 사이를 지나가지 말아야 하며, 냄새가 난다고 코를 막아서도 안 된다.
위구르의 자존심을 지킨 샹페이(향비)
샹페이는 중국 청나라 때 건륭 황제의 후궁이었던 웨이우얼족 여인이다. 카스 시내에서 동쪽으로 5km지점에 ‘아파커휘쟈 마자에 묻혀 있다. 샹페이의 원래 이름은 ’마이무란 아이즈무‘다. ’아파커휘자‘란 존엄한 자의 묘지란 뜻으로 지역의 반란을 평정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슬람 건축양식으로 건축된 이곳은 5대에 걸친 가족 72명이 잠든 곳, 실내는 기둥이 없는 돔식, 외부 벽면은 각종 도안과 무뉘가 그려져 있는 녹색 타일로 붙여 놓아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다. 이취형 지붕 위에는 이슬람 사원의 상징인 조각달을 받치고 있는 뾰쪽탑이 있다. 이슬람 전통은 남자의 묘지는 여자의 묘지보다 크게 만든다. 입구에서 1시 방향에 있는 붉은 천으로 덥힌 것이 향비 묘이다. 향비는 몸에서 향내가 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입구 왼쪽엔 베이징에서 시신을 운반할 때 사용했다는 가마가 놓여있다. 베이징에서 카스까진 5100km. 1년이 훨씬 넘어서야 옮겨 왔다고 한다. 그들이 향비를 기리는 이유는 황제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고, 위구르 여인의 자존심을 지켰기 때문이란다.
다시 우루무치로
(천산천지-박물관-홍산공원-바자르-민족쇼)
우루무치는 몽골어로 ’아름다운 목장‘ 이란 뜻으로 다민족이 집거하는 서북 변강의 중요한 도시이며, 신강 웨이우월 자치구의 성도이다. 란저우에서 우루무치까지 이어지는 철도의 개통으로 과거 작은 도시였던 이곳은 정치, 겅제, 교육, 교통의 중심지이자 공업도시로 급부상했다. 시내엔 5년 사이에 고층 빌딩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으며 세계 여러 도시들이 입성을 꿈꾸고 있다. 티엔산, 알타이산, 곤륜산이 둘러싸여 기후는 건조하고, 인구는 약 230만이 넘으며 한족이 75%를 차지한다. 북경과는 2시간 차이, 6시 반에 해가 뜨고, 11시에 해가 진다. 우루무치 박물관은 신강성의 대표적인 12개 소수민족의 풍속을 알 수 있는 민속전람관, 서역 출토 유물전시관, 고대 서역의 주인인 미이라 전시관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황금색 머리카락에 뵤쪽한 코, 깊은 눈, 후리후리한 키의 3800년 전의 ’러우란 미녀‘를 만났다. 이들은 모두 ’깐스‘가 되어 유리관 안에서 우리와 마주쳤다.
’깐스‘는 미이라와 비슷하지만, 다른 점은 인공이 아닌 자연 건조된 사람의 시신이다. 화려한 색상의 옷을 입고, 현재 유행하는 장식품에 뒤지지 않는 감각적이고 세밀하게 세공된 장식품을 착용하고 있는 모습은 당시 서역이 문명국임을 보여 주었다. 키가 큰 모습은 유럽인에 가까웠다.
서왕모와 주목왕의 로맨스. 천산천지
아침 일찍 천산천지를 보러 갔다. 중간엔 하사커족들이 몽골의 전통주택인 게르를 짓고, 유목을 하는 마을이 있었다. 관광객이 많을 때는 방목보다 음식을 파는 것이 주된 수입원 이라고 하는데 시대에 맞춘 팬션 사업의 일종이다.
천산산맥은 아시아 최대의 산맥 가운데 하나이다. 위로는 알타이 산맥이 옆으로 뻗어 중앙아시아를 러시아와 가르고 있고, 아래로는 곤륜산맥이 옆으로 뻗어 중앙아시아 벌판을 인도와 가르고 있다. 중앙아시아 서쪽 끝에 있는 중국 신장지구를 동서로 가르고 만년설을 머리에 인 채 여러 갈래의 물줄기로 서서히 녹아 내리 면서 준걸분지와 타클라마칸 사막의 군데군데를 생명수로 적시고 있다. 호수면적 2.7제곱킬로미터, 평균 수심이 52m로 백두산 천지보다 작다.
전설에 따르면 천지는 하늘나라 서왕모가 목욕하고 발을 씻었던 연못으로 주목왕과 서왕모의 로맨스가 전해지기도 한다. 주목왕은 3천 년 전 최초로 서역을 여행했던 자로 서왕모의 초대에 응한 그는 천산의 절경에 취하고, 복숭아를 권하는 그녀의 하얀 피부에 취하고, 향기로운 술에 취했다는 전설의 로맨스가 담긴 장소다. 주목왕은 할리우드의 ’브레드 피트‘ 만큼이나 색시남 이었던 모양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서왕모 사당을 찾아 향을 사르며 사랑을 얻기 위해 기도한다.
저역엔 민족쇼를 구경했다. 스텝이 빠르고, 경쾌하고 의상들은 더없이 화려했다. 중국속의 영원한 이방인의 나라, 거친 황무지와 사막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외로운 오아시스 도시가 점점히 박혀있는 지독하게도 가난한 땅, 그 길을 밟으며 그곳에서 우리의 과거의 모습을, 우리가 잃어버린 그 무엇들을 확인하고 왔다.
보잘 것 없는 한 끼 식사에 만족할 줄 알고, 자신들의 고유한 영역을 지키기 위한 투쟁과, 삭막한 자연을 개척한 지혜와 끈기, 그리고 인솔자 분들의 배려 등, 순박한 인간성을 가슴에 담아 왔다. 나에게 실크로드는 사람 사는 냄새가 깃든 옛 고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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